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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에 눈이 먼 수리남의 권력자들
금광에 눈이 먼 수리남의 권력자들
  • 엘렌 페라리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기자
  • 승인 2022.09.3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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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마약 밀매 그리고 전쟁

수리남의 마약밀매를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는 수리남 정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가이아나와 프랑스령 기아나 사이에 위치한 이 작은 국가는 항상 언론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런데도 수리남의 금광은 오랫동안 다국적 기업들의 관심사였으며, 분쟁을 고조하기도 했다. 1986~1992년 전쟁으로 분열된 남미 국가, 수리남은 일어서려 애쓰고 있다.

 

<마로니>, 2015 - 크리스토퍼 진- 귀욤 마르티알

달처럼 황량한 풍경이다. 여기 말로 하면, 열대림은 ‘망가졌으며’ 곳곳에 구멍이 뚫린 백악질의 토양으로 변했다. 뙤약볕에 두건을 쓰고 긴 소매 옷, 짧은 가죽 바지를 입은 약 30명의 인부가 10m 깊이의 구덩이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파이프를 온 무게로 받치고 있고 파이프에서 강하게 솟아나온 물은 땅을 하얀 진흙으로 만들어버린다. 좀 더 멀리 떨어진 또 다른 구덩이에서 마침내 물이 고인다. 이상한 터키블루 색이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보케 A는 이곳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존 열대우림 한복판에 있는 이 금 채굴장의 반장인 보케 A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전기기사가 될 수도 있었겠죠.”

수리남 전쟁(1986~1992)이 일어난 1986년, 11세였던 그는 게릴라 병사가 돼 정부군과 맞서 싸웠다. 그는 가족과 함께 살던 마로니(Maroni) 강둑 마을에서 도망쳐 국경을 가르는 강 반대편에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난민수용소로 갔다. 수리남에 되돌아왔을 때는 학업 시기가 지나버렸다. 그런 그에게 금 채굴은 생계수단이었다. 그 지역의 다른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구덩이에서 하는 작업이 가장 고되고 위험하다. 채굴장 관리를 맡기기에 앞서 자기 눈으로 구덩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투자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보케 A의 삶을 보면, 수리남은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수리남은 남미에서 국토 면적이 가장 작으며, 인구는 60만 명으로 인구밀도가 가장 낮다. 뿌리는 남아메리카이며, 아마존 열대우림이 뒤덮여 있고 역사 및 문화적으로는 카리브해 연안의 영향을 받았다. 기아나 고원지대에 위치하며 가이아나, 브라질, 프랑스령 기아나와 접해 있다.

수도 파라마리보(Paramaribo) 중심에 있는 질란디아(Zeelandia) 요새에는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 네덜란드의 옛 요새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한 전시실에서는, 가까운 과거를 서술하려 한다. 공용어인 네덜란드어로 ‘혁명기’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다. 여기서 ‘혁명’이란, 1980년 2월 25일 일어난 군사 쿠데타를 말한다. 혁명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지 5년, 대통령 선거 한 달 전 발발한 이 사건으로 신설 육군 장교 부대가 집권했다. 군부는 부정부패 및 실업(1977년 실업률이 경제활동인구의 18%)을 막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세웠다.

하지만 역사학자인 로세마르인 후프터(Rosemarjin Hoefte)는 “정치 계획은 모호했다.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그 어떤 이데올로기적 논쟁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1) 군대 내 조합의 설립을 인정하는 정부의 거부 표명 이후 그리고 무장 군인 명단에 포함된 장교 3명의 군법회의 소환 이후 쿠데타가 발발했다. 박물관의 설명은 1980년대 초 정권은 민주적이지는 않았다는 결론을 돌려 말하고 있다. 한 문장이 우연한 계기가 돼 ‘1982년 살인자들’을 언급하게 됐는데, 이들은 언론인, 노동조합원, 변호사, 대학교수 등 군부에 항의하는 15명을 체포 및 처형했다. 박물관 표지판에는 강한 군사정권의 책임소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비극의 현장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자리가 곧 살육의 현장이었기에 관람객들은 군부대와 감옥으로 사용했던 옛 식민지 요새에 있는 것이다.

