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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면성’(假面性)에 대하여, 영화 '마녀'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면성’(假面性)에 대하여, 영화 '마녀'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8.08.2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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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정 감독은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만 보더라도 항상 차기작을 기대케 하는 사람이다. 영화 <마녀>는 그러한 기대치의 연장선에서 단연 호기심을 강하게 끄는 영화다. 언뜻 <마녀>는 박훈정 감독의 이전 작과는 꽤 다른 영화로 보인다. 그의 정신세계, 영화세계는 핏빛이 선연하고 어처구니없이 잔인하며, 대놓고 일삼는 배신 등을 통해 사회의 불안을 다룬 일종의 슬래셔무비를 연상케한다. 이렇게만 보면 <마녀>는 박훈정 감독의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곱씹어볼 대목이 많지 않은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에는 드러난 주제와 숨겨진 맥락이 있는데, <마녀>의 드러난 주제는 달라 보일 수 있으나 숨겨진 맥락은 항상 어떤 속편의 속성을 드러내고는 한다. <마녀>가 <신세계>를 이을 걸작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독 주목하고 싶은 속성은 그렇게 드러난다.
 
엄청난 힘을 가졌지만, 자기 자신의 보호자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게 된 ‘자윤’의 이야기는 매우 극적으로 시작되나 그 과정은 예상가능한 범위 안에 놓인 탓에 평범하다. 자윤은 기억상실증 상태로 발견되어,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아이가 없었던 한 중년 부부의 딸이 된다. 그녀는 억지스러울 정도로 부모에게 살갑고 평범한 여고생의 발랄함과 특유의 천재성을 특이점 없이 발휘한다. 그런 그녀는 결국 분위기 살벌한 한 단체에 발각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게 되고 이 일로부터 자윤의 진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런 설정 속에는 청소년기에 겪을 만한 해묵은 문법이 대수롭지 않게 놓인다. 가족의 불화는 없고 사회적 이슈만 드러난다, 이를테면 소 값의 폭락 등 사회 문제가 가정 속에 틈입할 뿐이다. 사회적 이슈가 이들 가정에 들어오게 될 때 즈음, 외부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후 자윤은 가족, 친구 그리고 일상과의 결별을 고한다. 자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드디어 자윤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마녀>는 이러한 평범한 방식으로 짧은 시나리오의 골격을 마련한다. 모르긴 해도 차기 <마녀>의 속편을 계획했다면 이를 위한 고유의 디테일을 부여한 것이라고 할 만할 정도로 이야기는 장황하고 빤하다. 그 속에서 <마녀>의 자윤은 자신의 일상과 결별한다. 그 일상과의 결별은 자윤이 어떤 원한을 샀고, 그로 인해 부모님과 친구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설정이 더 해지면서 더욱 강하게 강조된다. 그러나 이 조건은 자윤이 이 자신의 능력을 숨겨왔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런 자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세계>의 이자성(이정재)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신세계>의 이자성은 진짜 신분이 들통날까봐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돈독한 정청(황정민)과의 유대관계를 꾸려나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어쩌면 이자성이 <신세계>에서 겪은 일을 지금 <마녀>의 자윤이 겪고 있는지 모른다. <신세계>에서 이자성이 정청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숨겨왔듯이 <마녀>에서도 자윤은 모두에게 자신의 진짜 본성을 숨긴다. 요컨대 박훈정 감독은 자신의 영화 중 이 두 영화에서 만큼은 ‘가면성’이라는 숨어있는 맥락을 반복한다. 영화 <마녀>는 그렇게 ‘가면성’을 요령 있게 재활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가면성이 수면위로 떠오르니, 문제는 ‘자신’을 지키는 일로 직결 된다. <신세계>의 이자성이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마녀>의 자윤 역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된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꽤 비일비재하다. 다시 말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만을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나, 알고보니 본성은 얼굴 속에 숨어 있었다는 식의 전개가 그러하다. 그렇게 박훈정 감독은 영화 속 캐릭터를 자기 성공의 스토리로 뒤바꿔서 그것을 기준으로 인물의 특성을 제조한다.
 
박훈정 감독의 세계관을 자기 자신의 영웅화로까지 확장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요인이 보조를 맞추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자윤이 갖고 있었던 압도적인 ‘초능력’이다. 영화<마녀>는 자윤의 초능력을 감출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하여 어느 상황을 기점으로 자윤이 스스로 이를 드러냈는지 숨겼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이는 이 영화의 반전 스토리가 된다. 그리고 자윤이 집요하게 추구했던 머리 속 종양제거는 영화 전체의 이야기 시작점이 되어 상황의 전략이 모두 그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자윤은 결국 일정한 자기 결론에 도달한다. 그 결론을 통해 그녀는 현실을 직시한다. 아니, 이미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자기로의 침잠, 자기 자신을 철저히 숨김으로써만이 자기를 강력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그 사실. <마녀>는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를 숨기려는 인간의 가면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영화 속 자윤의 얼굴은 그 힘의 결과물 들이다.  
 
그리고 이 가면성은 비겁하다고 할 수 있는 은폐전략이 심해질수록 관객의 카타르시스는 배가 된다. 그래서 박훈정 감독은 배우 얼굴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가 바라보는 얼굴은 본 모습을 숨겨줄 가면이면서 결코 벗겨낼 수 없는 가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가면성이란 인간의 정신적 병리현상이 아니라 인간적 전략임을 보여준다. 모두 가지고 있지만 결코 벗겨낼 수 없는 얼굴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를 뒤섞어 늘 모두에게 보여 주려하기 때문이다. 얼굴과 가면성의 두 단어가 영화<마녀>를 보며 계속 떠오르는 이유는 비단 신인배우 김다미의 얼굴 이미지 때문만은 아닌, 박훈정 감독의 얼굴에 대한 철학이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하지만 나는 <마녀>속 자윤의 얼굴에서 그런 가면성이 폭로될 때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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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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