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호 구매하기
미·중 간 틈새에 놓인 차기 정부의 ‘선택’
미·중 간 틈새에 놓인 차기 정부의 ‘선택’
  • 성일권(<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5.05.30 18: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때 세계화는 모두에게 기회의 땅처럼 여겨졌다. 값싼 노동력, 빠른 기술 확산, 무한한 시장. 하지만 지금 세계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디커플링(공급망 차단), 리쇼어링(해외 생산기지 복귀) 같은 흐름 속에서 세계화는 스스로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도 그렇다. 겉으로는 무역적자와 산업 패권 싸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21세기 자본주의 체제의 균열과 문명적 혼란이 자리하고 있다. 2025년 5월 12일 제네바에서 발표된 미·중 3개월 휴전은 이 복잡한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한쪽은 자급자족 신화를 되살리려는 중국, 다른 쪽은 보호무역 망령에 빠진 미국. 그러나 이 싸움의 불똥은 결국 한국 같은 중견국으로 튀어온다.

 

‘디커플링’이라는 착각

‘탈중국’, ‘자유세계’ 같은 단순한 구호는 현실을 가리지 못한다. 초국적 자본은 언제나 국경을 넘고, 기술과 정보는 장벽 따위로 가둘 수 없다. 미국이 말하는 디커플링은 결국 스스로의 불안한 산업기반을 중국이라는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일 뿐이다.

트럼프가 관세를 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 러스트 벨트(쇠락한 산업지대)의 몰락은 중국 때문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자국 산업을 해체한 결과다. 그 책임을 외부로 떠넘기는 것이 관세다.

중국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국가 주도의 장기계획으로 성장했다. 한국은 다르다. 식민지 근대화의 잔재 위에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덧씌워진 복합적인 구조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단순한 ‘균형 외교’가 아니라, 세계체제 속에서 스스로 위치를 정립하는 새로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다. 한국이 ‘중간지대’에 있는 한 선택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담론의 힘, 그리고 그걸 뒷받침할 수 있는 산업·기술·지식의 자생력이다.

 

기술주권과 글로벌 자본의 틀을 깨는 길

공급망 다변화, 기술 자립 같은 말은 익숙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한국의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 산업이 세계적이라 해도 설계와 표준은 미국이, 대량 생산과 확장은 중국이 쥐고 있다. 자립했다고 믿지만 사실 글로벌 자본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셈이다.

한국이 진짜 기술주권을 확보하려면, 글로벌 가치사슬의 포로가 아닌 로컬 기술생태계에서 출발하는 혁신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단순한 산업정책을 넘어 한국 사회의 자율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정치적 선언이어야 한다.

AI는 더 이상 기술 발전의 수단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 사고, 존재 그 자체를 바꾸는 힘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은 AI를 국가안보 무기로, 중국은 디지털 통제수단으로 사용한다. 한국은 이들 사이에서 인간 중심의 기술 주체라는 제3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AI와 인간의 공존을 위해서는 철학적·윤리적 기준을 세우고, 이를 산업·노동·교육 전반에 반영하는 개혁이 필요하다. 기술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다움의 깊이를 기준 삼는 전환이 한국이 나아갈 길이다.

 

자본의 요구를 넘어 사유의 패러다임으로

지금 대학은 더 이상 비판적 지성의 전당이 아니다. 기업 인력 양성소로 변질됐다. 그러나 기술혁신과 사회적 위기, 문명적 전환 속에서 필요한 것은 지식의 자율성, 깊이 있는 사유, 비판적 상상력이다. 한국형 대학 개혁은 산학협력을 넘어서야 한다. 시민적 교양, 융합적 사고,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는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이는 산업 경쟁력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산업의 방향성과 가치를 재구성하는 핵심 동력이 된다.

미중 무역전쟁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다. 21세기 문명 전환기의 거대한 담론 전쟁이다.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도,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도 아닌, 한국 스스로의 논리와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 차기 정부는 선택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이 세계체제 속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