 

실권자가 된 바우테르서

 

독재자 데시 바우테르서(Dési Bouterse)는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2010~2020년, 10년에 걸쳐 수리남의 대통령이었다. 두 차례의 임기 동안, 군사법원은 예심 끝에 그를 1982년 12월 살인의 주동자로 기소하고 징역 20년 형을 선고했다. 바우테르서 전 대통령의 체포 요청 없이 법원의 재정신청으로 2021년 8월에 판결이 확정됐다. 그래서 수리남은 한편으로는 우파 국가를 건설하려는 일부 고위층,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적 마약밀매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구 독재자의 무소부재 사이에서 고민한다.1982년 12월의 살인은 네덜란드 옛 식민지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단시켰다. 원조액은 연간 수백억 달러에 이른다. 같은 시기, 알루미늄을 만드는 보크사이트 시세의 하락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수리남은 세계적인 보크사이트 주요 수출국이다. 이 두 자금조달원이 1980년 국가 수입의 18%를 차지했다. 1982년 일련의 파업 사태가 일어났고, 군대는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1980년의 군사적 개입에 대찬성했던 국민이었다. 하지만 군부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바우테르서는 실권자가 됐다.

네덜란드군 하사였던 바우테르서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던 시기에 군 창설에 몸담고자 고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원래는 비동맹주의자였지만 외교 정책 면에서 그의 지위가 변했다. 1983년 1월, ‘불안정한 활동’의 이유로 ‘국가의 보수성향 노조를 부추기고, 정부를 타도하는 목적의 반정부 시위와 파업을 조직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 외교관들을 추방했다.(2) 그리고 지금까지 수리남과 가까웠던 쿠바와 거리를 두었다. 1983년 가을, 미국의 그레나다(Grenada) 침공과 그레나다의 모리스 비숍(Maurice Bishop) 총리 처형의 여세를 몰아 카리브해 섬 대표들을 축출했다. 미국과의 점진적 동맹의 역사가 있는 것일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네덜란드 역사학자 헤르트 오스틴디(Gert Oostindie)는 “수리남에서 정치적 수사학은 정권 유지라는 강박관념을 숨기고자 사용됐다”라고 말한다.(3)

1986년, 무장 군인들의 전초기지 공격으로 ‘수리남 전쟁’이 시작됐다. 25세의 로니 브륀스비크(Ronnie Brunswijk)가 공격을 주도했다. 바우테르서 경호원 출신인 그는 네덜란드로 망명한, 독재정권 반대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그가 수장으로 있던 게릴라 부대는 정글 특공대(Jungle Commando), 부대원 대부분이 마룬족이었다. 이들은 수리남 인구를 구성하는 하나의 종족이며, 브륀스비크 역시 마룬족이었다. 18세기에 식민지 내륙의 삼림 지역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인정하는 평화조약에 서명하지 않고 도망친 반역 흑인 노예의 후손들이다. 노예 폐지 100년 전의 일이다. 

1980년대 ‘부시니그로’라고도 불리는 마룬족은 인도인(37%), 크리올인(30%), 자바인(16%) 다음으로 네 번째로 많은 종족으로 전체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조상은 파도를 헤치고 연달아 네덜란드 식민지로 왔다. 모든 마룬족은 군으로부터 게릴라 부대를 지지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후프터는 “이 싸움은 종족 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라고 강조한다. 1986년 11월, 마룬족 거주지인 모이와나(Moïwana) 마을의 민간인 대학살로 수천 명이 프랑스령 기아나로 떠났다.

 

두드러지는 금 채굴 활동들

520km의 강을 사이에 두고 수리남과 접하고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는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 1989년 첫 번째 협정 실패 이후, 1992년 수리남 정부와 쿠루의 정글 특공대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수리남을 마주하고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생로랑뒤마로니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는 늘 분쟁이 있다. 

