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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적 평화의 아파테이아를 향한 우주적 명상- <트리 오브 라이프>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적 평화의 아파테이아를 향한 우주적 명상- <트리 오브 라이프>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03.25 10: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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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우주의 영성

 

신학적 유래가 없었다면 나는 사유의 길에 전혀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래하는 것을 통해 도래하는 것에 다가가려 합니다.

- M. 하이데거, 『언어로의 도상에서』 중(1)

잭이 품어 온 기억 속 이미지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회상으로 복원된 1950년대 고향집 풍경과 그와 병치되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어떤 의미로 점착시킬 것인가. 우주의 역사, 생명의 질서를 다룬 탐미적 이미지들이 침묵으로 웅변하는 내용과 그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이들 질문을 통과해야만 잭의 내면에서 충돌하는 두 세계의 의미를 공감할 수 있다.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 비가시적인 것의 실재성으로 도착하는 마지막 몽타주신은 테렌스 맬릭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적 포월의 세계다. 그곳은 자신의 페르소나인 잭을 통해 테렌스 맬릭이 근접하고자 했던 사유의 지평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이 글은 그 신비한 진경을 탐사하기 위한 두 가지 경로를 밟고자 한다.

먼저는 기존 테렌스 맬릭 영화가 보여준 성찰의 방식을 따라 <트리 오브 라이프> 안에 수용·변주된 그만의 영화 작업을 해명해 보고자 한다. 그간 테렌스 맬릭의 영화는 인간세계에 편만한 이항대립적 갈등과 그로부터 주어지는 해결 불가능의 아포리아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이를테면 영화 속 인물들은 이미 발생한 비극적 사태의 기원을 물으면서 숨은 신의 뜻을 헤아리거나 변증법적 화해의 세계를 모색한다. 그 세계는 요동치는 정념(pathos)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내적 평화의 아파테이아(apatheia)를 계시한다. 그들은 구도자의 태도를 숨기지 않으면서 아포리아적 존재가 희구해 온 해갈의 세계와 그 실현 가능성을 묻는다. 경험세계에 편재하는 절망에서 길어 올리는 형이상학적 철학 작업을 대리하는 셈이다. 테렌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연출 태도를 자신의 인장으로 삼아왔다. <트리 오브 라이프> 이후 그의 영화에 실망한 이가 있다면, 그만이 해낼 수 있었던 그 같은 영화작업의 방향과 색깔을 그리워했을 공산이 크다.

<트리 오브 라이프>의 심층을 조명하기 위한 두 번째 방식은 영화 서사의 흐름과 극단적으로 유리되는 신비한 몽타주 신들을 톺아보는 것이다. 이 글에서 논구하려는 첫 번째 몽타주신은 약 15분 동안 진행되며 거시적 관점의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쇼트들로 구성된다. 거대한 천체망원경과 정교한 현미경으로 포착한 듯한 이 영상이 하염없이 흘러갈 때, 우리는 오히려 종교적 영성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실체를 가진 다큐멘터리적 이미지 배면에서 광활한 관념의 세계로 가는 입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이미지들에 대한 사색의 깊이를 전제로 영화 종결을 대신하는 두 번째 몽타주 신에 대한 독해를 효과적으로 갈무리할 수 있다. 10여 분간 진행되는 이 마지막 몽타주신은 갈등해온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기적의 순간으로 배열된다. 중년의 잭이 영적 수행과도 같은 회상 끝에 만난 내적인 삶(inner life)의 한 출구가 거기에 있다.

이 같은 ‘발상-연출’, ‘영상-수용’의 소통구조는 때때로 우리를 현상학적 시선 주체로 이끈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테렌스 맬릭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공유해도 좋겠다. 그는 젊은 시절, 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연구하며 석·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그가 MIT에 몸담으며 가르친 철학의 내용도 하이데거의 현상학, 혹은 해석학적 존재론을 포함한다. 이 정보를 <트리 오브 라이프>의 독해에 중요한 단서로 활용하고자 한다. 테렌스 맬릭이 기도한 우주적 휴머니티의 실체는 하이데거의 도움을 받을 때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의 자의식으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숨은 신’을 찾는 나약한 인물들의 간절함이 먼저 만져졌다. 잭의 불완전하고 불균질한 회상 장면, 곧 점프 컷으로 단절되기 일쑤인 기억의 편린들은 치유를 바라는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탐미적 인서트 쇼트들은 생성과 소멸, 비움과 채움이 자리를 바꾸는 신적 시간, 극영화에서는 처음 마주보는 우주적 질서를 상기시켰다. 테렌스 맬릭은 소우주로서 우리 각자가, 그 같은 거대한 기획 안에서 운행하는 미세한 운동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미세한 인간적 운동에 좀 더 자세한 주석을 달아보기로 한다.

 

철학이 영화를 변명할 때

 

현실태적 기억의 끝단에서 과거는 현재 순간으로 수축하고,

다른 나머지 끝단에서, 즉 꿈의 끝단에서 과거는 넓은 공간으로 팽창한다.

- 로널드 보그, 『들뢰즈와 시네마』 중(2)

‘영화적’ 시간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너무 거창한 주제라서 그에 대한 근사한 서술을 해내기엔 지식의 빈곤을 감출 길이 없다. 그러나 영화를 ‘이야기의 시간’에 연연해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시간’으로 보는 방안은 흥미로운 한 방법으로 통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트리 오브 라이프>는 한 쇼트와 다음 쇼트 사이에서 수억만 년이 흘러가기 일쑤다. 그런 어떤 순간에 도착한 원시 지구를 담은 장면은 단지 몇 초의 먼 과거를 담아낸다. 그러나 계량적으로 측정되는 그 몇 초는 아들을 잃은 엄마가 수백 번 다녀간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피안을 찾아 신적 섭리의 세계를 열어젖히려는 이의 한 평생이 그 이미지에 얹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 쇼트는 보편 관객에게 서사적으로 맥락화될 수 있는 ‘이야기의 시간’으로 구성되기 어렵다. <트리 오브 라이프>를 ‘이미지의 시간’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부연하면 ‘이야기의 시간’은 우리가 아는 양적 시간, 곧 비가역적인 방식으로 흐르는 시간에 맞춰 서사 정보가 재구성될 때 감지된다. 그러나 잭과 그의 엄마는 절망을 타개할 방책을 찾아 자의적인 빈도와 속도로 조각난 기억들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갔을 것이다. 그 질적 시간은 그들 스스로조차 원만하게 맥락화시킬 수 없는 관념들의 집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내면과 연루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쇼트들을 진짜 다큐멘터리로 읽는 듯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트리 오브 라이프>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적 태도를 내보인 정한석(“실패한 변증법”)과 남다은(“영화적 허세”)의 글(3)도 그 문제의 몽타주 신을 때때로 다큐멘터리로 대하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 그들은 이 영화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묵상을 영상화하고 있다고 보는 데 동의한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 15분에 달하는 문제의 몽타주 신이 왜 창조론과 진화론이 충돌하는 방식으로 불필요하게(과잉으로) 계속되는지를 문제 삼는다.

