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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의 문화톡톡] 소셜미디어가 해체한 탈근대적 진실
[김소영의 문화톡톡] 소셜미디어가 해체한 탈근대적 진실
  • 김소영(문화평론가)
  • 승인 2025.05.30 1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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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역사 시대의 기술 이미지가 만들어 낸 소셜미디어

세상은 탈근대적 해체로, 사고는 근대적 이분법으로

한반도, 대한민국이 마치 반으로 쪼개진 것만 같다. 진보와 보수, 호남과 영남, 좌익과 우익 등. 이처럼 꽤 익숙한 양분화된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두 요소가 대등한 관계에서 변증법적인 합을 이룬다면, 그러한 이분법적 대립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무찔러야 하는 ‘적’이 되어버렸다. 

21세기를 탈근대 시대로 호명하지만, 인간 이성이 낳은 과학적 산물로 인해 모든 것이 이분화되었던 근대 시대보다 나을 게 없어 보인다. 세상은 차이를 존중하는 탈근대적 해체를 외치지만, 사고는 여전히 아니 더욱 강하게 근대적 이분법을 수호하는 듯하다. 작금의 이러한 양상을 부추기는 것 중 하나가 소셜미디어(social media)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무엇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사고하는가? 온종일 손에 쥔 스마트폰 속 소셜미디어의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 그야말로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온라인에서 생산되는 정보에 대한 해독과 소통 능력을 의미하는 디지털 리터러시는 개인적 일상뿐 아니라 집단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인간 행위와 밀접하게 연동되기 때문이다.

 

탈역사 시대의 기술 이미지가 만들어 낸 소셜미디어

미디어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으며, 지금도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체코 출신의 매체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인류의 역사를 ‘전역사, 역사, 탈역사’ 시대로 구분하고, 각 시대를 ‘그림, 문자, 기술 이미지’라는 코드의 발전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코드가 선사 시대의 그림, 역사 시대의 문자, 탈역사 시대의 기술 이미지로 변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해당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코드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자, 그것을 매개하는 새로운 코드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플루서에 따르면, 이 시대의 범람하는 기술 이미지는 선사 시대의 그림에 대한 우상 숭배와 역사 시대의 이해하기 힘든 불투명한 텍스트를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코드이다. 기술적 형상, 기술적 그림 등으로 번역되는 기술 이미지는 쉽게 말해 디지털로 생산되는 모든 이미지를 뜻한다. 

한편 현대인에게 익숙한 단어 중 하나가 소셜미디어이다. 위키백과에는 소셜미디어가 “개방, 참여, 공유의 가치로 요약되는 웹 2.0 시대의 도래에 소셜 네트워크의 기반 위에서 개인의 생각이나 의견, 경험, 정보 등을 서로 공유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생성 또는 확장시킬 수 있는 개방화된 온라인 플랫폼을 의미한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요약하면 인터넷의 등장으로 탄생한 소셜 네트워크 기반의 온라인 플랫폼을 말한다.

그런데 곧이어 설명된 글이 인상적이다. 바로 “일종의 유기체처럼 성장하기 때문에”라는 표현이다. 소셜미디어가 유기체처럼 자기-성장 혹은 자가-생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 함의를 갖겠지만, 디지털 콘텐츠를 생산 및 공유하는 과정에서 창발성(emergency)을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셜미디어는 최근 젊은 세대들이 많이 사용하는 인스타그램(Instagram)과 유튜브(YouTube)를 비롯한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포괄하는 용어로, 다수의 대상과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렇다면 왜 ‘소셜’ 미디어인가?

도구라는 일차적 의미를 지닌 미디어는 작용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 이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의 『수학적 커뮤니케이션 이론(A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1963)에서는 송신자가 채널을 통해 메시지를 수신자로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커뮤니케이션은 단수가 아닌 복수의 사람들이 미디어를 사용하여 수행하는 의사 전달 과정이다. 그렇다면 굳이 미디어 앞에 ‘소셜’을 붙인 소셜미디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소셜미디어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인터넷 미디어 플랫폼이다. 인터넷이 야기한 초시공간성은 국적, 계급, 성별 등의 경계를 허무는 전 인류의 동시적 커뮤니케이션을 성취해 냈다. 물론 지역 신문의 장소성을 뛰어넘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출현도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나, 디지털 플랫폼의 다양한 소셜미디어는 시간이라는 제약까지 극복하면서 탈영토적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또 다른 거대한 ‘사회’를 형성하였으니, 그것은 가히 ‘사회적’ 미디어, 즉 소셜미디어라 할 만하다. 

 

SNS의 기능, 일상의 공유로부터 경제적 수단으로

우리는 매일 0과 1의 비트 이미지로 얼마나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가? 사실상 현대인은 스마트폰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조그마한 기계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 기계는 나의 정보뿐 아니라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비물리적 공간이자, 나와 타자가 얽혀 있는 일종의 사회적 장소이기도 하다. 

