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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문화톡톡] 드니 디드로와 풍석 서유구 (1)
[김정희의 문화톡톡] 드니 디드로와 풍석 서유구 (1)
  • 김정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19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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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을 뒤흔든 한 소녀의 고백’

2014년에 개봉하여 누적 관객 6,181명을 기록한 프랑스 영화가 있다. ‘18세기 유럽을 뒤흔든 한 소녀의 고백’이라는 영화 포스터의 문구가 인상적인 “베일을 쓴 수녀”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1796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수녀(La Religieuse)>인데 작가는 백과전서파로 알려진 드니 디드로이다. 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백과전서파 디드로 달랑베르’라고 외웠던 바로 그 디드로이다. 디드로의 업적은 백과전서이지만 뛰어난 작가이기도 했다. 최근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디드로의 저서들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수녀>는 1752년 실제로 일어났던 “수녀 서원 취소 소송”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디드로와 친구 사이였던 한 후작이 사건의 실제 인물을 돕고자 했다가 원고 패소로 소송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디드로와 친구들이 이 후작을 다시 파리로 부르기 위해 사건의 주인공 수녀인 척 가짜 편지를 보내면서 후작과 수녀 사이에 편지가 오고 갔다. 디드로는 이십여 년 뒤 이 편지들을 고쳐서 <수녀>를 출간했는데, 종교계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이 책은 금서가 되었고, 200년이 지나 1966년도 영화로 만들어진 <수녀>도 상영금지 되었다.

 

디드로 (Denis-Diderot) 1713~ 1784

디드로는 1731년 프랑스 동부 랑그르의 수술용 칼을 제조하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백과사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가 <백과전서 혹은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전>을 출간하게 되었다. 디드로는 이 책의 백과사전 항목에서

“‘백과사전’의 목적은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지식을 모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의 일반체계를 제시하고 이를 우리 다음에 올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라고 명시하고 있다. 백과전서는 7만여 개의 표제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은 달랑베르가 썼고, 루이 드 조쿠르는 원고의 거의 1/4에 해당하는 17,000여 항목의 글을 썼으며,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150여 명의 저자들이 참여하였다. 디드로는 전체의 기획과 편집을 맡아 7만여 개의 표제어를 정하고, 6,800여 개의 항목을 직접 집필하였다. 1751년 1권이 출간된 이래 수많은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여 년에 걸쳐 예술, 과학, 기술 분야의 모든 지식을 담은 책인 백과전서는 텍스트 17권, 도록 11권, 부록 4권, 도록 부록 1권, 색인 2권 등 총 35권으로 완성된다.

 

풍석 서유구  (1764-1845)                             실학박물관 © 김정희
풍석 서유구 (1764-1845) 실학박물관 © 김정희

풍석 서유구 (1764년 영조40 ~ 1845년 헌종11)

풍석 서유구는 조선시대 실용 백과사전 <임원경제지>의 저자이다. <임원경제지>는 입시를 위해 암기해야 하는 것 중 중요도에서 “백과전서파 디드로 달랑베르”보다도 떨어진다. 학교에서 실학을 배우면서, “중농학파 중상학파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를 외우다가 “정약용의 1표 2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외우고 끄트머리에 “농업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외운 기억이 희미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임원경제지>가 농사짓는 법이 적혀있는 책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교사들 중에서도 임원경제지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없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정약용과 두 살 차이밖에 되지 않는 서유구는 지향점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 방대한 양의 저술과 이력을 보면 정약용에 비해 너무도 저평가 되어 왔다. 아니 서유구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시대 누군가에 의해 보여주고 싶고, 보여지는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의 초당이 초당 아닌 기와집이 되어 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서유구의 삶

풍석 서유구(1764년 영조 40 ~1845년 헌종 11)는 대표적인 경화세족 집안에서 태어나 대제학이었던 할아버지 서명응(1716년 숙종 42 ~1787년 정조 11), 이조판서였던 아버지 서호수(1736년 영조 12 ~1799년 정조 23)의 뒤를 이어 1790년 (정조 14) 과거에 급제하였다. 규장각 초계문신이었고, 벼슬길에 올랐으나 작은아버지 서형수가 유배를 가게 되자 고향인 장단으로 돌아가 18년간 은거하면서, <임원경제지>를 저술하였다. 다시 복직되어 관직 생활을 하였는데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는 조선의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고구마 재배법을 정리해서 <종저보(1834년)>도 펴냈다. 은퇴 후인 1842년 <임원경제지>를 완성했으나 출간 비용이 없어서 출간하지 못한 채 82세였던 1845년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삶을 마감했다.

