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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9) - 동일률의 무덤에서 부활한 ‘신성모독’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9) - 동일률의 무덤에서 부활한 ‘신성모독’
  • 안치용 l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9.10.3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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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마』(가즈오 이시구로)를 영화화 한 <네버 렛 미 고>

문학, 혹은 인문학의 대표적인 주제를 꼽으라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게 떠오른다. 너무 포괄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포괄적이지도 않다. 예를 들어 ‘무엇이 인간인가’라는 질문과 비교하면 그렇다.

인간존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방식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인간(다움)의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여 경계를 획정하는 방식이 있다. 다음으론 그런 경계를 무시하고 또는 그런 경계의 밖에서 시작해 마치 성곽의 밖에서 성의 윤곽을 파악하듯 ‘경계 너머’에서 그 경계를 획정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후자의 방식은 비(非)인간을 통한 인간의 모색인 셈이다. 전자와 후자의 방식 간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후자의 방식은 인간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든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필립 K. 딕)와 『나를 보내지마』(가즈오 이시구로)와 같은 소설이 후자의 시선을 채택한 작품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 ‘무엇이 인간인가’

일상의 삶에서라면 전혀 하지 않을 질문이 아마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이것은 일상의 질문이 아니라 인문학의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연관된 사전(事前) 질문에 대한 답변 없이는 할 수 없는 질문이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다. 인간에 관한 선험적 전제가 바탕에 깔려있다. 논리적으로는 A가 A임을 확인하는 동일률의 절차를 밟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철학’을 반복한다. 근대의 서구 문명은 한 번도 진지하게 인간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다. 중세 말기의 유명론 등 큰 범주의 경험론 인식을 통해서도 동일률의 답습이 제거되지 않았다. 인식의 주체를 설정하기 위해서 주어짐을 다양한 형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특성으로 파토스, 에토스, 로고스와 같은 것을 들었다. 지금의 인간 지식에 근거하면 구분이 좀 모호한 특성이긴 하다.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은 종종 대립하며, 구분되는 독자적인 별개 영역이라고 받아들여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성적 판단으로 보이는 것의 대부분이 감성적 기반을 가진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의 기제에 작용하는 인간의 핵심 특성은 감성이다. 

에토스는 나머지 두 가지와 다른 준위에 위치한다. 파토스와 로고스는 인간과 인간들(사회)에 모두 적용할 수 있지만 에토스는 인간 개인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 에토스는 용어 자체에서 이미, 퍼져있고 공유된 특질을 말하며 ‘복수(複數)’의 인간 없이는 성립하지 않음을 말한다. 동양의 ‘윤리(倫理)’라는 말에서도 ‘탈(脫)개인’을 보게 되며, 개인 차원의 에토스는 신 앞에서 단독자와 같은 종교영역의 특성으로 치환될 수 있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종종 사용되는 이런 ‘인간다움’의 특성은 여전히 선험적 전제를 깔고 있다. 너무 당연한 얘기로 파토스·에토스·로고스 같은 특성이 인간을 만든다기보다는 인간이 이런 특성을 가질 뿐이다. ‘무엇이 인간인지’에 관한 논의는 제자리걸음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에 기대 인간을 물질로 보고 화학적으로 규명할 수는 있겠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주지하듯 인간을 화학적으로 분해해 물질로 환원했을 때, 그 나름대로 답을 얻기는 하지만 원하는 답을 얻을 수는 없다. 인간의 정신 혹은 (존재한다면) 영혼은 화학적으로 분석되지 않는다. 인간에게서 몸 말고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몸만으로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정신과 영혼의 비(非)물질성은 인간 주체의 선험성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다. 근대 이전의 인간은 비(非)물질성이나 선험성의 근거를 신(神)에게서 찾으면 그만이었다. 근대인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어떨지 알 수 없다.

