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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마이너리티의 정치경제학과 카프카적 전형성, 영화 <기생충>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마이너리티의 정치경제학과 카프카적 전형성, 영화 <기생충>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19.06.07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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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을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로는 처음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 시사회를 놓쳐 개봉 이후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극장에서 관람하였다. 이전 작 <옥자>, <설국열차> 등에서 봉준호 감독의 연출력에 개인적으로 의문을 갖고 있던 터라 칸 황금종려상 수상에도 불구하고 영화 <기생충>에 대해 막연한 기대치 조정이 있었다.

먹을 것이 많은 잔치였다. 봉 감독의 영화세계는 <기생충>에서 무르익어 바야흐로 일가를 이룬 느낌이다. 연출뿐 아니라 각본까지 썼다는 점에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영화 세계에 더 기대를 갖게 된다. 영화 <기생충>은 가족 전원이 백수인 ‘기택’네 장남 ‘기우’(최우식 분)가 고액 과외 면접을 위해 ‘박사장’네 집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이 걷잡을 수 없는 사건으로 번져가는 이야기이다.

 

마이너리티의 정치경제학

영화 제작사는 홍보자료에서 “서로 만날 일 없을 것 같던 극과 극 가족의 만남을 통해 예측불허의 웃음과 긴장감을 선보일 <기생충>은 현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까지 담아내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피상적인 단어를 나열하긴 했지만 틀린 설명은 아니다.

기택(송강호 분) 가족과 박사장(이선균 분) 가족은 영화적 설정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는 서로 만날 일이 없는 양극의 집단을 대표한다. 당장 높이가 다르다. 서울 성북동의 호화 주택인 듯한 박사장네 집은 가파른 언덕 위에 있다. 반면 기택네 집은 슬럼을 연상시키는 서울 가난한 동네의 반지하 (아마도) 셋집이다. 결정적 사건이 일어난 첫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박사장네 집의 기절초풍할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기택네 가족은 하향(下向)하는 경로로 자신들의 집을 찾아간다. 그들의 재난을 상징하듯 그곳 그들의 마을은 폭우로 침수되는 중이다.

반지하인 그들의 집에 물이 차오르고 집안을 채운 물이 목까지 올라오자 별것 아닌 귀중품을 챙겨 이 가족은 ‘보금자리’를 떠난다. 이 장면에서 기정(박소담 분)이 똥물이 역류해 솟구치는 화장실 변기를 덮개로 막고 그 위에 걸터앉아 낮은 천장 아래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먼저 확인할 것은, 기택네 가족 모두가 백수 혹은 실업자라는 사실이다. ‘정상’적인 계급 분류에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과거 변혁의 주력으로 간주된 그 흔한 노동자 하나 없다. 마르크스 같은 진보적 사상가에게 노동계급은 핍박받고 착취당하지만 역사적 필연성에 의거하여 억압의 사슬을 깨고 불가피하게 미래로 전진해야 할 신탁을 받은 종족으로 간주된다. 기택네 가족은 핍박받고 착취당할 권리마저 부여받지 못한, 흔히 룸펜으로 분류되는 도시의 주변인이다.

일 없이 사는 도시의 주변인들은 자본가인 박사장네 집에서 기생적 그리고 잠정적인 노동계급으로 전환하였다가 사건의 그 날에 이재민이 되어 체육관에 수용된다. 그들이 이재민이 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그려진다. 사건의 첫날 아슬아슬하게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도망쳐 나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재난이다. 사회적 곤경은 자연의 곤경으로 중첩된다. 기실 자연의 곤경이란 것도, 자연의 외피를 씌운 사회적 곤경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영화에서 봉준호 감독은 대사 없는 그들의 이동을 ‘하향의 미장센’이란 영상언어로 흥미롭게 표현한다. 곤경은 재앙으로 중첩되며 사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최악으로 치닫는다.

