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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미술 이야기] 나무와 숲 사이를 오가며 맞잡은 손길에 담긴 그 온기
[안치용의 미술 이야기] 나무와 숲 사이를 오가며 맞잡은 손길에 담긴 그 온기
  • 안치용
  • 승인 2023.09.22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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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현숙, 따뜻한 서정성과 아름다운 인연의 미술적 조탁
Walking with a daughter 50.0 50.0 oil on canvas 2021
Walking with a daughter 50.0 50.0 oil on canvas 2021

 

산등성이에서 두 사람이 걸어 간다. 복장으로 보아 등산하는 중이 아니다. 모녀로 보이는데, ‘딸과 함께 걷기라는 제목을 통해서 곧 사실로 확인된다. 가로지른 능선이 완만하고 두 세계를 구획한 지평선이 뚜렷하다. 산과 하늘의 색이 현실과 다르다면 다르지만 그렇다고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자꾸 보면 다르다는 생각이 사라진다. 그들이 진행하는 쪽에 나무가 있다. 꽃인지 잎인지, 무엇인가 무성하게 그림의 중심을 포괄한다. 그러나 지배하지는 않는다. 조화하며 시선을 양보한다. 시선은 아무래도 아무래도 우하의 모녀에 꽂힌다.

구도가 천지인인데 거기에 나무[]가 추가돼 천지인목이 됐다. 애초에 나무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람이 나무가 되었을까. 나무사람, 사람나무, 둘 다일 수 있다. 그럼 천지목인도 가능하다. 다만 '인'을 뺀 천지목이 가능할지는 별개 논의다.

나무가 땅과 하늘을 이으며 모녀를 마중한다. 잎인지 꽃인지가 양쪽 끝에서 팔자 모양으로 떨어져 상반된 중력을 현시한다. 중력의 혼란보다는 중력의 부재, 즉 진공 같다. 그림 안은 얼핏 느낀 색감 혹은 기압과 달리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땅에 해당하는 붉은 계통의 색감은 어쩐지 차갑고, 하늘 또한 온기를 기준으로는 중립적이지만 온화한 느낌이 든다. 왜일까. 지평선에 다소곳하게 붙은 모녀 때문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차라리 지구와 비슷한 외계행성 같은 느낌도 받는다. 외계행성을 그렸다 하여도 그 모녀가 모녀임은 변하지 않는다.

안온한 분위기와 정갈한 다정함의 방사가 화폭을 가득 채운다는 최종 확증은 제목에서 온다. 이 그림의 제목(Walking with a daughter)에서 딸만이 적시되었기에 딸과 함께 걷는 이가 누구인지는 사실 관람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관람자는 가정교사와 주인집 딸 등 다른 관계로 받아들이기보다 그림 전반의 아우라를 호흡하면서 대체로 모녀로 간주할 터이다. 제목을 정한 화가를 식별하기에 이르면 모녀가 고정된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림 속에 등장하기에 어머니는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제목에 괄호 쳐진 어머니, 딸과 동행한 자신을 보는 화가, 딸과 동행한 그림 속의 자신. 이 세 주체(?)는 뚜렷한 하나의 실체를 세 각도에서 해명한다. 각자는 유체이탈인 듯 자신을 이탈해 다른 자신에 가 합체한다. 그림에서 인간으로서 유일한 주체는 딸이지만, 곧 동시에 유일한 대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림 속의 어머니는 어떤 순간에도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작가 자신은 분열되었다기보다 섞이지 않은 채 이처럼 혼합되어 모녀를 관조한다. 이 관조는 주로 어머니가 딸을 살뜰하게 보듬어 인도하는 양상이다. 그림 속 어머니의 시선이 딸을 향한다. 창작자로서 화가는 그런 모녀를 응시하며 결국 자신을 화폭에서 실현하기에 하늘과 땅, 나무는 현실과 사뭇 달라진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일지 모른다. 달라진 외양과 달리 진실은 현실을 강력하게 포용한다. 어머니가 딸을 안듯이.

 

Walking with a daughter 80.3 53.0 oil on canvas 2021
Walking with a daughter 80.3 53.0 oil on canvas 2021

 

같은 제목의 다른 그림에서 색감과 구도가 달라지지만, 딸을 후견하는 어머니의 시선이 동일하다. 그림이, 관조와 상상을 섞어놓은 듯한 덜 사실적이지만 진실을 담은 사실성을 구현하는 가운데 관람자에게 깊은 동감을 생성해 내는 건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어머니에 관한 이해가 화폭 뒤에 사전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인간이든, 1인칭 인식은 어머니에 관한 이해에 마주하여서 전지적 시점으로 비약하게 마련이다. 1인칭이 설령 어머니라고 하여도 마찬가지 비약이 일어난다. 이 그림들은 모성의 깊이를 자연스런 개념화와 아늑한 붓칠로 유화의 무게감을 실어 캔버스를 관통한다.

