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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타인이란 거울로 나를 보기 : <웨이킹 라이프>
[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타인이란 거울로 나를 보기 : <웨이킹 라이프>
  • 최재훈(영화평론가)
  • 승인 2019.03.05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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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일상에 중독되어 간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 텐데,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하루를 짓누르는 무게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질긴 권태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깨지 않은 정신을 지친 육체에 싣고 덜컹거리는 아침, 그 답답한 일상의 끝자락에 자폐아처럼 우리는 말문을 닫고 있다. 지난한 삶을 일깨워 그 의미를 묻는 것은 허영이며, 해답도 없는 질문을 찾아 낡은 머릿속 회로를 억지로 돌려놓는 수고를 하고 싶지도 않다. 지친 하루의 끝에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본 사람들의 얼굴은 단조롭고 지루해서 지겹다.

 

그런 사람들의 틈 속에서 똘망거리는 눈망울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는 낯설다. 귀찮아서 외면하는 엄마 곁에서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귀는 닫을 수 없기에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모두가 처음부터 침묵했던 것은 아니다. 서로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나를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떠들어대야만 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엔 확신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해답을 갈망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불안하고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지표 위에 그저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들은 불확실한 이 지표 위에서 흘러가는 청춘의 한 시점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어른이 되기엔 순수하고 아이라고 하기엔 성숙해져 버린 20대 언저리의 먹먹한 꿈과 혼란의 속내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스토리보다 말이 풍부하고, 사건보다 인물이 중심에 서 있다. 로맨스의 형식을 하고 있건 기발한 애니메이션의 형상을 하고 있건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그의 수다스러운 영화들을 통해 우리가 침묵으로 얼마나 많은 일상의 이야기들을 삼켜왔는지 새삼 일깨워준다.

 

 

모호한 삶을 품다

몸의 합일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설익은 철학적 농담을 던지는 젊은 남녀의 색다른 로맨스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통해 우리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커가는 청춘에 대한 예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토록 가볍게, 모호한 자신의 삶을 묵도하는 청춘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두 사람의 풋풋한 하룻밤 사랑은 낯설게 다가왔다. 결국 각기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같은 기차를 탄 두 남녀의 사랑은 확실할 수 없는 약속으로 끝난다. 과연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링클레이터 감독은 그저 두 남녀의 아련한 미소 뒤로 해답과 확신을 감춘다. 이미 청춘이란 것이 해답 없는 질문인 동시에 불확실성의 명제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인생의 여정에서, 죽음인지 꿈인지 모호한 경계에 서면 우리는 삶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웨이킹 라이프>는 꿈과 삶,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을 맴돌면서 인생을 규정짓는 갖가지 대화와 독백들을 몽상처럼 울렁거리는 이미지와 함께 흘려보낸다. 질문은 더 구체적인데 화면은 초현실적 몽상의 회화로 떠돈다. 화면은 수면 위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파동을 치듯 흔들리는데, 때때로 하늘 위를 나는 시퀀스에서 보이는 풍경은 수채화처럼 아름다워서 아득하다.

 

기억하는 게 잊기보다 힘들다는 명제 하에 사람들과의 만남을 더듬어 가는 주인공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없다. 꿈과 현실을 얘기하는 사람들조차 현실의 사람인지 몽상가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철학과 억지와 언어적 유희의 골목길을 바람처럼 유영한다. 각자의 말을 털어 놓는 사람들은 각자 다르게 삶을 표현한다. 난잡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확신시키기 위해 분신하는 사람도 있고, 세상에 저항하자며 자동차 스피커에 욕지기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교도소에서 복수의 잔혹한 말을 내뿜는 죄수도 있고, 어이없는 실수로 서로를 죽이는 남자도 있다. 하지만 사건에 개입하는 법 없이 멀찌감치 바라보는 감독은 어떤 감정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의 전작에 대한 여운을 기억하며 선뜻 집어 들어도 <웨이킹 라이프>는 사실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현란한 이미지의 중독성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털어낼 수 없는 묵직한 화두에 눌려버리는 것이다. 체화하기 힘든 말은 풍경처럼 휘익 흘러지나가고, 주인공은 아무에게도 동조하거나 반박함이 없이 그저 묵묵히 겉돌 뿐이다. 영화의 후반부 주인공이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떠돌며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동안 누구는 소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이라는 거울

우리가 타인과의 수많은 만남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어느 순간 타인은 거울이 되어 나 자신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한 사람쯤은 당신의 일부분이 되어 공감할 수 있는 말과 함께 화면 속에서 불쑥 나타날 것이다. 누군가 툭 던져버린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순간, 이미 묵직한 타인의 말이 이어지고, 다시 생각할 겨를 없이 또 심오한 말들이 쏟아져도 골치 아파할 필요도 없다. 선잠에서 깨어나 바라본 화면에서 내 귀에 쏙 박히는 한 마디를 건졌다면 된 것이다. 해답을 던져주기에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사람들의 삶은 그보다 더 개체적이다.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결정짓는다. 세상 어떤 철학자도 인생의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꿈은 무엇이고,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운명인가, 아니면 죽음의 기나긴 여정인가. 우리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현실에 발붙인 채 안주하고 있는가. 영화 속 주인공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신념을 확인하지만,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한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미궁이 우리 삶을 규정하는 명제라면, 골치 아픈 생활에 묻혀 설익은 인생에 관한 농담조차 던져주는 사람이 옆에 없다면 그저 담담한 심정으로 이 영화를 만나도 좋다. 이해하고 싶은 만큼만 받아들이고 툴툴 털어버릴 수 있다면 이미 당신은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가벼운 핀볼 게임을 하는 듯한 즐거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육체 기능이 끝나도 뇌는 12분쯤 살아있다지.

그 순간의 기억이 살아온 날보다 더 길지 몰라.

뇌가 살아 있는 12분 동안이 당신의 인생일 수도 있어.

 

 

 

* 사진 출처 : imdb.com_waking life

 

글 :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2018년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텐아시아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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