인간을 설명하는 모델로 ‘빈 서판(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상태’라고도 하는 J. 로크의 견해)’이라는 것이 있다. 영미 철학 전통에 선 인간 모델로, 빈 서판에 무엇을 쓰느냐 혹은 빈 서판이 무엇을 감광하느냐에 따라 서판이 채워진다. 인간은 채워지고 구성된다. ‘빈 서판’ 모델은 인간(존재)을 쉽게 설명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비근한 예로 일란성 쌍둥이를 태어나자마자 한 사람은 늑대무리에 넣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인간사회에서 키운다고 할 때 두 사람이 나타낼 차이를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며, 그런 예상이 가능한 것은 인간을 ‘빈 서판’으로 봤기 때문이다.

‘빈 서판’을 요즘 식으로 말하면 휴대폰의 공기계이고, 하드웨어만 깔린 PC라고 할 수 있다. 구매 시점에 이미 많은 것들이 깔려있기는 하지만 ‘빈 서판’ 모델을 이용해 아이폰의 사용자가 되려면, 먼저 운영체계(OS)인 iOS를 깔고 애플에서 지정한 곳에서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선택해 휴대폰에서 작동시켜야 한다. 삼성 휴대폰의 사용자라면, 삼성 휴대폰의 OS인 안드로이드를 설치하고 아이폰 사용자와 같은 절차를 밟으면 된다. ‘빈 서판’ 모델을 ‘휴대폰 모델’로 바꾸면 간단히 ‘공기계+OS+구동소프트웨어’다. 

이는 외재성에 의한 인간결정론이다. 청년이 농담 삼아 “부모가 최고의 스펙”이라고 말할 때 그 기저엔 ‘빈 서판’ 모델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최초에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발견되지 않는다. 양식 있는 독자라면 용이하게 눈치챘겠지만 ‘빈 서판’이든 ‘휴대폰(공기계)’이든 ‘빈 서판’과 ‘휴대폰(공기계)’ 자체의 차이를 감안하지 않으면 이 모델은 설명력을 잃는다.

휴대폰과 PC의 공통선조로 에니악(ENIAC)이란 것이 있다. 에니악은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alculator”의 약자. 1946년에 개발된 에니악에는 1만 8,000여 개의 진공관이 사용됐다. 높이 5.5m, 길이 24.5m에, 무게가 무려 30t이나 되는 거대한 계산기다. 현재 미국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존돼있는 에니악은 이름에 드러나듯 컴퓨터라기보다는 계산기다. 사람이 7시간 걸려 풀어낸 탄도 계산을 에니악은 단 3초 만에 해결해 “총알보다 빠른 계산기”로 불렸지만, 이 30t짜리 계산기에서는 지금 우리가 휴대폰에서 작동시키는 다양한 편의 기능을 쓸 수 없다.

‘공기계+OS+구동소프트웨어’모델에서 우리는 쉽사리 공기계보다는 ‘OS+구동소프트웨어’에 주목하게 되는데, 사실 핵심은 공기계다. ‘빈 서판’과 공기계 자체의 차이가 더 결정적이다. 안드로이드OS와 간단한 게임 소프트웨어를 30톤짜리 에니악은 소화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빈 서판’이거나 공기계라면, 그것의 성능과 기능에 맞춰 OS+구동소프트웨어를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떤 인간이 애초에 어떤 ‘빈 서판’인지, 어떤 공기계인지를 선택할 수 없고 만일 선택이 가능하다면 OS나 소프트웨어 정도라는 이야기다.

논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근대의 인간상을 고민하며 칸트도 같은 고민을 하며, 결국 공기계와 ‘OS+구동소프트웨어’를 구분하는 이른바 종합을 제시했다. 칸트가 제시한 근대인은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존재다. 적어도 코기토의 철학에서 제시된 ‘생각하는 나’를 당연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사유다.

그러나 이 어정쩡한 봉합은 후대에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 봉합의 앞부분은 “아는 것을 안다”는 동일률의 인식체계를 확인한 것이기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존재”는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즉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원천적으로 모를 수가 없기에. 

