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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저 희미한 기미- <버닝>으로 이창동 읽기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저 희미한 기미- <버닝>으로 이창동 읽기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8.11.0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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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미로서 영화

이창동의 영화는 개인을 둘러싼 공동체의 부도덕한 얼룩을 민낯으로 만나게 한다. 그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지는 인물들은 동시대를 살아온 우리네 삶을 이채롭게 시뮬레이션 한다. 그들은 피해와 소외의 나락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상처를 입거나 그런 흔적이 역력한 이를 이웃으로 가진다. 그들을 통해 이창동은 자신에게 유익한 태도와 행위를 넘어 공동체 윤리에 합당한 삶의 형태를 탐문하곤 했다. 그래서 이창동의 인물 상당수는 유달리 죄의식에 시달리거나 순수한 세계로부터 허물어져버린 자신의 처지에 절망한다. 때 묻지 않은 공감의 방식으로 영악한 공동체가 세련되게 주문해오는 공감의 포즈를 물리치기도 한다. 때론 수치와 염치 사이에서 저만의 길을 찾는 중에 적당한 타락으로 안녕을 유지하는 세계를 일갈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이창동의 도덕은 ‘정의’에의 지향이라기보다는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타자에 대한 개인의 의무, 혹은 인간다운 입장에 가까웠다.

<버닝>이 당혹스러웠던 이유는, 이창동이 그간 탁마해온 자신만의 영화 세계 상당부분을 불태워버린 후의 ‘모색’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버닝>은 맥거핀과 메타포로 갈라질 수 있는 설정과 소재들이 인과적 불협화음을 분출하는 영화다. 좀처럼 해명되지 않는 인물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서로의 주석으로 기능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종수(유아인 분)는 파주에서 출발해 후암동과 서래마을을 오가며 견디기 힘든 욕망의 삼각형 안에 포로가 된다. 그는 중개자 벤을 통해 해미로 뻗어가는 자기 욕망을 검열하며 ‘성장/반성장’의 기로에 선다. 그곳은 확률 높은 ‘리틀 헝거’의 삶과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레이트 헝거’의 삶 사이의 간극을 건네 보기 적당한 자리다. 그렇게 종수는 해미(전종서 분)와 벤(스티븐 연 분)이라는 다른 색깔의 수수께끼를 풀면서 우리를 모호함으로 점철된 해석 게임으로 끌어들인다.

이를테면 해미의 고양이는 존재하는 것인지, 벤은 도대체 누구인지, 해미와 벤은 어떤 관계인지, 우리는 완벽하게 재구할 수 없다. 종수에게 전화를 걸고는 침묵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해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종수와의 사연은 모두 사실인지도 해명할 수 없다. 해미가 어렸을 때 빠졌다는 집 앞 우물은 실존했던 것인지, 갑자기 해미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지는 끝까지 의문이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 재미를 좇는 벤이 두 달에 한번쯤 태운다는 비닐하우스가 극악한 여성편력에 대한 메타포는 아닌지, 해미도 피해를 입은 여성 중 한 명이 된 건 아닌지도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버닝>이 의도하는 모호성의 전략은 이창동의 계산된 팬터마임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의뭉스러운 설정의 끝에 놓인 어떤 진실을 완벽히 재구할 필요는 없다. 실체가 없다는 걸 잊어가면서 답이 없는 해석 게임을 각자의 관점으로 즐기면 된다.

그처럼 <버닝>은 과거의 관성을 떠올릴 때, 매우 이창동스럽지 않은 영화다. 기이한 영화이며 더 정확히는 어떤 ‘기미의 영화’다. ‘기미의 영화’라는 언명은 <버닝>이 의미화 가능성을 내포한 전조들로 쌓은 집이기 때문이다. 인물을 둘러싼 진실의 낌새들을 끝까지 개방해 놓고는 불가능한 뒷수습을 우리에게 전가하는 연출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글은 그러한 연출 방식을 그대로 받아 <버닝>을 입구 삼아 이창동 영화세계의 일단을 이루는 인물과 모티프, 소재와 설정, 시공간적 배경과 시각적 약호화 방식, 셔례이드의 언어성 등을 하나의 맥락으로 단선화하지 않고 음미해보고자 한다. 그러한 기획 아래에서 보면 이창동의 기존 영화에도 흥미로운 ‘기미’들이 있다. 이 글은 ‘기미로서 비평’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열어가기 전에 동의를 구하고픈 문장이 있다. “예술가는 비평가에 비하면 이차적 요소에 불과하다”(1)라는 자끄 엘륄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카운터 시네마나 포스트 미니멀리즘 예술처럼 비평가의 담론이 없으면 ‘예술’로 존재하기 힘든 작품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엘륄은 모두가 다 아는 말을 새삼스럽게 한다는 듯이 저 흥미로운 문장을 적었다. 엘륄의 저의를 지금도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저 언술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서 <버닝>이 구축한 모호한 의미망을 진취적으로 더듬어 보고자 한다. <버닝>의 낌새들을 입구 삼아 기존 이창동 영화를 재인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이창동 영화에 점점이 박힌 내적 요소들 간의 연결 가능한 배치를 시도해 보겠다. 이 평범치 않은 브리콜라주 작업을 통해 저마다의 의미를 머금은 채 흩어져 있는 이창동의 기표들이 합당한 목소리를 얻을 수 있길 희망한다. 의도대로 글이 풀어진다면, 탄탄한 인과적 구조물로 여겼던 기존 이창동 영화의 심층에서 어떤 복잡성(complexity)의 계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 사회의 얼룩: 그들이 묻힌 것

빚과 빛

<버닝>이 잡아낸 공간과 인물들의 윤곽은 자연광을 따라 어두워지고 밝아진다. 20대의 이야기를 인위적인 판타지로 데려가지 않으려는 의도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단언컨대 <버닝>은 희미한 빛이 주는 뉘앙스에 기대어 이야기를 열고 닫은 작품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기미도 남산타워에서 반사되어 해미의 창문 안으로 기어들어온 햇빛이다. 종수는 운이 좋은 날에나 하루에 잠깐 볼 수 있다는 그 빛을 해미와의 갑작스러운 섹스 도중 목격한다.

종수가 목격한 빛의 최초 굴절면은 서울의 상징 남산타워다. 후암동 다가구주택 작은 꼭대기 방에 자취하는 해미는 빚에 허덕이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서울의 상징으로 우뚝한 남산타워가 반사한 이 빛이 그 방 안의 윤곽을 아주 잠깐 간섭하다 그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종수에게 해미는 오랜만에 만난 비밀스러운 고향 친구다. 예나지금이나 그들은 서울의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녀는 종수와의 섹스 이후 아프리카로 떠나고,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뒤에는 벤을 소개해준 후 홀연히 사라진다. 종수가 섹스 도중 본 희미한 빛살처럼 그녀는 존재했지만, 곧이어 ‘떠남’과 ‘사라짐’의 기표가 된다. 그리고 종수는 남산타워의 희미한 빛으로부터 분노를 물려받는다. 이 분노는 서울의 중심부에서 망실되어버린, 어쩌면 불타 사라진 자를 둘러싼 의혹의 자식이다.

그녀가 머물던 후암동의 어지러운 방은 ‘그냥 배가 고픈 자’, 곧 리틀 헝거의 흔적을 안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손짓한 아프리카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로 설명되는 그레이트 헝거를 향한 묵시의 땅이(라고 믿어진)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레이트 헝거로 가는 구도의 길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는 벤과 종수 사이, 서래마을과 후암동 사이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곳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한 벤의 포르쉐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서 더 낡아 보이는 종수의 낡은 트럭 사이일 수 있다. 정확무오하게 계측되는 ‘빚’의 세계와 믿음과 의지의 구조 안에서만 희미하게 실체를 갖는 ‘빛’의 세계 사이이기도 하다.

