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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0) - ‘쇠우리’에서 꾸는 멈출 수 없는 꿈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0) - ‘쇠우리’에서 꾸는 멈출 수 없는 꿈
  • 안치용 l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 승인 2019.12.3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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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소설 『위폐범들 Les faux-monnayeurs』 (1925년)은 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유일무이한 소설이라 지목한 작품이다. 과거에는 『사전꾼들』이라는 제목의 역서가 국내에 통용됐다. 현대소설의 모든 가능성이 모색된 이 실험적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혈기왕성한 청년 베르나르, 문학소년 올리비에, 지식인이자 작가인 에두아르이고 이들을 둘러싼 무수히 많은 인물이 소설을 종횡무진 누빈다.

위트라고 할까 장난스러운 지점이라고 할까, 소설 속에서 소설가 에두아르가 구상하는 소설의 제목이 ‘위폐범’이다. 소설가 앙드레 지드와 앙드레 지드가 만든 소설 속의 소설가 에두아르는 ‘위폐범들’이란 소설을 통해 겹쳐진다. 지드가 『위폐범들』을 통해 세계와 대면하는 방법이다. 지드는 작가이자 극 중 화자가 되고, 에두아르라는 가상의 인물은 지드라는 실존 인물을 통해 생명력을 얻어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지경을 넓히는 데 성공한다.

 

“현실 세계와 표현 사이의 겨루기”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1969년)에서 보니것의 경험이 작품 속의 기이한 등장인물 빌리 필그림과 겹쳐진 정황과 닮았다. 작가의 사유를 대변하는 소설 속 등장인물을 창조해 작가 자신과 그를 연결 짓는 방식,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유보한다. 당연히 픽션과 논픽션을 연결한 고리가 있다고 해서 더 좋은 소설이고, 없다고 나쁜 소설일 수는 없다. 그 연결이 좋을 때 결과가 좋고 나쁠 땐 나쁘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988년)에서도 그 연결이 목격되는데, 『위폐범들』과 『제5도살장』과는 달리 희미한 연결을 취했다. 소설이 끝나는 장면에서 여주인공 셰큐레가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해줄 필자로 적시한 사람이 둘째 아들 오르한이다. 소심하게도, 대미에서야 소설 속의 작가 이름이 소설가 자신의 실명과 일치함이 나타난다. 

예로 든 『내 이름은 빨강』·『위폐범들』·『제5도살장』의 세 소설 순으로 연결 구조를 살펴보면, 이름·작품제목·경험(혹은 삶. 작가의 삶과 경험이 작품 속 등장인물의 삶 및 경험과 오버랩된다) 등으로 개입의 양상이 점점 더 깊어지고 구조는 더 복잡해진다. 

소설이란 장르가 등장하기 전에 뭉뚱그려 ‘이야기’가 있던 시절에 작가 또는 화자는 작품(이야기)에 직접 개입하곤 했다. 독자나 청자는 이런 개입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이란 확고한 장르가 탄생하고 작가와 작품의 분리가 분명해지면서, ‘작가 또는 화자의 작품 속 개입’이라는 예전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독자가 몰입할 수 있고 자체적 폐쇄구조를 갖춘 서사의 완결성에 의의를 두었기 때문일 수 있다. 서사의 완결성은 작가는 창작하되 개입하지 않음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이런 양상은 ‘창조하되 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신관(神觀)과 닮았다. 화자 또는 작가는 창작 이후엔 소실점 너머로 사라진다. 작가가 개입하는 이른바 ‘메타적’ 방식은 신이 현현하는 방식인 계시와 흡사하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근대사회의 스토리텔링엔 부적합하다는 인식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서사의 합리성과 완결성은 어느 사이엔가 무너졌다. 화자나 작가의 명시적 천명과 개입은 텍스트 자체만을 남긴 채 작가를 배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가, 이제는 개입이 작가와 작품의 재량에 맡겨졌다. 소설이 원론적으로 ‘세계의 재현’이라고 한다면, 재현할 세계가 더 이상 합리적이지 않고 완결적이지 않다는 각성이 작가의 재소환에 약간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위폐범들』은 ‘소설 제목’을 통한 소박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또 화려한 문학적인 실험에도 불구하고 근대소설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근대소설’이란 문학사적 분류라기보다는 근대성과 조응하는 정도에 따른 자의적 분류로 보는 게 좋겠다.