가수이자 음악가인 프린스 콜로니(Prince Koloni)는 “왜 내전이라 하는가? 이것은 두 진영이 서로 싸우는 게 아닌 군부와 종족 간의 분쟁이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나?”며 항의한다. 그는 마로니강 건너편에서 수레에 음식을 싣고 팔던 사람이었다. 프랑스어는 너무 일찍 ‘내전’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지 않았나 싶다. 네덜란드어로 ‘비넬란드서 오를로흐(binnenlandse oorlog)’인데 프랑스어로 옮기면 ‘국내 전쟁’이다. 역사가들은 자주 ‘외부와의 전쟁이 아닌 내부끼리의 전쟁(Interior War)’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아나 고원지대의 이웃 국가들처럼 수리남은 지리적으로 해안지역과 삼림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해안지역은 인구밀도가 높고 수도 파라마리보가 있는 곳이며, 인구 대부분이 집중돼 있다. 삼림 지역은 후배지로, 내륙지역에 속하며 인구밀도가 굉장히 낮다. 시팔리비니(Sipaliwini)지역은 국토 면적의 80%를 차지하는 내륙지역으로서, 중심축인 강을 통해 접근 가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마을과 마룬족 마을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접근성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리남 대학교 역사학과 예로머 에허르(Jerome Egger) 학과장은 “1986년 이전 국내 보건의료 인프라는 상대적으로 양호했고 교육 시스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옛 네덜란드 식민지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학교와 보건소가 있었다. “하지만 내전 중에 다 붕괴됐다”라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로니의 수리남쪽 강 지역>, 2015 - 크리스토퍼 진

베나누(Benanoe)는 ‘은주카어(njuka, 수리남에서 사용하는 크리올어 중 하나-역주)’를 사용하는 마룬족이 대대로 거주하는 마을인데, 피로그(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 원주민 카누-역주)를 타고 마로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타파나호니(Tapanahony)강을 따라 여러 시간 노를 저어야 나온다. 목재로 된 세모꼴 파사드의 전통가옥 수십 채가 콘크리트 블록과 시멘트와 철판 소재의 좀 더 현대적인 건축물들과 나란히 서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인적이 끊겼다. 전쟁이 끝난 뒤, 내륙 주민들은 도시로, 수도 파라마리보로 프랑스령 기아나로 이주했다. 마룬족들은 피로그 사공, 벌목 인부 또는 1960년대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센터 건설 인부 등 먼 곳에 가서 일하는 것에 이미 익숙했다. 전쟁으로 여인들과 아이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인류학자 리처드 프라이스(Richard Price)의 수치에 따르면, 지금은 파라마리보 거주 마룬족 인구수가 내륙지역 거주 마룬족 인구수를 넘어선다.(4)

베나누에서 정부의 유일한 시설은 발전장치다. 경유가 보급되면서 아직 거주 중인 소수 주민에게 야간에 몇 시간 사용할 전기가 공급된다. 현재 이곳에는 잠시 체류 중인 사람들, 노인둘, 마을 족장이 살고 있다. 족장은 일터인 금 채굴장까지 피로그로 매일 출퇴근한다. “은주카어를 사용하는 모든 마룬족 남성들은 한 번은 이 일을 거칩니다”라고 레오 디칸이 말한다. 수리남과 프랑스 이중국적자인 그의 프랑스 성은 ‘푸에’다. 여성들도 금 채굴로 먹고 산다. 디칸의 어머니는 아들이 자랑스럽게 걸고 있는 금목걸이를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었다. 

내륙지역에서는 자원개발이 식량 생산 활동을 대체했다. 금뿐만 아니라 삼림자원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중국 회사들에 벌목 인가를 내줬다. 마로니강과 타파나호니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금 채굴 관련 활동들이 눈에 띈다. 필로티 위 가판대에 있는 노틸러스 셸(Nautilus Shell) 엔진 오일의 장점을 강조하는 큰 광고판에는 손글씨로 금 무게당 휘발유 가격이 쓰여 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오르는 가격의 기준은 항상 금가루 단위다.