이창동이 중요하게 활용해 온 빛의 세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일단 <버닝>은 해뜰녘과 해질녘 즈음, 햇빛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며 세계의 인상을 변주시키는 시간대에 완성된 영화다. 자연이 선물한 완전한 미장센에 의존하는 영화다. 빛과 어둠이 서로를 밀어대는 시간대에, 의도한 전언과 계산되지 않은 느낌이 교섭하는 것을 지켜보게 하는 영화다. 이는 이창동의 작은 변화이기도 하다. 그간 그의 영화는 정밀하게 구축한 의미망을 효과적으로 감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빛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왔다.

예컨대 <박하사탕>의 오프닝은 긴 터널 속 암전을 뚫고 지나가는 기차로부터 시작된다. 멀리서 희미한 빛이 다가오는 듯하지만, 이 영화는 곧이어 뒤로 가기 시작한다. 기차가 헤쳐 나가려 했던 그 어둠은 <살인의 추억>에서 진범이라 믿었던 박현규(박해일 분)가 사라진 불온한 역사의 목구멍과 진배없다. 그러나 <박하사탕>은 그 어둠을 완전히 떨치는 게 불가능해진 영호(설경구 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들꽃 피는 철교 아래 강가에서 잠깐 마주쳤던 잠깐의 빛에 닿아가려는 것이다. 어쩌면 <박하사탕>은 애써 빠져나간 그 터널 속으로 다시 기차를 집어넣으며 최초의 빛과 처음 묻힌 어둠을 대조시키려는 기획이다.

잠깐 지나가는 <박하사탕> 속 한 장면. 영호는 모텔에서 외도를 하던 아내 홍자(김여진 분)를 붙잡아 집으로 돌려보낸 후, 곧바로 여직원 미스 리(서정 분)와 어두운 차 안에서 섹스를 한다. 섹스가 절정에 이를 무렵, 그들이 머무는 차 옆으로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기차에서 쏟아진 빛이 영호의 얼굴을 훑으며 빠르게 지나간다. 미스 리(서정 분)는 그 빛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만, 영호는 그 빛을 피할 틈이 없다. 그의 얼굴에 내려앉은 어둠의 존재를 일깨우던 이 잠깐의 시선. 희미하게 지나쳐가지만 어떤 기미를 남기는 이 빛은 1980년 5월 이전과 이후의 삶을 아프게 대조시킨다. 그는 그해 5월의 어느 날, 광주에서 너무 큰 빚을 졌다.

<오아시스>에서 공주(문소리 분)의 강렬한 첫 등장도 빛을 반사하는 놀이와 함께였다. 공주만 남겨두고 가족이 떠나자 고독으로 도배를 한 듯한 낡은 아파트에서 그녀는 작은 손거울을 들고 시간을 보낸다. 그녀의 취미는 거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대낮의 빛을 집안 곳곳에 반사시키는 놀이다. 이때 거울에 반사된 빛은 그녀의 상상 속에서 하얀 비둘기로 날아다닌다. 영화 중반 이후 손거울이 깨져버리지만, 그녀는 조각난 거울을 가지고도 작은 나비의 날개짓을 만들어낸다. 이런 상상적 놀이의 순간에 그녀는 평범한 사람의 발성으로 정갈한 허밍을 한다. 이 슬픈 퇴행적 판타지의 순간은, 공주가 유폐된 절망의 자리를 심미적으로 증언한다.

‘Secret Sunshine’이라는 영문제목을 가진 <밀양>의 빛은 구원의 여망을 안팎에서 수소문해가는 자의 고통 곁을 배회한다. 오프닝신에서 밀양으로 진입하던 차가 멈추자 신애(전도연 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때 아들 준(선정엽 분)은 앞유리창을 통해 여름 햇볕이 부서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초점 쇼트는 영화 초중반, 준의 죽음을 확인하러 온 신애의 시선을 통해 다시 한 번 실천된다. 죽은 아들의 자리에서 아들에게 와 닿던 선명하고 단호한 빛을 대면하는 것이다. 영화 후반 강장로를 유혹해 야외로 나간 장면도 유사한 구도로 ‘반복’의 표지를 갖는다. 그러나 이때의 하늘빛은 의뭉스러운 그늘과 연접해 있다. 그렇다면 <밀양>의 빛은 이주와 정주, 삶과 죽음, 가해와 피해, 고통과 구원의 문제를 놓고 인간과 절대자가 나누는 비밀스러운 대화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마땅히 인간(특히 ‘피해자’)의 몫이어야 할 용서의 권한까지 빼앗은 신의 불가해성을 환기시키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신애는 빛에 대한 대화를 통해 그곳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진입했었다. 예컨대 피아노학원 개업과 함께 떡을 들고 옷가게를 찾는 그녀는 그곳 사장에게 빛이 잘 들도록 인테리어를 바꾸라고 말한다. 아들의 ‘유괴-죽음’을 경험한 후에는 약국의 약사로부터 사소한 햇빛에도 신의 뜻이 숨어 있다는 말을 듣는다.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그들 장면은 희미한 노을빛 속에서 팬터마임을 시작하는 해미를 해석하는 데 작은 단서가 된다.

이처럼 이창동은 절망으로 침잠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킨 후, 그들 혹은 주변인물의 내면에 쌓여가는 ‘빚’과 ‘빛’을 바라보게 했다. 이때 우리는 그들이 베푸는 말과 행위의 윤곽을 비추는 빛이 어디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지 지켜보곤 했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버닝>은 가장 단순한 의미의 빚과 가장 우연적인 빛을 교차시킨 후 독해의 주도권을 우리에게 이양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버지 부재

이창동 영화는 아버지의 양면성과 아버지를 향한 모순적 시선을 종종 활용한다. <버닝>에서 종수는 젊은 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를 궁금해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벤의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버닝>이 그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별로 궁금하지 않은 종수의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흘린다. 그는 공무원에게 폭력을 휘둘러 구속 재판을 받으면서도 반성문 쓰는 일조차 거부한다. 최후 변론의 기회마저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침묵으로 대신한다.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그가 젊었을 적 주변의 조언대로 강남에 땅이라도 사뒀다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종수에게도 여유로운 삶을 물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식대로의 삶을 고수했고 지금은 피해자와의 합의도 거부하고 있다. 지금 종수는 그를 받아들이지도 외면하지도 못한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동(한석규 분)은 술에 찌들어 사는 둘째 형에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 “형님, 우리 식구들 전부 같이 모여 살면 안 될까. 옛날같이. 아버지 계실 때 좋았잖아.”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하던 시절은 되돌아오지 않고 일산이 신도시로 탈바꿈되는 속도만 빨라진다. 그에게는 이제 새로운 아버지 배태곤(문성근 분)이 있다. 배태곤은 부모 형제한테도 버림받은 후 서울바닥에 굴러 들어와 지금은 건물 재개발권으로 하탕을 노리는 잔혹한 조직 폭력배 보스다.

<초록물고기> 마지막 시퀀스를 보면, 막동의 가족은 버드나무집을 개조해 식당을 차린다. 가족이 모두 모여 불완전한대로 평화로운 미래를 설계한 것처럼 보인다. 막동의 꿈이 스민 과거가 기어이 현실화 된 것이다. 그러나 두 명의 아버지 사이에서 길을 찾지 못했던 막동은 그 시퀀스 이전에 이미 숨을 거둔다. 사회의 얼룩에서 흘러나온 피를 손에 묻힌 막동은 폭력과 위기로 물든 땅 일산의 희생양이 된다. 이 같은 이창동식 결말은 이후 한국영화에 적잖은 영향을 줬다고 믿는다. 사실상 <똥파리>의 마지막 시퀀스도 <초록물고기>의 정확한 반복이지 않는가.

