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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희의 문화톡톡] 미완의 윤리
[한유희의 문화톡톡] 미완의 윤리
  • 한유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20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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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현실을 담아내는 웹툰 읽기] 6
이백, 황짠느, <대나무숲에서 알립니다>

 

 

참을 수 없는 비밀의 두려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신라 경문대왕에 관한 <삼국유사> 속 이야기다. 경문대왕의 귀는 당나귀의 귀처럼 길었다고 한다. 늘 왕관 속에 귀를 숨겨서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왕관을 만드는 복두장만은 예외였다. 평생 비밀을 지키던 복두장은 죽음이 임박하자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에 가서 대나무를 보고 외쳤다. 이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1)  과연 복두장은 비밀을 지킨 것일까 발설한 것일까.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비밀을 발설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비밀은 지니고 있기에는 버겁고 내뱉기에는 두렵다. 비밀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욱 발설의 마력은 강해진다. 대나무숲에서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나를 알리지 않고 자신이 품고 있던 비밀을 배설함으로써 얻는 카타르시스에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대나무숲이 필요하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의 대나무숲은 SNS 세상으로 장소를 옮긴다. 자신의 비밀을 발설하는 장소가 SNS라는 점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질 수도 있는 위험성을 감수할 정도로 큰 ‘발화’에 대한 매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우리는 <대나무숲>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다. SNS에서 대나무숲은 어디서 하소연 할 수 없었던 같은 직종 또는 공통점을 가진 사회적 약자들이 마음껏 속내를 풀어 내는 공간으로서 소통의 창구다. 익명으로 업계의 부당한 처사를 고발하거나 힘겨운 현실을 토로하는 하나의 ‘장’2)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대나무숲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해방구가 된 대나무숲은 여러 집단에 생기기 시작한다. 특히나 많은 학교에 존재하는 <대나무숲>은 ‘레전드’를 모아놓을 정도로 유명하다. 학교마다 지니고 있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는 운영진과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사연은 다양하다. 학교에서 느꼈던 불편한 점과 더불어 학과 운영, 학회 운영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다. 더불어서 학교 내에서의 인간관계 등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사연도 많다. 특히 자신의 이야기를 다수에게 익명을 통해서 공론화를 하는 방식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폭로와 비밀의 배설이라는 장소로 누구나 볼 수 있는 페이지를 선택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익명성을 보장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점차 늘어난다. 상황으로 인해서다. 누군가의 실수, 실언은 빠르게 ‘박제’된다. 나, 주변 사람들만 알 수 있던 일들은 이제 잠깐의 폭로를 통해 ‘모두’의 웃음거리로 회자된다. 또한 ‘영원히’ 공개된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죽지도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따라서 익명의 뒤에 ‘나’를 숨겨야만 한다.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되지만 발화를 통해 해소하는 감정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밀의 유지가 어려워지는 공간이 오히려 발설의 장소가 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두렵지만 동시에 매력적인 공간이 바로 SNS 속 익명의 세계인 것이다. 빠르게 신상정보가 노출되고 사람들은 ‘분노’를 매개로 행동을 실천한다.

 

관계와 배제

청록고등학교에 대나무숲 페이지가 생겼다. <대나무숲에서 알립니다>는 이런 작은 사건에서 시작된다. <대나무숲에서 알립니다>(이하 <대알>)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다. 어디에나 있는 대나무숲으로 인해 청록고에서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사연을 받고 공지하는 과정에서 대나무숲은 청록고에 크고 작은 균열이 일어난다. 단순한 익명 제보에서 ‘실명’을 담보로 제보가 바뀌며 제보는 내용의 신빙성보다 누가 제보를 했는지가 중요해진다. 이후 학교는 변한다. 친구들의 관계는 위태롭고 믿을 수 없게 된다. 학교 폭력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동시에 살인과 자살이 발생하기까지 한다. 이 모든 사건이 <대알>에서 실명제보, 그리고 연쇄적인 제보를 통해서다.  

