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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 드러나는 두 가지 질서에 대하여
<기생충>에 드러나는 두 가지 질서에 대하여
  • 손시내 l 영화평론가
  • 승인 2019.06.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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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해당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생충>을 본 이들이라면, 대다수가 영화의 중반부, 저택에서 쫓겨났던 문광(이정은)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 순간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지목하고 여기서 국면의 전환이 이뤄진다고 말할 것이다. 기우(최우식)를 시작으로 기택(송강호) 가족 전체가 자신들의 관계와 출신을 속이고 박 사장(이선균)과 연교(조여정) 부부의 집에 과외교사(기우와 기정), 운전기사(기택), 가정부(충숙)로 취직한 후, 박 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나며 저택을 하루 비운 시점이다. 

<기생충>의 구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문광이 찾아오기 직전, 기택 가족이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햇살이 내리쬐는 나른한 대낮, 가족들이 집안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안온한 한 때가 지나고 비바람이 몰아친다. 이 무렵, 이들 가족은 거실에 모여앉아 양주를 꺼내 마시며 술주정을 한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세웠던 계획은 모두 성공했고, 버텨내야 할 긴장이나 마찰도 지금은 소강상태다. 그렇기에 다소 밋밋하게도 느껴지는 이 장면에는 미약하게나마 어떤 묘한 분위기가 어른거린다. 

그 분위기란, 이를테면 다음의 의문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들 가족은 앞서 일하고 있던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쫓아낼 만큼은 대담했지만 과연 그다음은 어떨까. 이들 가족의 욕망과 계획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기우는 박 사장 가족의 큰딸 다혜(정지소)와 결혼할 미래를 철없이 그리며 자신에게 과외를 소개해줬던 친구 민혁(박서준)의 말을 따라한다. 그는 이어 동생 기정(박소담)에게 “너는 이 집에 어울린다”고 말하며 만약 그들이 여기서 살게 된다면 어떨지를 상상한다. 가족들은 조금은 천진하게 부에 대한 선망과 반지하에 사는 빈곤한 처지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들의 욕망은 다른 방향, 다른 방식으로 뻗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이 가족을 묶어두는 관성 속의 균열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이때 기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영화의 초반부 피자박스를 접는 에피소드에서 이미 그에게 ‘불량품’이라는 표현이 사용됐음을 기억한다. 충숙(장혜진)이 ‘바퀴벌레’라는 표현으로 그 처지를 지적하자 기택은 장난처럼 충숙을 향해 울분을 표출하고는 곧바로 꼬리를 내린다. 여기 어른대는 미묘함이 다소 맥없이 풀어지는 인상이 강하지만, 어쩌면 보다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욕망과 정념의 표출이 시작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문광이 등장한다. 

 

문광의 사연은 이렇다. 박 사장 가족이 이사 오기 전부터 그 저택에서 가정부로 일했던 문광은 저택의 구조를 속속들이 알고 있고, 지하 벙커에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남편을 몰래 숨겨둔 채 4년을 살았다. 문광은 남편 근세(박명훈)를 벙커에 계속 살게 해달라고 충숙에게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거절 직후 문광이 기택 가족을 발견하면서, 두 가족의 갈등과 다툼이 영화의 전면에 떠오른다. 문광의 등장은 영화의 서사에 긴박한 전환을 부여하는데, 기택 가족의 욕망과 정념을 끄집어내 증폭시키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갑자기 가로막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이는 다음 순간 박 사장 가족이 돌연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한번 일어나는 일이다. 요컨대 여기에는 두 번의 전환이 있다. 기택 가족이 부유한 삶에 대해 품는 욕망과 자조는, 문광의 등장으로 인해 지하 벙커의 괴이한 이미지에 흡수되며 빈곤한 자들이 서로 마주 보는 상황으로 급격히 대체된다. 그리고 비밀과 거짓이 까발려지고 맨몸으로 마주한 두 가족 사이의 긴장은, 박 사장 가족이 귀가하면서 은밀한 난투극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 채 폭력적으로 소멸한다. 

연속되는 이런 국면에서 인물과 상황, 인물과 인물 사이에는 어떤 방식으로 새어 나올지 모르는 잠재된 가능성들이 있지만, 영화가 도입하는 사건들이 그보다 한발 앞서 발생하며 서사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 축적되는 비균질적인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기보다 어딘지 모르게 그것을 염려하며 그로부터 재빨리 후퇴하는 인상이라고 해야 할까. 인물들은 그 에너지를 팽창시키기도 전에, 그러니까 더욱 파렴치해지거나 불온한 욕망을 갖기도 전에, 혹은 빈곤한 자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늠하며 새로운 관계를 떠올려보기도 전에 새로운 국면으로 떠밀려간다. 