그런 식으로 이창동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아버지가 부재한 현실을 영화적으로 활용해 왔다. <시>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오는 종욱(이다윗 분)과 희진(한수영 분)은 둘 다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아왔다. 종욱의 가해 이유와 희진의 피해 이유를 아버지의 부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에서 불거진 갈등 상황을 봉합하는 주체가 일군의 아버지들이란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희진을 집단 성폭행하는 데 가담한 학생들의 아버지. 그들은 공동체의 문제로 불거진 ‘지속적인 집단 성폭행-자살’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굳이 양면적 태도를 숨기지 않는다. 문화원에서 시를 배우던 미자(윤정희 분)는 그 불편한 아버지들의 뒷모습과 아버지 없이 죽어간 희진의 정면 사진을 ‘본다’. ‘아네스의 기도’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이창동은 부조리한 사건을 제멋대로 소화하는 공동체의 비윤리를 응시하게 하면서 아버지 시대의 얼룩, 혹은 아버지라는 얼룩을 사용하곤 한다. 상대적으로 종수의 아버지는 극단적인 얼룩처럼 그려지진 않는다. 그러나 그가 종수에게 물려준 것이 가난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대적 박탈감과 연결된 참을 수 없는 분노, 그리고 그것의 실천적 기표로서 칼. 어쩌면 이창동은 무기력한 종수의 아버지를 경유해 우리 시대 20대가 견뎌온 양면적 세계와 모순적 상황을 풀어내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속물과 부도덕

이창동은 우리 사회의 평범한 풍경 안에 자리한 여러 모양의 속물적 인간을 스케치해 왔다. 그들 중 누군가는 부도덕한 사회의 얼룩을 묻히고는 문제적 인물이 된다. 그러나 <버닝>의 세계는 속물적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인물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사회에 명백한 해악을 끼치는 부도덕한 인물이나 집단도 가시화되지 않는다. 단지 인물 간에 뒤집을 수 없는 경제적 낙차가 전시될 뿐, 굳이 비난받을 만한 구석을 갖지 않는다.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분명하고 그로부터 생겨난 계급 질서가 감지되지만 이는 우리네 일상의 보편적 조건일 뿐이다. 물론 <버닝>의 몇몇 신들은 불평등을 만회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20대의 자의식을 입회시킨다. 그러나 해미에 대한 욕망을 차치하고 보면, 위를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살아가는 종수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재미를 찾는 벤과 어울리지 못할 이유도 없다.

아프리카에서 이제 막 돌아온 벤, 해미와 술자리를 마친 종수가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종수 아버지의 낡은 트럭 뒤에 벤의 포르쉐가 멈춰 서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 쇼트에서 해미의 좁고 어둡고 지저분한 방과 벤의 넓고 밝고 깨끗한 집 사이의 낙차가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여기서 파생하는 건 <오아시스> 초반, 이제 막 출소한 종두(설경구 분)의 옷차림에서 읽히던 어떤 이질감과 유사하다. 그때 종두는 추운 겨울날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팔 차림으로 버스정류장에 선 사람들 틈에서 담배를 찾았다. 그러나 낡은 트럭과 포르쉐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 곧바로 비난의 동력이 될 순 없다. 권태를 이기기 위한 벤의 고급스러운 파티도 정죄 받을 이유는 없다. 벤의 유일한 문제적 행동은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다닌다는 것인데, 이는 말로 전달되었을 뿐이지 영화 속에서 가시화된 적이 없다.

공동체 내에서 소외의 고통으로 침잠해가는 개인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그러니까 <버닝>엔 이창동이 늘 되물어 왔던 그 고민에 대한 입장이 뚜렷하지 않다. 그래서 속물적 인간과 부도덕한 관계망에 대한 올곧은 시선도 생략된다. 기존 이창동 영화 세계의 일단을 이루는 속물적 인간들의 면면을 떠올려 보자. 인정 넘치고 서글서글한 <밀양>의 종찬(송강호 분)은 적당한 속물성을 처세의 수단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이제 막 개업한 신애의 피아노학원에 그녀가 받지도 않은 상장을 걸어놓는다. 서울에서 온 유명 피아니스트라는 입소문의 힘을 기대한 것이다. 그를 향해 별다른 비판적 시선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우리 사회 30, 40대의 평균치처럼 그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초록물고기>에도 일산의 밤을 지배하는 배태곤과 김양길(명계남 분)같은 인물만 있는 게 아니다. 그곳의 낮 풍경을 보면, 신호위반을 무마하기 위해 경찰에게 오천원을 찔러 넣는 셋째 형(장진영 분)과 그에게서 만원을 받고는 오천원을 거슬러주지 않은 채 도망치는 경찰이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더 심각한 해악을 불러오는 속물들도 있다. <오아시스>에는 자신이 저지른 음주 뺑소니 사건을 모자란 동생 종두에게 뒤집어씌운 종일(안내상 분)과 그의 가족이 나온다. 심지어 그들 가족은 종두가 출소하기 전, 그에게 주소도 가르쳐주지 않고 외딴 곳으로 이사해 버린다. 가족으로부터도 버려진 인물은 종두만이 아니다. 공주 가족의 경우 더욱 영악한 방법으로 그녀를 외면한다. 그들은 중증 뇌성마비에 걸린 공주의 명의를 빌려 장애인 아파트를 마련해 이사한다. 그런데 정작 공주는 데려가지 않는다. 그녀의 가족에겐 공주의 장애가 필요했을 뿐, 장애를 입은 공주는 버겁고 귀찮은 짐짝일 뿐이다.

결국 <버닝>은 이창동의 기존 관심사를 벗어난 영화다. 벤을 둘러싼 의혹을 이야기하고 종수의 커가는 의심을 묘사하지만 그로부터 윤리적 입장에 대한 통찰이 주어지진 않는다. 종수의 분노는 벤이 해악적이거나 벤을 둘러싼 상류사회가 딱히 부도덕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종수의 상상에 기초한 살인행위는 기존 이창동식 전언을 내포하지 않는다. 소외된 20대의 내면에 적층된 분노의 표출이라지만, 종수의 손에 묻은 벤의 피는 사회의 얼룩에 대한 통찰을 견인하지 못한다.

 

2. 보존되지 않은 순수: 되감을 수 없는 시간

사진의 증언과 훼손된 사람들

이창동의 영화 세계는 초점이 맞지 않는 희미한 흑백사진으로부터 출발한다. 부분적으로 ‘보존/훼손’된 우리들의 기억 속 장면인양 흑백사진 안에서 어린 막동이는 또렷하지 않은 미소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후 막동이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옛 사진들이 나열되다가 큰 버드나무를 끼고 있는 그의 고향집 사진이 등장한다. 그 집은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이제는 화석화 된 평화의 한때를 증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초록물고기>는 이 사진과 비슷한 구도로 막동이의 고향집을 몇 번 더 잡아낸다. 그때마다 고향집을 포위해 들어오는 대단지 아파트와 건물들은 ‘보존하고픈 것’과 ‘훼손되는 것’ 사이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시간을 이끌고 높아진다.

그렇게 보면 오프닝 씬 속 버드나무집 사진도 어떤 기미에 대한 지표다. 일차적으로는 신도시로 탈바꿈 중인 일산의 한복판에서 마음의 보금자리마저 잃게 되는 막동이의 삶에 대한 기미를 담아낸다. 배태곤은 국가권력의 개발·이주 계획과 결탁한 당대 천민자본주의의 욕망을 미시적으로 반사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충실했을 뿐인 막동이는 결국 배태곤이 묻혀야 할 피에 대신 젖게 된다. 우리 사회의 공공연한 환부에 대한 선홍빛 기미는 그렇게 주어진다. 이창동 영화는 거기서 출발해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부채의식을 부과하는 길을 개척해왔다. 그래서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서 엔딩 크레딧과 함께 울려 퍼지는 음악은 순수로부터 멀어져 온 우리 모두를 위한 레퀴엠처럼 들린다.