 

오비거사생광자표(五費居士生壙自表)

풍석 서유구는 <오비거사생광자표>라는 자찬묘지명을 지었는데 ‘오비거사’는 다섯 가지로 인생을 낭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서유구는 젊어서 공부하느라 보낸 삶, 규장각 각신으로 보낸 세월, 집안이 몰락하여 향촌에서 농사지으며 농학에 매진했던 삶, 다시 조정에 나간 것, 마지막으로 <임원경제지>를 쓴 것. 모든 시기, 모든 시간을 헛되이 낭비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특히, <임원경제지>를 편찬했지만 인쇄할 돈도 없고 후학도 없으니 장독대 덮개로나 쓰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는데, 30년에 걸쳐 16 지 113권 54책 252만 자에 달하는 내용을 직접 실험해 보고 저술할 때 도움이 되었던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의 아버지의 심경이 전해진다.

 

서유구와 사람들

 

혼개통헌의(Astrolabe)  유금(1741-1788)이 1787년 제작한 이슬람 양식의 천문기기. 18세기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아스트로라브'      실학박물관 © 김정희
혼개통헌의(Astrolabe)
유금(1741-1788)이 1787년 제작한 이슬람 양식의 천문기기.
18세기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아스트로라브'
실학박물관 © 김정희

 

유금柳琴 (1741년 영조17~ 1788년 정조 12)

유금은 거문고에 벽()이 있어 스스로 이름을 금(:거문고)이라 고쳤고,

()를 탄소(彈素:줄 없는 거문고를 탄다는 뜻)라고 지었다.

탄소가 죽은 뒤 나는 때때로 그리운 생각이 들면 번번이 거문고를 연주했다. 연주를 마치고 머뭇거리며 우두커니 바라보면 행여 생전과 같은 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하관 할 때가 되자 나는 술을 붓고 다시 슬픈 곡조를 연주하여 애도하고 제목을 송원이라 했다.

서유구 <송원사 곡기하자> 풍석고협집 권 5

유금은 기하학· 천문학· 기계 제작 등에 조예가 깊었고 거문고와 해금 연주에 뛰어났는데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1748년 영조 24 ~ 1807년 순조 7)의 작은 아버지로 유득공보다 일곱 살 위였다. 유금의 이름은 유연이었는데 1776년 (영조 52) 연행 부사였던 서호수를 따라 중국에 다녀온 뒤 유금으로 개명하였다. 유금이 중국에 갈 때 조카인 유득공과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의 시를 가져가서 이조원과 반정균에게 이 시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1765년(영조51) 사행단에 포함되어 청나라에 갔던 홍대용과 친구가 되었던 청나라 문인들이었다. 네 명의 시를 모았다고 하여 <사가시집(四家詩集)>으로도 알려진 <한객건연집 韓客巾衍集>은 이들의 서문과 함께 중국에서 출간된 후에 국내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유금은 이렇게 <한객건연집>을 중국에 알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1783년(정조 7) 수차의 일종인 용미차(수차의 일종)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극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이조판서로 있던 서호수(서유구의 아버지)가 용미차 제작에 대한 상소를 올렸는데 정조가 이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유금은 연암 박지원의 <양환집서>로 더 유명한 시집 <양환집>을 남겼는데 양환은 말똥 구슬이라는 뜻이다. 동갑이었던 이덕무와 아홉 살 어렸던 박제가와 함께 나눈 깊은 우정 이야기들이 글로 남아 있다. 유금은 서유구와 그의 형 서유본을 아주 어릴 때부터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유금은 서유구보다 스물세 살이나 많았으나 친구 같은 스승이었다. 서유구가 유금을 생각하며 지은 글인 <송원사곡기하자>를 읽어 보면 서유구의 평소 성품과 더불어 세상을 떠나는 순간 거문고 연주를 듣고자 했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

나는 언젠가 남산의 비탈에 있는 그 집 (유금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집에 기하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방의 좌우에는 온통 천문 역법과 관련된 책이었다.

서유구 <기하실기> 풍석고협집 권 2

 

이빙허각 (1759년 영조35 ~1824년 순조24)

서유구의 형 서유본(1762~ 1822)의 부인으로 <규합총서>1809를 한글로 저술하였다. 음식과 의복을 마련하는 일, 채소 및 가축 기르기, 태교 출산 육아, 주거 및 위생에 관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장성해서는 책을 두루 읽었고, 기억력이 좋으셨다. 시를 잘 지었고 저술을 잘하여 아직 시집가지 않았는데도 여사(女士)라는 칭송을 들었다.”

만년에는 집안이 쇠락하여 선인이 물려주신 전답을 거의 다 잃게 되었다. 형수님은 손수 온갖 고생을 하며 열심히 일하여 곱절의 이익을 남기고 날마다 작은 양만 먹고 남편은 마음껏 공부에 전념하며 시간을 보내게 하셨으니 또 재간이 있는 부인이자 고생을 많이 한 분이다.”

저서에 <빙허각시집> 한 권, <규합총서>여덟 권, <청규박물지> 다섯 권이 있다.

그 중에서 <규합총서>는 형수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벌써 세상에 알려져 인척들이 곧잘 베껴 전해졌다.”

서유구 <빙허각 이씨 묘지명>

 

 

글·김정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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