“현실 세계와 표현 사이의 겨루기”라는 지드의 언명에서 그런 근대소설성은 확고하다. 현실 세계는 ‘겨루기’의 대상이며, ‘표현’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의욕이 겨루기와 결부된다. 그것은 여전히 온존한 주체의 현상이다. 세계는 만만치 않지만 겨뤄서 표현할 수 있다는 기개. 비록 이 겨루기에 누군가 인상주의같이 외견상 겸손한 용어를 동원한다 해도, 이런 입장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소설 『위폐범들』은 음악으로 치면 다성부음악이다. 현대소설의 다양한 시도가 모두 등장했다는 평을 받았다. 쉬이 짐작할 수 있듯이 다성부음악이 어려운 것은 개별 성부의 완결성과 전체적 조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휘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지휘자 역할을 맡은 소설가 지드는 『위폐범들』에서 55개의 주제를 소화했다고 한다. 세계와 대면하는 55개 주체라고 해도 좋을까. 분명히 할 것은 『위폐범들』은 개체의 관점에서 세계와 대면하고 세계를 파악한다는 점이다. 개별적 주체의 설정은 근대성의 명백한 반영이다.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근대화 

루쉰(魯迅)의 소설 『아큐정전』(1923년)의 주인공 아큐는 ‘정신승리’와 ‘찌질이’의 특성을 보여주는 소설 속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아큐는 『위폐범들』의 등장인물들과 달리 결코 개별적 주체가 아니다. 루쉰에게 아큐는 1920년대 중국인의 자화상이다. 『위폐범들』에선 프랑스인의 자화상이 모색되지 않는다. 자화상이 관건이 아니라 어떤 자화상이냐가 관건이다.

프랑스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로맹 롤랑(1866~1944년)은 『아큐정전』을 칭찬했는데, 그는 “가련한 아큐를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보통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상대도 못 하는 중국인들을 그린 작품’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중국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아큐의 모습은 현대인들, 많은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롤랑의 말대로 아큐는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는 존재론적인, 나아가 윤리적인 인간 유형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롤랑이 “또 다른 모습”이라고 특별히 강조한 것에서 뚜렷이 드러나듯, 아큐가 중국인의 모습을 다뤘음을 누구나 알고 그것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아무리 다층적 해석을 가하려고 해도 아큐가 중국인의 자화상을 다루고 있음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드의 『위폐범들』 속의 인간군상은 각자의 주체로서 각양각색의 양태로 세계와 맞선다. 반면 아큐는 전체이자 하나의 추상인 당대의 중국인으로서 세계로부터 억압받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 위치하는 한 아큐는 결코 세계와 겨루기에 돌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와 맞서려면 반드시 주체로 정립돼야 하기 때문이다. 추상은 주체의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다.

소설 『아큐정전』이 백화문으로 작성됐다는 사실에도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루쉰의 고민이 녹아 있다. 루쉰의 고민은 국민(國民)의 상에 관한 것이었다. 지드가 현실 세계와 표현 사이의 겨루기를 작가로서 고민했다면, 루쉰은 중국과 중국인이 세계 속에 어떻게 들어가고 어떻게 세계를 극복할 것인가를 투사로서 고민했다. 입인(立人) 또는 활인(活人)으로 불리는 루쉰의 사상은 중국 근대화의 항구적 과제를 날카롭게 제시하려는 의도와 맞닿아 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 중국의 근대화란 과제에 맞는 특정한 인간상에 관한 고민이다. 『위폐범들』이 초역사적 주제를 다룬다면 『아큐정전』은 특정한 역사성을 천착해 해법을 모색한다. 음악으로 치면 아큐정전은 단성부음악이다. 요약하면 아큐가 전체로서 중국인, 즉 국민을 대표한다면, 『위폐범들』의 등장인물들은 다성부음악 속에 표현된 개인을 대표한다.