<박하사탕>에는 낯선 부조리극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아이러니한 신들이 있다. 이율배반적 요소들의 중첩을 통해 나빠진 인물들의 더 나빠져 가는 상태를 알리는 장면들. 영호와 홍자 부부의 집들이 장면도 그 중 하나다. 영호의 지인들이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하려는 순간, 최근 남편에게 불륜행각을 들킨 홍자(김여진 분)가 기도를 하자고 한다. 이와 유사한 장면은 그보다 더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간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날 영호는 어렵게 자기를 찾아온 순임에게 의도된 언행으로 상처를 입힌다. 그렇게 첫사랑의 성사 가능성을 스스로에게서 박탈한 후 영호는 자신을 좋아하는 홍자와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려 한다. 섹스가 시작되기 직전 홍자는 영호에게 기도에의 동참을 요청하며 사도신경을 왼다. 이들 신에는 되감을 수 없는 시간 앞에 무력한 인물들이 있다. 순수로부터 멀어질 것에 대한 자각과 함께 불거지는 히스테리가 있다.

그렇다면 <박하사탕>은 순수한 얼굴로 대면하던 ‘우리의 시간’을 수소문해가는 영화다. 타락한 세계의 구성원이 되기 이전 단계로 되돌아가고픈 욕망이 담화의 시간을 재조립하는 이야기이다. 1980년 5월을 통과한 이후의 영호는 이미 훼손되어버린 자기 모습에 절망하면서, 순임을 자기로부터 먼 곳으로 떼어 놓는다. 그래서 영호는 경찰이 된 후 순임의 마음이 담긴 사진기를 받지 않는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죽음 직전의 순임으로부터 사진기를 다시 돌려받을 때, 이번엔 오열한다. 그의 눈물이 터진 시점은 그 사진기 안에 인화되지 못한 필름이 담겨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다. 간직할 수 없었던 세계, 내 것일 수 없었던 사람과 시간의 잠재태. 그렇게 <박하사탕>은 보존되지 않는 순수를 아프게 회상하는 영화다.

영호의 눈물은 이창동 영화의 일관된 태도에 가닿는다. <시>에서 미자는 희진 엄마로부터 합의 의사를 받아내기 위해 등 떠밀리듯 그녀를 찾아간다. 미자가 희진 엄마의 집에서 본 사진들은 죽은 자들이 살았던 시절을 정갈하게 증언한다. 이후 미자는 평화로운 밭과 개울을 끼고서 새소리와 예쁜 들꽃이 어우러진 길을 지나쳐 간다. 나무 그림자 아래로 떨어져 있는 살구를 주워 맛을 본 후, 떠오른 시상을 따라 시 한 구절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산책로는 회복할 수 없는 비극으로 난 길이기도 하다. 죽은 딸로 인해 살아도 죽은 것 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는 여자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떨어져 으깨진 살구처럼 희진은 죽었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 누군가의 시간은 실현될 수 없는 가능성으로만 남았다.

이처럼 이창동은 보존할 수 없는 시간, 혹은 이미 훼손된 사람의 시간을 사진, 혹은 사진기라는 오브제로 감각시킨다. 어떤 장면들은 존재 자체로 우리게 윤리적 질문을 파생하고, 곧바로 주제의식을 암시하는 기미가 된다. <버닝>에서 해미를 아프리카로 떠나보낸 종수는 어쩔 수 없이 파주로 간다. 그를 맞이한 것은 어두운 고향집 벽면에 걸린 아버지와 자기 자신이 있는 사진들, 곧 그의 지금을 만든 한때의 사연들이다. 아버지는 이미 그곳 축사와 함께 허물어져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종수도 아버지의 전철을 이미 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축사에 홀로 남겨졌다가 어디론가 팔려간 송아지의 마지막 표정을 해미의 실종에 대한 메타포로 읽어야할지, 종수의 마지막 실천에 대한 기미로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종수는 알몸이 되어 되돌릴 수 없는 절망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리틀 헝거들 사이에서 그레이트 헝거를 갈구하던 해미를 곁에 둘 수 없는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와(의) 전화

우리는 이창동의 영화에 등장한 엄마들의 심리궤적을 통해 주제의식에 이를 수 있다. 죽거나 죽음에 준하는 나락으로 침잠해가는 인물을 두고 그의 엄마가 취하는 다른 스탠스에 이창동의 전언이 있는 것이다. <초록물고기> 속 엄마는 서사에 미미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엄마의 자리’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유의미한 해석에 도달할 수 있다. 영화 말미, 김양길을 죽인 후 찾아온 공포를 이기지 못한 막동이가 공중전화로 버드나무 집에 전화를 건다. 엄마가 받아야 할 전화를 뇌성마비에 시달려 온 큰 형이 받는다. 큰 형과의 통화는 돌이킬 수 없는 세계와의 대면이다. 무서운 것도 많고 머리도 엄마가 감겨주고 잘 때도 엄마 옆에서 자야 하는 큰 형은 곧바로 막동이가 잃어버린 한 시절을 상기시킨다. 피범벅이 된 막동이가 수화기를 들고 칭얼댈 때, 따뜻한 엄마 옆자리로부터 그가 얼마나 멀어졌는지가 상기된다. 죽기 전, 엄마의 목소리가 허락되지 않음으로써 그는 되돌아가려던 세계로부터 미리 결락된다. 항상 “너 꿈이 뭐야?”라고 되묻던 배태곤에겐 대답할 수 없었던 언어들도 거기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그 언어들은 <초록물고기>의 주제의식으로 가는 첩경이다.

<오아시스>에서 갓 출소한 아들 종두를 2년 6개월 만에 만난 엄마의 말은 전혀 다른 스탠스를 가진다. 화장실에 간 종두가 잠시 시야에서 사라지자 엄나는 “쟤 이제 어디서 재운다니?”라고 말한다. 그 순간 우리는 몸과 마음의 정처를 모두 잃은 한 사내를 보게 된다. 모두에게 오해받는 삶, 누구에게도 이해를 구할 수 없는 사랑은 그때부터 예견된 것이다. <밀양>은 아들을 잃은 엄마의 뒷모습, 곧 가장 가혹한 피해의 흔적을 좇게 하는 영화다. 그녀는 아들을 유괴한 도섭으로부터 받은 전화를 아들의 사후에도 빈번하게 받는다. 그것은 아들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자책이 만든 환청이다. 그래서 신애가 자가 구원을 위한 마지막 계기마저 빼앗긴 후 보이는 분노어린 태도는 <버닝>에서 종수가 보인 그것보다 설득력이 크다.

<시>에서 미자는 가해 학생 부모에게 요구된 합의금 500만원을 구하지 못한다. 그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실제로 돈이 없다. 둘째, 가해자의 부모끼리 정한 금액으로 이 끔찍한 사건을 퉁친다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크다. 셋째, 먼 곳에 사는 딸이 맡긴 손자를 잘못 키웠다는 자책감에 돈이 있을지도 모르는 딸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 <시>의 주제의식은 두 번째 이유를 선택할 때 가장 고양된 행위의 철학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세 번째 이유를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미자는 치매 진단을 받고 나서도 딸에게 그 사실을 숨기는 엄마였다. 영화 종반부에 말로만 듣던 미자의 딸이 부산에서 올라온다. 그런데 미자는 종욱과 머물던 집에 없다. 문화원에도 꽃과 시만 남긴 채 출석하지 않는다. 손자 종욱과의 관계에서보면 엄마 역할로부터의 실종이고, 딸과의 관계에서 보면 엄마라는 현존에서의 탈주다. 이후 낭독되는 ‘아네스의 기도’는 미자의 목소리로 시작되어 희진의 목소리로 옮겨간다. 이 시를 두 명의 유령으로부터 읊어지는 것으로 읽는다면 우린 또 다른 주제의식을 만날 수 있다.