수리남 대학교 지리학과 학과장이면서 광물자원 경제학자인 르네 아티스트(René Artiste)는 “금 채굴은 전쟁과 관계가 있다”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수리남의 금 채굴은 19세기 말 시작됐다. 1980~1990년대 브라질 금 채굴자들인 ‘가림페이로스(Garimpeiros)’는 훨씬 큰 규모로 새로운 금광맥을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을 도입했다. 정부 대표들은 계속해서 게릴라 부대 때문에 위험지역이 된 내륙지역에 가려고 했으며, 자유롭게 가공하지 않은 금을 채굴할 수 있도록 해줬다. 

현재 브라질인 2만 명, 마룬족 1만 명이 내륙 삼림 지역에서 금을 채굴하고 있고, 다국적 회사인 아이엠골드(Iamgold)와 뉴몬트(Newmont)가 관리하는 금광 두 곳도 있다. 아티스트에 따르면 사업 허가를 명시하지 않고도 정부의 통제와 세금징수에서 자유로운 분야라고 기술하고 있다. ‘정부 관료들, 권력자들 등 모두가 금 사업에 투자했다. 물론, 직접 사업은 하지 않고 중개인 노릇만 한다.” 전쟁 이후, 정글 특공대 대장 브륀스비크는 브라운스버그(Brownsberg) 자연공원 안까지 금광을 개발했지만, 보호받았다.

이 전환기에 수리남에서는 사회학이 발전했다. 중산층이 쇠퇴하고 신흥 부자들이 나타났다. 후프터는 “세기의 반환점에는 적어도 인구의 60%가 빈곤선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편, 1960년대 말에는 21%였다. 고위공무원들은 예외였던 반면, 국제무역 및 외환거래와 관련된 작은 그룹은 새로운 경제 엘리트층을 만들었다. 마약이나 무기 밀매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과 관련된 일부 군인 계급이나 개인의 갑작스러운 부의 축적은 상당히 놀라웠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조직범죄를 위한 눈가림

왜냐면 1980년대에 영리 목적의 또 다른 불법 분야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바로 코카인 밀매다. 수리남은 마약밀매의 중심지가 됐고, 부정부패와 범죄가 늘어났다. 프라이스에 따르면 “군대에서는 코카인 밀매와 한창 성장 중인 지하경제 통제에서 나온 돈이 네덜란드의 지원금을 대신하기 시작했다.”(5) 1983년부터 콜롬비아 메델린(Medellin) 카르텔과의 유대관계가 형성됐다. 전쟁하는 동안, 브륀스비크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마약밀매라는 수단을 이용했을지도 모르겠다.(6)

에허르는 “마약 거래에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내부 통제나 단속도 없었고, 국경은 개방돼 있었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서 항공기들이 도착했다(...)”라고 말한다. 적도 열대우림으로 브라질과 국경이 나뉜 수리남은 코카인 생산국가인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와 수리남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 코카인 소비 시장 사이의 완벽한 환승지다. 북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해 있어 카리브해, 미국 그리고 최근에는 서아프리카까지 갈 수 있다.(7)

근동 또는 중동 쪽 돈주머니를 차고 있던 브륀스비크와 국토 나머지를 지배하고 있던 바우테르서, 이렇게 두 명의 전쟁 지휘관 간 체결된 1992년 평화협정으로 마약밀매를 위한 국토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8) 두 명 모두 1990년대에 국제 마약밀매 혐의로 네덜란드 법정에서 궐석재판을 받았으며, 인터폴은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무장 대립은 끝이 났고, 둘은 정치 분야에 정열을 쏟았다. 바우테르서가 선거를 조직화하고 신헌법을 공포하고자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1987년에 설립한 국민민주당(NDP)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그 결과로 옛 독재자는 ‘정부의 특별 고문’에 임명됐고, 다음날 체포 영장 발부 관련해서는 외교적 보호를 받았다.