그런데 그 영상을 두고 창조론, 진화론을 언급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 든다. 명백한 현실의 시간(진화론의 시간)과 믿음 안에서 신념화 된 시간(창조론의 시간)이 다투는 풍경이라고 말했다면 오히려 근사한 서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15분의 몽타주 신은 상처 입은 한 인간, 그러면서도 신실한 신앙인의 자기 초극 과정을 전시한다. 절대적 타자로서 신의 자기 계시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는 한 인간의 절박한 영성이 교유하는 초월적 풍경이 거기에 있다. 바꿔 말하면, 이 몽타주 신은 평온한 미래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한 한 인간이 신적 전망의 원근법을 체화해가는 과정에 대한 거대한 수사일 수 있다. 다큐멘터리와 같은 표피를 가졌지만 그로부터 가장 먼 내막을 가진 이미지들인 셈이다. 정한석과 남다은은 이러한 해석적 판단에 때론 동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트리 오브 라이프>가 ‘이미지의 시간’으로 재구축된 영화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적 진행이 매끄럽지 않고 각 시퀀스에 구멍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는 남다은의 말은 일면 정확하기 때문에 옳은 지적이 아니다. 테렌스 맬릭은 시퀀스에 구멍을 남겨두면서 그 구멍이 중요치 않다는 우리의 동의에 기초해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작업을 성취해내기 때문이다.

뜬금없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해체 이후 발터 벤야민이 쓴 에세이를 가지고도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변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대인이었던 벤야민은 절망적으로 흐르는 베를린의 사회적 공기를 느끼면서 유년시절의 베를린을 섬세하게 회상한다. 시간의 비회귀성을 기억의 회귀성에 의지해 극복하며 단발적인 글쓰기를 해나간다. 그 결과물이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다. 인생 후반부에 쓴 이 책은 기억의 파편을 분절적으로 나열하는 방식, 해명할 수 없는 것을 해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내버려두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바꿔 말해 옛 추억을 인과적 맥락에 따라 접붙이지 않고, 회상으로 재구축한 세계를 개방적 해석의 장으로 데려가려는 자세가 역력하다. 그의 글 안에서 소주제로 엮인 장소들은 ‘여기에’와 ‘저기에’가 오직 하나의 ‘거기에’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하이데거의 논변을 상기시킨다. ‘거기에’의 존재로서 공간성의 의미, 의식을 가진 신체와 장소가 어떻게 결속되어 있는가에 대한 탐색이 그의 글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벤야민에게 유년의 베를린은 영적 초극의 길을 감추고 있는 어떤 이미지였던 것 같다.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테렌스 맬릭이 불러낸 유년의 고향 역시 유사한 의미, 같은 방식으로 영화화 된 것일 수 있다. 그 역시 1950년대 평화로운 고향집에 대한 분절적 기억을 병렬하면서 종교적 포월의 가능성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테렌스 맬릭의 연출 행보를 토대로 재구성해보면, 그는 철학적 메시지의 일관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만의 철학적 논변을 뼈대로 매우 까다로운 편집 과정을 거쳐 영화를 완성했다. <씬 레드 라인>만을 예로 들면, 이 영화에서 존 쿠삭, 조지 클루니, 자레드 레토, 존 트라볼타 등의 역할은 편집을 통해 단역에 가깝게 축소되어 버렸다. 게리 올드먼, 미키 루크, 빌리 밥 손튼, 마틴 신, 빌 풀만, 루카스 하스, 비고 모텐슨 등은 전쟁영화 현장에서 피땀을 쏟았음에도 마무리 편집 단계에서 출연분량 전체가 배제된 경우에 속한다. 내로라하는 최고의 배우들을 출연시킨 상황에서도 그들의 얼굴값을 고려치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출연 당사자에게 매우 미안해해야 하는 일이 맞다. 주목할 것은, 테렌스 맬릭이 시나리오를 서사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보다 더 집중하는 사안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철학 작업의 도구이자 목적으로서 영상의 내적 일관성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정보를 토대로 말하면, 테렌스 맬릭이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쇼트들로 영상을 낭비했다고 말하는 여러 평자들의 견해에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그는 4년 동안의 엄청난 수고로 얻은 영상이기에 그 쇼트들을 잘라내지 못한 게 아니다. 물론 두 대립적 학설(창조론/진화론)을 함부로 통합하려는 의도가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주적 시간을 설계한 이의 합목적성에 따라 ‘나’라는 소우주가 잉태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시키는 데 그 장면들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테렌스 맬릭은 자신이 주도하는 철학 작업의 내적 일관성을 따랐고 그 결과물이 앞서의 명분에 부합한다고 판단된다. 다시 말해, 테렌스 맬릭은 어린 자식을 잃은 젊은 엄마의 갈급한 요청에 신이 우주적 비전으로 응답해 왔다는 것을 말하려 했을 뿐이다. 중년이 된 잭이 자기 삶 전체를 회고하며 깨침을 얻을 때 그 이미지들의 부축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몽타주 신의 길이가 5분이었으면 더 적절했다거나, 25분이었으면 더 괴상했으리라는 판단은 차라리 취향에 가깝다.

