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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킬링 디어(2017)>,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란티모스의 신화적 게임
[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킬링 디어(2017)>,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란티모스의 신화적 게임
  • 김경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2.0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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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티모스 영화의 핵심은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은 경영학의 개념으로, 상대와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서로에게 최선의 결과를 선택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경영학의 언어는 대체로 전쟁의 언어로부터 기원했으며, 경영학은 인간 주체가 아니라 돈과 돈의 싸움으로 인간의 행위 방식을 설명하고자 한다. 란티모스의 영화가 전복하려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나 통용되는 전쟁의 룰을 무화하는 것이다. 마케팅이 자본주의 사회의 전쟁이기에, 란티모스는 이에 대응하는 대립쌍으로 신화의 전쟁을 되살린다. 더 나아가 교환/화폐라는 근대적인 대상을 폐기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물물교환의 세계라는 원점으로 되돌린다. 란티모스의 <킬링디어>만큼이나 이를 잘 드러내는 영화는 없을 것이다. <킬링디어>의 엔딩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게임은 경영학의 게임일 수가 없다. 미지의 존재를 분노하게 한 죄로 누가 희생당해야 하는가를 논하지만, 이는 랜덤으로 정해져야 한다. 카메라마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듯이 총의 시점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이때 이해관계는 끼어들 수가 없다. 란티모스는 신화로 되돌아가되,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의 세계를 바깥의 시선에서 보게끔 한다. 란티모스는 이 세계를 적확한 방식으로 보는 알레고리의 세계를 구축한다.

 

출처-네이버 영화
출처-네이버 영화

란티모스 영화는 이해할 수 없는 타자가 가득하다. 리차드 카니가 <이방인, 신, 괴물>에서 지적했듯, 타자는 정상 사회로부터 배제당해 세 가지 형상으로 드러난다. 란티모스는 이 타자가 시스템의 외부로부터 등장한다는 것을 명시해준다. 이는 그의 공간 디자인에서부터 알 수 있다. 란티모스가 <킬링 디어>에서 푸코를 연상시키는 흰색 병원을, 전작인 <랍스타>에서 교정을 하는 호텔을 등장시킨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송곳니>의 섬은 외부로 탈출할 수가 없는 구조이다. 란티모스가 보는 정상성의 세계는 폐쇄회로라고도 할 수 있다. <킬링 디어>에서 감독이 무표정한 카메라로 병원 복도라는 같은 공간을 비추는 데에는 이러한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폐쇄회로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중간에 등장하는 버즈 아이드숏이라든가 여러 요소들은 시스템이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관객에게 체화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신의 시선과도 동일시된다. 또한 인간을 왜곡하는 광각 렌즈의 시점은 

우리는 시스템의 시선을 신의 시선과 동일시하고, 그것으로 인물을 다 볼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이 시스템을 돌아가게끔 하는 것은 자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에 의해서 모든 행위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세계는 "자본주의의 멸망보다 세계의 멸망이 더 상상하기 쉬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세계(마크 피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동선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은 오로지 마틴뿐이다. <더 랍스타>에서 커플들이 솔로를 수용소로 들어오게 만드는 규칙이 있듯, <킬링 디어>에서 병원이 환자의 삶을 결정하는 시스템에서 예외적인 존재다. 란티모스의 카메라는 곧장 공간과 동일하게 움직이며, 이는 인물들을 가두어 두는 듯한 효과를 만든다. 이때 타자들은 동선 자체를 예측할 수 없이 등장한다. <랍스타>에서의 솔로들은 호텔에 비밀침투하고, 마틴은 스토킹으로 가족을 뒤흔든다. <더 랍스타>와 <킬링 디어>에서 모두 타자는 메시아로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으로부터 시작해, 벤야민이 주장하듯, 정치는 시스템 자체를 재구성하는 신적 폭력에서부터 시작한다. 감독은 자본주의의 순환논리를 공간화하되, 이를 떠도는 유령적인 존재를 만든다. 초법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등장시킨 뒤 이를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새로운 규칙이 들어선 시대는 지금의 어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출처-네이버 영화
출처-네이버 영화

란티모스는 이 자본주의의 폐쇄회로를 실행하는 것이 가부장제라고 보고 그 교착을 파헤쳐간다. 란티모스는 <송곳니>부터 가족 관계를 옭아매는 것이 규율과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형상화한다. <알프스>에서의 나를 대체하는 존재는 또 다른 가족으로도 보인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란티모스는 가족관계가 허울이라는 것을 선명히 드러내려 한다. <더 랍스타>의 커플들이 실은 가짜임을, <송곳니>의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허울이라는 걸 증명하는데 <킬링 디어>에서는 이 방식을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이 영화를 여는 첫 장면에서 심장은 수술대 위에 놓여 동그란 원 안에 갇혀있다. 이는 의료체계가 생명을 어떻게 고립시키며, 생명정치의 틀 아래 가둘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전신마취라 말하며 체위를 요구한다. 이러한 연결점은 가족마저도 생명정치의 대상으로 판단하리라는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란티모스는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과감히 잇는다. 생명이 가격이 되고, 정치가 되는 것이 가족이라는 미시 권력에도 침투하는 방식이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는 이러한 관계가 발생시키는 신경증적 불안을 스크린에 옮기는 동시에 계급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폐쇄회로란 결국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정상 계급의 문제로 귀결된다. 마틴과 의사가족이 느끼는 이질감이 이 문제를 보여준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더 많은 솔로들을 잡아들이는 <랍스타>의 기괴한 설정이 그걸 보여준 적 있다. 이 폐쇄회로에 타자인 마틴이 제안한 게임이 들어온다. 그리고 가족은 신체가 '정상'이라는 의료인의 판정들에 따라 '비정상'으로 변하는 기이한 체험을 하기 시작한다. 란티모스는 폐쇄 회로에서 벗어날 방법은 룰을 강제적으로 재설정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여긴다. 이는 룰이 서로를 파멸하게 되는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에서도 반복되는 모티프다. 

