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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기우제
인디언 기우제
  • 성일권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2.10.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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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이 사는 아메리카에서 한가을부터 늦가을 사이에 비정상적으로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기후 현상을 가리켜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라고 한다. 보통 맑게 갠 날씨이지만 연무(煙霧)가 낀 듯한 상태이며, 밤에는 기온이 꽤 내려간다. 이 기간이 되기 전에 눈에 띄게 서리가 내리는 저온 현상이 일어나면 인디언 서머가 더욱 뚜렷해진다. 인디언 서머가 계속되면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이 말라 비틀어 죽고, 인간과 동물은 목이 말라 고통을 받는다.

인디언들은 비를 기원하기 위해 인신 공양까지도 감행하는데, 특이(?)한 것은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점이다. 인디언들이 비가 올 때까지 계속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인디언 기우제는 허무 개그와 같은 우스갯소리나 미신이 아니라 사막과 같은 척박한 삶의 조건 속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을 결속시키고 개인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게 만드는 유용한 심리적 기제이자 신념 체계인 셈이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가뭄이 계속되면, 임금이 친히 하늘에 기우제를 드리고 소박한 식사를 하고 음주가무를 멀리하는 등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하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망원동의 망원정이 희우정(喜雨亭)이라 불리웠던 것도 길고 긴 가뭄 속에 왕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뒤 단비가 내린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월호가 영국의 위기상황을 다룬 기사의 제목을 기우제 직전의 ‘인디언 서머’라고 표현한 것은 신랄하지만,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독재자 네로에 비유한 것에 비하면 부드러운 편이다. 영국 보수당은 파티광이자 술주정꾼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사임에 이어, 마거릿 대처 이후 두 번째의 여성 총리로 기대를 모은 리즈 트러스 총리마저 부적절한 감세정책으로 금융시장에 혼란을 야기하며 불과 40여 일 만에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인도 이민자 가정 출신인 42세의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을 총리에 앉혔다. 

보수당은 하염없이 추락하는 정권과 당의 지지율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인디언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인도혈통의 젊은 정치인을 제사장으로 뽑았다. 펀자브 지방에 뿌리를 둔 인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수낵은 부와 명예를 겸비한 초엘리트 계층에 속하지만, 힌두교 성전인 『바가바드기타』를 들고 의원선서를 한 힌두교도이기도 하다. 전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의 국민들은 인도계 출신 제사장이 출구 없는 극심한 경제불황인 이른바 인디안 서머를 끝내주길 바라지만, 마른 하늘에서 단비는 쉽게 내릴 것 같지는 않다.

취임 6개월이 지나도록 대통령 지지율이 20%대에 머무는 한국의 경우, 영국과 같은 의원내각제라면 제사장이 수없이 바뀌어야겠지만, 제사장의 임기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5년으로 보장된다. 그러다 보니, 제사장은 수개월째 계속되는 무역적자, 서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고인플레, 실업난, 남북갈등, 한반도 위기 고조, 자신의 끊이지 않은 실언 등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라며 호위 검사(檢事)들로 병풍을 치며 반대세력에 검을 마구 휘두른다. 프레데리크 로르동의 말대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네로라면, 한국의 대통령은 뭐라 불러야 할까?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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