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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로라 멀비는 루마니아를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로라 멀비는 루마니아를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1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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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필름’에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한 시대와 장소에 관한 총체적인 사유, 실험적인 연출,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이미지가 에세이 필름의 특징이라면,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2023)는 분명 하나의 에세이 필름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라두 주데 감독은 직접 자신의 신작이 ‘노동 착취’를 다룬다고 코멘트했다. 비록 표면적인 서사는 ‘초과 근무’를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전작 <배드 럭 뱅잉>(2021)과 마찬가지로 163분의 영화가 겨냥하는 바는 결코 하나의 소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혐오와 상스러운 욕설, 정치•종교계를 가리지 않고 부정부패가 범람하는 루마니아의 시대상 전반을 다루는 국지적인 성찰에 가깝다. 영화가 고발하는 노동 착취 이슈를 먼 나라 이야기로만 취급하는 것은 짧디짧은 생각이다. 한국 노동 환경의 참담한 실태를 다룬 뉴스를 콕 집어 언급한 감독의 코멘트처럼 말이다.

<배드 럭 뱅잉>에 따르면 극장의 스크린은 ‘거울 방패’가 되어 세계를 비춘다. 예술(시네마)은 현실 세계의 단면을 잘라내어 전시하고 또 고발한다. 해당 작품이 황금곰상이라는 영예를 얻게 된 데에는 예술 본래의 역할에 충실한 감독의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이번 작품 또한 영화의 매체성을 강조하지만, 그보다 유튜브•틱톡•줌(zoom) 등 다양한 플랫폼을 활용하는 장면들도 눈에 띈다. 이제 영화인은 시네마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활용하는 이 ‘MZ 미디어’들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 결과를 찬찬히 살펴야 한다.

 

안젤라는 다국적 기업이 제작하는 산업 안전 홍보 영상에 출연할 인물을 물색하느라 부쿠레슈티 시내를 누빈다. 로드무비 형식을 띠지만, 명확한 목적지는 없다. 그녀의 여정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연장되는 업무 시간에 고통받는 그녀의 모습은 초과 근무 시간에 산업 재해를 당한 인터뷰이들과 오버랩된다. 특히 최종 결과물인 안전 홍보 영상에서 사회 구조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동자들을 불구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은 과도한 초과 근무이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안전모 착용을 강조하는 슬로건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개인의 안전 불감으로 돌려버린다. 명백히 불순한 의도에도 노동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영상 제작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1장, <1981년도 영화와의 대화>. 이 장에서 영화는 안젤라와 과거 한 여성 택시 운전사의 하루를 교차한다. 흑백과 컬러 화면으로 포개지는 시간성은 두 인물의 공통된 행동에 주목한다. 안젤라의 라디오는 “그 황금기는 어디로 갔나?”며 향수를 느끼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과거의 여성이 겪은 부조리는 여전히 건재하다. 이후 두 여성(영화)이 실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며 택시 운전사의 이름 또한 안젤라로 밝혀진다. 택시가 우버로 바뀌었을 뿐, 신세는 물론 이름까지 같은 이들이다.

 

택시 운전사의 모습을 슬로우모션으로 처리한 장면들은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실험 중 하나이다. 세계의 이미지와 사운드에 변형을 가하는 순간들은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의 실험을 연상케 한다. 멀비는 『1초에 24번의 죽음』에서 영화 역시 과거의 존재를 상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롤랑 바르트의 이론을 반박했다. 라두 주데 감독이 달리는 택시의 이미지를 변형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영화의 진행을 인위적으로 지연하고 흐름을 방해하며 필름에 내재하는 정지의 시간성을 가시화한다. 만약 멀비의 주장처럼 카메라의 눈이 재현의 지시성을 얻는다면, 시네마는 세계의 재현에 일조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멀비가 현대의 디지털 기술을 정지의 순간을 가시화하는 그녀의 작업에 유용한 도구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두 주데가 묘사한 현대의 디지털 기기는 세계를 서서히 ‘종말’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는다. 화상채팅 ‘줌’의 가상 배경은 제작자의 의도에 맞춰 교묘히 이미지를 조작한다. SNS의 필터는 피사체의 성별을 난잡하게 뒤흔든다. 또한 카메라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져 누구나 영상을 업로드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자, 조회수를 위한 이미지의 과잉과 왜곡이 판을 친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인간에게 쇄도하는 악의적 이미지를 막을 방법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가짜 뉴스’ 문제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다. 범람하는 쇼트폼 콘텐츠는 잠들고 싶은 인간의 눈을 포획하고 놓아주지 않는다. “포르노 배우가 상대 배우를 앞에 두고도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하듯이”, 이제 이미지는 실제 세계보다 인간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배드 럭 뱅잉>에서 시네마를 무기 삼아 세계와 맞서자고 주장했던 감독은 이번에도 영화를 그 대안으로 제시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2장 <촬영 원본>에서는 카메라의 한계와 위험성이 강조된다. 현대의 모든 플랫폼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감독의 입맛에 취약한 미디어로 변질되었다. 8K의 화질은 클로즈업을 통해 감성을 쥐어짜는 연출을 가능케 한다. 크로마키는 감독에게 노동자의 말풍선에 어떤 말이든 집어넣을 수 있는 권력을 쥐여줬다. 디지털 변형에 의존하는 이미지는 더 이상 세계와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만약 모든 디렉팅이 악의를 품을 수 있다면, 필름 역시 세계를 재현할 힘을 잃고 마는 것은 아닐까? 노동자와의 인터뷰 과정을 담은 2장의 ‘촬영 원본’은 최소한의 편집도 거치지 않은 영화의 원료이다. 하지만 가위질 없이도 화면 속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사물은 철저히 회사 측의 입장을 반영한다. 이때 영화가 뤼미에르를 언급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카메라가 촬영한 모든 것에 불순한 의도가 섞였을 수 있다는 사실은 허탈함을 자아낸다. 우리는 뤼미에르의 영화를 통해 이와 유사한 감정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영화 리얼리즘’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영상에마저 감독의 디렉팅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이다. 이로써 세계를 비추는 거울 방패는 시한폭탄으로 전락하며 종말을 예고한다.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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