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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동행자를 구하는 방법 <본즈 앤 올>(2022)
[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동행자를 구하는 방법 <본즈 앤 올>(2022)
  • 이하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2.0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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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의 인물들은 테두리의 바깥에서 목격한 생경함과 인력이 끌어당기는 미묘한 순간들에 집중하고는 한다. <아이 엠 러브>(2011)에서 마른 나뭇가지처럼 생기가 상실되었던 중년의 엠마(틸타 스윈튼)는 자신의 몸에 일부였던 커다란 집을 빠져나와 사랑하는 연인에게로 재촉하는 걸음으로 가지를 뻗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에서 외부인 올리버(아미 해머)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줬던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의 굳은 몸은 탁 트인 공간에 내리쬐는 빛에 의해 유연함을 얻는다. 반대로 <서스페리아>(2019)에서 수지(다코타 존슨)가 지닌 몸의 자유로운 쓰임은 모든 면을 둘러싼 거울의 반사로 하여금 신체를 옥죄는 파괴적인 수단으로 변모한다. 그렇다면 <본즈 앤 올>(2022)은 어떨까. 타인의 육체를 강탈하는 식인이라는 코드로 확장된 <본즈 앤 올>은 이제껏 인식하지 못한 몸의 성장을 타자와의 결합을 통해 촉발시키고 그 중심에는 18살 소녀 매런(테일러 러셀)이 있다. 

 

구체와 추상 사이를 오가는 경계면 

18살 매런(테일러 러셀)은 피아노 건반을 치는 손의 유연한 움직임으로 파생된 소리와 함께 등장한다. 피아노 건반은 마치 뼈에 매겨진 고유 번호처럼 각기 정해진 위치에서 임명된 소리를 내는 것을 차분하게 완수한다. 이러한 고요한 규칙은 얼마 가지 못해서 매런이 자신을 감싸던 불완전한 테두리인 컨테이너를 빠져나와 친구의 집으로 향하면서 균열된 소리를 내며 시작된다. 매런의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규율을 배반하고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순식간에 친구의 손가락을 깨물어 먹어치우면서 매런은 신체 강탈자가 된다. 원인불명의 식인 행위는 공백으로 남고 질문은 쉬이 답을 얻지 못한다. 매런이 지닌 의문을 상쇄해 줄 아버지마저 편지와 출생증명서만을 남겨두고 떠난다. 아이러니한 점은 매런의 다음 행보다. 떠나간 아버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 떠났던 어머니를 찾아 버스에 올라탄 것이다. <본즈 앤 올>은 영화의 형식을 로드무비에 기대고 있는데, 본디 로드무비는 길 위에서 만나는 타인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 <델마와 루이스>(1993)에서 남편이 있던 집을 버리고 차에 올라탄 여성들의 연대, <스탠 바이 미>(1986)에서 집에 잔존하는 고요함을 버리고 철로 위를 걷는 아이들의 모험, <파리 텍사스>(1987)에서 사막 한가운데를 거닐며 태초의 자신을 복원하려는 트레비스처럼 길 위에서 매런은 자신의 흔적을 찾고자 한다. 

매런에게 텍스트의 구체성과 냄새의 추상성은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선택해야 할 질료가 된다. 아버지가 남긴 카세트테이프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정신병원의 간호사에게 맡긴 편지는 구체적인 실체와 언젠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사실성을 갖게 된다. 이는 매런이 아버지의 카세트테이프 음성에 기록된 유년 시절을 들으면서,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처음’을 애써 상기하려는 태도와 같다. 기억하지 못하는 구체적 증언은 이성의 영역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정신병원에서 찾은 어머니가 남겨둔 편지를 읽자마자 덤벼드는 난폭함처럼 이미 빛바랜 과거의 사실이다. 길을 떠나온 매런은 과거에 존재했을, 어떤 구체적인 진실보다는 알 수 없는 앞으로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세계를 향해 달려간다. 