사춘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또래다. 작은 사회인 학교에서 내가 혼자 다니지 않을 수 있는 것. 학교라는 환경에서 가장 중요하다. SNS이 일상인 그들은 함께 있지만 ‘페메’와 ‘디엠’을 통해서 공고하게 관계를 유지한다. 그들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을 취해야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리를 나누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누군가를 제외하는 방법이다. ‘나’ 아닌 ‘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적으로 상정할 때 무리는 동질감을 얻기 쉽다. 남과 다른 ‘나’를 균질화하며, 동시에 남을 고발하는 과정을 통해서 무리가 유지된다.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아싸’는 모멸감, 열패감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더불어 이런 분위기는 지속적으로 타자에 대한 관용이 아닌 배제와 혐오를 확산시킨다. SNS을 사용하면서 더 은밀한 배제, 더욱 복잡한 권력이 형성된다. 

하지만 어른들, 학교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 아이들 ‘공동체’의 문제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권력의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한다. 학교 폭력이 일어났을 때 학교는 사건을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아이들은 묵인과 배제의 과정을 학습한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튀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 된다. ‘적당히’는 점차 균질성을 좁게 구획한다. 따라서 ‘남다르다’는 개성이 아닌 유별나다로 의미가 변환된다. 다름이 틀림이 되는 현실에서 SNS 공간은 더욱 위태롭다. 누구도 지켜줄 수 없는 정글의 세계. 
배제되고 소외되는 자들을 코너로 몰아넣고, 막바지에 몰린 상황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른들은 알려주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을 알려줄 뿐이다. 말을 건네고 손을 뻗는 행위는 지양된다. 배제는 곧바로 증오와 혐오로 옮겨가며 대상을 변경·확장한다. 또래 집단에서의 결격 사유는 동질감이 이질감으로 바뀔 때다.

정안이가 중학교 때 조용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때와 달리 고등학교 시절 온갖 사건 사고를 겪었던 것은 바로 ‘나서서’ 말했을 때다. 정안이는 최대한 이성적인 사고로 아이들에게 누구도 제보를 참여하지 않기를 제안한다. 하지만 정안이의 이런 시도는 오히려 정안이가 배제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정안이의 결과를 보고 제보는 더욱 더 많아지게 된다. 제보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증오의 공급자이자 수여자다. 모두 잘못된 것을 알지만 어떤 방식으로도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나’를 중심으로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가 아이히만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직접 체험한다. 평범한 악.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한 아이들의 선택에서 악은 증오와 혐오를 키워나간다. 민희와 수영의 관계에서 수영이 살해와 자살로 상황을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탈출구가 없던 감정의 고리를 어떤 방식으로도 끊을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증오의 대상은 대상대로, 증오를 하는 주체들은 주체대로 ‘건강한 관계’를 상상하지 못한다. 모두가 다르기에 전체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대알>은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왜 그런가? 에 대한 의문과 서스펜스를 유지한다. 2부까지 연재할 수 있었던 것은 연출의 탁월함 때문이다. 긴장감을 팽팽히 당기면서 관계의 윤리를 결부하여 현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대알>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범인인가’, ‘왜 그랬는가’가 아니다. 일련의 사건에서 일어나는 모두의 태도다. 과정마다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는 연속적 사건에서 당당하게 도덕적 판단과 사고가 가능한가 묻는다. 윤리적인 선택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 비단 ‘학교’ 안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어느 때보다 잘 지켜지는 이 시대는 모순적으로 익명을 더 많이 요구한다. 사회는 점차 폭넓은 개인을 인정하기보다 점차 더 좁은 상태로 구획한다. 

 

민낯과 얼굴

광물로서의 ‘유리’는 모든 것을 다 투영하는 성질을 지닌다.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지만 동시에 깨지면 날카로워서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 <대알>에서 유리도 마찬가지의 성격을 지닌다. ‘유리’의 존재는 특별하다. 전교 1등에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간다. 굳이 ‘무리’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존재다. 모나고 유별나지만 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마이웨이’로 살아간다. 유리에게 친구란 자신의 벽을 허물어도 되는 존재인데, ‘민선아’가 유일하다. 유리는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가 있는 선아를 ‘선아’ 그자체로 바라본다. 롤링페이퍼에 작성한 “우리는 그냥 친하니까 친한거야.” 

