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나고,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걷어내야 하는가? 카르텔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시민 공화국을 상상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사람을 뽑고, 정당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이 나라의 권력의 구조, 정의의 실현, 연대의 원칙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권력은 봉사다. 우리가 카르텔 정권에서 잃어버린 가장 근본적인 정치 언어는 바로 ‘공복(公僕)’이라는 단어다. 공직자는 ‘국민의 종’이어야 한다는 말은, 그저 관료주의적 구호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초적 계약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권력은 봉사의 자리가 아니라 ‘카르텔 플랫폼’이 되었고, 정치는 자기를 위한 생존 기술이자 배타적 생태계가 되어버렸다. 서울대 법대, 고시, 로스쿨, 대형로펌, 모피아, 재벌, 국회…. 이 모든 경로는 권력의 내부를 순환하는 파이프라인이 되었고, 거기엔 시민의 삶과 분노가 개입할 자리가 없었다. 공복의 정신을 다시 가르치는 정치교육, 제도를 시민의 감시 아래 두는 통제장치, 권력의 윤리를 상시적으로 되묻는 문화가 필요하다. 즉, 정치의 회복은 윤리 이전에 문화의 문제다.
‘엘리트’ 카르텔은 지금까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삭제했다. 친일 반민특위 해산, 4.19 운동의 무력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 세월호 진상규명의 지연, 그리고 윤석열 정권의 내란 사태까지. 그들은 늘 “과거는 잊자”라고 말하며, 정의를 ‘시효’의 언어로 가두고, 공동체의 상처를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덮었다. 그러나 망각 위에 정의로운 사회는 세워질 수 없다. 기억은 분열이 아니라, 책임의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 부당한 지배에 저항한 이름들, 희생된 이들에 대한 기록, 불의에 맞섰던 시민들의 목소리를 공화국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헌법이 살아 숨 쉬는 사회이고, 그 기억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생물학적 DNA다.
제도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어도 사회가 차가우면, 공동체는 갈라진다. 엘리트 카르텔이 무너진 그 자리에 새로운 주거, 노동, 의료, 교육의 정의를 심어야 한다. 사회권의 확대는 더 이상 후순위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 해체 이후 반드시 따라야 할 사회 재구성의 첫 단계다.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존엄은, 더 이상 시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가 다시 태어났다는 증거이며, 공화국이 ‘국민의 삶’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징표다.
공화국이여, 다시 시작하라
권력은 무너졌지만, 새로운 공화국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윤석열 정권의 몰락은 ‘한 부패 정권의 실패’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으로서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허물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 공화국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 시작은 ‘엘리트’의 손이 아니라, 이 땅의 시민들이 품고 있는 오래된 분노, 그리고 그 분노에서 길어 올린 긴 호흡의 사유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나라를 세울 것이다. 기억 위에, 연대 위에, 정의 위에,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한 정치 위에 카르텔(cartel)이라는 용어는 흔히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유경쟁을 제한하고 이윤을 담합하는 경제적 결탁 구조를 뜻하는 말로 자리 잡았으나, 우리 사회에서는 보다 다층적이고 정치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단순히 시장 독과점이 아닌, 권력의 담합과 부패를 드러내는 핵심 은어로 기능하는 것이다.
한국의 카르텔은 정치, 경제, 사법, 언론, 관료, 심지어 교육에까지 깊이 침투한 그물망이다. 이 거미줄은 학벌·지연·혼맥·업연·혈연으로 실타래처럼 엮여 있으며, 자신들의 내부를 향해서는 단단히 결속되고, 외부에 대해서는 냉혹한 배제의 논리로 작동한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이러한 카르텔 네트워크는 자신들이 지닌 기득권의 특권적 비대칭성을 감추기 위해, ‘좌파 카르텔’, ‘종북 카르텔’, ‘노조 카르텔’이라는 딱지를 반대 세력에게 붙이는 이념 전쟁을 벌인다. 타인을 악마화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이 위험한 정치 전략은, 역사의 오래된 수법이자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형이다.
윤석열 정권은 ‘자유’, ‘공정’, ‘법치’를 외쳤지만, 실상은 그 슬로건이 가장 심각하게 유린된 정권이었다. 수사기관은 정권 반대자에 대한 표적 수사와 먼지털이식 압수수색을 반복했고, 대표적 사례로 조국 전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와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를 향한 376회 압수수색이 있었다.
반면 대통령 가족, 나경원, 한동훈, 심우정 등 권력층 가족의 허물은 검찰권의 그늘 아래 은폐되었다. 공정한 법 집행은커녕, 법은 권력의 도구로 전락했고, 검찰은 정치의 심복이 되었다. 이른바 ‘검찰 공화국’의 실체는 결국 국가를 사유화한 엘리트 카르텔의 본질을 드러낸다.
특히 탄핵 정국에서 드러난 ‘법조 카르텔’과 ‘언론 카르텔’의 협업은 실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모피아 출신 총리와 부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호칭 속에서 기회주의적 침묵을 지켰고, 보수언론은 시민항쟁의 진실을 외면한 채 정권의 피난처 역할을 자임했다. 진실이 아닌, 권력의 입장에 서 있었다. 언론은 윤석열 정권의 폭주를 보도하지 않았다.
