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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투기자본을 우려하면서도 현재를 담지 못한 <국가부도의 날>
IMF의 투기자본을 우려하면서도 현재를 담지 못한 <국가부도의 날>
  • 성일권
  • 승인 2018.12.19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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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권 | 문화평론가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 결론이 궁금해졌다.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보면서 너무나 결론이 뻔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부디 필자의 예상이 빗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강렬하게 치밀었다. 그러나 결론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1997년 국가부도 위기의 직전까지 갔던 한국 정부에 대한 IMF의 구제금융 과정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이며, IMF체제의 영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긴 탓이다.

그래서일까. 연기파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가 화려한데 반해 결론이 너무 예측 가능하여 식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흔히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을 미리 알려주어 영화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사람이나 그렇게 쓰는 영화평을 일컬어, 스포일러라고 부른다. 이 영화가 꼭 그런 꼴이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인 듯싶더니, 등장인물들의 직업과 캐릭터가 이미 영화의 결론을 말해주는 듯 서사적이다.

배우 김혜수는 한국은행 통화금융정책팀장 한시현을 연기해 국가부도 상태를 멈추기 위해 고민하고, IMF 구제금융신청을 주장하는 재정국 차관(조우진)은 대단히 기회주의적이며, 어음부도로 졸지에 빚더미에 앉은 갑수(허준호)는 힘없는 서민이며, 달러 및 부동산 사재기로 벼락부자가 된 윤정학(유아인)은 대단히 유능하며, 뱅상 카셀이 연기하는 IMF 총재는 미국의 앞잡이자 저승사자처럼 거만하다. 언론과 관객들 사이에선 4명의 연기파 배우가 분()한 배역의 실제 인물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영화가 묘사한 IMF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찬반 진실게임이 빚어졌으나, 이는 순전히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고 실록 다큐멘터리 정도로 인지한데서 기인한 논쟁들이다. 경우에 따라선 이런 논쟁들이 흥행에 대단히 도움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그게 지나치면 영화적 감동이 반감되기 마련이다.

모든 상상력이 가능한 영화적 접근법을 동원한다면, 또한 아직도 IMF체제가 현재 진행형으로 한국사회에 그 후유증을 깊게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서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만을 모자이크해선 안 된다.

영화는 상황의 긴박감을 주기 위해 중간에 자료화면으로 당시 TV 앵커들이 기업들의 연쇄부도와 시중 은행들의 도산 위기를 숨 가쁘게 전하는 뉴스화면을 삽입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왜 이런 위기가 발생했는지 심도 있게 분석하는 뉴스화면은 없었다. 그저 한보, 대우, 쌍용, 미도파, 해태 등 굵직한 기업들이 자금난을 겪어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다는 정도였다.

생각해보니, 속보 뉴스들이 전혀 긴박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앵커들이 영화 속의 전개 내용을 요약해주는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 TV뉴스가 정관계 로비, 리베이트 및 뇌물 수수를 통한 부실대출이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하지 못한 것은 정책책임자들이 진실을 숨겼던 것처럼, TV 역시 감히 진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더욱이 당시엔 KBS, MBC 등 국공영 방송의 공정성과 진정성이 시민단체들로부터 자주 의심받고 공격받던 터였다. 영화는 과도할 정도로 TV뉴스를 자료화면으로 사용했지만, 그다지 주목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경제위기의 본질적 이유를 밝히는 TV 뉴스화면를 찾기 힘들다면, 시민단체나, 노조, 또는 서울역이나 용산역의 가득한 홈리스들의 목소리를 담은 화면을 짧게나마 삽입한 게 더 실감나지 않았을까.

 

잠시 영화 속으로 들어 가보자. 영화의 내용대로라면 한국은행 직원들만이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사방으로 뛴 애국자들이며, 청와대나 경제 관료 등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수방관하거나 국가부도 상황을 즐긴 현대판 매국노들이다. 특히 대통령은 수치를 내세우는 복잡한 설명은 싫어하고, 단순 명료한 걸 좋아할 만큼,(영화속 경제수석의 말이다) ‘무식하다. 경제 관료들은 당면한 경제위기를 감추는데 급급하다가 서민들이 받게 될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실에서 IMF에 자금 요청을 강행하고, 이 와중에서도 선후배들의 기업들을 챙기면서 차후를 대비하는 야비한 인간들이다.

하지만 감사원 보고서(1998)와 국회국정조사 보고서(1999) 등 외환위기의 책임 소재를 규명한 공식 문건이나 당시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영화에선 재정국)과 한국은행 등 관계당국에서 일했던 이들의 증언 등을 살펴보면 영화가 묘사한 당국의 위기 대응 과정을 고스란히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팩트가 잘못 배열되었고, 관점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위기 해법을 두고 사사건건 부딪치며 선악(善惡)구도를 형성한 한은 팀장 한시현(김혜수 분)과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의 언행은 비록 상상력에 기반했다고 해도 팩트 왜곡이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영화 속의 재정국 차관이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한시현은 경제주권을 빼앗기게 된다며 강력 반대하지만, 사실은 딴판이다. IMF행을 적극 주장한 쪽은 오히려 한은이라는 것이다.