 

본능을 상기시키는, 방향성을 알 수 없는 비릿한 냄새는 매런의 과거 위에 얹어진다. 매런은 자신을 떠난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계급의 우위에 서서 매런에게 식인 행위를 가르쳐준 중년의 남자 설리(마크 라이언스)는 일방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대상이다. 각성된 매런의 위태로운 걸음마에 발을 맞춰 걸으며 통제하는 설리는 원치 않는 돌봄을 행하려고 한다.  이러한 관계의 일방적인 사태가 지닌 폭력성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존재를 드러낸 설리는 냄새를 맡고 나타나 매런을 당혹감에 빠뜨리고, 설리는 매런의 경계면을 넘을 수 없는 불쾌한 냄새로 대응한다. 반면, 설리에게서 도망쳐 들어간 마트에서 만난 소년 리(티모시 샬라메)는 시선의 일치를 통한 동등한 위치를 획득하도록 한다. 일방적인 응시를 할 수 있는 사물로서 매런을 대한 설리와 달리 리와 매런은 동시에 서로의 냄새를 맡는다.

텍스트나 음성의 정리되고 정돈된 문장 안에 구획된 의미가 아닌 냄새의 모호함은 매런의 내재된 무언가를 분출케 한다. 그들이 맡은 냄새는 언어를 통해 뭉뚱그려서 재현할 수 없는 단지 평면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타인을 향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강한 끌림처럼 경계면을 넘은 냄새는 서로의 세계에 발을 끼워 넣으며 침범한다. 이것은 매런이 버스에 올라타 창문 너머로 바라본 설리와의 눈 마주침이 아니라 매런과 리가 같은 자동차에 올라타 같은 풍경을 공유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프닝 시퀀스로 돌아가 보자. 수채화로 그려진 송전탑과 산이 동시에 그려진 그림은 사람이 없는 풍경을 연속적으로 제시된다. 카메라는 비극의 이빨을 드러낸 매런이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친구의 손을 베어 먹은)에서 바로 이어지는 롱 샷의 송전탑과 산의 중간 경계면에서 뛰쳐나와 산으로 향하는 매런을 포착한다. 송전탑이 도시의 규율과 규제를 상징한다면, 산은 본능을 분출하는 공간이 된다. 이러한 상징성은 단어 안에서 구획을 시도하기보다는 파편화된 잔상들로 혼재되기에 이른다. 놀이공원에서 사냥감을 정한 리가 도시에서 벗어난 곳으로 남자를 유인하지만 이곳은 도로의 문명사회와 맞닿아있는 경계선에 가깝다. 살해 이후에 죽은 남자에게서 취득한 차 안에서 가족이라는 존재를 파악한 매런은 본능을 거스르는 도로 위를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도시의 규율이 지닌 구체성과 충동이 지닌 추상성은 경계를 오가면서 매런의 선택을 지긋이 응시한다. 

 

신중하게 세공한 그들만의 역사 

집이 없는 이들은 타인의 집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없다. 집 안으로의 진입이 육체의 내부라면, 집 바깥은 육체의 외부에 가깝기 때문이다. 누구도 타인에게 육체의 은밀한 내부까지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경유지에 도착하듯 방문한 리의 이모네 집과 자신을 떠난 어머니를 찾기 위해 간 매런의 외할머니의 집에서 그들은 곧바로 쫓겨난다. 그 누구도 리와 매런에게 공간을 내어주지 않고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다. 신체 강탈을 통해 타인의 역사를 갈취하는 매런과 리는 영원히 손에 쥘 수 없는 신기루만을 포착한다. 리와 매런의 첫 만남에서 그들은 리가 살해한 남성의 집에 가게 되는데, 리는 침대 위에서 남자가 듣던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가지만 엇나간다. 남자의 것은 영원히 리의 소유가 될 수 없으며 일시적으로 손에 쥔 모호한 무언가에 불과하다. 영화의 가장 중심축인 식인 행위는 타인의 역사와 시간을 강탈하는 것은 내면이 빈곤함으로 가득 차 있는 외로운 자들의 원인불명의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설리와 매런이 노인의 집에 침입해서 실행한 식인 행위로 돌아가 보자. 사운드가 이미지를 전도하는 방식으로 그려진 식인 시퀀스는 먹는 소리 위에 죽어가는 늙은 노인의 유년기 시절부터 인생을 아우르는 사진들을 인서트로 보여준다. 왜 먹는 모습이 아니라 사진을 보여준 것일까. 사진은 눈에 보이는 기록된 물질, 사물에 가깝고 시간을 향유한 공간 역시 그러하다. 단순히 먹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흡수하고 빼앗는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기존의 정체성을 지워낸 자리에 새로운 것들을 박아 세공하는 18살의 매런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스토커>(2013)의 18살 인디아를 떠올리게 한다. 무언가를 끊어내고 잘라내는 경계면에 선 나이임과 동시에 아버지가 떠나기 전 놓고 간 카세트테이프는 길게 늘어진 과거의 길과 그 형태가 비슷하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지나치는 빛과 풍경을 바라보면서 들었던 카세트테이프는 이후 리와 함께 듣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제 매런은 자신이 볼 풍경을 선택하고 세공할 능력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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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세공된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들은 영원할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에너지의 분출은 빛이 유영하면서 춤을 추는 듯 보인다. <아이 엠 러브>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잔디밭 시퀀스는 그 형식이 거울쌍처럼 닮아있다. 엠마와 에도(플라비오 파렌티)가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서로의 몸을 애무하는 <아이 엠 러브>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흔들리는 풀잎과 곤충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병치시킨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엘리오가 감춰왔던 진심을 표면으로 드러내는 공간이 된다. 자전거를 타며 추월하고 역전시키기를 반복하던 엘리오와 올리버의 발 구르기는 잔디밭 아래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두 영화는 계절의 상징성을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아이 엠 러브>에서 오프닝의 황량하고 삭막했던 겨울은 생동감이 넘치는 여름이 되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열정을 표출했던 여름은 같은 풍경을 보던 대상이 떠나며 겨울 난로의 장작이 타들어감으로 뒤바뀐다. 