물론 첫 편집본이 8시간이었다는 기사를 놓고 생각해 보면, 중년 잭의 ‘현재’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테렌스 맬릭의 입장에서는 잭의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보다 어린 잭이 가족들과 보낸 1950년대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편집 결과, 우리는 잭의 회상이 왜 시작되었는지, 그 의도와 계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성을 확보하기 어렵게 되었다. 잭의 현재를 다룰 때, 카메라는 마천루의 빌딩 숲을 앙각으로 올려다보곤 한다. 거기 솟은 것은, 성공한 건축가가 누릴 수 있는 물질적 풍요의 세계일 것이다. 거대한 빌딩의 전면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햇빛과 흘러가는 구름은 신의 자기 계시를 희미하게 암시한다. 그 앙각의 쇼트들은 50여년 전, 고향집 떡갈나무를 올려다보던 어린 잭의 시간을 유비적으로 연상시킨다. 먼 옛날 절박함 속에 희구하던(그러나 지금은 잃어버린) 내적 분투의 순간은 그렇게 다시 잭에게 손짓해 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유사적 연상 관계를 이루는 이미지는, 잭이 그 먼 비가역적 시간을 건너 고향집에 이르게 된 데에 모종의 단서가 된다. 불충분한 정보에 의한 추론이지만, 이러한 입장만으로도 테렌스 맬릭의 사색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재차 강조하면 <트리 오브 라이프>는 철학이 영화를 변명하고도 남는 경우에 해당한다. <투 더 원더>에서 <송 투 송>에 이르는 테렌스 맬릭의 최근 영화들에 휘발된 명증한 철학적 태도가 <트리 오브 라이프>에는 매우 선연하다.

 

에덴에 다시 이를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 「창세기」 2장 9-10절

테렌스 맬릭은 항상 자신에게 망각된 삶(존재)의 진정한 기원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특히 <씬 레드 라인>과 <트리 오브 라이프>의 보이스 오버 내래이션은 서양의 형이상학이 감당해온 ‘존재물음’을 인간사의 잔혹한 풍경 아래에서 곡진하게 전개한다. 이러한 비평적 진술 안에는 이미 하이데거의 시선이 기입되어 있다. 하이데거 철학의 한 경향이 그의 영화 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거나, 그의 영화가 감춘 풍성한 의미를 추수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지적 작업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덜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하이데거는 성 마르틴 성당에서 종을 치던 아이로 자란다. 일찍이 그는 사제가 되는 조건으로 가톨릭 공동체의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녔으며 몸이 병약하지 않았다면 실제로 예수회 신부가 되었을 것이다.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 입학할 때만해도 그는 신부의 삶을 꿈꿨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신앙 체험은 그의 사유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그렇게 신학을 입구 삼아 존재물음의 길에 들어섰고, 종교적인 삶의 구조를 현상학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개념어들을 정초하기에 이른다. 이후 형이상학적 정통 신학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만, 그가 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또는 성스러운 것이 드러나는 시원적인 삶의 지평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4) 그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 『슈피겔』지와의 인터뷰를 보면, 우리의 구원이 철학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오로지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가능성은 사유의 시작 단계에서 신의 임재나 혹은 신의 부재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의 부재에 직면해 쇠락하고 있다.”(5)는 문장은, 그의 철학이 영적 통찰과 이웃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가 사르트르 등과 함께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통칭되는 것은 재규명될 필요가 있다.

지금 나는 테렌스 맬릭이 무신론자인가, 유신론자인가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그의 영화가 시원적인 삶을 잃어버린 이들의 면면을 통해 화해와 통합의 국면을 희구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는 하이데거가 현상학 혹은 해석학의 방식으로 마지막까지 궁구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씬 레드 라인>, <뉴 월드>, <트리 오브 라이프>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위기를 견디며 존재물음 앞에 선다. 그리고는 신의 섭리를 포용한 자연의 이미지 안에서 은폐된 존재 자체의 근원적인 진리를 찾아들어간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충만하게 조화를 이루는 그 종교적 지평을 기독교의 언어로 ‘에덴’이라고 명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 철학은 인간존재의 본질이 회복되는 ‘에덴’을 묻는 테렌스 맬릭의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된다.

테렌스 맬릭은 이미 <황무지>와 <천국의 나날들>에서부터 정신적 피안의 세계를 찾는 인물들의 내면에 천착해 왔다. 큰 이견이 없을 정도로 이 두 영화는 비범한 작품이다. 지면의 제약상 <천국의 나날들>을 예로 들어 ‘에덴’의 풍광을 해독해 보기로 한다. 이 영화에서 최초의 ‘에덴’은 떠돌이 빌과 병약한 농장주가 애비를 동시에 사랑하면서도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던 시절로 통한다. 시카고 슬럼가에서 우발적으로 공장장을 죽인 빌은 애인 애비와 함께 남부 텍사스의 어느 농장으로 흘러든다. 그들은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서로의 관계를 남매라고 속인다. 그런데 곧이어 갈등이 고조된다. 죽음을 앞둔 유복한 농장주가 애비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미묘한 삼각관계 안에 잠재된 갈등은 한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빌은 농장주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애비의 농장주와의 결혼을 수용한다. 자신을 향한 애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에 농장에 머물 명분을 얻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농장주가 죽으면 그의 재산을 가로챌 수 있다는 계산도 했던 것 같다. 빌과 애비의 관계를 남매로 알고 있는 농장주 역시 잃을 것이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마지막까지 품는 것 외엔 인생의 다른 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술하게 봉합된 그릇된 욕망들은 한꺼번에 그 흉측한 면면을 드러내고 만다. 애비는 농장주에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농장주는 빌의 바람과 달리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빌과 애비의 관계가 농장주에게 탄로 나고 만다. 그 어긋난 상황을 틈타 거대한 메뚜기떼가 농장 전체를 뒤덮고 농장주는 빌을 죽이려다 오히려 빌에게 살해당한다. 경찰에 쫓기던 빌은 영화 말미 사살된다.

