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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교토에서 온 편지>, 그들은 어떻게 공간을 마주하는가
[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교토에서 온 편지>, 그들은 어떻게 공간을 마주하는가
  • 송상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4.01.15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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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교토에서 온 편지>는 세대 간 복잡하게 얽힌 모녀의 사연을 통해 가족의 연결고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때 사람 사이 온기를 뭉근하게 다루면서 인물들을 따라가는 영화가 사실 조금 더 무게를 싣는 지점이 ‘사람’보다는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교토에서 온 편지>는 공간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영화보다는 ‘공간’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방점이 ‘사람’이 아닌 ‘공간’에 조금 더 크게 찍혀 있다는 데에서 출발해 보자.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가 섞인 화자(차미경)는 어릴 적 한국에 온 뒤로 어머니의 나라 일본에 가본 적이 없다. 영화는 인종과 국적, 그리고 정체성과 뿌리로 뒤엉킨 그의 서사를 거점 삼아 세 딸들의 사연을 하나씩 정확하게 엄마의 사연에 꿰어내고 있다. 부산 영도구에 터를 잡고 살아온 엄마는 억척스럽게 남편 없이 세 딸들을 키워냈다. 장녀는 책임감에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못한 채 경제활동에 집중하고, 서울 방송국에서 일하는 둘째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신음해 다시 부산에 내려왔다. 막내는 학업보다 안무를 배우는 일이 좋아 가족 몰래 춤 연습에 몰두한다. 이때 영화가 딸들 각자의 서사를 엄마 이야기의 부속품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교토에서 온 편지>는 엄마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엄마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엄마를 동력 삼아 전개되고는 있으나 모든 딸의 서사를 뚝심 있게 끌고가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영화를 대할 때 누군가의 딸이면서도 때로는 엄마이기도 한 존재가 어떤 환경에 몸담는지 넓게 조망할 기회를 얻는다. 그 지점에서 먼저 <교토에서 온 편지>는 사람이 아닌 공간의 영화로 변모할 수 있다.

비단 서사의 측면뿐 아니라 카메라의 운용 역시 주목해 보자. 공간을 응시하는 사람들, 공간에 녹아들거나 혹은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층층이 쌓인 질감을 살리는 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에 또다시 <교토에서 온 편지>는 공간의 영화가 된다. 사실 <교토에서 온 편지>가 공간을 응시하는 작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영화에서 종종 카메라는 누군가의 시점을 빌려 관객에게 그 사람의 눈에 담긴 모습을 대리해 줄 때도 있지만, 때때로 누군가의 어깨너머에서 그 사람이 바라보는 풍경을 일정 부분 재단하거나 간접적으로 제시해 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카메라로 무엇을 찍어낼 것이며, 공간과 피사체를 응시하는 방법에 무엇이 있을지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이자 산물이다.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이제 <교토에서 온 편지>의 오프닝 숏을 떠올려 보자. 차창 너머 혜진(한선화)이 목도하는 광경이 시점 숏으로 보인다. 결국 풍경을 바라보는 혜진보다도, 혜진이 바라보는 풍경이 우선 아닌가. 그렇지만 영화가 이후 혜진을 따라갈 때의 접근법은 매번 달라진다. 엄마와 말다툼을 한 뒤 밖으로 나와 휴대폰을 바라보는 혜진의 모습은 시점 숏 대신 어깨너머에서 혜진의 손이 프레임 내부에 드러내도록 찍혔다. 이 구간 속 관객들은 혜진의 손놀림과 휴대폰 액정을 응시하는 그의 자세 또한 가늠해 보면서 대상을 응시하는 혜진이 어떤 마음일지 상상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다. 결국 대상을 직접 바라볼지 말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 <교토에서 온 편지>에 시시각각 동력을 불어넣는다.

그렇다면 <교토에서 온 편지>가 개체의 시선을 빌리거나 거치는지, 혹은 빌리지 않은 채 직시하는지 구분하는 일이 왜 중요할까. 그 의의는 <교토에서 온 편지>가 공간에 각자의 기억과 경험을 입히는 데 집중하는 영화라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건 교토가, 서울이, 부산이 또 그 사람이 머무르는 그 공간과 장소가 모두 <교토에서 온 편지>를 거치면 어떻게 재정의되고 그곳에 얽힌 사연이 재구성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는 일이다. 그에 따라 영화는 공간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집중하고, 그들의 리액션도 절대 놓치지 않고 있다.

두 가지 예시만 살펴봐도 그렇다. 교토에 가보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세 딸들은 엄마를 모시고 한걸음에 일본으로 가서 외할머니의 흔적을 찾는다. 이때 화자가 자신의 엄마가 시간을 보냈던 교토의 한 병원에서 나와 지그시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다. 이어 뇌리에 남는 또 하나의 장면. 결국 서울에 상경해 꿈을 이어가는 막내딸 혜주(송지현)가 “서울은 바다가 안 보이나? 바다가 안 보이니까 좀 이상하네”라며 자취방의 창틀에 기대 바깥의 도시 풍경을 바라보는 숏도 함께 떠올려 보자. 똑같은 장면이 동일한 구도로 반복해서 관객과 만났다고 볼 수 있다. 엄마와 딸이 각자 꼭 가고 싶었던 곳에서 그곳을 어떻게 눈에 담고 있는가. 만약 이 구간에서 인물들은 프레임에서 배제한 채로 카메라가 그들의 시점을 빌린 듯 풍경만 제시했다면, <교토에서 온 편지>가 과연 공간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영화가 될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지 않나. 언제 관객들의 자율적인 감상에 맡기고, 언제 인물들과 동화될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핵심이다. 그렇게 <교토에서 온 편지>는 그 시선을 다루는 미묘한 터치의 차이로 인물과 공간을 오가는 온기를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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