상상 속 순수와 연접한 엄마(<초록물고기>), 자식 하나를 지운 엄마(<오아시스>), 출구없는 절망에 빠진 엄마(<밀양>), 윤리적 사유를 주문하는 엄마(<시>)를 만났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버닝>의 엄마는 기괴하다 못해 해괴하다. 종수는 전화를 걸어놓고는 아무 말도 않는 상대방을 궁금해 왔다. 그런 전화를 벌써 여러 번 받았다. 그런데 영화 종반, 그 전화의 주인이 엄마였을 수도 있다는 단서가 주어진다(물론 아닐 수도 있다).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16년의 세월을 거슬러 만나자고 한다. 그런데 종수와 엄마는 그 긴 세월을 견디다 만난 모자 사이처럼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자신이 일하는 백화점까지 오백만원을 갚으라고 찾아온 빚쟁이 이야기를 하고는 젊었더라면 장기라도 팔았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은 그녀에게 종수는 어떤 존재일까. ‘젊은 네가 장기라도 팔아서 오백만원 정도는 책임져줘야 하지 않겠니’라는 말을 하려고 이 자리를 만든 것일까. 이 해괴한 장면을 다 해명하기도 전에 종수 엄마는카톡 알람소리에 휴대폰을 켜고는 상대가 보내온 이모티콘을 즐긴다. 우리는 그런 엄마에게 종수가 어떤 의미로 보존되어 왔을지 생각하며 서글퍼진다. “제가 해 드릴게요”라는 말을 하는 종수의 표정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범한 우리들의 믿음에 따르면, 인격은 결코 대상화될 수 없다. 하물며 엄마에게 아들이란 존재는 가장 숭고한 ‘인식작용’ 안에서 통합되는 존재다. 아들로 불리는 인격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정초할 수 없는’ 잉여(Plus)를 남기는 법이다. 그러나 종수 엄마는 지난 16년간 남산타워의 가장 더러운 유리창에서 반사된 햇빛을 오래 쬔 것처럼 보인다. 이 해괴한 신이 종수를 깨우던 전화의 마지막 표정이란 사실에 우리는 <버닝>이 하고팠던 말 중 하나를 건질 수 있게 된다. 확실한 것은, 16년 전 어린 종수가 엄마 옷을 태울 때, 엄마는 종수라는 이름에 가닿는 모든 감정을 태웠다는 것이다.

 

3. 살아남은 사람: 자신에 대한 적의

자기 처벌과 애도

이창동 영화의 요체는 윤리적 애도를 에둘러 요청하는 쇼트들에 있다. 애도가 완수될 수 없음을 알고서도 그 열망을 놓지 않는 몇몇 인물은 우리에게 세공된 윤리적 논제를 풀어놓는다. <버닝>이 이창동스럽지 않은 영화라고 느낀 결정적 이유 중 하나도 우리의 자의식 정서를 가다듬는 날카로운 질문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버닝>은 애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집착을 가져다 놓고, 집착이 키운 의혹의 힘으로 서사를 밀고 간다. 의혹은 확신에 찬 의심이 되고 곧이어 분노로 폭발한다. 그런데 분노가 폭발하는 자리에 공동체의 윤리적 안녕을 묻는 이창동식 날인은 없다.

<초록물고기>는 죽은 막동이가 생전에 꿨던 소박한 꿈이 실현된 자리에 그가 사랑했던 미애를 데려다 놓는다. 영화 마지막 시퀀스를 말하는 중이다. 배태곤의 아기를 임신한 미애(심혜진 분)는 막동이 가족이 버드나무집을 개조해 차린 식당에 와 배태곤과 식사를 한다.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식당 밖 풍경을 둘러보다가 막동이로부터 건네받은 사진 속 버드나무집이 바로 여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애는 막동이와 서로를 향한 감정을 확인한 바 있지만, 포악한 배태곤의 손에서 달아나지 못했고, 이제는 떠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배태곤이 막동이를 죽이는 순간을 목격한 그녀는, 죽어가던 막동이의 자신을 향한 눈빛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 버드나무집은 막동이와 나눈 모든 시간을 단박에 환기시키는 박제화된 장소일 것이다. 이제는 다가갈 수 없는 먼 곳이면서 언제든 벗어날 수 없는 과거를 동시에 감각시키는 아우라의 거처.(2) 미애의 내면에 삼켜진 막동이는 그렇게 그녀의 비밀스러운 기억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박하사탕>의 회고적 시선이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시점은, 1999년 구입한 총을 자기 목구멍에 쑤셔 박은 때부터다. 죽이고 싶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그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1980년 5월에 군인신분으로 광주에 투입된 후, 실수로 한 소녀를 죽인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처벌의 길에 들어선다. 폭압적 시대를 개인사에 들이면서 그가 타락해갈 때 우리는 그 과정에 작동하는 그의 의지를 읽게 된다. 발에 총상을 입은 영호에게 광주의 소녀가 다가오는 신은 매우 인상적이다. 어두운 밤, 저편에서 그에게 다가오던 그녀는 순임이었다. 그러나 어두운 그늘을 통과한 이후 그녀는 모르는 소녀로 변환된다. 광주로 내려오기 전 영호는 반합에 모아뒀던 순임이 보낸 박하사탕을 쏟았고 부대로 면회를 온 순임을 대면할 수 없었다. 사후적으로 보면, 순임의 박하사탕이 동료들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장면은 고통스러운 기미였다. 소녀가 자기 총에 죽은 순간, 영호는 더 이상 순임을 품어선 안 된다고 다짐한 것처럼 보인다. 순수했던 시절은 끝났고, 이제는 자기 처벌과 학대를 통해 감당해야 할 불가능한 애도의 시간이 남았다.

스토리 시간에서는 맨 처음이지만, 담화의 시간에서는 맨 마지막에 배치된 장면이 있다. 1979년 가을, 영호와 순임은 철교 아래 강가에서 첫사랑의 떨림으로 조우한다. 그런데 이 신의 맨 끝, 곧 영화의 맨 마지막 프리즈 프레임은 언캐니하다. 담화의 시간과 함께 우리의 해석에의 의지까지 홀드하는 신비한 사진적 순간. 굳이 설명하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들꽃 옆에 누운 영호는 기차가 지나가는 철교를 올려다본다. 그때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볼을 타고 굴러 떨어진다. 영호의 얼굴은 타락한 세계에 자신을 내던진 후 고통과 좌절의 터널을 다 경험해 본 자의 표정이다. 실제로 그 자리에서 영호는 순임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상해요. 여기 내가 한 번도 와본 적 없거든요. 그런데 옛날에 한 번 와본 데 같아요. 저 철교랑 강이랑 다 낯익어요. 여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데거든요.”(영호), “그런 건 꿈에서 본 거래요”(순임), “정말 꿈이었을까요?”(영호).