정치경제학적 잣대로는 기택네의 적대가 박사장네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숙주와 기생충처럼 적대하지 않고 공생한다. 이러한 공생의 조건은, 두 집단이 만나는 장이 말하자면 ‘본원적’ 가치의 생산현장이 아니라 가치의 주변적 소비현장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그 장(場)은 공장이 아니라 가정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변혁이론을 주장하는 이론가들에게 이곳은, 가치는 물론 변혁 측면에서도 무의미한 공간이다. 게다가 이곳의 계급ㆍ계층구조는 복잡하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직접 대립하는 사회의 전통적 장과 달리, 이곳에선 박사장과 박사장의 아내 연교(조여정 분) 사이에 가부장제의 지배와 종속의 전선이 암암리에 성립되는 가운데, 박사장네에서 일하고 있는 기존 기생적 노동집단과 이 자리를 빼앗으려는 기택네 가족 간의 전선이 형성된다. 게다가 기생적 노동자도 아니고 그저 기생 생활자인 근세(박명훈 분)와 그의 아내 문광(이정은 분)까지 가세하면서 적대는 정치경제학에 일치하지 않는 방향으로 형성된다.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기택네와 문광네가 적대함이 마땅한 박사장은 이 적대의 전선들에서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만화경을 영화는 보여준다. 끝까지는 아니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샹탈 무페의 통찰에 부합하는 영화적 진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본래 기생충은 박사장 같은 이들이지만 현실의(또한 영화에서) 기생충은 기택네나 문광ㆍ근세 부부 같은 이들이 되는 역전이 나타나고, 나아가 이 ‘기생적 (노동)집단’ 내에서 숙주에 잔존할 권리를 두고 피 터지는 투쟁이 벌어진다. 비록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기택의 본능적 일격이 터져 나오지만, 그것은 무페의 포괄적인 민주주의 기획에 못 미치는 것으로 변혁의 몸짓이라기보다는 즉자적 분노의 반응에 불과하다.

물론 그럼에도 기택의 분노는 다양한 대중이 참여하는, 무페가 말한 대로 포퓰리즘적 변혁 전망의 일단을 드러냈다는, 하나의 영화적 전언이라는 ‘꿈보다 해몽’에 가까운 의견을 덧붙인다. 영화가 사회과학이 아닌 만큼 감독이 해몽까지 내어놓을 까닭이 없고 꿈이라도 잘 꾸면 될 터인데, 이 영화는 분명 ‘무페의 꿈’에 가까운 꿈을 그려낸다. 약간 복잡한 논의지만, 그 꿈은 노동자 계급의 세계적 연대로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고전적 전략이 아니라 억압받는 다수의 계급이 다양한 형태의 네트워크로 지배계급을 넘어서야 한다는 구상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영화에는 이런 구상이 전혀 나오지 않고, 예민한 정치적 감성을 가진 관객이라면 어쩌면 한번쯤 떠올릴 법한 정도의 숨은 그림이다.

 

카프카적 감성이 엿보이는 선 굵은 전형성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선 굵은 전형성을 보여주는 데에도 성공한다. 선이 굵다고 디테일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디테일이 넘치게 살아 있다. 후경으로 배치된 그 디테일은 인물의 역사성과 사회성에 관한 생생한 아비투스를 다른 문법으로 포착함으로써 오히려 인물들이 자잘하지 않고 굵직하게 형상화할 공간을 열어준다. 그것은 카프카의 소설 속 인물들의 뭉툭하면서도 단호한 전형성과 닮았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불가해한 존재에 좌절하면서도 주어진 형이상학적 무게를 기꺼이 받아내려는, 최종심급의 존엄이 유머와 위트 속에 구현되었듯이 <기생충>의 인물들도 그렇게 그려진다. 불가해한 자신의 존재는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다른 존재와 대면하며, 소통불능 속에서 최종적으로 세계의 비참에 어떤 식으로든 맞선다. 봉 감독은 <기생충>에서 형이상학을 전면적으로 끄집어낸다. 그러나 그 형이상학은 철학이나 소설이 아닌, 영상의 형이상학이기에 아마도 극소수의 관객을 빼고는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이 형이상학은 동시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우화이다. 본질적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을 극복할 가능성이 전무하다면 인간은 고통에 진지해질 수 없다. 만일 누군가 거기에다 진지함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폭력은 오직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이어야 한다. 각성하였듯 본능에 따랐듯 권리로서 폭력은 언제나 억압받는 자에게만 부여되며, 억압하는 자들의 폭력은 비록 너무 드물게 일어나지만 철폐되어야 한다.

 

영화로 그려지는 형이상학과 우화는 그러므로 사회과학이 아니라, 예컨대 카프카 소설의 전범을 따라야 하는데, <기생충>에서 나는 그 가능성을 목격하였다.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세계와의 거리는 희극적 현현 속에 극복 불가능한 비극을 담았다.

영화는 수미상관으로 구성되었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보여주고 결코 회신을 받지 못할 말걸기(예를 들어 모스부호를 이용한 통신)를 시도한 뒤에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것은 하나의 원환으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보여주지만, 돌아와서 같은 자리인 듯한 그 자리는 사실 같은 자리가 아니다. 시작과 끝이 같은 듯 다르며, 해피엔딩으로 보이는가 하면 해피엔딩이 아닌 듯도 하다. 기생충과 숙주라는 이분법이 내재와 초월이 뒤섞인 흥미로운 영화적 메시지로 관객들에게 다양하게 전달될 수 있다는 데에 이 영화의 매력이 있다. ‘냄새’도 상상할 수 있다.

5월 30일 개봉했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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