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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운명, 과연 비극으로 끝날까
책의 운명, 과연 비극으로 끝날까
  • 김지연 | 문화평론가
  • 승인 2020.10.30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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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입구역에는 인테리어로 유명한 서점 ‘아크앤북’이 있다. 서가로 만든 아치형의 천장이 책으로 가득한 동굴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책 애호가들의 로망을 자극한다. 이곳의 인테리어는 SNS를 타고 널리 알려졌고, 꼭 책을 살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하는 명소가 됐다. 코엑스의 ‘별마당 도서관’이나 파주출판단지의 ‘지혜의 숲’ 역시 같은 맥락으로 유명하다. 서가를 천장까지 쌓아 올린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스펙터클(spectacle)이 돼 대단한 독서가가 아닌 이들의 눈길까지 끌어 모으기에 충분하다. 

현대에 이르러 책의 역할은 조금 더 다양해졌다. 붉은 벽돌 대신 건축물과 인테리어의 일부가 되고, 조금 더 작게는 공간에 지적인 느낌을 더하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기능한다. 책 모양의 조명이나 소품용 가짜 책은 물론, 때로는 특별한 인테리어를 위해 빈티지 양장본이 비싼 가격에 팔린다. 또한 SNS의 피드를 풍성하게 하는 역할도 있다. ‘#북스타그램’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지만 별다른 내용이 담기지 않은 리뷰도 상당수다. 책을 읽지만 다른 사유가 재생산될 만큼 깊이 있게 읽기보다는 책이 상징하는 이미지를 사랑한다. 책은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자기과시용 소품으로 소비된다. 이것은 어쩌면 책이라는 물건에 지난 시절의 화려한 추억이나 아날로그 감성의 상징적 향수를 부여하는 행위, 단지 종이책이라는 이유로 지적 이미지와 가치를 부여하는 취향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책은 이런 장식적 기능 외에도, 독서모임의 주제가 돼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교 역할도 한다. 하지만 책을 위한 모임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모이기 위한 화젯거리로 책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 책보다는 사람 만나는 것을 우선시한다는 비판도 있다. 책을 정말 좋아하는 이들은 독서모임보다는 여전히 혼자 읽기를 선호한다. 오래전의 명화들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늘 단독으로 표현한 것도, 책은 혼자 읽고 사유하는 것이 어울린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테다. 

 

<읽는사람>, 2020 - 유아영

책에 여전히 힘이 있을까

지금 이 시대의 책은 벽돌이나 장식소품,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도구와 같이 다양한 역할이 늘어난 대신, 원래 가졌던 역할의 무게는 조금 더 가벼워졌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꼭꼭 씹어 읽고 충분히 소화하는 시간을 거쳐 자신만의 사유와 견해를 만들기보다는, 필요한 정보를 우회하지 않고 곧장 배울 수 있거나, 스스로 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단순 명료하게 정리해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을 읽기를 원한다. 힐링 에세이나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정리한 다이제스트류의 책이 서점가에 유행하는 이유다. 오늘 필요한 것을 지금 당장 채워주는 책이 사랑받는다. 

심지어 긴 글을 읽지 않는 독자들의 경향은 실제 책의 분량에도 영향을 미친다. 에세이의 각 챕터는 점점 짧아져서 SNS의 피드와 비슷한 분량이 됐고, 소설마저 짧아지고 있다. 과거에 장편소설은 원고지 800~1,000매에 달했지만 최근 500매 내외의 경장편 소설이 인기를 얻는 추세이며, 약 70~100매가 기준이었던 단편소설도 최근에는 호흡이 길다고 느끼는 독자가 늘어났다. 그래서 문학계에서는 30매 내외의 초단편소설을 시도해보는 중이다. 중국 작가 장자자의 『너의 세계를 지나칠 때』나,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처럼 상대적으로 호흡이 짧은 단편집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책이 이렇게 가벼워지고 짧아지다가 결국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단지 비현실적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수백 년 후, 아니 당장 10년 후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책이 존재할지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까, 아니면 거슬러 올라야 할 급류일까. 만약 점점 희미해져 가는 책이라는 존재를 우리가 애써 지켜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책을 지켜야만 한다면