‘국민성에 관한 고민’은 ‘근대국가에 관한 고민’의 다른 말이다.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서구의 발전도식을 수용한 중국 지식인이 찾는 국가와 국민의 상은 함께 사유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루쉰의 애국심과 충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민과 사유가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분석한 것과 흡사한 의식을 『아큐정전』에서 루쉰이 표출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아큐정전』에서 루쉰은 반성과 해법의 척도 및 기준을 오리엔탈리즘으로 삼았다. 오리엔탈리즘은 중체서용(中體西用) 같은 명목상의 중화의식은커녕 서양에 의한 동양의 인식체계를 철저하게 내면화하는 것을 말한다. 근대사회를 서양이 지배함에 따라 지배와 피지배에 호응해 생성된 인식체계다. 그것은 가해자의 인식과 피해자의 인식을 교묘하게 합체해 놓았다. 따라서 옥시덴탈리즘은 없다. 서양에는 (제국주의 관점의) 가해자만 있고, 피해자가 없기 때문이다. 

루쉰은 위대한 작가이자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었지만 그 시대 사유의 시대적 틀과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구 근대국가들과 또 다른 서구국가(또는 아류 서구국가)라고 할 일본의 침탈 속에서 중국 민중을 구할 길은 강건한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것 말고는 찾아지지 않았고, 그러려면 중국인은 봉건성을 탈피해 근대적 국민으로 거듭나야 했다. 

중국뿐 아니라 거의 모든 제3세계에서 근대국가 수립의 열망은 고통과 치욕을 동반했다. 오리엔탈리즘이 극적으로 보여주듯, 먼저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를 주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근대화의 관문에 접어들 수 있었다. 자기비하의 감정은 루쉰의 『광인일기』에서도 처연하게 드러난다.

 

원근법이라는 근대성의 세계관이 보여주는 허약함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41년)은 유럽의 30년 전쟁을 다룬 희곡이다.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끝난다. 유럽은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으로 100년 넘게 지속된 혼란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 짓고 근대로 이행할 채비를 갖춘다.

역사학계에서는 이 희곡이 다룬 30년 전쟁의 종전 시점을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조약을 분기점으로 독일을 뺀 유럽 주요국가의 국경선이 사실상 획정되고 종교의 다원성이 인정됐다. 종전과 함께 체결된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는 (편의적 표현으로) 국가들의 영토 경계선을 분명히 하는 한편, 국가들 간에 상대의 종교를 인정하도록 했다. 가톨릭 제국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을 사실상 형해화하고, 주권 국가들이 경쟁하는 근대 유럽의 정치구조가 나타나는 계기가 된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은 원래 정치적인 풍자물로 창작됐다. 나치의 전쟁 준비에 대한 덴마크 정부의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려고 브레히트가 이 희곡을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런 사전 지식 없이 작품을 읽으면 텍스트 자체로는 정치풍자극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30년 전쟁을 통한 전쟁의 참상 고발? 모성? 더 폭넓게 인생의 의미?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소재에 조금 더 집중하면 근대의 출발 시점에 근접한, 또는 직전의 아주 어두운 새벽을 통과하는 시대를 그리며 그 시대에 짓눌려 힘겨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억척어멈의 엄청난 불행이 압도적으로 눈에 들어오지만, 그의 무지와 어리석음 또한 안타깝게도 확연하게 돌출한다. 얼핏 아큐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억척어멈이 아큐보다는 진취적이라고 평할 수 있다. 작품 자체에서 미세하게 드러나는 이 차이는 작가의 세계관을 통해서 더 극명하게 표명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루쉰의 ‘쇠로 된 방’ 비유는 ‘아큐’를 모진 절망의 끝자락으로 밀어붙인다. 잘 드러나진 않지만 그래도 보려고 하면, 30년 전쟁이란 역사적 사실을 풍자의 소재로 활용해 미래를 열고자 한 긍정적 인식이 억척어멈에게서 엿보인다. 루쉰이 그리는 인간에게선 활로가 여간해서 보이지 않는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998년)에서도 근대성 의제를 추적할 수 있다. 물론 이 소설은 우선 추리소설로 분류된다. 흥미롭게도, 추리적 요소가 약함에도 이 소설은 재미있게 읽힌다. 사랑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우리의 주제와 얼마든지 연결되는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내 이름은 빨강』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중세 터키 세밀화가다. 이들은 서양미술의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느냐와 마느냐를 두고 대립하고 갈등하다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소설에서 소재로 삼은 서양미술의 새로운 기법의 핵심은 원근법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근대의 출발점이라면 원근법도 분명 근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원근법은 미술에서 구현된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인간중심주의다. 지드의 『위폐범들』을 떠올려보자.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 즉 다양한 주체가 등장한다. 이어서 다양한 시선이 생성되는데, 각각의 시선은 각각의 원근법을 갖는다. 지드가 『위폐범들』에서 다양한 원근법적 인식과 현상을 하나의 소설로 꿰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합리적인 상을 관찰자에게 주는 듯한 원근법은 그러나 오류를 전제한다. 관점에 따라 그것은 전면적 오류다. 원근법은 그것이 적용된 사물의 상대적 크기만을 관찰자에게 전달한다. 그 그림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관찰자의 시선에 집중한다. 따라서 그림은 화폭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은 항상 관찰자의 미간 아래 뇌 속의 어느 지점에 위치한다. 그림은 관찰자 없이 존재하지 못하기에 항상 부수적인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화가 또는 화가의 시선에 입각한 주체적 작업이란 반론이 가능하지만 모든 그림이 보여짐을 운명으로 한다고 할 때 주체성의 시간은 화폭이 비어 있을 때만 관철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화가는 언제나 감상자의 시각에서 그림을 그린다. 잠정적 주체를 항구적 주체로 오인한 합리성의 인식이 원근법이다.