결국 그가 영화 마지막 쇼트에서 흘린 눈물은 1979년 영호의 것이 아니라, 디제시스의 시간 전체를 통과한 절대적 체험 주체의 몫이고, 영화 밖 우리의 몫이다. 이 불가능한 셔레이드가 내놓은 역설적 신체 언어에서 서사는 중단되고 질문은 시작된다. 그는 자기로부터 먼 곳에서 죽은 순임을 애도하지 못했고, 그보다 광주의 한 소녀를 애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올려다 보이는 철교 위에서 완전한 자기 처벌(자살)에 이르는 1999년의 자신을 애도하고자 한다. <박하사탕>이 빼어난 영화인 이유는, 영화 밖에서 아무 일없다는 듯 잘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 겹겹의 애도를 감당시키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의 죄책감과 죄의식은 ‘내가 그녀를 죽였다’에 방점이 있다.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행위와 관련되는 셈이다. 그러나 <밀양>의 신애가 가지는 죄의식은 자기 학대의 수위가 점점 더 깊어진다. ‘내가 남편을 죽였다’, ‘내가 아들을 죽였다’는 충격, 곧 자아의 전 영역을 뒤흔드는 총체적 슬픔과 관련되는 것이다.(3)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향한 가장 강하고 지속적인 고문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4) 영화가 건넨 정보를 모아보면, 그녀의 남편은 자신과 아들을 두고 집을 나가 외도를 하다 죽는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그녀는 명확한 피해자다. 그러나 그녀가 남동생에게 남편의 외도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쇼트를 보면, 남편 외도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왔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죽은 남편의 고향(밀양)으로 이주하는 행위는 가해자의 내면, 곧 아들에게 아버지 없는 삶을 물려준 고통을 초월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밀양에서 아들마저 ‘유괴-살해’되어 죽는다. 물리적 가해자는 웅변학원 원장 도섭이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이 가해자라는 자책 속에 침잠해 들어간다. 그녀가 하고 다닌 거짓말과 행동, 곧 부동산 쪽에서 투자처를 찾아다니는 생활과 경제적 여유를 과시하는 발언(“있는 돈 은행에 넣어봤자 요즘 이자가 싸잖아요.”)이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진 가해자의 내면에 상처를 덧대는 장면도 있다. 그녀가 운전하던 차에 치일 뻔한 보행자가 그녀에게 던진 말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고 말만하면 답니까?”다. 그래서 도섭을 면회하러 가는 행위는 간절하다 못해 처절한 자기 구원의 희망과 연결된다. 용서란 특정 사건의 피해 당사자가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윤리적 구원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신애는 도섭에게 용서를 행하는 것만으로도 가해 혐의를 그에게 전가할 수 있다. 반대로 그녀 자신은 피해자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받을 수 있다. 그러나 뿌리칠 수 없는 죄책감을 털어내려던 그녀의 도전은 완전히 좌초된다. 도섭이 신애가 없는 자리에서 신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았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애에게 절박한 애도의 길은 완전히 막힌다. 이 절망은 그녀의 삶 전체를 흔들어놓는다. 준은 아빠가 생각나면 소파에 누워 아빠가 잘 때 내던 코골이 소리를 따라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창동은 아들이 유괴된 후 아들이 취하던 자세로 소파에 누워 준의 코골이 소리를 따라하는 신애를 보여준 바 있다. 이중의 가해자가 되어 두 방향의 애도를 해내야 하는 신애의 무의식적 상태가 표출된 신이 아닐 수 없다. 그 때문에 면회실신 이후 신애는 부재하는 남편의 자리, 상실된 아들의 자리를 허구적으로 대체했던 신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냥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 대결의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제 신애의 고통스러운 동선은, 반복되는 애도의 실패가 불러 온 참극을 전시한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신애의 신을 향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적의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이다. <밀양>의 종반부는 그 중층적 에너지의 극단적 분출로 뜨거워진다. 영화 마지막 신에서 거울을 들고 선 종찬(송강호 분)이 고문에 가까운 자기 처벌의 길에 들어선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지는 끝내 미지수다. 바람에 밀려가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비추던 희미한 햇빛의 의미는 그렇게 개방된다.

 

읊어지는 시와 써내려갈 소설

토마스 아퀴나스의 언술처럼 도덕적 행위의 일차적 목적은 자신의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에 있다(5). 영화 <시>는 위악적인 공동체의 부도덕을 답습하지 않고 윤리적 애도를 끝까지 실천하는 미자가 나온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공동체의 모습은 영화 초반 우리에게 여러 기미로 주어진다. 예컨대 미자는 길을 지나다가 희진의 자살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의 엄마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절망하는 것을 본다. 이 장면을 수퍼 주인에게 옮기지만 그녀는 미자의 말에 아무 관심이 없다. 공감적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 어쩌면 <시>에 등장하는 공동체의 부도덕은 그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오프닝신에서 얼굴이 처박힌 채 떠내려가던 죽은 희진의 얼굴을 찾아주고, 더 나아가 그녀의 목소리를 되찾아주는 데까지 나아가는 영화다. 문제적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미자를 두고 가해자의 아빠들은 “행동통일”을 권면한다. 죽은 희진과 그녀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의 아픔은 이 행위공리주의자들 앞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최대의 유용성과 실리를 보장하는 행위원칙 안에서 의사결정 과정은 신속하고 실천의 절차는 일사분란하다. 그들에게 공감적 도덕 규칙으로부터 선취되는 ‘공동체 윤리’란 없다. 그 무렵 미자의 내면을 지배한 건 부도덕한 자들 사이에서 더 강하게 다가오는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염치없는 자들 사이에서 견뎌야 하는 수치심이었을 것이다. 학교 교장 이하 선생들도, 그곳 경찰과 기자도 고통의 근원을 들여다보며 이해당사자로서의 책무를 찾는 이는 없다. 얼굴과 목소리를 잃은 피해자(희진)의 가해자에 대한 용서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합의를 마쳤으니 잘 됐다고, 해결됐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미자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미자의 실천은 오로지 희진의 얼굴과 목소리를 향한다. 희진과 종욱을 모두 아는 듯한 여중생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미자는 희진의 위령미사에 몰래 참석한다. 여중생들의 시선이 야기한 죄의식 속에서 그녀가 한 것은 희진의 얼굴이 담긴 액자사진을 들고 나와 자신의 집 식탁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시를 쓰기 위한 중요한 태도로 설파되는 ‘본다’와 ‘느낀다’에 관한 윤리적 응대가 거기 있다. 그렇게 우리에게 희진의 온전한 얼굴을 찾아 준 미자는 희진의 내면을 더듬어 쓴 ‘아네스의 기도’라는 시로 그녀의 목소리까지 되찾아준다.

재차 말하면 ‘아네스의 기도’는 미자의 목소리로 읊어지다가 중반부터 희진의 목소리로 낭송된다.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듣게 하는 이 전략은 이미 <오아시스>에서 실험된 바 있다. 영화 마지막 신을 장식하는 종두의 목소리. 그 신에서 종두가 교도소에서 보내온 편지가 종두의 목소리로 읊어진다. 공주를 “마마”라고 부르는 종두의 목소리는 공주 혼자 머무는 집의 허허로움을 밀어낸다. <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자의 고통스러운 마음에 유령의 목소리가 찾아오는 형식을 취한다. 미자의 시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을 얻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낭독 방식은 죽은 이가 살아 돌아와 윤리적 인간과 마음을 맞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때의 몽타주신은 미자와 희진이 평소 머물던 장소들을 단속적으로 제시한다. 이창동은 그들에게 각별한 장소감(sense of place)으로 승화된 이미지를 정갈하게 보여준 후 희진이 몸을 던진 다리 위까지 우리를 데려간다. 이러한 쇼트의 배열은 일차적으로 이승에서 희진의 마지막 동선과 그때 그녀를 다녀간 감정들을 더듬어보게 한다. 희진의 내면을 헤아리기 위해 ‘시’라는 수단을 들고 그 장소를 밟았던 미자의 마음을 쓸어보게 한다. 그래서 <시>는 ‘죄책감—애도-윤리’라는 이창동의 중요한 화두가 섬세한 시청각적 이미지에 실려 놀라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결말을 갖는다.

<버닝>에서 종수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그러나 그는 영화 종반까지 소설을 쓰지 못한다. 구속 재판 중인 아버지를 위해 과장적인 탄원서를 작성했을 뿐이다. 그는 현실과 인물을 미화시키는 문장력은 가졌지만 자의식적인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도 그는 “아직까지 무슨 소설을 써야할지 모르겠어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라고만 말한다. 그런데 그는 해미 방에서 마지막 자위행위를 한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섹스를 대상과의 진지한 커뮤니케이션으로 풀이한다면 자위행위는 대상없는 섹스, 혹은 상상적 대상과의 불완전한 섹스가 될 것이다. 그 관점에서 종수의 첫 자위행위와 마지막 자위행위를 대조시켜보는 건 유의미하다. 그의 첫 자위행위는 해미가 아프리카로 떠난 후 그녀의 빈 방에 들러 고양이 밥을 준 직후다. 그때 그의 시선은 창 밖 풍경, 곧 남산타워와 산등성이에 즐비한 다가구 주택을 향하지만, 그와 동시에 방 안에 걸린 해미의 사진을 향하기도 한다. 그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세계로의 진입과 매력적인 해미를 꿈꾸지만 그와는 진지한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다.