<본즈 앤 올>의 매런과 리는 서로에게 튕겨져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차 안에서 각자의 시선에 위치한 풍경만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탁 트인 잔디밭에서 노을 진 풍경을 바라본다. 전작들에서 내리쬐던 햇볕은 한 층씩 색을 덧입히는 노을로 그 형태를 변화시킨다. ‘느낀다는 것’은 객관적인 수치와 자료가 없는 개인의 것이지만, 매런과 리는 ‘본다는 감각’을 통해서 공유하게 된다. 단지 같은 자동차를 타고 길 위를 함께 하는 동행자가 아니라 같은 풍경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동행자가 된 것이다. 매런과 리는 보호막이 되어줄 그들만의 집을 마련한다. 하지만 철저하게 분리된 공간이던 집은 설리의 침입으로 피로 물든 사건 현장이 되고 순식간에 타인의 공간이 된다. 한 겹씩 포개 놓았던 견고했던 그들의 역사는 공간의 잉여스러운 인서트들의 늘어진 시간 안에서 다시금 재현되고, 살해 도중에 삽입된 집 바깥의 빛들은 매런과 리가 획득했던 이미지로서 설리에게 공격당한 리를 애도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묻는다. ‘처음’이 언제냐고. 아마도 리와 매런에게 최초일 것으로 추정되는 첫 식인 행위는 베이비시터일 것이다. 하지만 18살 이전의 기억들은 몸에 새겨지지 않은 외부에 기록된 사실에 불과하다. 때문에 리가 온전하게 감각하고 있는 처음은 아버지를 살해한 순간일 것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리의 날 것 그대로의 거친 죄책감은 피의 역사를 흡수하기로 결심한 미성숙한 어른의 표상이다. 매런은 죄책감을 쏟아내는 리의 역사를 가만히 들어주고 바라본다. 처음은 그 자체로 인생의 목적지를 선택하는 일이자 신중하게 강탈해야 할 순간이다. 지금까지 매런은 리가 남자를 살해할 때도 지켜보기만 했을 뿐, 직접적으로 살해의 순간에 가담하지 않았다. 매런의 처음은 설리에 의해 죽어가는 매런이다. 영화의 중반부 산속에서 만난 이터들은 뼈까지 남김없이 먹는 쾌감과 충동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매런과 리는 그것을 체감하지 못한다. 매런은 이제 리의 역사와 인생을 뼈에 새겨진 감각과 보이지 않는 내부의 것을 모두 흡수하면서 타인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다. <본즈 앤 올>은 어쩌면 “나의 모든 것을 먹어줘.”라는 리의 대사처럼 표면에 존재하는 살갗과 더불어 내부 깊숙이 자리 잡은 뼈까지 모두 먹어줄 수 있는 타인의 역사로 세공한 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순간을 그리는지도 모른다.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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