사물 자체, 또한 사물과 사물에 결부된 가치를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받아들이는 세계에서 원근법은 가치의 훼손이며 나아가 신성모독이 된다. 신성한 것은 그림에서도 신성한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에 부합하는 공간을 점유해야 한다. 다양한 시선과 관점이 아니라 오직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한 하나의 시선과 관점이 세계에 존재해야 한다는 견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신성의 세계관은 원근법이 도입되면 폐기된다. 이것은 하나의 가치관이 다른 가치관으로 넘어가는 일상적인 변동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원근법의 세상은 분열을 예고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만큼의 관점이 존재한다고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원근법의 세계관에 입각해 근대화의 도정은 열릴 수 있다.

원근법의 세계관은 근대인이 하늘의 별을 구성하는 방식과 닮았다. 인간에게 인식된 하늘의 별은 믿음과 달리 실체와 무관하다. 인간은 하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망막에 감광된 것을 인식할 따름이다. 별을 탈출해 달려온 빛이 눈의 시신경에 부딪히는 시점으로 밤하늘이 구성된다. 별빛이 인간의 눈에 인지된 순간의 우주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있는 우주를 보지 못하고 오직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주의 별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볼 수 있는 것만을 보는 것이 원근법적인 인지체계다. 현시점에서 단지 내 망막에 닿은 별빛만을 지각할 뿐이며 그 빛을 떠나보낸 별 자체에 대해서는 인간이 알 도리가 없다.

신이 있어 전체를 조감한 우주나 천체물리학자가 파악한 별의 지도와는 다르다. 단적으로 이미 사멸한 지 오래인 별조차 내 눈에선 깜박이며 생생하게 살아있다. 빛나지 않는 별을 빛난다고 인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때로 인간이 죽은 별에다 사랑을 맹세하지만, 사멸하지 않는 별이 없듯 잦아들지 않는 사랑이 없다고 할 때 그 맹세는 어쩌면 가장 적절한 맹세다.

원근법(세계관)의 등장이 다행인 것은, 죽었든 살았든 주체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기준점을 획득해 그 기준점에 의거해 세계에 맞서며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합리성으로 포장된 그 기준점은 얼마나 임의적이고 허약한지. 그 기준점에서, 빅뱅처럼 근대적 개인이 분출했고 이것은 문학이 겨뤄 표현해야 하는 주제이자 주체가 된다.

