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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크리스토퍼 놀란, 인간 없는 영화의 시간
[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크리스토퍼 놀란, 인간 없는 영화의 시간
  • 김경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5.0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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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의 개봉에 앞선, 놀란에 대한 단상

 

 

〈오펜하이머〉 출처:네이버 영화
〈오펜하이머〉 출처:네이버 영화

올해 7월, 크리스토퍼 놀란의 12번째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 예정이다. 이 영화가 핵무기를 개발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전기영화라는 것이 공개된 후로 화제가 되었다. 우선 그가 주로 다룬 SF가 아닌 실화 영화를 연출했으며 오펜하이머가 문제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첫 번째 흥미로운 지점이다. 여전히 과학과 윤리를 논할 때마다 사례로 언급되는 오펜하이머를 놀란이 어떠한 이야기를 풀어낼지 잘 가늠이 안 되어서 더욱 그러하다. 두번 째로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맷 데이먼, 플로렌스 퓨 등 할리우드 올스타라고도 할 수 있는 화려한 배우진도 화제가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캐스팅은 그의 친구인 드니 빌뇌브가 만든 〈듄〉의 캐스팅과 비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화제인 진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오펜하이머〉가 크랭크인한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인터넷에서는 이 영화를 소재로 한 온갖 짤방이 유행했다. 만일 놀란이 핵 실험 장면을 삽입한다면 진짜로 핵폭탄을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가정에서 시작한 것이다. 황당무계한 발상이지만 왜인지 놀란이라면 진짜로 할지도 모른다는 대중의 집단무의식이 짤방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짤방은 놀란의 개성을 한껏 드러낸다. 놀란은 디지털 시대에 역행하듯이 여전히 필름과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드문 감독이다. 첫 영화부터 지금까지 그는 CG를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심지어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 등 SF 장르에서도 CG를 쓰지 않으며 꿈과 우주를 그려냈다. 핵 실험에 CG를 쓰지 않는다면  진짜 핵탄두를 터뜨린 것을 찍을 것이라는 밈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20세기의 고전적인 연출을 고집하되, 그것으로 최첨단의 영화를 찍어서 대중을 설득할 힘이 있는 감독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드물 것이다. 또한 그가 지금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블록버스터 감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밈
크리스토퍼 놀란 밈, 출처: 레딧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기는 감독으로는 드물게 1960년대의 록스타를 방불케 한다.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 〈메멘토〉부터 그의 인기를 정점에 오르게 견인한 배트맨 트릴로지,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그리고 근작 〈테넷〉까지 그의 영화는 언제나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작품성으로든 오락성으로든 호평 일색이었다. 그를 동시대 거장으로 부르는 반응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만큼 그에게 복잡한 애증을 느낀다. 90년대에 탄생한 시네필에게 놀란은 이전 세대 영화의 실험적인 문법을 오락으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D.F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를 시작으로 좌안파인 알랭 레네와 크리스 마르케 등을 거쳐서 정립된 모던 시네마의 정수를 블록버스터의 문법으로 번역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러한 영화는 숏과 숏 사이에 있는 시간의 행간을 극도로 벌린다. 특정한 숏에서 그다음 숏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선형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그러나 두 숏 사이의 시공간이 다르며, 이 둘의 차이가 벌어져 있을 경우에 관객은 자연스러움을 느끼되 영화 속 시공간이 다른 논리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둘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충돌하게끔 해서 영화적인 시공간이 현실의 시공간과 다르며, 거기 안에서 새 시공간을 체험하게끔 하는 것이다. 예로 홍상수가 둘 이상의 시공간이 공존하며, 상황의 반복과 변주를 거듭하며 여러 시공간이 충돌하는 세계를 일상과 접합하는 것만큼이나 눈여겨볼 만한 것이다. 홍상수의 모호한 세계와는 달리 놀란은 영화적인 시공간이 현실의 선형적인 시간관과 다르다는 것을 장르적 문법을 더해서 오락화하고자 한다. 또한 관객도 시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퍼즐처럼 조립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인셉션〉은 곤 사토시의 〈파프리카〉와 오시이 마모루의 〈시끌별 녀석들-뷰티풀 드리머〉에서 드러나는 아니메적인 상상력과 히치콕의 서스펜스, 007의 장르 문법, 〈환송대〉나 알랭 레네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실험성이 어우러져 있는 종합 선물 세트와 같은 영화다. 놀란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급진적인 영화적 체험을 상업영화에서 그려내는 감독은 희귀하다. 무엇보다 놀란의 영화는 장르물로도 재미있다. 〈테넷〉은 007을 놀란이 찍는다면 어떻게 될까에 대한 호기심을 달래주면서도 나름의 장르적 재미를 구현하기는 했다.

