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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노다지 (정창화 :1961)> - ‘액션영화의 대부’ 너머
[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노다지 (정창화 :1961)> - ‘액션영화의 대부’ 너머
  • 김 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3.07.10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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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장르에 대한 실험

 

포스터
영화<노다지> 포스터

정창화 감독에 대해 흔히 ‘액션영화의 대부’라고 하지만, 이는 매우 불완전한 수식어다. 왜냐하면, 그는 홍콩 쇼 브라더스 전속 감독이 되면서 한국 영화계를 비운 공백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가 줄어들었으며, 홍콩 무협영화와 액션영화, 특히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의 세계적 흥행으로 인해 액션 연출에 대한 인지도가 부각되었다. 이 두가지가 그에 대한 평가를 협소하게 만든 양날의 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액션영화뿐만 아니라 여러 장르를 끊임없이 실험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장르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를 다각적으로 연구한 호기심 가득하고 영리하며 열정적인 감독이었다. <장화홍련전>(1956)이나 <장희빈> (1961) 같은 사극은 물론이고 <황혼의 검객>(1967) 에선 갓을 쓰고 도포를 두른 검객들이 검술 대결을 펼치는 퓨전 웨스턴 사극의 미학을 열었고, <지평선>(1961)에선 이른바 ‘대륙 물’ 혹은 ‘만주 웨스턴’의 장르를 개척했다. 급기야, <노다지>는 이 장르적 실험을 하나의 그릇에 모두 부어 담은 하이브리드 장르다. 이런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에 정창화 감독은 하이브리드 장르를 실험한 것이다. 이 영화에는 액션과 멜로, 필름 누아르와 웨스턴도 있다. 이 하이브리드 장르 영화는 각각의 장르를 떼어 놓아도 장르 영화로 뚜렷한 특징들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필름 누아르의 특징은 인상적이다. 필름 누아르는 어둡고 구성이 추상적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팜므 파탈이 등장한다는 관습도 있다. 정창화 감독은 <노다지>에 등장하는 동네 양아치 혹은 갱들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그들에게 누아르 필름의 무게와 추상적 아름다움을 부여해 준다. 그들의 아지트를 묘사한 세트 디자인은 누아르가 지향하는 추상적인 흑과 백의 대조를 모던하게 구현한다. 물론 김승호의 옛 여인(윤인자) 팜므파탈뿐 아니라 영옥 팜므파탈도 만만치 않다.

정창화 감독이<노다지>라는 흑백 영화에서 흑백의 콘트라스트를 맘 놓고 다루는 능수능란한 변주는 영옥과 동일이 데이트하는 바닷가의 로맨틱한 역광 장면에서도 보인다. 정창화 감독은 같은 콘트라스트 톤을 가지고 누아르 미장센과 로맨틱 미장센을 맘껏 펼친다.

 

‘가장 스토리’와 ‘성장 스토리’가 교차하다

 

사금왕 운칠
사금왕 운칠

<노다지>는 내러티브 또한 매우 다채롭고 정교하다. <노다지>에는 여러 개의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스토리마다 플롯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각각의 스토리는 각각의 하위 영화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다시 상위 스토리나 플롯과 만난다.

사금을 찾아 20년간 함께 동고동락한 운칠(김승호)과 달수(허장강)의 ‘가장 스토리’가 있고, 이 두 사연 많은 가장의 하위 스토리에 영옥(엄앵란)과 동일(황해)의 버림 받은 아이들 ‘성장 스토리’가 있다. 운칠과 달수 사이에 의리와 욕망의 드라마가 있다면, 영옥과 동일 사이에는 러브 라인이 놓인다. 이 스토리들을 끌고 가는 인물들 모두 매력적이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김승호가 연기한 사금왕 운칠의 감정선은 물론, 황금 앞에서 의리도 저버리고 어리석게도 목숨까지 잃게 되는 달수 허장강이 그린 욕망의 부침도 이해할 수 있다. 불우했던 영옥이 뒷골목 여자 갱이 되어 당차게 살아내는 모습이나 영화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두목 박노식을 향해 직접 응징하는 모습은 ‘영옥 스토리’를 독립해도 손색없을 만큼, 또렷한 캐릭터를 보여준다.

 

1961년을 주도하며, 미래를 앞당긴 정창화 감독

정창화 감독은 1961년 1월에 <지평선>, 6월 <노다지> 그리고 9월에 <장희빈>을 개봉한다. <지평선>과 <장희빈>은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의 기록을 남긴다. 이는 1961년도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 영화 13편 중 두 편이니 대단한 성취지만, <노다지>는 10만 명을 넘기지 못한다. 어쩌면 <노다지>가 관객보다 너무 앞서 나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당대의 관객이 옴니버스 영화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스토리와 복잡한 플롯, 하이브리드 장르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사용한 플래시백 속의 플래시백은 이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임권택 감독이 90년에 들어서 <서편제>에 사용할 때 쯤에서야 관객의 호응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노다지>는 정창화 감독과 닮아 있다. 그가 한국과 홍콩의 경계를 허물었던 것처럼, <노다지>는 장르를 섞고 경계를 허물며 장차 정창화 감독의 행보를 암시했던 것 같다.

1960년 4·19 이후 다소 활력을 되찾았던 한국 사회에서, 1961년의 정창화는 <노다지>를 통해 ‘노다지’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허황한 미래를 한번 비틀어서, 꿈은 이루어진다고 강변한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화적 활력을 준 것이다.

 

한국형 웨스턴 구현

여러 가닥의 스토리와 플롯은 마지막 전투 장면으로 종결되어 새로운 가족을 예고한다.대립되던 동일과 운칠의 관계, 헤어졌던 영옥과 운칠은 다시 새로운 미래의 가족으로 통합되고, 악당들의 손에서 이 관계를 함께 지켜내며 그 결속은 강해진다. 여기에서 누아르와 가족 멜로 드라마의 두 가지 기능, 질서와 통합이 동시에 작동하게 된다. 갱들은 총격으로 제거되고 가족은 사랑으로 통합된다. 마지막 장면에 운칠과 영옥, 그리고 동일은 함께 걸어나간다. 그들은 노다지와 가족을 함께 지킬 것이다. ‘노다지’는 ‘노터치 No Touch’에서 나온 근대 신조어라지만 이 영화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통합’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기도 하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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