자기 생각, 자기 시선으로 앞을 향해가는 선아는 고등학교의 진학 앞에서 자신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을 다시 한 번 경험한다. 아무리 두드려도 선아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유리는 선아의 죽음을 마주한다. 친구의 죽음으로 유리는 충격과 두려움, 분노로 인해서 산산조각난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 그 자체를 인정했던 존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유리는 직접 ‘심판자’가 된다. 누구보다도 똑똑한 유리는 선아를 죽음에 내몬 존재들이 선아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모두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리의 불안요소는 여기에 있다. ‘민선아’라는 존재는 분명히 부당한 세상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이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결국 ‘유리’는 선악의 저편(beyond)에 있는 존재가 아닌 혐오적 연상의 사슬을 유지하는 존재로 돌변한다. 정의를 위해 정도를 넘어설 때 올바름은 설 수 없다.

왜 너는 죽어야 했을까 라는 질문에 유리가 만들어 낸 선아의 답안들은 “그러니까 그냥 자살이야.”, “그러니까 혼자 무너진거야.”다. 애초에 정답은 없던 문제다. 유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도, 답도 스스로 찾아가고자 대숲지기가 된다. 같이 대나무숲을 운영하던 ‘유나’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진행한다. 모두 선아를 위해서 라는 말로 포장된다. 하지만 곧 유나는 빠르게 이 상황을 인지한다. 대나무숲 운영자로서의 복수가 선아의 복수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복수는 ‘선아’를 위한 것이 아닌 유나와 유리 각자의 몫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윤리라고 칭했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의 차원3)이라는 것이다. 유리가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점은 모든 문제의 시초가 된다. 얼굴의 자기 표현은 윤리적 의미4)임에 반해 유리가 바라보는 얼굴-정안도 마찬가지-이 모든 것이 다 지워져 글씨로 다가온다. 얼굴의 모습을 구분할 수 없고, 표정까지 읽을 수 없는 글씨로만 얼굴이 현현될 때 얼굴은 상상아 불가능한 지점으로 탈바꿈된다.

선아가 바란 얼굴의 모습은 ‘공감’과 ‘공유’다. 누구나 여러 가지의 모습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을 원했던 것이다. 함께의 가치를 얼굴로 현현하고자 했던 선아의 마지막 시도인 롤링페이퍼는 실패한다. 공개적인 자리에 위치한 롤링페이퍼는 텅 비어있었다. 유리와 유나의 진심어린 말과 몇몇이 선생님의 권유로 적은 말들이 전부였다. 반대로 학교 뒤편에 있던 롤링페이퍼는 증오와 악의가 가득한 말들이 가득했다. 사회적인 얼굴과 ‘민낯’의 간극만 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선아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의 가치를 꿈꿨던 것이 지독하게도 이상적인 ‘꿈’임을 체감한다. 그동안도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용인했던 상황들을 다시금 제대로 마주한 것이다. 롤링페이퍼의 얼굴은 윤리가 아닌 혐오이자 배제일 뿐이었다. 누구도 선아의 앞에서 민낯을 보여주지 않은 채, 뒤에서 혐오의 민낯을 드러냈다. 선아에게는 유나와 유리를 제외하고 모두가 괴물이었다.

니체는 말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에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5)

유리는 괴물을 처리하기 위해서 괴물이 된다. 사실 유리도 유나도 대숲지기만으로는 선아의 복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멈출 수 없는 유리의 선택은 증오의 증폭이자 또다른 선아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깨진 파편은 날카롭게 유리의 안팎에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 각자의 민낯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수치심과 혐오를 재생산하게 할 뿐이다.