 

‘마음짐승’ 혹은 ‘사회짐승’ 없는 근대국가는 불가능할까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대위의 딸』(1836년)의 배경인 제정 러시아는, 1830년대에도 근대국가의 맹아가 얼음 아래 숨겨져 있는 상태였다. 30년 전쟁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서유럽 열강이 근대화의 성과를 내기 시작한 19세기에도 러시아는 유럽 변방의 후진 왕조 국가로 남아 있었다.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로 유럽의 동쪽 변방에서 고유한 민족 정체성을 키워갔다. 차르를 정점으로 한 이 왕조국가가 하나의 공동체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인식은 내부에서 생겼다기보다는, 루쉰의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요하게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요인이 작용했을 수 있다. 

『대위의 딸』의 발표될 시점이면 러시아에 이미 나폴레옹이 왔다가 패퇴한 시기였다. 러시아라는 ‘상상의 공동체’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는 히틀러 군대의 침입을 받아 다시 한번 공동체 의식을 제고하게 된다.

근대국가 또는 민족국가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적절히 밝혀냈듯이 근대성과 집단적으로 공유된 허위의식, 그리고 봉건적 지배체제를 대체해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해야 할 시급한 필요성에 따라 출현한다. 러시아에서는 지배계급 내에서 시급성의 인식이 더뎠고, 이런 더딘 전환이 역설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발발을 초래했을 가능성은 오래된 토론거리다.

『대위의 딸』의 소재는 1773∼1775년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이다. 당시 러시아 차르는 독일인으로, 황제이자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황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대제(재위 1762∼1796년)였다. 러시아 국민국가의 맹아적 의식이 존재할 듯 말 듯한 시점에, 다른 민족인 돈카자크족의 푸가초프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제국을 몇 년 동안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기마민족인 카자크족은 종종 러시아의 용병으로 활용돼 대거 전쟁에 투입됐다. 그런 기여에도 불구하고 카자크족의 군사적 탁월함은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돼 러시아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게 된다. 사회주의 혁명기에 이들이 혁명군인 적군에 맞서 백군의 주력이 된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도 존재한다.

푸가초프의 반란에는 봉건성과 민족문제라는 두 가지 사안이 중첩되며, 소설의 후경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푸시킨은 간접적으로 이 사안을 취급한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혁명기에도 봉건성과 민족문제라는 두 가지 난제는 여전했다. 러시아 근대국가의 여명기에 향후 러시아가 안고 갈 봉건성 해소와 민족문제 해결을 푸시킨은 분명하게 의식했다. 그러나 후경에 담은 것에서 드러나듯, 방법론에선 스토리텔링을 강화하며 역사의 격동에 휩싸인 개인들의 모습을 담백하게 그려내는 우회로를 택했다. 일각에서는 문제의식을 숨기고 스토리텔링을 강화한 표면적 현상을 근거로 『대위의 딸』을 동화(童話)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후경에다 시대적 고민을 넣은 까닭은, 아마도 푸시킨이 작품을 쓸 때 계속 당국으로부터 검열을 받는 처지였다는 상황이 일부 반영됐을 것이다.

푸시킨의 해법은 루쉰과 다르다. 사랑이다. 낭만적이어서 식상한가. 소설에서 주인공 부부는 푸가초프와 예카테리나가 죽은 후에도 살아남고, 후손이 또 대를 이어 살아남는다. 부부가 된 주인공 그리뇨프와 마리아는 역사를 버틴다. 어쩌면 당시 푸시킨이 미래의 희망과 조국애를 표명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르겠다. 난관을 극복한 새로운 세상에서 러시아의 후손이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남아 융성하기를 바라는, 전망이라기보다는 믿음에 가까운 기대. 

고유명사의 활용을 잠시 짚고 넘어가자. 푸시킨은 푸가초프와 예카테리나라는 실명을 소설에 사용했다. 두 남녀 주인공의 이름, 그리뇨프와 마리아는 푸시킨이 지은 것이다.(여담으로, ‘마리아’는 서양 소설에서 여성 주인공 이름을 고를 때 구세주라 할 수 있다. 수도 없는 마리아가 수도 없는 작품에서 활약한다.) 