흔히 커피나 와인의 맛을 설명하며 바디감이란 용어를 쓴다. 소곤소곤 봄비가 직선으로 적당한 굵기의 방울로 떨어지는데 그 아래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은 어린 딸과 그 딸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한쪽 어깨가 살짝, 너무 흥건하지 않게 젖은 아직 충분히 젊은 엄마가 동행하는 모습을 창 넓은 커피숍에 앉아 바디감이 느껴지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 엄마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이런 상상의 바디감이 말하자면 서정성이다.

김현숙 화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서정성은 너무 부담스럽지 않지만(말하자면 오글거리지 않는다) 결코 가볍지 않은, 누구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그런 보편적이고 친근한 서정성이다.

 

f-16 10p with you 53.0 45.5 oil on canvas 2023
f-16 10p with you 53.0 45.5 oil on canvas 2023

 

김 화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였고, 그때로는 전공자보다 다소 늦게 그림을 시작하였지만, 첫 전시회를 열고 벌써 20년을 훌쩍 넘긴 중견작가이다. 모녀 동행 시리즈 그대와 함께(With You)’ 등으로 특유의 서정을 화폭에 담아냈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그림 그리기를 글쓰기의 연장으로 받아들인다.

어느덧 그 사이 나무가 숲으로 변하고 모녀가 가족 등 다양한 관계의 양상으로 변주하였다. 특히 나무가 숲으로 변하며 그림에 구현된 선과 점은 작가에게는 덧칠을 통한 모종의 수행이 되고 관람자에겐 감상 지평의 확대가 된다. 나무를 보는 것과 숲을 보는 것 사이엔 분명 차이가 있다. 나무를 보았다가 숲을 보거나, 숲을 보다가 나무를 보는 식으로 두 세계를 넘나들면 화폭에서 받아들일 감성 또한 느닷없이 폭발할 수 있다. 수직의 질감으로 형상화하는 숲은 대단한 비원이라기보다는 소박한 기원과 인간적 소통을 상징한다. 숲이라는 공간에서 나무를 넘어선 공동체성이 회화의 형태로 묻어나게 된다. 공동체성이란 게 거창한 무엇인가를 암시한다기보다 손에 닿을 수 있고 체온을 공유할 수 있는 일상의 소담한 공동체를 지목한다. 그 공동체성이 겹겹 수직의 인연으로 중첩되고 본원적 인간성의 이해로 증폭된다.

f-18 6p with you  41.0  27.3 oil on canvas 2023
f-18 6p with you 41.0 27.3 oil on canvas 2023

 

따뜻한 서정성과 아름다운 인연의 미술적 조탁과 포근한 체현. 김 작가의 그림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동의 근원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서정적 형식이 예술가가 자신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하여 제시하는 것이라면, 서사적 형식은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 및 타인과 간접적으로 관련하여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작가의 서정성은 조이스의 설명에 부합한다. 그림에 표현된 (어머니의) 딸은 타인이 아니고, 결국 (어머니) 자신과 관련된 질기지만 아름다운 인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서정성은 혹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아주 더운 날에 온다고 한 누군가를 생각하며 음료수를 아예 냉동고에 넣어 얼려두었다가, 도착하였을 때 얼음이 적당한 크기로 적당한 비중으로 남아 있는 상태로 마실 수 있게 시간을 계산해 음료수병을 냉장고에서 꺼내놓았다. 병 속의 얼음이 서서히 녹으며 고체보다 액체의 비중이 늘어나고 온도차로 병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러한 상태로 놓인 음료수병의 모습. 서정성의 영역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온다고 한 누구인가가 딸이든 남편이든, 그가 확정되어 병이 놓인 공간에 등장하기 전까지가 서정의 영역이고, 김 작가의 그림이 천착한 영역이다.

 

with you 45.5 65.2 oil on canvas
with you 45.5 65.2 oil on canvas
with you 92.0 92.0 oil on canvas
with you 92.0 92.0 oil on canvas
f-8 15p with you 65.2 50.0 oil on canvas 2023
f-8 15p with you 65.2 50.0 oil on canvas 2023

 

어쩌면 김 화가에겐 그가 붓을 들기 전에 이미 서정성이 어떤 식으로든 기본값으로 주어진 듯하고, 붓칠이 시작되자 자연스럽게 그 끝에서 서정이 캔버스에 묻어났다. 누군가 그렇게 평가한다면 이견이 없다. 그만의 서정성은 분명 그의 작품의 힘이고 특장이지만, 만일 그 너머로 가려고 한다면 그가 무엇을 찾아낼지 궁금하긴 하다.

 

·안치용

인문학자 겸 평론가로 영화·미술·문학·정치·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크리티크M 발행인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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