마지막 자위행위는 해미 방 침대에 누운 종수의 성기를 등 뒤에 누운 해미가 움켜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창동은 편집을 통해 이 장면을 종수의 꿈이나 상상이라고 말하지만, 어쨌든 종수는 해미에 의한 소통(‘해미와의 소통’이 아니다)과 어떤 실천을 각오한 듯 보인다. 곧이어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아 노트북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다음 쇼트에서 카메라는 후암동 꼭대기 방 밖으로 나가 줌아웃을 한다. 거대한 서울의 풍경을 프레임 안에 채운 후 한쪽 구석에 해미가 사는 비좁은 방을 위치시킨다. 느와르나 범죄물에서 자주 쓰는 음험한 도시의 생리를 상기시키는 쇼트다. 빽빽한 서울의 건물들 너머로 해가 지고 있고, 희미한 빛조차 사라지면 이제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그 다음 신은 벤을 향한 종수의 살인이 이유와 명분을 가진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벤은 자기 집에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며 한 여자에게 립스틱을 발라준다. 이 신은 해미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서도 동일한 방법을 취했으리라는 추측을 이끌어내기 위해 삽입됐다고 믿는다. 벤은 세련된 외모와 우월한 경제적 배경, 그리고 여성의 호감을 사는 능숙한 테크닉을 동원해 상대를 농락해 왔을 것이다. 단순히 재미있는 생활을 위해 여성과 관계를 맺고 전리품을 얻은 후 그녀를 지웠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신은 해미의 실종에 대한 종수의 추리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종수가 아버지의 칼로 벤을 살해하고 벤과 포르쉐를 불태우는 영화의 마지막 신이다.

그렇다면 종수는 해미에 의해 (상상 속에서) 마지막 자위행위를 한 시점에 그녀의 실종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집착해 온 수수께끼가 풀리자 그는 소설로 옮길 소재를 비로소 얻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벤을 향한 살인이 소설을 써내려가는 중 상상한 장면인지, 실제 상황인지는 덜 중요하다. 그의 분노는 정확히 벤이 누려온 특별한 환경과 생활방식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수가 써내려갈 소설은 그의 추리가 키운 분노의 내용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화 <버닝>이 그의 소설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러하다면 종수의 소설은 미자의 시가 준 울림에 미치지 못한다. 이창동다운 윤리적 태도도, 메시지에 합당한 미학적 형식도 불충분하다. 다분히 주관적인 발언이지만, <버닝>의 스토리텔링은 <시> 이후 이창동을 기다린 8년에 값하는 마지막은 아니다.

 

4. 꿈과 안개: 예외적인 이창동의 그것

기억과 망각

앞에서도 우회적으로 말했지만, 이창동의 리얼리즘은 타락을 거듭하는 인간, 혹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그들 중 상당수는 죽음의 그림자가 도사리는 망각의 순간을 가진다. 아주 사소한 장면 몇 개를 열거할까 한다. <밀양>에서 신애는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러 관공서를 찾는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주민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 망각은 제도권에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도구를 잃었다는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독립적으로 자기 존재를 자각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태, 곧 자기 실존의 망실 상태를 의미한다. <박하사탕>에서 1999년의 영호는 엄청난 부피의 열쇠꾸러미를 들고 다닌다. 그 무렵 그는 억울하게 혼자 죽을 순 없으니 나를 여기까지 밀어뜨린 사람들을 없애고 죽겠다는 결의를 내보인다. 그런데 열쇠가 너무 많아서 지상의 마지막 거처로 삼은 비닐하우스의 자물쇠를 열지 못한다. 이 상황은 분명한 메타포다. 그는 간절히 열고 싶었으나 끝내 열 수 없었던 세계‘들’을 잊지 못한 채 살아왔고 이제는 더 이상 열어젖힐 수 있는 세계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이창동은 윤리적으로 ‘기억하는 자’를 내세워 공동체에 필요한 공감의 방식들을 성찰한다. 앞에서 ‘애도’의 개념으로 접근했지만 <시>의 미자는 희진을 향한 ‘투시적 감정이입’을 통해 윤리적 공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용탁 시인이 말하는 ‘시를 쓰는 사람’은 결국 새로운 진실을 찾아 기억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창동은 치매에 걸린 미자를 통해 ‘집단의 의도적 망각’과 싸우는 ‘사적인 기억’의 힘을 절박하게 실험했다고 할 수 있다. 미자는 ‘본다’라는 시작의 기본기에 충실해 타자의 체험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따라 느껴보기 위해 애쓴다(6). 이 투시적 감정이입은 고통받았던 희진과의 일체감을 지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아네스의 기도’ 이전에 가장 인상적인 시는 언어가 완전히 닫힌 상태에서 온다. 합의금을 재촉하는 기범(안내상 분)에게서 벗어난 미자가 갑자기 낯선 강가에 앉는다. 그곳은 희진의 시체가 떠내려간 곳을 건네 보기 좋은 곳이다. 고통스럽지만 온당한 기억하기, 혹은 윤리적 추념에 적당한 곳이다.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 노트를 펼치지만 아무 말도 쓸 수 없다. 그 순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면서 빗방울이 그녀 안에 고인 언어를 대신한다.

그처럼 이창동은 죽음과 동행하는 망각과 윤리적 공감으로서 기억의 순간을 빈번하게 대조시킨다. 우리의 현실을 닮은 세계는 그 대조의 순간에 절망적인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버닝>에서 엿보이는 망각과 기억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낯설다. 있었을까, 없었을까, 혹은 진짜냐, 가짜냐를 둘러싼 ‘기억/망각’은 서래마을과 파주의 상징적 간격 안에 의혹을 부풀리는 전략에 불과하다. 중학생 때 종수가 해미에게 정말 못생겼다는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일곱 살 때 우물에 빠진 해미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 사실이 아니거나 한 가지만 사실일 수도 있다. 이 모호성의 전략은 해미의 실종(이라고 믿어지는 사건)을 둘러싼 강렬한 호기심에까지 일관되게 뻗어간다. 그러나 해석에의 긴장을 팽팽하게 당기는 순간들이 인상적이라지만, 거기에서 영화관 바깥으로 가져갈 만한 질문이 파생하지 않는다. 좌표를 잃은 20대가 감당 중인 고통과 혼란을 다루려 했다면, 노을녘 파주에서 춘 해미의 춤에 더 강렬한 의미와 감정이 실릴 수 있는 순간을 마련했어야 했다. 없다는 것을 잊는 펜터마임식 망각을 습관화하고 있는 20대를 숱하게 안다. 이 비극을 묘사하는 내용적·형식적 수단은 더 고려되었어야 했다.

권태와 춤, 코라의 시간

벤은 권태로운 남자다. 그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여자들이 춤을 추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줘도 그는 하품을 한다. 종수는 하품하는 벤과 두 번이나 시선을 교환한다. 비닐하우스를 두 달에 한 번 정도 불태운다는 말이 서사적으로 추론 가능한 비유라면, 그는 두 달에 한번 꼴로 여자를 바꾸는 남자다. 여자를 바꾸기 전에 기존에 만나던 여자를 죽일 수도 있는 남자다. 그런 극단적인 실천조차도 그에게는 사소한 재미에 불과하다. 이처럼 이창동이 내던져준 서사의 기미를 그대로 믿는다면, 대마초와 기타 등등을 허용하게 된 그의 내력을 다소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해미도 권태와 다투는 여자다. 리틀 헝거의 지난한 삶에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쳤다. 어쩌면 그녀는 먹기 위해 벌고, 쓰기 위해 모으는 생활에서, 그 생활에 필요한 어떤 ‘반복’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경제적 궁핍에도 불구하고 푼돈을 따로 모아 아프리카로 떠난다. 리틀 헝거들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무대에서의 초월적 퇴각. 그래서 파티에 참석한 주변인이 해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녀의 순진함(‘순수함’이 아니다)에 대한 조소의 표지가 있다.