여기 전쟁을 피해 서재에 숨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밖은 매우 추운 겨울이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불쏘시개라곤 책뿐이다. 결국 그들은 수많은 책 중에서 의미의 경중을 따져 가장 쓸모없는 것부터 태우기 시작한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불쏘시개』의 내용이다. 작가는 생존을 위협하는 극한의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책의 의미란 무엇인지, 생존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묻는다. 이 이야기를 거꾸로 되짚어보면,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는 생존이 더 중요한 극한 상황이기 때문에 책이 중요하지 않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독서는 목적지로 곧게 난 지름길로 빠르게 걷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과 삶, 세계를 이루는 것들, 고전의 지혜와 미지의 세계 사이로 난 골목들을 느리게 헤매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긴 산책에 가깝다. 그 산책의 목적지는 각자 다르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굴러가는 현대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길고 느린 산책은커녕, 그나마 타인과 비슷한 목적지까지 도달 가능한 효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서점가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잘 팔리는 것은 각종 수험서, 즉 필요에 의해 찾는 책들이다. 대학도서관 역시 서고를 늘리기보다는 열람실을 확충한다. ‘지식의 상아탑’은 이제 죽은 말이 됐다.

사실 책의 가장 큰 역할은 ‘이야기’와 ‘지식’의 전달이었다. 이야기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되짚고 현재의 지평을 넓히며 미래를 상상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중은 소설책보다는 영상에서 이야기를 찾는다. 오로지 책만이 이야기를 접하는 경로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모두에게 영상 재생기기, 즉 스마트폰이 있으며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등 어플로 손쉽게 다양한 이야기에 접근 가능하다. 이야기를 찾기 위해 굳이 책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다만 주인공의 깊은 내면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직 텍스트의 영역이자, 소설 장르만이 가지는 힘이다. 또한 영상으로는 제작하기 어려운 배경이나 상황 설정들 역시 소설에서는 자유롭다. 영상 제작을 위해서는 거대자본이 필요하지만, 출판은 그에 비해 소규모 자본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이야기의 폭을 훨씬 넓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 책은 지식을 공유하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SF소설 『비블리온』에는 책이 금지된 사회가 등장한다. 책에 담긴 지식과 그로부터 비롯된 자유로운 사유, 미래를 향한 비전은 일정 계층만 누릴 수 있는 특혜다. 이 이야기는 허구지만, 사실 경제적인 계급 격차가 지식의 격차로, 이어서 삶의 격차가 되는 상황은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책만이 지식 공유의 경로가 아니다.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이 보급화되면서 배움의 문턱이 낮아졌다. 또한 2012년부터 온라인 공개 수업(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 사이트가 증가하면서 코세라(Coursera), 에드엑스(edX) 등에서 해외 명문대 강의를 동영상으로 만날 수 있으며, 국내에서는 한국교육학술원에서 제공하는 ‘KOCW(Korea Open Course Ware)’에서 전국 190개 대학교와 24개 기관의 강의를 무료로 볼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헬싱키 중심가에 위치한 오디(Oodi)도서관의 사례를 보면 지식의 허브로서 도서관의 역할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엿보인다. 헬싱키는 이미 인구 대비 도서관 수가 세계 최고임에도 불구하고, 핀란드 독립 101주년을 맞아 시민들을 위한 선물로 새로운 도서관을 마련했다. 오디 도서관은 일반적 형태의 도서관이 아니라 ‘헬싱키의 거실’이라는 별칭답게 시민 간 지식의 허브이자 각종 창조적 활동의 거점이다. 자유로운 작업과 토론이 가능한 가변적 공간들, 3D프린터와 인쇄기, 영상 편집실과 녹음실, VR체험실 등 지식을 나누고 실험해볼 수 있는 도구들이 마련돼 있다. 누구에게나 열린 이 공간에서 시민들은 다양한 계층과 교류하며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다. 마치 도서관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한 오디 도서관은, 책이 지식의 전부가 아닌 시대에 도서관의 역할에 대해 묻는다.