이는 이 영화가 상징들의 운용으로 진행된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무료 와이파이 소동, 꼽등이, 소독차, 재운과 합격운을 가져다준다는 산수경석,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단, 거주공간으로서의 저택과 반지하 그리고 지하, 근세가 사는 지하 벙커의 이미지와 모스 부호 등등. <기생충>의 모든 것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상징과 현실 사이에는 당연히 헐거운 틈이 존재하며, 상징은 현실을 토대로 하고서야 작동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 격차를 드러내 보여주거나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들을 응시하는 대신, 계속해서 상징의 차원으로 돌아간다. 

 

물론 이런 상징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는 매우 자의식적이다. “상징적이다”, “시의적절하다”라는 대사들이 곳곳에 깔리고, 계단이 끝없이 늘어나며 물에 잠긴 반지하 집에서는 별안간 산수경석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처럼 꼼꼼하게 상징을 드러내는 자의식이 너무도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으므로, 그 관계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울퉁불퉁하고 얼룩진 현실에 영화의 형식으로 대결해보길 주저하지 않는 자의식인가. 혹은 상징으로 점철된 영화의 세공된 형식에 맞서 현실의 불균질함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자의식인가. 

봉준호의 지난 영화들, 그중에서도 한국의 구체적인 사회, 역사적 현실에 발 딛고 있었던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와 같은 영화들은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진동하며 현실과 상징 사이의 벌어진 틈새를 불안하게 응시했었다. <기생충>에서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른 것 같다. 달리 말해 여기에는 불안이 없다. 범람하는 상징들이 곳곳에서 현실의 힘과 밀고 당기기를 하기보다, 일방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며 체계적이고 질서 잡힌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근세의 존재와 관련한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박 사장 가족의 막내 다송(정현준)의 눈에 무시무시하게 각인돼 연교를 근심케 하는 그의 형상은 불안이 아니란 말인가. 여기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근세의 형상이 보여주는 것은 이미 영화 속에서 의미화된 불안이다. 그 불안은 아이가 그린 그림 한 귀퉁이에 상징적으로 말라붙은 불안이다. 근세는 <기생충>의 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세계 안에서 불안으로 기능한다. 

오히려 근세와 관련해 말해져야 하는 것은, 기이하게 시대착오적인 지하 벙커의 모습이다. 4년이 아니라 40년은 숨어 산 듯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이 공간에는, 법학서를 비롯한 각종 서적들로 미뤄 보건대 지식인의 흔적이 남아있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여기에는 지적이고 정치적인 행동들이 소멸하고, 이념의 실천과 대안의 탐구가 증발해버린 이후 체념과 흔적들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생충>이 한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을 다루는 영화임을 상기해보자. 경제적 불평등에 대항하는 지적, 정치적 실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불평등을 원래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들에 대한 타격에 의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근세는 어느 순간 말하지 않는가. 자신은 마치 그 지하 벙커에서 태어난 것 같다고. <기생충>이 구축하고 묘사하는 세계란 너무도 공고해 보이는 계급 격차 아래서 욕망과 정념의 표출은 물론 저항도, 연대의 모색도 봉쇄당한 세계다. 이는 물론 현대 한국사회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일 테고, 한 편의 영화에 희망과 대책을 내놓을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 질서가 있다고 말해야 할 텐데, 하나가 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현실의 질서라면 다른 하나는 영화적 세계를 상징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하는 질서다. 영화의 후반부, 박 사장을 칼로 찌르는 기택의 행동은 그 숨 막히는 질서와 체계를 돌발적으로 찢어보려는 안간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손에 피를 묻힌 채 도망치는 기택을 영화는 말 그대로 내려다보고, 곧이어 머리를 다친 기우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근세가 사라진 지하 벙커에 몸을 숨긴 기택에게, 기우는 헛된 희망이 담긴, 보낼 수도 없는 편지를 쓴다. 

여기 배어있는 냉소는 깨지지 않는 질서에 대한 냉소일까, 그걸 찢으려는 실패한 시도들에 대한 냉소일까. 하나 분명한 것은, 질서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그걸 간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냉소가 아니라 ‘냉철함’이라는 사실이다.  

 

 

글·손시내
영화평론가.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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