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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미술 이야기] 우리 민화 속 전통의 호랑이가 이 붓끝에서 세계시민이 된다
[안치용의 미술 이야기] 우리 민화 속 전통의 호랑이가 이 붓끝에서 세계시민이 된다
  • 안치용
  • 승인 2023.12.15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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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선 화가

단군신화에서 비록 곰에게 패배하여 우리 민족의 시원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지만, 일상에서 호랑이는 곰보다 훨씬 깊이 들어와 오랜 시간 한민족과 함께하였다. 호랑이 하면 가장 먼저 용맹을 떠올리기에 무반(武班)을 호반(虎班)이라고 한 것이 자연스럽다. 병마나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즉 벽사(辟邪)의 힘이 있다고 하여 호랑이 그림이나 호()자를 활용한 부적이 세간에서 활용됐다. 산군(山君), 산령(山靈), 산신령(山神靈), 산중왕(山中王)으로 불리는 호랑이는 민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과거의 호랑이 그림 하면 조선시대 풍속화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가 아무래도 가장 유명하다. 한데 정통회화 계열로 봐야 하는 극사실주의 <송하맹호도>보다는 민화 속의 호랑이가 보통 사람에게는 더 친숙하다. 민화 속 호랑이 중에는 입체주의를 떠올릴 법한 그림이 더러 있다. 사물을 보는 시선을 하나로 고정하지 않고 여러 시선을 화폭에 공존케 하는 게 입체주의의 대표적 특성이라고 한다고 우리 민화에서 입체주의는 보편적이다.

까치호랑이 194x260cm 유화 

 

1963년에 서울대 미대에 진학하여 그림과 인연을 맺은 김소선 화가는 60살 언저리에 민화의 호랑이를 만나 20년이 넘게 호랑이 그림을 천착했다. 그림 인생 60년의 마지막 3분의1을 호랑이, 특히 민화의 호랑이와 함께했다.

'까치호랑이'는 민화의 특성을 비교적 충직하게 더불어 창의적으로 재현한 그림이다. 발랄한 까치와 다소 어리숙한 호랑이가 어우러진 일종의 작호도(鵲虎圖)에서 민화 류의 입체주의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호랑이 눈이 세 개로, 정면과 측면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까치와 호랑이가 친구가 되고, 정면의 시선과 측면의 시선이 한데 어울리는 대동의 세상, 혹은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한 민중의 작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호랑이 몸의 정면과 측면을 입체주의화한 전래의 기법은 김 작가에서 눈을 세 개로 만들어 얼굴의 입체주의화를 독창적으로 모색한 결과로 이어진다. 세 개의 눈은 입체주의를 넘어서는 더 강력한 주술적이고 심미적인 효과를 거둔다. 두 개 그림을 이은 연결작으로 김 화가 호랑이 그림 중에서 큰 편에 속한다

옛날 부적으로 쓰이던 호랑이 모양을 모티브로 까치를 추가하여 작호도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소화한 그림이다. 이 호랑이는 바디빌딩 호랑이에 속한다. 민화 호랑이 중에서 가슴이 불룩하여 바디빌딩을 한 것처럼 보이기에 붙은 애칭이다. 선이 각각 뚜렷하면서 서로 조화하기에 포용과 상생의 기운을 뿜어낸다. 특히 바디빌딩한 호랑이의 가슴이 달달하게 부풀어 올라 까치의 수다스러운 부리와 잘 호응한다. 노련한 쇼핑호스트 같은 까치와 어리숙한 아마추어 모델 같은 호랑이가, 제대로 된 영광굴비를 판매하는 저녁 식사 시간대 홈쇼핑 채널인 양 관람자의 눈길을 화폭으로 끌어당긴다. 슬그머니 상반신만 왼쪽에서 슬쩍 드리민 까치의 자세가 아주 프로 장사꾼처럼 보인다. 까치의 자세보다는 그런 프로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화가의 손길을 칭찬할 일이리라.