유력 대선주자에 대한 수백 회의 압수수색을 생중계하면서도, 그것이 ‘정치 수사’라는 의문은 제기하지 않았다. 내란이 시작될 때, 계엄 문건이 떠돌 때, 언론은 침묵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방패였다. 그들은 검찰의 공소장을 ‘단독 보도’로 둔갑시키고, 권력자의 발언을 ‘팩트’처럼 받아썼다. 그리하여 기자는 언론인이 아니라, 정권의 속기사가 되었고, 보도는 진실이 아니라 기득권의 통지문이 되었다. 그 속에서 진실은 갇혔다.
시민은 눈을 잃었고, 민주주의는 귀를 잃었다. 언론 카르텔은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름에도 정권 유지를 위한 하나의 담합된 기계로 작동했다. ‘보도하지 않음’으로, ‘말하지 않음’으로, ‘묻지 않음’으로 권력을 지켰다. 그것이 침묵의 기술이었다. 그 기술은 진실을 잘라냈고, 국민을 의도적으로 무지의 늪에 빠뜨렸다.
언론 개혁은 이제 삶의 문제다. 공영방송의 독립성 확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 주권’의 문제인 것이다. 검찰과의 익명 브리핑을 폐지하고, 편집권 독립과 내부 고발자 보호법을 강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이 뉴스의 주인이 되는 문화적 전환이다. 뉴스를 구독하는 사람은 정보를 선택할 권리가 있는 동시에, 그 매체의 공정성과 윤리를 감시할 책임도 가진다.
언론이 권력에 대한 감시자가 되려면, 먼저 시민이 언론에 대한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독립언론, 대안언론, 지역언론, 전문언론…. 그 모든 생태계가 복원될 때, 우리는 다시 진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진실의 이름으로, 그리고 침묵의 공동정범이 아닌, 기억의 기록자로서. 진실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을 회피하면, 카르텔 정권의 권력이 또다시 부활한다. 시민들의 감시가 반드시 필요한 카르텔 권력의 주요 파이프라인으로 대형 법무법인과 사법기관을 빼놓지 않을 수 없다. 김앤장 변호사 집단은 정치 법률 엘리트들의 외곽 조직처럼 정권 유지를 지원했고, 헌재와 법원은 카르텔 내부의 규범에 충실했다.
기득권은 거미줄처럼 엮여 서로의 낙하산을 보장하고, 보복을 두려워한 침묵의 연대 속에서 민주주의의 심장은 서서히 멎어갔다. 더욱 가관인 것은 정권이 카르텔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카르텔 척결’을 외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대상은 재벌도, 검찰도, 모피아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던 공기업들이었다. 수자원공사, LH, 한전 등 공공기관들이 희생양으로 지목되고, 수많은 직원들이 ‘도덕적 해이’라는 이름으로 윽박을 받았다. 이는 폭력적인 전가(轉嫁)의 정치학이자, 고의적 왜곡을 통해 진짜 카르텔 세력을 숨기려는 권력의 ‘연막작전’이었다. 카르텔의 정점에 있던 탐욕의 권력자는 물러났으나, 그가 대리인으로 내세운 공기업 CEO들과 사병화한 사정기관은 구체적인 물증 없이 여전히 직원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대선 이후 새 정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단연 카르텔 해체다. 문재인 정부에서 미완으로 남은 검찰개혁과 재정관료 카르텔 개혁은 이제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기획재정부는 예산 편성과 정책 기획이라는 두 권력을 모두 쥔 채 ‘부처 위의 부처’로 군림해왔다. 이들은 퇴직 후 대기업, 금융사, 로펌으로 이동해 다시 국가를 통제하는 그물망을 구축한다. ‘모피아’라는 경멸 섞인 별칭은 단순한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구조적 현실의 명명이다.
민주당은 기재부를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로 분리하는 구상을 제시하고 있다. 예산 편성 기능을 국무총리실 또는 대통령실 산하로 이관하고, 나머지 정책과 금융 기능은 재정경제부로 이관함으로써 모피아의 권한 집중을 분산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행정조직 개편이 아니라, 예산권과 정책권의 상호 감시 체제를 복원하겠다는 민주주의 구조 개혁이다.
검찰 역시 마찬가지다. 기소권과 수사권의 분리는 더 이상 논쟁의 영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기본 조건이다. 독점된 수사권은 정치적 기획수사로 변질되었고, 윤석열 정권 하 검찰은 권력의 방패이자 창이 되었다. 이제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공소청, 중대범죄수사청을 통한 권력 분산형 수사시스템 구축이 요구된다.
이러한 개혁은 단지 제도 개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자존심이며, 민주주의의 회복이다. 윤석열 정권이 남긴 것은 더럽혀진 헌정 질서와 법치의 왜곡, 그리고 국민에 대한 배반이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도 ‘카르텔 척결’이라는 구호는 여전히 그들 입에서 반복된다. 좌파 카르텔, 노조 카르텔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념 공세의 구호로 말이다. 자신들이야말로 그 정점에 있었음을 끝내 인정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이제는 시민이 응답해야 한다. 카르텔을 파괴하는 것은 선출 권력의 몫만이 아니다. 권력과 제도의 구조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은 시민들의 정치적 책임이며 윤리적 권한이다. 대선 이후 우리는 다시 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엘리트의 공화국에 살 것인가, 아니면 시민의 공화국에 살 것인가. 그 균열의 시작은 지금이다.
글·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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