<킬링 디어> 속 스티븐은 마틴에게 시계를 사주고, 호의를 베풀어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려한다. 마틴에게 그 선물들은 어딘가 불만족스러워보인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화폐로 무언가를 교환하는 일이 어딘가 모순으로 치닫는다는 걸 영화 장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스티븐은 돈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는 걸 알수록 더욱 돈에 집착하기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부조리로 몰아넣는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인과를 모두 '마틴'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티븐의 생각처럼 모든 인과를 '마틴'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틴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게임이란 무엇일까? 바로 부조리를 부조리로 되돌려주는 부조리극이다. 의사가 술을 마신 채 환자를 죽인 일을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듯이 마틴도 이에 대응하듯 상식 바깥의 행동들을 반복한다. 이러한 인과의 불확실성은 시스템 자체를 교란하게 한다. ​자본주의의 인과는 1의 화폐를 주면 1만큼의 가치를 돌려받는다인데 이러한 게임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란티모스에게 인과의 불확실성은 경영의 불확실성에 수렴한다. 계속해서 정상이라 판명되는 아들로 인해 스티븐은 정상성의 가치가 무력해진다는 걸 알아차린다. 1:1로 교환되는 건 결국 죄와 죄뿐이다. 상품가치가 교환가치를 압도하는 시대를 파괴해 란티모스는 가부장제 시스템과,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폭력을 가시화한다. 마지막 장면은 특히나 압권이다. 합리적 선택의 여지들을 모두 제거한 채, 우리가 게임이라 부르는 경제적 선택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보여준다. 그 합리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바로 서로가 죽으면 서로의 mp3를 뺐으려하는 밥과 킴만이 남아있다. 란티모스는 이걸로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란 결국 약육강식의 시스템을 반복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영화 곳곳에서 우리는 딸과 아들이 희생양이 되리라는 암시를 받는다. 순결한 존재이지 않으면 희생제물조차도 되지 못한다는 논리가 가능한 것이 <킬링 디어>의 세계다. 란티모스의 세계는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대상을 통해서만 교환하는 룰을 설정한다. <랍스타>의 눈, <송곳니>의 송곳니가 그 예시라 할 수 있다. 란티모스는 이처럼 무언가를 바쳐야 무언가를 얻는 세계를 계속 영화화한다. <킬링 디어>에서의 스티븐은 순결한 두 자녀 중 한 명을 바쳐야만 죄를 해결할 수 있다. 마틴이 킴과의 섹스를 일부러 거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디테일에서 그의 정치적 무의식은 여기서 나온다. 희생제의의 세계는 화폐라는 추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재를 이야기하려 한다. 부르주아의 세계로 들어서며 우리는 탈마법화(베버)된 세계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란티모스가 이를 거부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굴러가는 방식이 이로 인해 소외당했기 때문이다. 계급이 나뉘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생산양식과 멀어졌다. 탈마법화된 세계는 그렇기에 모두에게 불공평한 세계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시스템의 개인은 버즈아이드숏으로만 비춰지며, 어떠한 순간에도 란티모스의 인간은 스스로가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란티모스식 세계로 회귀한다면 우리는 죄를 그대로 갚을 수 있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사형수에게는 사형'을 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는 폭력적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은밀히 그런 논리를 바란다. 시스템이 그런 부분들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란티모스가 시스템을 공격하려는 이유는 시스템에 부재한 정의를 그가 대신 실행하려는 의지에서 온다.

 

출처-네이버 영화
출처-네이버 영화

버즈 아이드 숏과 사운드, 그리고 선악이 불분명한 '마틴(배리 케오간)'의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다. 란티모스의 영화 진행은 그 동안 동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에서 시작해왔다. 그러나 <킬링 디어>는 환상이라는 소재를 가장 현실에 가까운 미장센으로 보여준다. <랍스타>와 <송곳니>에서 등장하는 이국적 공간 대신 병원을 등장시킨다. 란티모스가 병원에서의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밥을 보여주는 버즈 아이드숏을 통해 드러난다. 펄떡이고 있는 심장을 보여주는 오프닝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환자 개개인은 란티모스의 해부대에 오른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마틴을 보여주는 장면은 독특하다. 킴이 보는 프레임으로만 마틴이 드러나는 장면, 집 창문밖 프레임으로는 마틴이 보이지 않는 장면 연출은 마틴이 감독의 시선을 어쩌면 복사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화에서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운드 연출은 이에 백미를 더한다. <킬링 디어>에서 가족에게 벌어진 일은 타인에겐 아무 일도 아닌데, 사운드는 계속 그것을 어떤 일이라 강조시킨다. 란티모스가 영화적 리듬을 만드는 방식은 이러한 엇박으로부터 온다. 사운드와 시각의 불일치는 실재를 왜곡하며, 이로 인해 그의 영화는 화면과 그것을 보는 감각마저 일대일로 교환이 불가능한 지옥으로 구성된다. 란티모스는 기후위기와 정치는 물론, 파국에 이르고 있는 동시대의 징후를 감각의 혼란 그 자체로 포착하려 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글·김경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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