 

불안과 파르헤지아6)

감정은 방향성을 갖는다. 불안은 사람을 움직인다. 불안은 사람을 헐벗기고 사람은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차별을 분노를 그리고 혐오를 덧칠한다. 덧칠하고, 또 덧칠하고 그렇게 끝끝내 상대를 자신과 같은 색으로 덧칠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안심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안은 또다시 다른 이를 붙잡아 움직인다. 대나무숲에서 보는 것은 불안한 당신의 민낯이다. 덧칠하면 덧칠할수록 불안은 짙어질 뿐이다.7) 

유리에게 대나무숲은 자신의 대답을 듣기 위한 도구다. 선아에 대해서 알게 될수록 유리는 차별과 배제의 위해와 잔인성을 확인한다. “선아는 끝이 나지 않는 문제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끝을 보기 위해서” 대나무숲을 만든다.

미안하다는 페메를 보낸 정안이가 유리의 목표가 된 것은 우연이자 필연적이었다. 정안의 존재는 하나의 가능성이자 희망이다. 누구와도 둥글게 잘 지내는 정안이는 선아의 마지막 보루였을지도 모른다. 정안이는 앞에서 행동하지 않았으나 선아의 이야기를 흘려라도 듣고 말해준다. 정안이가 달랐던 점은 단 하나다.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 ‘미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후 고등학생이 된 정안의 선택들은 푸코가 말하는 파르헤지아를 상상하게 한다. 모종의 위험을 초래하는 말하기라는 점에서 정안의 발언과 파르헤지아는 궤를 같이 한다. 문제는 누구도 정안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누구도 들을 생각이 없는데 파르헤지아라는 행위는 가능할 수 있을까.

<대알>에서 두드러지는 불안이라는 감정은 따라서 파국을 향하는 ‘행위’의 전제가 된다. 불안을 통해 드러나는 ‘민낯’이란 결국은 동질성을 재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나의 과오, 혹은 단점이 국소화되고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즉 불안은 증오와 혐오를 극대화시킨다. 실수와 허점이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공존은 도무지 상상될 수 없는 미지의 어휘로 남는다. 공감이 부재될 때 증오와 혐오는 사회의 현상과 분위기로 존재한다. 공존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다양성과 자유는 허울 좋게 껍데기만 남아 있다. 오히려 의미는 생기를 잃고 어휘만 박제되어 있을 뿐이다. 공감의 부재로 혐오와 증오가 당연시되는 사회. 오히려 증오를 공모하는 사회는 폐쇄적이 된다. 

유리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제보자의 리스트 업로드를 예약해두고 정안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 말했던 정안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전부였을까? 마지막 거울에 비친 정안이의 얼굴에는 또 다시 불안이 떠오른다. 따라서 <대알>의 완결이지만 여전히 미완결의 상황을 상정한다. 사회적 윤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무서운 것을 우리 모두가 아이히만이 되어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개입하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동조적으로 용인하는 사람들 역시 증오를 가능하게 하고 확장한다.8)  윤리 부재의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파르헤지스트가 될 수 있을까. <대알> 석연치 않은 결말로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글 · 한유희
문화평론가. 제 15회<쿨투라> 웹툰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1년 만화평론 공모전 우수상 수상. 경희대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으로 웹툰과 팬덤을 연구하고 있다.


1)http://legacy.www.hani.co.kr/section-010100020/2004/11/010100020200411301513001.html
2)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12626/http://chiefexecutive.kmac.co.kr/detail.asp?gcode=020111&seqno=3795#
3) 강영안, 타인의 얼굴, 문학과지성사, 2005, 151쪽.
4) 앞의 책, 181쪽.
5) 프리드리히 니체, 김정현 옮김,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125쪽.
6) 미셸 푸코는 자아와 타인에 대한 통치에서 파르헤지아를 재정의한다. 파르헤지아는 말하기의 자유인데,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닌 그 진실대로 생각해야만 한다. 
7) <대나무숲에서 알립니다> 에피소드 중
8) 카롤린 엠케, 정지인 옮김, 혐오사회, 다산지식하우스, 2017,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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