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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미술 이야기] 형형색색 솜사탕 구름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한 검은 멜랑콜리의 봉우리들
[안치용의 미술 이야기] 형형색색 솜사탕 구름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한 검은 멜랑콜리의 봉우리들
  • 안치용
  • 승인 2023.10.0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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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정 작가, 영국 사치갤러리에서 10월 11~15일 전시회

<내 이름은 빨강>은 튀르키예의 저명한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으로 파묵의 작품 중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 제목을 딴 어느 화가의 전시회가 최근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내 이름은 빨강>이 미술을 소재로 한 소설이란 점이 이런 전시회 이름이 생기는 데에 영향을 줬을 법하다.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의 주요 소재가 원근법이다. 르네상스 시기 서양의 원근법을 수용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지금 용어로 튀르키예 화단이 둘로 나뉘어 대립하는 게 소설의 간단한 내용이다. 그 일로 살인까지 발생한다.

이제 원근법이 회화에서 종종 무시되기에 소설 속 이야기가 격세지감이다.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예술관에 따라 화가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때로 여러 개 시선과 소실점이 한 화폭 안에 공존한다. 특별히 근대 어느 시점에 집요하게 모색된 경계 허물기는 그 이전의 모든 예술적 탐색과 함께 현대 미술에 두루 유산으로 상속됐다. 소설 <내 이름은 빨강> 등장인물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문제가 극복되고 또 극복됐고, 극복되는 많은 치열한 과정을 남겼기에 현대 화가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데 상당한 자유를 누린다. 지금 어떤 작가가 특별히 어떤 사조의 그늘 안에 있다고 평가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LOVE(2301), 30S(72.7x72.7), Mixed media on canvas, 2023
LOVE(2301), 30S(72.7x72.7), Mixed media on canvas, 2023

 

서두가 길었다. 영국 사치갤러리에서 1011~15일 전시회를 여는 강혜정 작가의 작품을 보면 언뜻 유산을 떠올릴 법하기에 든 생각이다. 특별히 누구, 어떤 사조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를 따지는 건 가능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 ‘의식의 흐름이 버지니아 울프 같은 소설가가 활동할 땐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적 기법이었지만, 지금 의식의 흐름을 안 쓰는 소설을 찾기가 드문 상황과 비슷하다. 동시에 유산과 함께 자유가 느껴진다.

사치 갤러리(The Saatchi Gallery)는 런던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트렌디하다는 첼시에 위치한, 현재 세계 현대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설 미술관이다.

이번에 사치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16개 작품은 모두 2023년에 그렸다. 강 작가의 최근 작품 경향을 잘 반영한다. 무엇보다 왕성한 작품활동에 놀라게 된다. 전시 작품은 공통적으로, 강렬한 색감이 캔버스의 중심을 지배하는 가운데 보일 듯 말 듯 한 무채색의 존재 성찰을 욱여넣어 현대인 삶의 일단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발랄하고 HIP한 분위기가 화폭에 가득하기에 어쩌면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저변에 멜랑콜리가 자리한다. 우수라고 표현해도 무방하겠지만, 우울에 매력을 더해야 멜랑콜리가 된다는 수전 손택의 그 멜랑콜리가 느껴진 까닭에 강 작가의 이번 작품들을 관통하는 정서를 멜랑콜리라고 부르는 게 적합해 보인다. 여기에서 느껴진 멜랑콜리는 짙은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일 듯 말 듯 한 검은 산들의 봉우리를 조감함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구름은 알로록달로록 형형색색의 솜사탕이라고 해야 하겠다.

Eunoia _53cm×40.9cm_10P_2023년_Mixed  media on canvas
Eunoia _53cm×40.9cm_10P_2023년_Mixed media on canvas

 

따라서 그의 그림에 만연한 것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모종의 분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보기에는심각한 분열이 아니다. 예리하게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 분열은, 삼킬 듯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괴물 같은 게 아니다. 전장의 특수부대원 몸에 있는 흔적처럼 찢겼다 붙은 채이고 어떤 틈은 외형상 벌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간단한 응급조치로 봉합돼 있다.

자꾸 보면 보기와 달리 분열이 미미한 수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익숙하게 또 일상적으로 봉합해 내기에 현대인은 분열보다 봉합된 상태를 대면하는 게 편하다. 비비드한 봉합이 시선을 사로잡기에 그 색감 아래 숨겨놓은 봉합선을 자칫 놓치기 쉽다. 봉합 이전에 상처가 있었고 병원과 같이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 싸움의 현장에서 대충 아마추어의 솜씨로 상처를 꿰매는 작업이 있었다는 기억 또한 봉합된다.