 

〈인셉션〉-출처 네이버 영화

한편 놀란에 대한 증오는 놀라운 형식에 비해 그가 그려내는 세계관이 잔혹하다는 데에서 나온다. 놀란이 그려내는 시간이 지나칠 정도로 운명론과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놀란의 세계관은 그의 초기영화에서부터 씨앗을 볼 수 있다. 그가 학생 시절에 찍은 단편 〈두들버그〉가 예시다. 〈두들버그〉는 벌레를 죽이려 남성이 방 곳곳을 뒤지는 상황을 다룬다. 영화의 반전은 남성이 그토록 죽이려 했던 벌레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때 놀란은 하나의 스크린에다가 세 개의 시공간을 그린다. 벌레를 죽이는 남성이 신발로 벌레인 자기 자신을 내리치는 순간에 그 남성도 또 다른 거대한 남성에게 죽는다. A(남성)-A`(벌레를 죽인 남성)-A``(벌레를 죽인 남성을 죽인 남성)의 구조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복수의 영화적 시공간이 현재에 합쳐지는 구조는 그의 필모 전반에서 반복된다. 놀란 영화의 비극성은 인간이 그가 한 행동으로 인해서 생기는 일을 알기가 어려우며, 심지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부조리로부터 기인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플롯 구조,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의 주제 의식과 놀라우리만치 비슷하다. 기억상실증으로 그 자신이 한 행동을 모르는 상황을 다루었던 〈메멘토〉에서부터 〈덩케르크〉에 이르기까지 그는 쭉 같은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다. 이 감독의 극작술은 행위를 한 이가 그 자신을 죽이기까지의 부조리한 것을 그들만 모르고 관객은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영악스러운 의도 아래서 진행된다. 〈인터스텔라〉는 자신이 한 모든 사소한 행동이 결국 미래의 나 자신을 결정하고야 말고, 자유의지라는 것도 허상에 불과하다는 놀란의 허무주의를 전면에 드러낸다. 더군다나 이를 그려내고자 물리학 등 과학의 문법을 총동원하는 것도 왜인지 과학적 회의주의자와 닮아있다. 〈테넷〉에서는 진보라는 것은 없고, 오직 현재만 반복된다는 듯이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놀란은 모든 캐릭터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죽음을 택하는 배트맨, 〈인터스텔라〉 속 5차원 태서렉트로 가야 하는 쿠퍼(매튜 매커너히) 등등은 그의 세계가 얼마나 잔혹한지를 드러낸다. 그의 영화는 전개가 정해진 미래로 가기 위해서 한 사람 정도는 희생되어도 무관하다는 공리주의로 가기도 한다.

놀란의 영화는 여태껏 비극적인 영웅이 세계를 구하는 히어로물이었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 세계 혹은 공동체가 무너질 위기에서 시작한다. 영웅이 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세계가 멸망하는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야 만다. 놀란은 파국을 다룰 때 영웅, 혹은 한 개인이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듯하다. 배트맨 트릴로지는 트롤리 딜레마의 거대한 변주로 보인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다크나이트〉다. 배트맨(크리스천 베일)은 조커(히스 레저)에게서 레이첼(연인)과 투페이스(공동체) 둘 중 하나를 구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놀란은 딜레마에 처한 여러 인물의 고뇌를 그려내되 인물이 각자의 딜레마에 처해 있는 심리적 상황을 포착하려고 한다. 〈다크나이트〉 속의 레이첼을 구하러 가는 배트맨과 투페이스를 구하러 가는 고든은 딜레마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경우다. 이 둘이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러 갈 때 둘의 시간은 평행으로 배치된다. 〈다크나이트〉에서는 이 둘의 시간을 아직은 다른 시공간으로 배치하지 않는다. 대신에 IMAX로 둘이 각자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찍으며 기존 화면비와는 다르게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각인한다. IMAX는 관객이 보아야 할 시간을 지시해주는 장치와도 같다. 고든과 배트맨의 시공간은 일상적 시공간과 구분된다. 〈인셉션〉에서의 시간은 아예 네 개로 분할되어 있다. 현실에서의 6시간, 꿈에서의 일주일, 꿈속 꿈에서의 6달, 림보까지 네 개의 시간을 배치해서 이 넷에 각자의 딜레마를 부여한다. 현실에서의 몇 시간은 에너지 독점으로부터 인류를 구해내는 공동체적 시공간이며, 꿈에서의 일주일은 팀을 구해야만 하는 비즈니스의 시공간이며, 꿈속 꿈에서의 6달은 피셔 부자의 관계를 회복하는 가족의 시공간이다. 림보에서의 영겁은 코브가 자신 그리고 사이토를 구하는 개인을 구원하는 시공간이다. 인류-팀-가족-개인의 구원은 다른 시간으로 체험된다. 코브(디카프리오)가 눈을 깼을 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순간에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덩케르크〉는 이를 극대화해 1달, 1시간, 1분이라는 세 층위의 시간을 연속으로 편집하고, 음악을 통해서 이 셋을 하나의 리듬 아래에 배치한다. 세 시간대에 있는 개인이 제각기 다른 공간에 있더라도 셋이 서로에게 반응하고 있다는 연대를 관객이 체험하게끔 한다. 놀란은 개인과 공동체, 가족이 제각기 중요하며, 이 셋이 딜레마를 넘어서 구원되는 과정을 비춘다. 〈인터스텔라〉도 마찬가지로 나와 가족, 세계의 구원을 한 곳에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놀란은 〈인셉션〉에서부터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딜레마를 마주하지 않으려, 시간을 쪼개서 모든 것이 구원되는 체험을 그려내고자 한다. 놀란의 캐릭터는 이러한 상황에서 감독의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에 그치게 된다. 그들은 한 동기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무엇보다도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빌린, 사랑하는 여성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남성은 지나칠 정도로 편의적인 설정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긴다. 여전히 놀란의 영화를 계속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놀란 영화만큼이나 영화만 남고 인간이 없는 영화는 드물어서다.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더라도 빈자리에는 언제나 과학 이론이 있고, “이해하기 힘들면 느껴라”라는 감독의 자의식이 드러나 있기에 〈테넷〉에서 그에게 깊은 실망을 한 사람으로 〈오펜하이머〉에서 그가 과연 실제 인간을 어찌 그려낼지 기대해본다.

 

 

글·김경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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