푸시킨은 역사의 현장을 검토하며 관련한 구체적 고유명사를 드러내지만 주인공은 임의의 가상 인물로 투입했다. 역사의 고유명사의 틈을 비집고 살아남은 보통명사들의 힘과 끈기를 보여주는 소설의 보편적 방식이다. 『대위의 딸』에선 이들이 살아남아 근대국가를 목격하게 될 터다.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 소설가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1994년)은 또 다른 근대국가를 묘사한다. 근대국가의 기본 모델은 이중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정치적 자산과 산업혁명의 자본주의를 기본자산으로 깔고, 봉건적 지배체제에서 자본지배체제로 전환한 것이 우리가 흔히 목격하는 근대국가다. 근대국가 또는 국민국가가 일반화할 시점에 사회주의 블록이 생기면서 근대성과 사회주의가 결합한 새로운 국민국가가 선보였다. 독일에선 전체주의가 근대성 및 제국주의와 결합한 특이하고 잔혹한 국가가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 국가를 분석할 때 대상으로 삼은 두 나라가 러시아와 독일이다.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근대성’이란 이름으로 국민국가에 장착될 때 전체주의가 태동했다는 연구인 셈이다. 

푸시킨의 조국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란 전망과 달리 농노제가 온존한 후진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이변을 창출했다. 사회주의 국민국가는 사회주의 국민국가의 이념을 수출하고 이식하며 사회주의 블록을 만들어냈다. 내부적으로 블록 내의 지배관계가 분명했지만 사회주의 블록의 국민국가들은 애써 서로를 형제국가로 간주했다. 

그 국가들 중 하나가 『마음짐승』이 고발한 루마니아다. ‘국민국가+전체주의+근대성’의 뒤섞임 속에서 소설 속 ‘마음짐승’이란 용어가 시사하듯 『위폐범들』에 등장한 것과 같은 부유하는 개체들이 혼재하는 실존적 위기의 상황을 소설은 그려낸다. 

『마음짐승』에서는, 아큐처럼 대표성을 갖는 개인이 아니라 『위폐범들』처럼 각자의 삶의 몫을 지고 각자의 실존적 고뇌를 감당하는 개인이 나온다. 『마음짐승』의 개인을 전체주의에서 고통받은 ‘대표성의 개인’으로 볼 수도 있을까. ‘마음짐승’은 개인별로 다르게 발현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마음은 아무래도 개인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일 공산이 크다. 그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지만 동시에 아쉬움의 요인이 된다. 전체주의의 폭력과 잔혹을 사회적인 범위에서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전체주의 국민국가 속 국민의 마음을 다뤘기에 불가피했으리라는 옹호 또한 가능하다. 어떤 마음은 대표성으로 수렴되는데, 어떤 마음은 개인을 떠나지 못한다. 고독이나 고통 같은 것들은 모두가 겪는 일이라 해도 항상 개별적 수준에서 경험되며, 따라서 개인의 시선으로 기술돼야 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마음짐승’이 아니라 ‘사회짐승’으로 그렸다면 소설의 결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984』나 『놀라운 신세계』에서는 ‘마음짐승’을 다루지 않는다. 시대정신이나 시대를 대표하는 유형을 다룬다. 개인의 문제, 개인의 실존을 다룬 『마음짐승』 같은 소설이 있어서 사회주의 혹은 전체주의 국민국가의 국민들을 그려내는 게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 싶다.

 

‘쇠우리’와 ‘쇠로 된 방’ 너머에서

근대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용어는 아마도 막스 베버의 ‘쇠우리(Iron Cage)’가 아닐까. 용어에서 이미 근대성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이 묻어나온다. 앞서 언급했듯, 루쉰도 쇠의 비유를 썼다. 