다시 소셜미디어로 돌아가서, 최근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살펴보자.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소셜미디어의 대표 격인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는 근래에 들어 주목할 만한 특정 양상을 보이며 그 기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주로 사진을 탑재하기 위해 사용된 인스타그램은 개인의 상업적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자신의 취향이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소통과 거래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 또 다른 자본의 장(場)

인스타그램보다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올릴 수 있는 유튜브는 어떠한가? 2005년 서비스를 시작한 유튜브는 현재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동영상 공유 사이트로, 사용자가 직접 영상을 제작·업로드·공유하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튜브의 개인 채널 역시 특정한 양상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창기 유튜버들은 일반인 위주였던 반면, 근래 들어 가수나 배우 혹은 요리사나 정치인 등을 비롯한 유명한 셀럽(celebrity)들이 개인 채널을 개설하고 있다. 이러한 채널들은 기존의 팬들을 일차적으로 자신의 온라인 공동체 안으로 흡수할 뿐만 아니라, 디지털 미디어의 개방형 네트워크와 알고리즘의 특성을 통해 다른 구독자들도 빠른 시간에 끌어들이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그들의 유튜브 채널에 다른 셀럽을 초청하면서 팬들의 상호 접속 및 공유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해당 유튜버와 지인 간의 만남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채널의 이러한 활용으로 인해 소셜미디어가 그들만의 새로운 사회자본을 형성하는 장(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작 영화가 나오면, 출연 배우나 감독이 셀럽들의 각 채널에 동시다발적으로 출연하여 그 영화를 홍보한다. 짐작 가능하듯, 이러한 콘텐츠는 해당 영화와 출연자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지며, 자연스럽게 구독자의 호감을 불러일으켜 영화의 관람 행위로도 이어진다. 

프랑스의 문화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유명한 저서 『구별짓기: 판단의 사회적 비판(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1979)은 1960년대 프랑스 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한 경험적·실증적 연구이다. 자본과 계급으로부터 문화와 계층으로의 연결고리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는데 여전히 인용되고 있다. 특히 부르디외 이론의 핵심 개념인 아비투스(habitus)와 장(le champ)은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이라는 탈영토적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경제자본(economic capital)’,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사회자본(social capital)’으로 나뉜 그의 자본론은 소셜미디어에 나타난 현상을 해석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서로 다른 생활 조건으로 생산된 집단적 실천인 아비투스와 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형성되는 여러 장들이 최근 들어 소셜미디어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물리적인 공간의 다양한 장들이 대부분 온라인 공간에도 존재하며, 현대인은 이러한 탈영토적 공간에서 노동과 향유를 동시에 즐기는, 이른바 디지털 호모 파베르이자 디지털 호모 루덴스로 살아가고 있다. 

놓치지 말아야 점은 최근 들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채널이 특정한 아비투스와 장을 형성하면서 자본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문학장, 정치장, 경제장, 문화장, 예술장 등으로 구분되는 부르디외의 장들은 유튜브 채널의 주체, 즉 유튜버의 능력에 따라 그 기능이 결정된다. 초창기에는 개인의 취미나 일상을 보여주는 채널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각 장의 형태가 여러 유튜브 채널로 양산되고 있다. 

이러한 장들은 일정한 공통의 아비투스를 토대로 형성되지만, 부르디외가 주장했듯 그러한 장들은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과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y)을 지니므로, 긍정적·부정적 기능이 동시에 존재함을 유의해야 한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미디어는 자본이다.

익히 알고 있듯 구글, 네이버, 카카오톡 등을 비롯한 거대 미디어 플랫폼을 소유한 기업들은 전통적인 미디어 기능을 전방위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바야흐로 자본의 쟁취는 디지털 미디어 없이는 불가능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그 유명한 명제 “미디어는 메시지다”가 작금의 시대에 들어 “미디어는 자본이다”로 변주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셜미디어 역시 소셜 캐피털이라 할 수 있다. 물리적 영토의 사회자본이 소셜미디어의 소셜 캐피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소셜미디어가 만들어 낸 사회자본은 경제자본이나 문화자본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기술 중심 시대를 뒤엎고 있는 소셜미디어에 유의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자본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중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운명이겠으나, 기술 이미지가 만든 그 세계는 더 이상 초월적 가상세계가 아니라 일상적 현실세계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셜미디어의 진정한 주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정치·사회·경제적 전쟁‘들’을 지속해서 주시해야 할 것이다. 

 

글·김소영
문화평론가 겸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교수. 기술 중심의 탈경계적 대중문화에 관한 학제 간 연구를 수행 중이다. 한국영화학회 국제학술상임이사와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이사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국브레히트학회 공연이사 및 『영화연구』 편집위원과 『스토리콘텐츠』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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