 

우리는 여전히 읽는다

분명 책이 해왔던 두터운 지식의 전달과 깊은 사유를 인터넷과 온라인 강의, 자유로운 지식의 교류만으로 온전히 대체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접하기 더 어려워진 언택트 시대에 이른 현재, 누구나 원하는 만큼 책을 사 볼 수 없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여전히 종이책만 고집하는 것이 과연 민주적일까. 한편 깊이 있는 독서가 상대적으로 생존이 덜 급한 계층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여유라면, 우리는 곧 『비블리온』 속의 세상처럼 일정한 계층만이 긴 텍스트를 독해하고 사유를 끌어가는 힘을 독점하는 사회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곳은 경제적 격차가 지식의 격차로, 다시 삶의 격차로 이어지는 패턴이 과거보다 더욱 강화돼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책의 운명은 비극적 결말이라는 예감이 든다. 책은 정말 비극의 주인공일까, 아니면 겉모습만 조금 달라질 뿐 미래에도 유효한 존재일까. 

이런 상황에서 흥미로운 점은 여전히 수많은 책이 출판되고, 소규모·독립 출판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리미티드 에디션’, ‘퍼블리셔스 테이블’ 등 매년 열리는 북페어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올해는 오프라인 대신 열린 온라인 북페어가 매우 성공적으로 마감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구매한다. 또한 지난 9월말 발간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문화예술 계간지 <마니에르 드 부아르>의 텀블벅 펀딩은 1천여 명의 후원자를 모으며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다. 여전히 진지한 글을 읽는 독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반면 전자책을 읽는 인구가 증가하고, 글을 쓰고 읽는 온라인 플랫폼 역시 발달하고 있다. ‘북저널리즘’ 같은 플랫폼은 온라인에서 유료 멤버십으로 먼저 글을 공개하고, 이후 종이책으로 출간하는 방식이다. 종이책의 물성을 여전히 좋아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의 상황도 동시에 펼쳐지고 있다. 이 간극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텍스트로부터 생성되는 상호작용과 개인의 사유다. 책의 물성에 앞서, 읽는 행위의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유화나 조각만이 미술이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설치나 영상은 물론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같은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작품들까지 모두 ‘미술’이라고 부른다. 과거 양피지에 손으로 직접 쓴 책에서부터 시작해 지금은 디지털 인쇄로 책을 만드는 것처럼, 전자책이나 온라인 플랫폼들 역시 매체의 변화일지도 모른다. 매체라는 것은 본질과는 별개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우리는 기존의 종이책과 형태를 달리하며 나타나는 것들을 예의주시하면 된다. 여전히 타인의 생각이 궁금하고 좋은 글을 읽고 지식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작정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변화의 파도를 타는 즐거움 속에서 우리가 원래 책에서 찾던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테다. 책의 크기가 작아지고 무게가 가벼워지고 글의 길이가 짧아진다고 해서 사유가 짧고 가벼워질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읽는 행위의 목적이다. 새로운 신발을 신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골목 곳곳을 누비며 느리고 긴 산책을 할 마음의 채비가 필요하다. 

 

 

글‧김지연

예술과 도시에 깃든 사람의 마음, 서로 엮이고 변화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 글을 쓴다. 홍익대 예술학과와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미술전문지 『그래비티 이펙트』의 미술비평공모에 입상했다. 미디어아트 전시 <뮤즈> 시리즈를 기획했고, 책 『마리나의 눈』, 『보통의 감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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