“만약에 말이네. 창문도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만든 방이 한 칸 있다고 치세. 거기에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네. 머지않아 숨이 막혀 죽을 거야. 하지만 깊이 잠이 든 상태이니 무슨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하겠지. 그런데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비교적 의식이 있는 몇 사람을 깨운다고 하세. 그러면 이 불행한 몇 사람은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느끼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자넨 그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쇠로 된 방의 비유는 탈출구가 없는 모델이다. 루쉰에게서 보이는 오리엔탈리즘의 잔영과 패배의식의 반영일까. 물론 쇠로 된 방은 철학적 모델로는 성립 가능하다. ‘시지프의 신화’처럼 인간존재의 원형적 모델로 보면 일리가 있다. ‘시지프의 신화’의 결론은 단순하다. 그저 묵묵하게 바위를 밀어라. 안 밀면 안 된다. ‘시지프의 신화’는 초역사적 지평에서 인간의 문제를 거론한다. 역사를 비껴가면 쇠로 된 방의 모델도 흥미로운 발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루쉰의 쇠로 된 방 모델은 철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라고 보이며, 역사적 지평을 염두에 뒀음이 명료하다. 그것은 희망 없는 희망을 헛되이 추구하는 자세, 그 비슷한 것이다. 루쉰은 앞선 인용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하지만 기왕에 몇 사람이라도 깨어나면 그 쇠로 된 방을 깨부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봉건사회 또는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한다. 근대화의 본질은 개발주의다. 개발과 발전을 피할 수 없기에 그러므로 근대성을 피할 수 없다. 하여 이제 세계인은 거의 모두 근대국가에서 살고 있다.

근대국가 혹은 국민국가 모델은 서구가 만든 발전표준으로, 아직 그 외의 발전경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모델만이 지구와 인류의 운명을 얽어매며 불가역적 방식으로 트랙에 올려져 있기에 현실적으로 다른 모델에 눈을 돌리기는 불가능하다. 세계는 이미 너무 연결되고 결합돼 근대화 및 개발 모델 외의 다른 독자적인 모델을 찾는 건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과도한 비용을 소요할 것이다. 무모한 시도이므로 기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누구나 알게 됐듯이 서구가 저작권을 가지고, 또 여전히 상당한 지배 및 영향력을 행사하는 근대성과 근대적 국민국가 모델의 해악은 확연하다. 베버가 쇠우리라고 예견한 억압과 질곡이, 가상의 공동체 속에서 개인으로만 존재하는 인간들을 질식시킨다. 

쇠우리 모델은 그래도 쇠로 된 방 모델보다는 낫다. 쇠우리에는 창살이 있으므로 그 사이로 바깥을 바라보고 호흡할 수 있다. 억척어멈이 살아간 30년 전쟁의 독일과 비교하면 누군가는 쇠우리를 천국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진단이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당대의 고통만을 생각하며 구체적이고 개별적 고통에서만 각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언제나 마르크스 같은 이들이 있어, 전면적이고 완전한 해방을 부르짖으며 이상향을 추구했다. 그러나 주지하듯 완전한 해방은 요원하며 현실에선 억압의 종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은 세상’이 아니라, ‘덜 나쁜 세상’을 찾는 과정이 삶이다. 

세상이 그렇다면 그런 세상과 겨루며 표현의 문제를 고민하는 문학은 차악에 만족하는 자아 인식에 머물게 될까. 쉽게 부인할 수 없다손 쳐도 직관적으로 그것이 정답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근대가 만들어낸 고통받는 개인과 소외된 자아는, 고통과 소외에도 불구하고 자기 한계를 부여하는 기능을 부여받지 못했다. 합리성으로 포장된 근대성의 무한한 욕망은 개별로서 존재하는 자아에게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복제했다. 자아는 고통과 소외로 점철되지만, 그 고통과 소외로 인해 완전한 ‘해방구’가 된다. ‘해방구’라는 형식은 근대성의 산물이지만, 해방구를 구성하는 내용은 탈근대적, 아니 초근대적이며 탈역사적이다. 그곳에서는 고통과 소외의 현상과 함께 루쉰이 말한 것과 같은 부질없는 희망과 꿈의 가능태가 있다. 그리하여 더 나은 세상, 더 가치 있는 인간을 꿈꾸기는 멈출 수 없으며 저지되지도 않는다. 이것이 근대성과 국민국가의 감옥이 가두지 못한 근대인의 정신이며, 우리는 문학과 사유를 통해 드물지만 그 성취를 목격하게 된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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