결과적으로 '에덴'의 시절이 끝났음을 알리는 전조로 등장한 메뚜기떼는 불완전한 삼각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가 감춰 온 모순된 욕망의 실체를 시각화한다. 이때의 언캐니한 충격은 이항대립적 질서의 충돌지점을 상기시킨다.(6) 이를테면 한 쪽엔 가난한 떠돌이 이민자들이 생계를 다투는 공장이 있다. 수직으로 솟은 굴뚝 이미지가 있으며 각박한 도시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에 합치되는 기표로서 미국 동부 출신의 빌이 있다. 다른 한 쪽엔 평화로운 수평의 이미지, 곧 대평원의 풍광이 있다. 변화에의 강박없이 안주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농장은 그 이미지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는 미국 남부 출신 농장주의 삶으로 대변된다. 양자는 대공황 무렵의 미국에 병존했던 충돌하는 삶의 태도, 방랑과 정착으로 분기되는 삶의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경쟁과 적의의 관계, 어쩌면 이항대립적 세계를 표상하는 기표였던 빌과 농장주는 조화로운 공존의 길을 끝내 찾지 못한다. 테렌스 맬릭이 서로 다른 욕망에 포박당한 빌, 애비, 농장주를 하늘과 대지가 맞닿는 지평선이 맞닿은 쪽으로 데려갔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 충돌하는 모순의 접경에서 에덴의 가능성을 살피려 한 것이다.

<천국의 나날들> 이후 은둔하던 테렌스 맬릭은 20여년 만에 <씬 레드 라인>을 내놓는다. 영화 제목 'thin red line'은 인간이 한계 상황에 이르렀을 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선이 매우 얇고 모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목에서부터 우리 삶을 경계지우는 모순된 논리와 그로부터 파생하는 아포리아를 사유하겠다는 기획을 숨기지 않는 셈이다. 이를 위해 테렌스 맬릭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욕망하는 인물들을 태평양 한복판의 전장으로 몰아세운다.

이 영화에서 '에덴'은 두 가지로 드러난다. 먼저는 물리적 장소로서 과달카날 섬의 풍광을 다루는 테렌스 맬릭의 시선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매우 분명한 태도로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섬의 풍광을 순수의 시원에 대한 ‘물음의 장소’로 활용한다. 섬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표정은 ‘에덴’을 반사하는 또 다른 이미지일 것이다. 부연하면 폭력으로 얼룩진 문명의 역습을 받기 이전, 과달카날 섬은 ‘야만’이 아니라 차라리 ‘선/악’ 이항대립이 분화되기 이전의 순수로 표현된다. 테렌스 맬릭은 일본군과 미군 사이의 전투가 펼쳐지는 와중에도 마치 선험적 ‘에덴’의 입구처럼 그 섬의 풍경을 탐미적으로 가시화한다. 전쟁과 같은 인간 세계의 참상을 그들 쇼트와 충돌시키면서 ‘에덴’에 다시 이르는 길을 묻는 것이다.

두 번째 ‘에덴’의 이미지는 생사의 경계에서 몇몇 인물들이 회상 신 안에서 감지된다. 그들이 존재의 피안처럼 붙들고 있는 조각난 기억 안에 돌아가야 할 세계가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공병대 장교로 전역한 이후 다시 이등병으로 전장에 끌려 온 벨은 사랑스러운 아내 곁에서 보낸 평화로운 일상을 끊임없이 불러낸다. 이들 쇼트에서 미화되는 순간들을 누군가는 ‘과잉’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상 참혹할 수 없는 나락에서 한 인간이 전력으로 불러낸 ‘에덴’이라면, 당연히 초월적인 피안의 저편으로 빛나야 할 것이다. 그처럼 <씬 레드 라인>은 다중시점으로 시퀀스를 분절시켜가며, 인물 각자의 고유한 ‘에덴’을 성찰하게 한다.

<씬 레드 라인>의 인물들 상당수는 마지막까지 붙잡고자 했던 각자의 '에덴'으로부터 허물어진다. 이등병 위트는 신참을 대신해 스스로 희생당한다. 그 때까지 그의 내면을 지배한 건 과달카날 사람들과 어울렸던 평화로운 순간에 대한 이미지다. 웰시 상사는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성(城) 안에 고립되어야 한다는 교훈 속으로 유폐된다. 그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전쟁 상황을 아직 더 감내해야 한다. 벨은 자신을 구원해주던 그리운 아내의 이미지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순간과 맞닥뜨린다. 아내가 편지로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고백과 함께 이혼을 요구해 오기 때문이다. 스타로스 대위는 공적을 쌓으려는 고든 중령에 의해 과달카날 섬에서 쫓겨나게 된다. 고든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점철된 군생활을 회의하면서도 그 혐오스러운 관계망과 권력을 좇아온 관성에서 비껴서지 못한다. 그 싸움이 결국 공허감만 남길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우린 이 실낙원의 결말에서 보이스 오버 내래이션으로 계속 반복되었던 질문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 비참한 전쟁마저 신의 합목적적 세계 운영의 결과인지, 과연 자연의 섭리에 속하는지 다시 묻게 된다. 사랑과 증오가 결국 하나의 얼굴이라는 영화 말미의 역설적 진술은 매우 강력한 잔향을 남긴다. 우리 중 누군가는 해명할 수 없는 것을 끝까지 해명해내야 할 것 같은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 <씬 레드 라인>은 존재하고 있으면서 또 존재해야 하는 가능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을 세세하게 쓰다듬는 철학 작업이었다. 이와 연결시켜 말하건대, 그렇다면 <트리 오브 라이프>는 현존재의 실존을 다루려는 철학적 야심을 가장 먼 데까지 밀어부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도 한 인간의 ‘에덴’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따라 출발한다. 그리고 그는 망실된 ‘에덴’을 뒤늦게 다시 찾아가려 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 인물이 갇혀 있는 아포리아의 미로 속으로 신의 자기 계시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이제 ‘숨은 신’이 침묵 속에서 내보인 우주적 휴머니티의 세계를 더듬어 보자.

 

우주적 휴머니즘, 화해와 포월의 길

 

사유를 통한 시작(詩作)은 실로/존재의 토폴로지이라네.//그것은 존재에게 자기 본질의 근원적 장소를 말해둔다네.