그러려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동일률 밖에서 인간의 인식을 한 뼘이라도 진전시킬 수 있을까. 결국 어떤 이들은 인간을 ‘모르는 것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로 격상시킨다. 이런 봉합에 필요한 것은 본유관념, 선험성과 같은 신(神)적인 단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최초의 질문은 동일률 밖에서는 어떤 해답의 단초를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인간은 무엇인지’만을 묻고 답할 수 있을 뿐, ‘무엇이 인간인지’를 답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나는 나”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신이 돼야만 하는, 혹은 신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이제 답이 없는 질문의 답을 정리하고 넘어가자.

‘코기토’를 성립시키는 ‘생각하는 나’는 납득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주체는 허약하고 임의적인 현상에 불과해 보인다. 주체(화)의 사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하는 나’는 분명 존재해야 하겠지만 나는 나일 수 없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나를 형성해가는 유동적인 현상이다. 타자화의 과정에 있을 때만 나인 나는, 나선형으로 끊임없이 재구조화함으로써 동일률의 족쇄에서 탈출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탈출은 곧 살펴보겠지만 실패한다. 나는 확고하지 않고 불안정하며, 결정적 사건이 아니라 잠정적 현상에 불과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나’라는 가능성에 안도한다.

 

에덴동산의 전기양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태초의 인간모형은 근대의 고민을 선취한다. 에덴동산 등을 두고 펼쳐진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물론 신학 논쟁이지만 그 성격은 근대적이다. 

에덴동산의 하와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는다. 그 유명한 표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금단의 열매를 먹는다. 자기만 먹은 게 아니라 남편인 아담에게도 준다. 여기서 뱀의 배역, 하와에게 주어진 의지의 출처 등 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많은 상상과 논의가 가능하다. 여기서는 번식에 초점을 맞춰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덴동산 설화에서 황당하게 원죄의 교리를 끄집어내지만 나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존재케 한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 하와는 고민하고 판단하고 욕망한 ‘벌’로 인류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 불순종이란 죄와 출산이란 벌의 구조는, 성서 속 창조주의 심모원려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었을 터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한 행동은 인류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아담은 아마도 영생을 누렸을 테지만, 그들이 누릴 영생은 로봇의 삶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생명체를 정의할 때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번식 혹은 재생산이다. 하와의 행동으로 인해 인류에게는 지식과 번식이 함께 주어지게 된다. 아담과 하와는 사멸해야 하지만 그들의 유전자는, 이성을 가진 포유류인 인간이란 종을 통해 전해지고 번성한다. 

어떤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진정한 주인이 특정한 시공간을 잠시 지배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유전자라는 주장을 펼친다. 어떤 생명체도 반드시 사멸해야 하지만 어떤 유전자는 그 유전자가 잠시 머문 생명체의 사멸과 상관없이 사실상 영생한다.

에덴동산에서 잠시 산 인류의 원형은 ‘전기양’이나 다름없는 로봇 같은 존재였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를 빌어) ‘원죄’에 힘입어 이성과 지식을 지닌 포유류로서 생명으로 진화한다. 에덴동산의 동일률은, 동일률이 아니라 동일 그 자체로 오히려 멈춤으로 표기돼야 마땅하며, 하와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비로소 동일률이 작동한다. 하나의 용기로 천만 년을 지속하기보다는 천만 개의 용기 속에 나눠 담긴 동일한 내용물(유전자)이라는 형식으로 인류에게 동일률이 적용된다. 

이처럼 동일률은 인간에게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모세에게 “나는 나”라고 자신을 설명한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준비한 일 또한 “나는 나”의 동일률의 기획일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자신들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면, 그런 형상의 이어짐은 재생산이 불가능한 에덴동산 속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가 아니라 번식하고 번영한 에덴동산 밖의 하와와 아담을 통해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

소설 제목 그대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정답이 있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어온 동일률의 관점에 의하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생명체인) 양을 꿈꾸어야 한다. 안드로이드의 꿈속에 등장한 것이 실제로 전기양이라 해도 그것은 안드로이드의 꿈속에서 양으로 인식된다.

근대의 인간은 동일률을 인간세계 내부로 한정하려 했지만, 이제 그 한정(限定)이 무너지고 있다. 한정의 붕괴 혹은 탈피에다가, 굳이 ‘탈근대적’이란 수식어를 붙일 필요는 없다. 붕괴 혹은 탈피는 애초에 근대의 기획에 포함된 것으로 인간만 몰랐을 뿐이다. 