 

<마로니 그랜드산티의 사금채취지역>, 2015 - 크리스토퍼 진 

2010년, 바우테르서는 중요한 동맹의 선두라는 위치와 과거 적이었던 브륀스비크의 지지 덕분에 수리남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90년대에 브륀스비크는 보편해방개발당(ABOP)에 합류했고, 2000년에는 의원으로 선출됐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바우테르서는 마약밀매에 연루된 측근들을 권력직에 임명했다. 군부 독재 시절 바우테르서의 오른팔이었고 미국에서 1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에티너 부렌베인(Etienne Boerenveen)은 대령으로 복직했으며, 이후 국영 석유회사 스타촐리(Staatsolie)의 감독위원회 의장에 임명됐다. 

바우테르서는 아들 디노를 대테러센터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그는 코카인 밀매에 연루돼 브라질로 추방됐고, 그곳에서 외교직을 맡았다. 그는 현재 마약·무기 밀매 및 2백만 달러를 대가로 헤즈볼라(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 무장세력으로 신의 정당 또는 이슬람 자하드라 불림-역주)에게 수리남에 베이스캠프를 제안한 혐의로 미국에서 15년 형을 살고 있다. 미국 마약 단속국(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DEA)이 이를 밝혔다.(9)

더글라스 파라(Douglas Farah)와 카트린 바비노(Kathryn Babineau)가 안보 문제 전문 싱크탱크 시큐어 프리 소사이어티 센터에 제출한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데시’ 바우테르서 정부는 국제적인 조직범죄로 이득을 보고, 정부 기관에 범죄자를 영입하면서 수직적인 통합 범죄 조직으로 둔갑했다.”(10) 두 사람은 수리남에서 ‘범죄 국가(Criminalized State)’를 봤으며, “국가를 불법 거래의 은닉처, 국제 조직범죄로부터 안전지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개혁당(Vooruitstrevende Hervormings Partij)이 승리했고, 찬 산톡히(Chan Santokhi)가 바우테르서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됐다. 바우테르서의 반대파로 알려졌으며, 경찰서장을 역임하고 2005년에서 2010년까지 페네티안(Venetiaan) 대통령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그의 당선이 국가의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무척 희박하다.

2021년 11월, 수리남 공화국 대통령의 귀금속 회사 칼로티 프레셔스 메탈(Kaloti Precious Metals) 방문은 시행 중인 정부 정책을 지속하겠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바우테르서 재임 동안 아랍에미레이트의 칼로티와 수리남 정부 간 합작회사를 만들고 연간 60톤의 금을 채굴할 수 있는 정제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수리남 금 채굴량을 넘어서는 숫자다. 게다가 수리남은 남미의 다른 금 채굴지역과 연결이 잘 돼 있지도 않았다. 

전직 기자이면서 안보 컨설턴트 출신인 더글라스 파라의 보고서 덕분에 수리남 정부와 칼로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해당 정제공장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는 금 채굴 분야를 조직범죄를 위한 눈가림으로 사용하고 있는 수리남 정부가 인정한 돈세탁 시스템을 마련하고,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금을 수출했다는 증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권좌에 오른 산톡히 대통령은 1980년 쿠데타 기념일인 2월 25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하면서 바우테르서의 유산과 서둘러 거리를 뒀다. 수리남에는 기독교 및 힌두교 기념일과 크리올인의 노예 해방 기념일, 원주민의 날, 마룬족의 첫 평화협정 서명일 등 종족 관련 휴일도 있다. 현재, 5월 1일 근로자의 날과 함께 수리남 전체를 결속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날은 11월 25일 독립기념일이다. 하지만 이날도 만장일치로 정해진 건 아니다.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은 특히, 해방 노예의 후손인 크리올인이 원하던 것이었다. 인도인 후손과 자바인을 대표하는 정당들은 국가가 여러 종족 그룹으로 분열돼 소외당할 것을 염려해 이에 반대했으며, 1966년 독립 이래 정권을 잡기 위한 인도인 후손과 아프리카인 후손이 대립하던 이웃 국가 가이아나의 분열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독재정권이 끝나고 채택된 1987년 헌법에서는 당명에 특정 종족의 언급을 금했다. 약칭은 그대로 사용하고 정치적 구성만 바꿨다. “수리남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닮은 누군가를 위해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종족의 기준에 따라서 투표한다”라고 에허르는 말했다.