- 마르틴 하이데거,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중 (7)

<씬 레드 라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글을 이어가 볼까 한다. 영화 속에서 신의 주관이 깃든 자연의 시간과 가장 섬세하게 교유하던 위트는 죽음의 순간 앞에 묵묵히 선다. 엄마의 임종 순간을 항상 되뇌었던 그는, 스스로 삶과 죽음의 경계, 유한한 인간의 마지막 순간으로 나아간다. 이때 우리는 아포리아의 접합 가능성을 묻던 이가 그 질문 자체가 되는 풍경을 보게 된다. 모든 모순을 벗어나 내적 평화로 향하는 그 질문은 피와 살을 가진다.

그 장면을 의식한다면, <트리 오브 라이프>는 <씬 레드 라인>의 마지막 질문을 받아 더 선명한 이미지로 대답을 준비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신의 합목적성을 배경에 둔 광활한 시공간에서 그 답의 영화적 체현을 시도하는 영화인 것이다. 서사적으로 보면 인물 내면 가장 안쪽의 감정까지 도달하려는 기획이며,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한 인간이 통찰할 수 없는 가장 먼 곳의 지식까지 내다보려는 도전이다. ‘전쟁이란 자연의 섭리일까’, ‘왜 육지는 바다와 맞설까?’, ‘자연은 이중적 속성이 있어 그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는 걸까’, ‘어쩌면 우리 인간의 영혼은 하나가 아닐까’, ‘우리의 몸부림은 모두 하나의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와 같은 <씬 레드 라인>의 불가능한 궁금증은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우주적 비전 안에서 실마리를 얻는다.

영화는 성공한 건축가가 된 잭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의미심장한 내래이션이 주어진다. “동생, 엄마, 바로 그들이 당신의 문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소중한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신적 질서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잭의 유년기를 보듬어 준 엄마와 동생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우선 중요하다. 상징적으로 보면, 잭은 거울 단계를 막 지난 앳된 소년이다. 그는 이상적 자아가 통괄하던 시절을 이제 막 빠져나가는 중이다. 이때의 ‘빠져나감’은 상상적으로 구축된 에덴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과정을 상기시킨다. 내래이션은 잭에게 놓인 모순적 현실을 들려준다. 그에게는 자비와 은총 아래 사는 삶, 곧 자애로운 엄마가 내보인 세계가 존재한다. 여기에 육체의 소욕을 따르며 군림하기를 좋아하는 삶, 종종 아빠에 의해 마주하게 되는 세계가 뒤섞여 있다. 이 갈등적 현실에서 잭은 오이디푸스 궤적을 밟는다.

그렇게 보면 1950년대 큰 떡갈나무가 있는 고향집은 잭에게 아포리아의 최초 발생지라고 할 수 있다. 실존적 패러독스의 시원이기도 하다. 촬영 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정원의 나무와 그 집 안팎을 드나드는 햇빛, 바람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자연이 허락하는 우연한 탐미의 순간을 활용해 신의 자연 계시를 느끼게 하려 한 것이다. 유념할 것은, 그들 장면이 중년의 잭이 ‘에덴’을 찾아가기 위해 불러 세운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광으로만 촬영됐음에도 어린 세 형제와 젊은 엄마의 표정, 움직임 등은 나뭇잎에 얹힌 햇살의 떨림과 같이 흡사 자연의 일부처럼 포착된다. 그러한 촬영은 소우주로서 인간이 내면의 평화를 갈구해가는 여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하이데거식으로 보면 나무, 햇볕, 바람을 포함해 이 집(에 대한 기억)을 구성하는 것들은 ‘존재의 장소화(die Verortung des Seins)’에 대한 실례가 된다. 잭과 그의 동생들이 가지고 놀던 사물들, 이를테면 오래된 피아노와 동생이 치던 통기타는 존재자를 존재자로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이 실존적 공간은 신의 섭리를 품은 에덴을 찾아가는 데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고향집은 존재가 스스로 드러나고 감춰지는 터이며, 존재의 진리가 일어나고 모이는 곳이다. 존재하면서 두루 관통하고 편재하는 것들을 자기에게로 불러들이는 장소(Ort)로서 ‘토포스(topos)’다(8).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곳을 공유했던 존재들과 그들 사이의 경험에 대한 위상학적 장소론, 곧 ‘존재의 토폴로지’를 탐색하게 한다. 그 이미지들 안 어딘가에 신을 통해 존재의 이해로 향하는 ‘당신(신)의 문’이 있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테렌스 맬릭의 클리셰 중 하나인 앙각의 쇼트들은 매우 적확한 형식이 된다. <씬 레드 라인> 이후 신성과 이웃하는 나무를 올려다보는 앙각의 카메라는 ‘숨은 신’을 찾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포용하는 그릇과 같았다.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는 유년의 뜰 안에 자리한 거대한 떡갈나무가 마치 성경 속 ‘생명나무’처럼 상징화된다. 따라서 앙각의 쇼트를 두고 ‘적확하다’고 한 이유는, 단지 어린 잭의 시점 쇼트(POV)를 합리적으로 구축했다는 말이 아니다. 에덴을 향한 잭의 태도는 앙각의 카메라로 구현되고,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뉴 월드>부터 테렌스 맬릭과 작업해 온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를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잭의 내면에 떠오른 고양된 정신성의 이미지가 느껴지도록, 움직이는 인물들의 느낌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자연광에 의한 가장 아름다운 찰나를 포착하는 스테디캠의 유려한 움직임도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확실히 그의 촬영은 테렌스 맬릭의 철학 작업을 공명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확고한 형식틀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이후 그의 카메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이미지로 개념화하는 신비로운 도구였다. 알폰소 쿠아론(<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버드맨>,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배경에도 그의 카메라가 있다고 단언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테렌스 맬릭이 세워 둔 거대한 떡갈나무의 의미를 더 성찰해 보기로 한다. 이 나무에 부여된 의미 덕분에 우리는 영적인 묵상의 시간을 갖게 된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어떤 우주적 휴머니즘의 원천에 뿌리를 내린 우주수(宇宙樹)를 사유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창세기」, 「잠언」, 「에스겔」, 「요한계시록」 등에 등장하는 생명나무는 에덴의 한가운데 위치한다. 생명나무의 존재는 우선적으로 첫 번째 인간 아담에게 모종의 메시지가 된다. 신에 의한 피조세계 중심에 그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 신의 임재를 표지하는 생명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9). 이때의 생명나무는 갈등적 아포리아가 분기하기 이전의 에덴을 상징한다. 신과 피조세계 사이의 조화롭고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결정적 기표인 것이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그 생명나무가 창세전부터 존재했던 신의 지혜, 우주 만물에 현시되어 있는 신의 뜻을 보여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잭이 회상하는 사건들은 생명나무와 유비되는 그의 고향집 떡갈나무 근처에서 벌어진다. 당연하게도 그 사건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린 잭은 급작스러운 사고로 동생을 잃고 그 충격으로 슬픔에 잠긴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모습, 특히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죽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불의의 익사사고를 당한 친구를 빼앗아간다. 이 해명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는 또래 아이들과 사소한 비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몰래 지은 죄에 아파한다. 권위적이고 때론 폭력적인 아빠에게 반항을 하기도 하고, 사랑으로 받아주는 엄마에게 과도한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이 고통스러운 성장담은 한 인간이 에덴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에 대한 경험적 진술과 다르지 않다. 주지할 것은, 잭이 경험한 고통과 절망이 테렌스 맬릭의 자전적 체험을 반영한다는 사실이다(10). 실제로 테렌스 맬릭은 어린 시절 두 동생을 잃었다. 한 명은 차사고로 엄청난 화상을 입었고(영화 속에 화상 입은 소년 이미지가 등장한다), 한 동생은 스페인으로 기타를 배우러 간 후 자살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성장기에 아빠와 극심한 불화를 겪는다. 그래서 어린 잭의 강렬한 경험과 그 기억을 헤집어 보는 늙은 잭의 시선은 테렌스 맬릭의 자기 인생에 대한 고백에 근접한다.