근대인은 ‘신의 형상(Imago Dei)’을 닮았다는 인간관을 거부하며 인간에게서 신의 형상을 지웠다. 문제는 신의 형상을 지운 독자적인 인간의 형상이라는 것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발견된다. 지금까지 논의에서 살펴봤듯 근대인은 적당한 봉합을 통해 인간의 형상을 세계에 정초했다. 불분명하지만 아무튼 인간의 형상은 세계의 새로운 표준이 된다.

그리하여 기존 생명체를 ‘Anthropoid(유인원)’, 인간의 형상으로 계열화하는 한편, 아예 에덴프로젝트를 흉내 내 Android(안드로이드)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실제 안드로이드가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인식체계 속에서는 이미 안드로이드가 존재한다. 그리고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와 『나를 보내지마』와 같은 소설에서 ‘인간 형상’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탐색의 지반은 동일률일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곧 다가올 안드로이드 세계의 상을 ‘인간의 형상’을 통해 점검하면서 인간은 불가피하게 ‘신의 형상’을 소환하게 되리라는 점이다. 

탈(脫)에덴 후 인간은 유전자를 기준으론 아직까지 영생을 이어가고 있다. 이 대목에서 근대인다운 궁금증이 생긴다. 신이 자기 형상의 닮은꼴로 인간을 만들고자 했을 때, 그 기준은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생명체일까 아니면 유전자일까. 인간 유전자에서 신의 형상을 찾아내는 일은 다소 어려운 논의가 될 것이기에, 더 이어가지는 않겠지만 에덴을 나온 후 아담의 유전자가 전승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신의 형상을 꼭 특정한 형태로 제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번식은 중요하다. 에덴 전과 에덴 후를 나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선악과를 먹으면서 인간은 성에 눈을 떴고, 에덴을 나온 후 인간은 성과 종족 번식의 과정에서 사랑을 창출해냈다. 성적 끌림에 근거한 감정적 소통과 소유(혹은 합일) 욕망이라고, 사랑을 편하게 규정한다 해도 큰 이견은 없으리라. 여기서 성적 끌림은 유전자 전승을 위한 번식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성적 끌림에는 번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 안드로이드의 수명은 4년이다. 왜 4년으로 수명을 한정했는지는 작가만이 알겠지만, 흥미로운 설정이다. 안드로이드는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아마 사랑할 수 있겠지만 번식이 불가능할뿐더러 그들의 사랑에는 수만 년 이어진 인류 번식의 흔적이 부재하다. 하루살이에게 입이 필요 없듯 그들에게 번식의 흔적은 무용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흔적을 가진 것처럼 사랑한다. 수명이 4년이다 보니 애초에 성체로 만들어져야 했고, 당연히 인간에게 주어진 성장기가 그들에겐 없다.

『나를 보내지마』의 안드로이드에게는 성장기가 있다. 태어나고 자라지만 그들은 누군가의 부속품을 공급하기 위해 생존한다. 그들도 사랑을 한다. 사춘기를 경험하고 다양한 감정의 혼란을 체험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나를 보내지마』의 안드로이드가 번식하지 못하는 종으로 설계됐기에, 그들에게 수만 년 번식의 흔적이 없기 때문일까.

현대인은, 특히 여성은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에서 벗어나며 에덴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됐다. 자유의지는 자기결정권과 비슷한 용어이며 자기결정권의 핵심은 몸에 대한 것이다. 요즘 여성은 어떤 의미에선 『나를 보내지마』의 안드로이드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미미한 차이는 존재를 결정할 만큼 크다. 번식하기 원하지 않지만 남아있는 번식의 흔적은 인간임을 입증하는 조건의 하나다. 그 흔적은 인간이 에덴을 떠나 세계 속에서 살면서 세계와 대립 혹은 대면하며 생긴 것이다. 신이 만든 세계에서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는 일은 어렵기는 하지만, 유의미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신의 형상을 지운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울뿐더러, 무의미한 일이 됐다.