2020년 대선은 이 조치에 반대하지 않았다. 산톡히 대통령은 마룬족 지휘관 출신 로니 부륀스비크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그가 속한 보편해방개발당(ABOP)와 동맹을 맺으면서, 인도인 후손이 속한 제1그룹에 의지했다. 마룬족은 인구의 22%를 차지하면서 크리올인과 자바인을 넘어서며 수리남 제2그룹이 됐다. 수리남 유권자들은 그들이 속한 종족 공동체가 가져올 수 있는 권력에 대해 너무 많은 환상을 갖지 않는다. 프린스 콜로니는 “각자 주머니를 채우려 애쓰고 있다. 전쟁보다 부정부패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쟁은 몇 년 만에 끝났지만, 부정부패는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라고 요약한다. 공식적인 수치는 없지만, 수리남 전쟁(1986~1992)으로 수백 명 이상이 사망했다. 

수리남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일부 교사들은 1980년대 이후의 역사는 가르치기를 주저한다”라고 에허르가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바우테르서를 뭐라 불러야 하나? 독재자? 대통령? 마약밀매업자? 또, 브륀스비크는? 게릴라군? 부통령?” 수리남의 가까운 과거는 여전히 채굴 구덩이 펌프에서 솟는 물처럼 탁하다. 수리남 국민 대다수는 알지 못했던 과거다. 

 

 

글·엘렌 페라리니 Hélène Ferrarin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기자

번역·송아리
번역위원


(1) Rosemarrijn Hoefte, <Surinam in the Long Twentieth Century : Domination, Contestation, Globalization>, Palgrave Macmillan, New York, 2014년.  
(2) William Blum, <Killing Hope. US Military & CIA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 Zed Books, London, 2003년.
(3) Gert Oostindie, <The Dutch Caribbean in the 1990s; Decolonization, recolonization ?>, Annales des pays d’Amérique latine et des Caraïbes 라틴 아메리카 및 캐리비언 국가 연감, Aix-en-Provence, 1992년.
(4) Richard Price, <The Maroon population explosion : Surinam and Guyane>, New West Indian Guide, Leiden, 2013년.
(5) Richard Price, 『Peuple saramanka contre État du Suriname. Combat pour la forêt et les droits de l’homme 사라망카족 vs 수리남 정부. 삼림과 인권을 위한 투쟁』, IRD-Karthala-Ciresc, Paris, 2013년.
(6) 상동 
(7) David Weinberger,『Les routes de la cocaïne des trois Guyanes : vecteurs d’instabilité géopolitique régionale ou globale ? 세 기아나의 코카인 로드』, Observatoire des criminalités internationales, Institut de relations internationales et stratégiques, Paris, 2020년 9월. 
(8) Collectif Mama Bobi et Joël Joy, 『Peuples en marronage. Le Suriname : contraintes économiques et démocratie 1760-1990 마룬족. 수리남: 경제 제약과 민주주의』, L’Harmattan, Paris, 2020년.
(9) <Le Suriname, plateforme transcontinentale de la cocaïne 수리남, 코카인의 대륙횡단 플랫폼>, RFI 웹문서, https://webdoc.rfi.fr
(10) Kyra Gurney, <US Treasury Department abandoned major money laundering case against Dubai gold company>, International Consortium of Investigative Journalists, Washington DC, 2020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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