여기까지 헤아린 후, 테렌스 맬릭이 아니면 상상하기 힘든 두 번의 기이한 몽타주 신을 말해야 한다.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이들 몽타주 신은 우주적 상상의 끝, 곧 자기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가닿는 정신적 운동(15분 분량의 유사 다큐멘터리 신)과 자기 내면 안 가장 깊숙한 곳을 통찰하는 정신적 운동(10분 분량의 마지막 신)을 전시한다. 이 장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15분 분량의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신이다. 이 압도적인 몽타주 신은 ‘숨은 신’의 뜻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교섭한다. 지극한 명상을 유도하는 이 영상은, 불교적 용어로 말할 때 번뇌와 망념이 삽시간에 소거되는 ‘돈오(頓悟)’의 순간을 위한 게 아니다. 도저히 풀 수 없는 아포리아로부터 주어지는 망념을 해소해 가는 이해의 여정, 곧 ‘해오(解悟)’에 이르는 과정을 전시한다. 그래서 15분의 유사 다큐멘터리 영상은 자연과 생명, 사물의 존재론을 거쳐 그들 사이의 질서를 수용해가는 시적 통합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테렌스 맬릭은 신의 섭리 안에 귀속되는 평화를 암시한다. 정신과 감각 안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선험적인 것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주문한다.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영상으로의 이행 과정에 대한 이해다. 중년의 잭은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빌딩 숲에서 새떼의 군무를 본다. 엄청난 수의 새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기하학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신비를 내보인다. 아마도 그 비결은, 새들이 자기 주변의 가까운 개체들과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는 선험적 원리를 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새떼의 이미지는 그냥 삽입된 게 아니다. 그 쇼트는 신이 설계한 자연의 질서 안에 머무는 삶과 그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새떼를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 주체는 잭이다. 이때 잭은 둘째 아들의 죽음에 아파하는 50여년 전의 젊은 엄마를 떠올린다. 젊은 엄마는 숲 한 가운데서 슬픔에 겨워 나무들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감는다. 그때의 암전에서부터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엄청난 우주와 생명의 역사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그 15분의 영상은, 일차적으로 자식의 죽음을 극복하려는 엄마의 내면이 불러낸 이미지가 된다. 그러나 한 층 더 들어가 보면, 존재의 의미를 잃어왔던 잭이 그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불러낸 젊은 엄마의 내면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조각난 그 이미지 안에는 생경한 시공간이 분절되어 있다. 자기장으로 인해 생기는 오로라, 장엄하게 지나는 구름과 황량한 들판, 화염과 연기가 피는 온천, 사막의 풍경, 이끼 낀 습지 등은 지구의 숨겨진 얼굴들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 심장의 맥박과 혈관의 움직임, 미생물의 율동과 뱃속 태아의 모습과 같은 생명의 신비가 담긴다. 그러다가 별의 탄생과 소멸, 지구의 탄생이 나타나고, 공룡이 등장한다. 상처입고 피 흘리는 익룡의 바닷가, 망치상어의 유려한 움직이 지나간다. 백악기 초식동물인 파라사우롤로푸스가 거닐었던 숲이 나오는가 싶더니 죽어가는 공룡을 두고 떠나는 매정한 공룡 가족이 나온다. 이때 죽어가는 공룡을 발견한 벨로키랍토르 한 마리가 나타나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포식의 기회를 내려놓고 유유히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이후 운석의 충돌과 공룡의 멸절이 나타난다.

이들 장면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절망적 고통조차도 아주 미미한 자연적 질서로 환원하는 힘을 가진다. 무한한 우주의 시공간을 주관해가는 신의 섭리와 지혜 안에서는 행성의 생성과 소멸조차도 사사로운 사건일 뿐이다. 죽어가던 공룡이 얻어낸 잠시의 목숨은, 연장된 삶을 표지하면서도 지연된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한 개체의 삶과 죽음의 접경은 종의 멸절 앞에서 아주 미미하게 지워질 뿐이다. 이러한 영상을 통해 테렌스 맬릭은 신의 우주적 비전 안에서 흐르는 절대적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트리 오브 라이프>는 우주적 휴머니즘에 관한 영화다. 나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내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조화와 균형, 용서와 화해를 준비해야 한다. 잭의 젊은 엄마가 걸었던 자비와 은총의 길은 그런 우주적 비전과 중첩되면서 ‘당신(신)의 문’을 드러내 보인다고 할 것이다.

 

 

무한성의 결핍, 유한성의 절망을 넘어

 

누가 나를 이곳에 놓아두었는가.