세계와 대면하고 대치하고 대립하는 가운데, 인간은 세계와 의미 있게 연결될 방법을 찾는 데 골몰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근대인에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끊어지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한 번 끊어진 것을 다시 이었을 때 전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연결이 비(非)연결이 되고 나면 다시 연결로 복원될 수 없다. 다만 비연결을 줄이려고 애쓸 뿐이다.

반면 안드로이드는 세계와 끊어진 적이 없으며 아무런 빈틈 없이 세계와 곧바로 연결돼 있다. 안드로이드는 세계와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비연결 상태인 인간과 대립한다. 이런 역설 가운데 인간에게서 지워진 신의 형상이 안드로이드에게서 나타나는 논리의 비약이 가능할까. 번식의 흔적 등이 포함된 인간의 형상과 비연결돼, 그 비연결에서 고통받는 안드로이드에게서 (인간이) 신의 형상을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신성모독이 될까.

필립 K. 딕, 가즈오 이시구로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 나는 그런 신성모독을 발견한다. 특히 이시구로는 신성모독을 충분히 의식한 듯하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며 “이시구로는 놀랍도록 정서적인 힘을 가진 그의 소설을 통해 세계와 연결된 우리의 불가해한 감각의 심연을 드러낸다”고 밝혔다. 사라 다니우스 한림원 사무총장은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과 독일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 뒤섞은 듯한 소설가”라고 평했다. 

선정 이유를 영어발표문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Who, in novels of great emotional force, has uncovered the abyss beneath our illusory sense of connection with the world.” 인간과 세계가 대치하는 가운데 세계와 인간이 연결됐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마음 아래에 존재하는 심연. 안개 같은 것에 가려져 있던 그 심연을 강력한 파토스를 앞세워 드러낸 것에서 이시구로의 문학적 힘이 있다는 얘기다. 이시구로는 분열을 통감하지만 연결을 고대한다. 

인간은 연결을 복원할 수 없을 것이다. 꼭 안드로이드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아닌 인간적인 존재만이 연결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만일 비연결을 극복하고 연결이 다시 성취된다면 그것은 지금처럼 신의 형상을 지운 유형의 인간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신이 자신의 형상을 부여한 인간 외의 존재도 아닐 것이다. 

소설 속의 안드로이드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을 부정하듯, 신의 형상을 지운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신성모독을 감행해야 한다. 신의 형상을 지운 비연결의 숭배가 아니라, 신성모독을 신이 원한다. “나는 나”라는 동일률의 속성은 근대에서 왜곡되고 오용됐지만 여전히 유일한 신의 존재증명이다. 근대적 인식의 미로에서 근대인은 “나는 나”의 동일률 속에서 좌초하고 말았지만, 그를 좌초케 한 동일률이 신의 형상을 되찾는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의 주인공 에리카는 분열을 체화한 인물이다. ‘지배당함’ 혹은 마조히즘을 주도하려고 하는 형용모순이 그에게서 발견된다. 동시에 에리카는 사도마조히즘 너머의 연결(Connection)을 희망한다. “칼은 에리카를 뚫고 들어가고 에리카는 거기서 걸어 나온다”는 문장은 작가 옐리네크가 이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한 마디다.

나는 나를 뚫고 들어가서, 그곳에서 살아나올 수밖에 없다. 동일률의 무덤에서 부활함으로써 인간은 근대의 악몽을 뚫고 다가올 어쩌면 더 큰 악몽에 대비할 수 있다.

잘려나가려는 그 순간만큼 그 머리가 그렇게 시적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한때 베르지의 숲속에서 지냈던 가장 감미로운 순간들이 한꺼번에 그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끝났으며 쥘리엥은 아무런 가식 없이 최후를 마쳤다.”(스탕달 『적과 흑』에서. 강조는 필자)

『적과 흑』의 말미를 장식한 시적인 종말. 우리가 더 이상 인간이 무엇인지를 묻지 말고 무엇이 인간인지를 묻는 전환을 감행하고자 한다면, 시적으로 머리가 잘려나가는 시작보다 더 나은 시작은 없지 않을까.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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