까치호랑이 60.5x41cm 유화

 

다른 '까치호랑이'는 소나무까지 배치하여 호랑이가 까치와 어우러진 모습을 전래 민화의 구도를 충실하게 따르며 그려내었기에 앞선 그림과 비교하며 감상하면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김소선 호랑이 그림을 볼 때 유의할 점은 그림이 유화라는 사실이다. 유화의 묵직함과 불투명성을 그대로 활용하는가 하면 때로 수채화 느낌으로 민화 호랑이 유화를 만들어낸다. 우리 전래의 민화를 유화라는 서양 회화의 기법으로 소화하여 한국의 전통과 풍속, 그리고 모종의 민족적 정신을 세계인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글로벌한 감각과 형식으로 승화한 것이 김 작가 호랑이 그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적인 내용을 세계적인 형식으로 융합하여 확장성을 극대화하며 새로운 표현의 영역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호랑이 38x38cm 유화 2022
호랑이 38x38cm 유화 2022

 

초록색 눈에 검은 눈동자, 흰 눈썹을 한 대표적인 민화 풍 호랑이 그림 '호랑이'는 민화의 해학과 달관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사냥할 때 살상용 무기로 쓰이는 송곳니가 살기가 사라진 채 귀엽게 그려졌다. 얼굴을 채운 무늬 또한 위엄보다는 다정과 다감, 소탈함을 느끼게 한다. 굵고 가는 것을 같이 배치한 몸의 무늬가 생각보다 잘 어울렸고 충분한 여백을 부여하여 덜 사실주의적인 접근으로 더 다가오는 인상을 안출했다. 호랑이 얼굴을 한 애완견이 아닐까 의심을 하여봄 직하다. 그것도 애교가 아주 많은 녀석이지 싶다. 어쩌면 반대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무시무시한 놈일지도 모르겠다

 

호랑이2 72.7x72.7cm Oil on Canvas 2019
호랑이2 72.7x72.7cm Oil on Canvas 2019

 

붉음과 푸름을 뒤섞어 기존 민화의 느낌에 신비감을 더한 '호랑이'는 실제 벽사를 해낼 것처럼 강인하다. 음양의 조화, 혹은 태극의 현현 같은 확고한 지향 안에 호랑이의 기백과 민화 호랑이의 따뜻함을 동시에 추적했다. 김 작가의 다른 호랑이 그림들과 함께 감상하면 비슷한 구성과 형식으로 다양한 느낌을 산출해내는 작가의 원숙한 역량을 엿볼 수 있다.

 

호랑이  (Tiger) 200x116cm Acrylic on Canvas 2015
호랑이 (Tiger) 200x116cm Oil on Canvas 2015

이 '호랑이'는 민화의 호랑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형적인 민화 호랑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도 없다. 한국에서 사라진 멸종 위기종 백두산호랑이의 초상일까? 평온한 듯 동요하고, 우울한 듯 긍정적이어서 사람의 초상화 같기도 하다. 이 호랑이는 웃는다고 볼 수도 운다고 볼 수도 있어 감상자의 마음 상태가 그림의 성격을 판별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된다. 호랑이 그림 포트폴리오의 확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벌서는 호랑이 90x90cm Oil on Canvas 2013
벌서는 호랑이 90x90cm Oil on Canvas 2013
벌서는 호랑이 97x97cm 유화 2022
벌서는 호랑이 97x97cm 유화 2022
벌서는 호랑이 26.5x26.5cm 도자화

김소선 호랑이 그림의 압권은 벌서는 호랑이시리즈다. 민화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한 이 호랑이들은 한배라는 생각을 품게 하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인간의 시선에서 호랑이를 너무 단순하게 판단해 그 차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서양인이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별하지 못하듯이 개성이 뚜렷하게 서로 다른 호랑이들을 식별하지 못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림 속 호랑이들에게 큰 결례를 범한 것이지만, 그런 결례를 범하게 만든 작가에게는 칭찬이 된다.

호축삼재라고 할 때의 그러한 기능을 벌서는 호랑이들이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들이 어쩌면 행운을 불러올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민화 호랑이의 현대적 업그레이드이지만 민화의 고유한 특징은 그대로 보전한 그림이다. 훈련을 받고 서커스에서 춤을 추는 호랑이들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보고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라고 한다. 민화 호랑이를 닮았지만 세계시민 호랑이를 상기하게 하고 더불어 그 종 전체의 슬픔을 체화하였기에 귀여운 애수가 깃들인다. 그들의 불행에 기대 행운을 기대한 것은 잘못일 수도 있겠다.

 

 

찾아보면 호랑이 화가로 불리는 작가가 더러 있다. 김소선을 우리 민화 호랑이의 특징을 제대로 계승하면서도 세계시민적인 감성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독보적인 호랑이 화가로 불러 큰 과장은 아니지 싶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평론가로 영화·미술·문학·정치·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크리티크M 발행인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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