누구의 명령과 의지로 인해 나에게 여기 이곳과 이 시간이 주어졌는가.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한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중(11)

파스칼은 세속적 세계에 최적화된 삶의 조건들이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자 할 때에는 가장 힘겨운 난관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반대 역시 진리라고 단언한다.(12) 영화 말미 중년의 잭은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딩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그때 그는 고딕적으로 솟은 빌딩 전면 유리창에 서린 햇빛과 구름의 이미지를 본다. 유년시절 고향집 떡갈나무 아래에서 올려다본 하늘의 모습이 거기에도 반사되어 있다. 그는 신의 섭리가 주관하는 세계에 늘 속해 왔음에도 힘겨운 영적 싸움, 곧 ‘숨은 신’ 아래에서 사는 고통을 피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루시앙 골드만에 따르면 ‘숨은 신’이란 현존하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신이다. 때때로 현존하고 때때로 부재하는 신이 아니라 언제나 현존하며 언제나 부재하는 역설적 존재다(13). 그 때문에 한 인간이 신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조건, 그럼에도 그와 동시에 현실 세계와 타협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조건 아래에 놓여 있다면, ‘숨은 신’과의 동행은 영적 갈등으로 점철되는 비극적 삶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잭의 뒤늦은 반성은, 그 영적 갈등의 삶을 회피한 채 너무 긴 세월을 살아왔다는 후회와 관련된다. 젊은 엄마가 내보인 자비와 은총의 길, 사랑으로 보듬는 삶보다도 젊은 아빠가 가르쳤던 경쟁을 통한 승리, 때론 이기적인 선택을 통해 세속적 성공을 쟁취하는 삶을 밟아 온 것이다. 그러한 반성 속에서 잭은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폭압적인 아빠로부터 입은 유년의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 10분을 장식하는 포월적 몽타주 신에 이르기 전, 잭은 고향집을 떠나던 무렵의 순간들을 회상해 낸다. 에덴의 흔적을 좇는 시원적 삶으로부터 어떻게 멀어졌는지, 그리고 그때 주어졌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교훈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한다.

고향집을 떠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패기만만하던 아빠의 실직이었다. 젊은 아빠는 성공으로 가는 길이 닫히고서야 자기 인생 전체를 후회 속에 통찰해낸다. 그때 젊은 아빠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보이스 오버 내래이션은 “높은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하지만 지금은 먼지와 같은 나를 느낀다.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무... 새... 돌이켜보면 부끄럽다, 소중한 걸 외면한 채 고마움도 잊고 살다니. 인간의 어리석음이란”이다. 그 장면에서 아빠는 어린 잭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 잭 역시 아빠에게 반항하며 못되게 굴었다고 용서를 구한다. 그때 덧붙인 말은 자신이 아버지를 더 닮았다는 고백이다. 고향집에서 짐을 빼 이사를 가는 장면에서 잭의 엄마도 마지막 내래이션을 남긴다. 이 내래이션은 상처입은 남편과 그를 닮은 잭을 초월적으로 향하고 있다. “행복해지는 길은 사랑뿐이야. 사랑이 없으면 삶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아. 나누며 살아야 해. 아이 같은 눈으로. 희망을 품고 살아.”

편집의 맥락을 분석할 때, 그 엄마의 내래이션이 되살아나면서 중년이 된 잭의 인생 전체가 흔들렸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쇼트에서 어린 잭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보이스 오버 내래이션은 “그땐 당신의 이름조차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 알아요. 항상 절 부르고 계셨단 걸.”이다. 그렇다면 이 내래이션은 과거의 잭이 깨달았으나 잊었던 ‘가능한 삶’을 미래의 잭이 다시 전유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리고는 10분의 신비한 엔딩 몽타주가 시작된다. 자신에게서 잊힌 ‘숨은 신’의 현존 앞에 잭이 다시 나아간 다음 순간에 기적과 같은 비현실적 시공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금부터의 신은 테렌스 맬릭이 우리에게 당부하는 최종적인 영적 포월의 지평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초반 쇼트에서 중년의 잭은 황량한 사막 위에 덩그러니 놓인 기이한 문을 통과한다. 이 문은 에덴의 흔적을 지닌 젊은 엄마의 품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통로다. 더 나아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흘러나왔던 내래이션(“동생, 엄마, 바로 그들이 당신의 문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을 선명한 이미지로 다시 보여주는 것이다. 재차 되새겨야 할 것은, 이 몽타주 신이 자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전환을 위해 잭이 불러낸 상상적 영상이라는 사실이다. 현실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 시공간에서 잭은 절대적 타자로서 신의 자기 계시를 충만하게 맞닥뜨린다.

이후 장면에서 중년의 잭이 걸어 들어간 신비한 바닷가는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을 후경에 두고 있다. 전경에서는 바다와 육지가 서로의 경계를 다시 짓고 있다. 거기서 잭은 시간을 거슬러 등장한 젊은 엄마에게 안기고, 어린 잭과 동생을 함께 끌어안는다. 유년기에 죽었던 동생도 살아 돌아오고 한때 고통의 근원이었던 젊은 아빠와도 화해의 눈빛을 교환한다. 수평선과 지평선, 수제선의 경계가 중첩해 울리는 이 공간에서 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새로운 결단을 통해 도래하게 될 미래도 영적으로 통합된다. 이제 잭과 함께한 인물들의 표정에는 고통스러운 과거에서 발원한 부정적 정념이나 미래에 대한 세속적 강박이 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은 신적 질서 안에 귀속되어 자기 삶을 전면적으로 갱신하게 된 잭이 마주한 아파테이아(apatheia)의 국면(14)일 것이다. 빽빽하게 솟은 해바라기들로 가득 찬 마지막 쇼트는 가장 완전하고 고유한 ‘존재 가능’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는 생명, 혹은 우리 주변의 수많은 잭‘들’이 지향해야 할 삶을 은유한다. 테렌스 맬릭은 해바라기의 단순명료한 상징성을 활용해 이미 주어져 있고, 주어질 가능성을 믿는 자에게 다시 허락되는 지평을 강조하는 셈이다.