그런 그녀에겐 두 가지 자족적 무기가 있다. 불온한 현실을 망각하기 위한 소극적 수단으로 펜터마임이 있고, 추구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적극적 몸짓으로서 그레이트 헝거 춤이 있다. 영화 중반 파주의 종수집 마당을 배경으로 한 롱테이크 신은 가히 영화적 기적이라고 할만큼 강렬하다. 앉아서 대마초를 나눠 피우던 해미는 저물어가는 파주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갑자기 마당 저편으로 걸어나간다. 그리고는 상의를 탈의한다. 역광 때문에 노을진 하늘 아래 그녀의 뒷모습이 검은 윤곽을 이룬다. 무당의 굿처럼, 어떤 제의의 순간처럼 그녀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를 형상화 한 펜터마임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녀의 춤사위는 그레이트 헝거 춤으로 넘어간다. 그때 깔리는 음악은 누벨바그를 점화시킨 루이 말의 영화(<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삽입된 곡이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만든 'Générique'.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서 이 곡은 남편을 버린 플로랑스(잔느 모로 분)가 함께 떠나기로 한 애인을 간절히 기다릴 때 울려 퍼진다. 그 잔상이 해미의 율동 안에 각별한 정동을 일으킬 무렵, 음악이 멈추고 현실의 바람소리가 프레임을 흔든다. 자유로웠던 그녀의 표정은 흐느끼는 눈물로 넘어간다. 해는 이제 먼 능선을 넘어가고 세계의 윤곽은 한층 더 어두워져 있다. 파주의 평온한 들판과 능선을 수평으로 훑던 카메라 안에서 나뭇가지는 바람에 애잔하게 흔들린다.

이 신은 이창동의 영화 세계에서 처음 보는 코라(chora)적 시간을 담아낸다. 주체가 생성되는 몸짓과 부정되는 어스름이 동시에 담겨 있다. 홍경표의 카메라는 우연적이면서도 운명적인 흐름을 가시화하는 데 성공한다. “움직임과 그 순간적 정지로 이루어진, 극히 일시적이고 근본적으로 유동적인” 순간이 거기 있다. “정립도 조정도 없는 운율적 공간”이 거기 있다. 상의를 벗은 그녀의 윤곽과 해를 삼키는 능선의 흐름은 정형적이면서도 명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가 된다. 그녀의 춤을 품은 종수집 마당은 욕망의 첨예한 끝이 일렁이는 공간이면서 욕망의 무화가 이뤄지는 원시적 공간이 된다(7). 그녀는 리틀 헝거들의 부질없는 삶들 덕분에 비대해진 세계를 초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몸짓이 겨냥하는 곳은 의혹의 기원인 파주도, 리틀 헝거의 삶을 강요하는 후암동 꼭대기 방도, 다가갈 수 없는 서래마을 벤의 집도 아닌 ‘그 어딘가’다.

물론 ‘그 어딘가’는 리틀 헝거에 해당하는 종수와 해미의 ‘상상적 합의’를 전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이창동의 인물들이 ‘상상적 합의’로 만들어 낸 세계가 유독 아름다웠다는 것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오아시스>에서 종두는 홀로 잠들 공주에게 전화를 걸어 나뭇가지가 바람에 떠는 풍경과 소리를 마술로 지워주곤 했다. 이 마술은 합의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그들만의 대마초였다. 그렇게 그들의 작은 천국은 상상적 합의 속에서 초월적으로 임재하곤 했다. 차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둘만의 천국을 춤추던 종두와 공주에게 틈입하던 공주집 테피스트리 속 판타지의 세계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런 어떤 순간에 공주는 장애를 벗고 정돈된 말과 행위로 둘만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처절한 슬픔을 배면에 깔고 있는 <오아시스>의 초월적 판타지보다 <버닝>에 삽입된 코라적 시간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버닝>의 서사, 이미지, 형식 중에서 이 신만 기억에 남는다는 건 아무래도 아쉽다. 해미의 춤이 겨냥한 ‘그 어딘가’가 현실의 ‘무엇’을 ‘어떻게’ 초월한 결과인지에 대한 의미망이 너무 헐겁다.

 

5. 우리의 ‘그 어딘가’

자아도취적 소비주의의 세계를 규율하는 듯한 남산타워의 시선에서 종수와 해미가 나고 자란 파주의 들녘은 아직 안전하다. 그러나 종수와 해미가 부딪쳐나가야 할 곳은 생산적인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운 파주의 폐축사나 비닐하우스가 아니다. 서울이 상징하는 어떤 세계는 진입해 들어온 리틀 헝거들의 노동에 가격을 매길 것이다. 그 노동이 반복되면 그의 삶에 적당한 가격이 매겨질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가치가 굳어지고 나면, 그들 중 더 많은 수는 서래마을보다 후암동 꼭대기 방에 가까운 어딘가에서 자기 삶을 수긍할 것이다.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분명하지만, 이창동이 서사무대 아래에 설정한 논리는 그런 맥락과 연루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잉여로 취급받거나 일회용으로 이용되는 청년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사회적 죽음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또 다른 해미들이 신용불량자로 가고, 또 다른 종수가 극단적인 분노의 자리로 내몰리는 풍경을 톺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버닝>에는 소외되고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격’이 드러나지 않는다. 기존 이창동 영화가 선취했던 윤리적 입장과 태도는 매우 흐릿하다. 이창동은 중층적인 의미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편이었지만, 때론 매우 선명하게 고통을 이야기하고, 상처를 덧대는 일상의 풍경을 고발했다. 예를 들어 이창동은 육체적 장애를 입은 자, 겉으론 장애가 없으나 공동체의 불편으로 낙인찍힌 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왔다. 몫을 주장하기 힘든 자의 처지를 여러 갈래로 설명했다. <오아시스>에서 평범해 보이는 어느 경찰은 공주에게 몹쓸 짓을 시도한 것으로 종두를 단정한 후 이렇게 묻는다. “솔직히 말해 봐. 변태지?”, “저런 애를. 인간으로서 이해가 안 되네. 솔직히 성욕이 생기데?”. <시>에서 가해자 아버지 중 한 명은 사태 해결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여자애가 키도 작고 생긴 것도 그렇고 그렇게 생겼다는데 아니 애들이 뭘 보고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가요”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기미에서 기미로만 이어지는 <버닝>의 서사가 모호성의 전략에만 너무 의존했다는 생각이 든다. <버닝>은 처연한 아름다움을 품은 쇼트들로 가득하다. 스테디 캠으로 찍은 새벽녘 종수의 비닐하우스 순회 조깅 신도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비밀스럽게 부서지는 햇빛에도 나름의 의미를 심던 ‘이창동스러움’이 거기엔 없다. <버닝>이 끝난 이후까지 따라붙던 미스터리한 긴장도 훌륭한 연출의 효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 영화가 남긴 여운에 빗대어 보면, 미궁으로 안내하는 제스처와 사건들의 뉘앙스만 남은 건 아닌지 씁쓸하다. 파주와 서래마을 사이에서 우리 시대 청년들이 각자의 꿈을 꾸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현실의 스펙트럼은 너무 넓고 그 내막을 속속들이 체험하기엔 이창동이 너무 먼 곳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 자끄 엘륄, 하태환 역, 『무의미의 제국』, 대장간, 2013, p.252.
(2) 알라이다 아스만, 변학수·채연숙 역,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2017, p.467.
(3) 해란트 캐챠도리안, 김태훈 역, 『죄의식: 일말의 양심』, 씨아이알, 2016, p.56.
(4) 이하 신애의 내면에 대한 설명, 면회씬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글 참고. “가해와 피해의 미로에 갇힌 엄마들- <마더>와 <밀양>에 대한 윤리적 기억”(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008)
(5) 헤란트 캐챠도리안, 김태훈 역, 『죄의식: 일말의 양심』, 씨아이알, 2016, p.465 재인용.
(6) 막스 셸러, 이을상 역, 『공감의 본질과 형식』,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pp.37-38.
(7) 줄리아 크리스테바, 김인환 역, 『시적 언어의 혁명』, 동문선, 2000, pp.25-33 참고.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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