Superstar2, 50F(116.8x91.0), Mixed media on canvas,2023
Superstar2, 50F(116.8x91.0), Mixed media on canvas,2023

 

그림 ‘Superstar2’를 보면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환호하는 팬들에게 답례라도 하는 듯한 수퍼스타를 연상할 수 있다. 한데 표정이 애매하다. 환하지 않은 의례적인 웃음으로, 아니면 울음으로 볼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피부색이다. 의상과 철저하게 대비된 인물은 인종을 가늠하기 어렵고 피부가 기이하게 창백하다. 모자와 살의 색감이 따로 놀면서 묘하게 호응한다. 긴 몸을 코르셋처럼 휘감은 의상은 여러 층위의 회색이고 그중 하나의 선이 우아하게 공중으로 뻗친 띠처럼 중앙에 떠 있어서 혹자는 칼로 오인할 수도 있겠다.

강 작자의 이번 출품작은 배경이 없고(혹은 지웠고), 모두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위치한 인물을 그렸다. 피부에 부여한 색감이 신경쇠약에 걸린 듯 슬프다. ‘Superstar2’에 나타난 색감에서 나는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프로작 캡슐을 떠올렸다.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단어인 프로작. 공공연하고 동시에 은밀하게, 그리고 창백한 현대인의 우울은 강 작가의 따뜻한 붓 터치를 통해 매력적인 고독으로, 즉 멜랑콜리를 발산하는 예술로 마침내 승화한다.

프로작 캡슐
프로작 캡슐

 

인물화, 배경의 삭제, 무채색과 유채색의 대비, 망설이며 절제한 피부의 색감, 그로테스크하지만 정감이 느껴지는 만화적 신체 등이 모든 출품작에서 특징적이다. 개인적 판단으로는 성찰보다는 직관이 이러한 특징을 작품에 부여한 듯하다. 작품에서 은근하게 느껴지듯, 본능적 온기가 고뇌를 덮어버리려고 기능한다. 어떤 형태로든 우울과 고독을 품고 사는 현대인 삶의 조건을 직관하되 삶을 긍정하는 온기로 삶을 돌파하는 병사의 용기를 더불어 주목한다.

Mother and daughter_60M_130.3x80.3_2023
Mother and daughter_60M_130.3x80.3_2023

 

인물의 수가 많아질수록 돌파의 힘이 증대된다. 작은 예외는 어머니와 딸이다. 등장인물이 (셋보다 작은) 둘이지만, 모녀라서 그런지 용기의 온기가 가장 높다. 무채색의 비중 또한 가장 낮다. 구도로는 걸어가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며 걸어간다. 함께 걷는 것과 마주 보는 것, 이 두 가지는 현실에서 동시에 일어나지 않지만, 회화적으로는 결합한다. 두 개의 시간, 두 개의 관점, 두 개의 사건이 섞이고, 배경마저 지워버림으로써 두 인물의 근원적 유대와 지지가 뚜렷해진다. 물론 여기에서도 찾으려 들면 봉합선이 보인다. 봉합선으로 간주할 만한 흔적이 관점에 따라 쉽게 확인된다.

Soaring soar_53cm×40.9cm_10P_2023년_Mixed media on canvas
Soaring soar_53cm×40.9cm_10P_2023년_Mixed media on canvas

 

‘Soaring’은 분열과 봉합을 극적으로 통합해 보여준다. 이른바 하늘색과 다른 색이 칠해진 하늘에 구름이 떠 있다. 화폭의 인물은 삶의 자리에 앉아 저 너머를 올려다본다. 그렇다고 초월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강한 내재성에 깃들인 본원적 멜랑콜리. 삶의 결기로 구도의 길에 나선 수도자의 모습이 아니다. 우울과 고독을 아메리카노 마시듯 견뎌내며, 또는 견뎌내는지도 모른 채 마시며 하루하루를 사는 우리네 삶의 일단을 보여준다. 어쩐지 이 삶의 정황이 낯선 느낌.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돈오의 각성보다는 지겹지만 친숙한, 그리고 (착각임을 곧 깨우치지만) 힘을 주는 듯한 정언명법의 독백이 따라온다. 그렇게 우리는 심상하게 삶을 살아내고 가끔 비범하게 예술로 비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야기를 이 그림이 들려준다.

이번 전시에는 ‘Superstar’ 연작 외에 ‘Eunoia’, ‘세 자매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세자매(Three Sisters)2, 100F(162.2x130.3),Mixed media on canvas,2023
세자매(Three Sisters)2, 100F(162.2x130.3),Mixed media on canvas,2023

 

·안치용

인문학자 겸 평론가로 영화·미술·문학·정치·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크리티크M 발행인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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