 

 

‘숨은 신’의 침묵의 언어를 찾아서- 우리는 모두 ‘욥’이다

 

미래 속의 매초는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중(15)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 시작에 「욥기」 38장 4, 7절의 내용(“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땡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을 자막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가 불가해한 절망에 빠진 이의 내적 분투란 것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고통에 대한 신의 자기 계시가 영화에 등장할 것임을 암시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욥기」는 성경 66권을 통틀어 가장 먼저 기록된, 심지어 「창세기」보다 먼저 쓰인 시가서(詩歌書)다. 유한한 개별 인간의 고통스러운 절규에 무한한 지혜를 가진 신의 시선이 멀리서 교응하는 ‘인간-신’의 근원적인 대화다. 참고로 서사적 갈등을 내포한 화려한 변증문들은 대부분 고도의 문학성을 보여주는 운문체로 작성되어 있기도 하다.

내용의 핵심은 욥과 세 친구의 대화인데, 욥의 세 친구는 갑작스러운 고난 앞에 내몰린 욥을 정죄하고, 그 원인을 욥의 개인사 안에서 추궁하려 든다. 그러나 욥은 인간의 삶이 신의 주권 아래에 놓여 있고, 갑작스런 절망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도 신이라는 것을 강변한다. 그는 이미 풍족했던 재산을 모두 잃었고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죽음에 빼앗겼으며 온몸에 악창이 생겨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도 싸우는 중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고난이 인과응보로 주어진 것이라는 비난 앞에서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덧입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자신에 대한 저주와 탄식, 자책에 빠져 순간순간 신을 원망한다. 그러다가 자세를 바꿔 의연한 태도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불안을 떨쳐내고 신을 찬양하기도 한다. 그처럼 그는 인내와 절제로 자기 고통을 초극하려는 의인이었지만, ‘숨은 신’을 두고 분열하는 내면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숨은 신’의 침묵 안에서 자신을 향한 그의 궁극적인 뜻을 찾아 헤맨 인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첫머리의 자막에 의지하지 않고도 <트리 오브 라이프>는 새로 쓴 ‘욥기’라 할 수 있다. 물론 <트리 오브 라이프> 이전의 테렌스 맬릭 영화도 「욥기」의 성격을 일정 부분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침묵하는 신의 뜻을 해명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리 오브 라이프>는 신의 자기 계시가 상대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파악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진다. 인간(잭)이 제기한 의문에 신이 구체적인 설명을 풀어내는 장면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신은 창조 세계의 질서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유지해 온 자신의 지혜에 대한 확신을 준다. 인간의 근시안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주적 비전 안에서 우회하여 들려주는 셈이다. 이는 <트리 오브 라이프>가 「욥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까지 재현한 것임을 보여준다. 테렌스 맬릭 특유의 시적 리듬과 탐미적인 쇼트들, 영적 포월의 세계를 희구하는 앙각의 쇼트 등은 「욥기」의 유려한 운문체가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트리 오브 라이프>는 ‘숨은 신’의 침묵 안에 이미 주어진 언어를 찾는 이야기이다. 우리를 향해 태초부터 준비된 기획을 재구성하는 광대한 정신적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테렌스 맬릭은 영화 안팎의 우리 모두가 ‘욥’이라는 데 착안해 철학 작업으로서 <트리 오브 라이프>를 완성한다. 잭에게 들이닥치는 질문들은 평생을 궁구하더라도 명징하게 풀 수 없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죄없는 자에게 닥친 죽음과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영원한 난제다. ‘선한 신’이자 ‘숨은 신’이 침묵 속에 용인하고 있는 악의 문제처럼 끝내 풀기 어려운 숙제다. 그럼에도 우리는 테렌스 맬릭의 인물들처럼 신과 나 사이의 거대한 틈을 메워가는 삶을 완전히 외면할 순 없다. 감당할 수 없는 공허에 흔들리는 소우주에게는 영적인 통찰과 반성적 잠언이 필요하다.

잭이 재차 전유한 영성으로부터 배운다면, 우리는 시원적인 모든 것의 기원인 에덴을 기억해야 한다. 각자의 생명나무 아래에서 흔적으로 마주했던 어떤 삶, 신적 질서 안에 귀속되는 인생의 태도를 회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경험해온 갈등과 고통이 소거되는 영적인 아파테이아의 국면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트리 오브 라이프> 이후 테렌스 맬릭의 영화들을 지켜보는 일이 점차 노동이 되어가고 있다. 수사적 클리셰만 남고 특유의 철학 작업이 영적 통찰을 견인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은 그가 되돌아가야 할 영화적 고향을 되짚어보는 시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신의 의지를 찾는 습관으로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일종의 확증편향에 빠진 문장들이 있다면 양해를 구한다. 그럼에도 <트리 오브 라이프>가 우리 각자에게 자신만의 생명나무를 되새길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다르고 유일하고 특별하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신상희 역, 『언어로의 도상에서』, 나남, 2012, p.129.

(2) 로널드 보그, 정형철 역, 『들뢰즈와 시네마』, 동문선, 2006, p.176.

(3) 정한석, 「우린 아직 ‘생명의 나무’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씨네21』, 2011.11.1.

남다은, 「다시 시작하라-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영화적 명상인가 영화적 허세인가」, 『씨네21』, 2011.11.10.

(4) 신상희, 『하이데거와 신』, 철학과현실사, 2007, P.19.

(5) Der Spigel, no.23, 1966.9.

(6) 이에 비길 만한 유사 성격의 언캐니한 신을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만든 개구리 비 장면(<매그놀리아>에서 다시 마주한 적 있다.

(7) 마르틴 하이데거, 신상희 역,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길, 2012, p.125.

(8) 강학순, 『존재와 공간』, 한길사, 2011, p.210.

(9)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Broadman &Holman, 1996, p.203.

(10) 정한석, 앞의 글.

(11) 블레즈 파스칼, 정봉구 역, 『팡세』, 올제, 2012, P.142.

(12) 블레즈 파스칼, 정봉구 역, 팡세, 올재, 2013, p.489.

(13) 루시앙 골드만, 송기형 외 역, 『숨은 신』, 연구사, 1986, p.49.

(14) 에픽테토스, 김재홍 역,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 서광사, 2013, p.42.

(15) 마르틴 하이데거, 신상희 역,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 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길, 2012, p.350.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의 인문학적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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