IMF가 아닌 대안이 있으면 내놓으라는 재정국 차관의 냉소적 요구에 한시현은 국가 자산을 담보로 한 자산담보부채권(ABS) 발행과 일본과의 통화스와프를 제시하지만 묵살당한다. 그러나 두 방안은 정부가 대통령에게 구제금융 신청 재가를 받기에 앞서 실제로 검토했던 사안이나, 이 검토과정에서 IMF 지원 요청이 지연되는 동안 보유 외환이 환율 방어를 위해 낭비됐다”(국정조사 보고서)는 비판이 따르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정부는 우리나라의 최대 단기차입선이었던 일본의 자금 지원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서, 1111일엔 엄낙용 재경원 2차관보가, 28일엔 임창렬 부총리(19일 강경식 후임으로 임명)가 직접 일본에 건너가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오히려 일본은 그해 단기차입금 220억달러 중 130억달러를 회수하며 한국의 외환위기를 가중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의 자금지원 거부 뒤에는 미국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 시장 장악을 위해 미국 영향권 아래의 IMF를 내세워 고강도 금융개혁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일각에서 일부러 반미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막후에서 미재무부 관료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라는 건 정론이다.

제작진은 어떤 부분에서는 팩트를 과장, 왜곡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팩트를 최대한 반영함으로써 21년 전의 사실들을 조각조각 긁어모아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필자의 뇌리에 계속 맴돈 의문은 하나 있다.

대체 지금의 시점에서 이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지금, 또다시 국가부도의 날이 다가오니 준비하라는 뜻인가? 또 다시 금융위기가 닥치면 윤정학(유아인)처럼 현찰을 준비해뒀다고 결정적인 순간에 사재기에 나서라는 뜻인가? 그것도 아니면 갑수(허준호처럼)처럼 빚쟁이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값싼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해야 한다는 뜻인가?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제작진이 이 영화의 제작의도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주인공 한시현(김혜수)이 한은팀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투기자본 감시 관련 NGO의 활동가로 제 2의 인생을 사는 장면에서 어렴풋이 결론을 헤아려 본다. IMF 체제 이후 투기자본이 횡행하며 한국의 금융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한시현이 선택한 새로운 삶은 지극히 그이답다. 한시현은 지금 우리 경제가 직면한 현실을 이미 21년 전의 IMF 협상과정에서 예견하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왠지 공허하고 씁쓸하다. 도무지 결론과 지향점이 오리무중인 탓이다.

한시현은 자신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 기획재정부 직원(한지민)에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며 결연한 자세를 보이지만, 누구에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인지 불분명하다. IMF체제로 인해 투기자본으로 악화된 한국의 뒤틀린 금융시장구조를 바로 잡겠다는 뜻인지, 또는 IMF체제 이후 악화된 고용구조, 재벌 갑질횡포 등 규제완화 등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가계부채 악화 및 경제침체의 해결방안을 찾겠다는 것인지.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미국계 투기자본 론스타가 2011년 외환은행 지분 51%를 취득한 뒤 1년 뒤에 하나금융지주에 매각해 4조원이 넘는 차익을 거뒀음에도, 한국정부가 당시 외환은행 매각절차를 고의로 지연시켜 피해를 입었다며 국제중재기구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약 5조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내년 초에 어쩌면 비관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민단체들이 론스타의 이른바 론스타 먹튀 사건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국민주 형식으로 자금을 조성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만 해도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가 지난 7,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부당하게 개입해 합병 건이 주주총회를 통과했고, 이로 인해 삼성물산 주주였던 우리가 피해를 봤으니 정부가 8,600억원을 물어 달라며 우리 정부를 정식 제소했고, 독일 엘리베이터업체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 과정을 문제 삼고 있으며, 검찰 수사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산업은행의 GM 지원 건도 향후 제소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제작진이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된 작금의 한국 경제 현실을 우려하여, ‘국가부도의 날을 제작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금융위기를 기회로 삼아 벼락부자가 된 금융인 윤정학(유아인)의 성공스토리를 부각시킴으로써 한국에도 사모투자 회사를 통한 금융투기가 본격화했음을 알렸으나 투기자본의 위험성을 드러낸 적이 없다. 영화 말미에 한시현이 투기자본 감시 NGO에서 활동한다고는 하지만, 그의 역할이 너무 한시적이거나 너무 낭만적이다. 물론, 제작진이 한시현과 기획재정부 직원이 파이팅하는 수준에서 투기자본의 암약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IMF 이후, 우리경제의 골칫거리가 된 해외 투기자본들의 먹튀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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