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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강물’을 너무 일찍 들이킨 사람들
‘망각의 강물’을 너무 일찍 들이킨 사람들
  • 성일권 l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9.03.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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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Wandschneider - Lethe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죽음의 신 하데스가 다스리는 저승에 망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다섯 개의 강이 흐른다고 믿었다. 고통의 강 ‘아케론’은 망자가 저승 입구에서 만나는 첫 번째 강이다. 망자는 뱃사공 카론이 노를 젓는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아케론강을 건너며, 자기 죽음에서 오는 깊은 고통을 천천히 씻어낸다. 비탄과 통곡의 강 ‘코키토스’는 망자가 건너는 두 번째 강이다.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흐르는 그 강에 망자는 모든 시름과 비통함을 내려놓는다. 세 번째 강인 ‘피리플레게톤’은 코키토스와 정반대인 불의 강이다. 뜨거운 열기에 물과 진흙이 끓어오르는 이 강에서 망자는 남아있는 감정들을 완전히 태워버린다. 네번째 강은 두려움과 증오, 우울함의 강인 ‘스틱스’다. 영혼과 죽음, 내세에 대해 다룬 플라톤의 『파이돈(Phaidon)』에 의하면, 스틱스의 강물은 청금석(靑金石)과도 같은 검푸른 색을 띤다고 한다. 하데스의 왕궁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했던 이 강의 위엄은 인간은 물론 신들조차 두렵게 한다. 그리고, 망자가 건너는 마지막 강은 ‘망각의 강’이라고 불리는 ‘레테’다. 잠의 신 힙노스의 산속 동굴 주변을 흐르는 이 강은 매우 고요해서 침묵의 강으로도 통한다. 죽은 자들은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이승에서의 기억을 모두 지운다. 이를 영혼이 새로운 육체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죽기도 전에 망자가 지나치는 마지막 순서인 레테의 강물에 영혼을 적신 이들이 적지 않다. 왜, 무엇을 잊고 싶어서, 망각의 강물을 벌컥 들이킨 것일까?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만 까먹는 ‘5·18 학살’ 책임자 전두환의 선택적 치매증세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고, “반민특위로 해방 후 국론이 분열했다”는 나경원의 주장, 국민적 저항으로 퇴출된 독재 부패세력의 일원이었다가 태극기부대와 지역감정에 기대어 용케 부활한 이들의 적반하장식 ‘적폐청산-민주주의 수호’ 발언도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하며, 아예 기억조차 하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재의 안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은 애초에 우리 사회의 과거와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과거와 연결된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은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사회 그리고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문제는 이 같은 과거 부정이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 제기될 경우의 위험성이다. 더욱이 이들은 거의 무한정 주어진 정치적 발언권을 통해 자신들의 기억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억마저도 제멋대로 날조하고, 부풀리고, 깎아 없앤다. 한 집단의 정체성은 현실과 과거의 이어진 관계를 전제로 한다. 굶주린 쥐떼들에 뜯긴 식빵에 송송 난 구멍처럼, 우리 사회의 기억세포는 멍들고 병들어 그 정체성마저 희미해지고 만다. 그래서 이들이 불과 수년 전에 우리의 자유로운 삶을 옥죄고, 숨 막히는 고난의 일상을 안긴 독재자들을 이제 다시 소환하려 하는데도 예전의 분노가 쉽게 되살아나지 않는다.    

물론, 기억은 우리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곧 생각할 수도 없고, 쉬이 살아갈 수도 못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쉬이 살아갈 수도 없다. 생각한다는 것은 구별하고 분별하고 분리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또한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의 무게에 짓눌리는 게 아니라, 그 무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적어도 일정 수준의 망각을 필요로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처럼 그 어떤 것도 잊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붙들고 집착하기 때문에, 사안을 분류하거나 그 경중을 따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과도한 기억에 질식해서 심장울혈로 사망하고 만다. 

그래서 샹송가수 자크 브렐은 혁명찬가인 <엥테르나시오날>에서 “(…) 잊어야 한다.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사라지고 모든 것은 잊히기 마련이기에”라고 노래 부른다. 지평선은 아득하고 미래는 어둡기만 하므로,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할 때는 과거는 잊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잊는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행복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망각은 행복의 필요조건일지 모른다. 

미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망각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질 것이다. 하버마스가 최고단계의 코스모탈리탄 사회의 전형으로 꼽은 유럽연합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다시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굳은’ 의지 앞에서 출발했다. 그 의지는 과거와의 단절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한 것이라 한다면 이 단절은 반드시 망각과 동의어인가?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는 짐승을 부러워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짐승은 그렇지 않다. 역사 없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완성을 향한 유럽연합의 과정은 결코 불행한 과거의 망각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한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미래를 향해 가는 대장정이었다.   

불행한 과거의 단절은 과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과거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과거가 없는 사람이란 뿌리를 상실한 사람이며, 그는 언제든 현재에서 자아를 상실할 수 있다. 기억 없이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으며, 사회적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존재일 뿐이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집단의 차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역사의 잔혹한 광경을 생각할 때 어떻게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죽은 자들과 상처받은 자들을 망각해버리는 것은 두 번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할 의무는 하나의 명령어처럼 다가온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공동의 미래를 준비하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그러고 이 선택은 대개의 경우 개인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집단적 차원에서는 이런 선택이 어떤 이익이나 혹은 이념에 따라 이루어질 때 위험은 더 가중된다. 촛불시민혁명이 불과 얼마 전인데도, 그 가까운 기억마저도 부정하려드는 세력의 선택적 ‘망각’을 목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죽으면 모든 망자들이 마셔야만 과거의 모든 기억을 깨끗이 지우고, 전생의 번뇌를 잊게 한다는 ‘망각의 강물’을 너무 일찍 들이켜 버린 이들은, 과연 저승에서 고통스러운 불망(不忘)의 아픔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글·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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