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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특집] 로맨스 시리즈(2) - 윤리적이지 않은 사랑은 없다
[계절특집] 로맨스 시리즈(2) - 윤리적이지 않은 사랑은 없다
  • 안치용 l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9.11.29 1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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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은 사랑일까. 대체로 사랑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사랑의 정의가 고무줄 같은 만큼 가타부타를 양단간에 고르기는 어렵다. 반면 불륜을 정의하기는 어렵지 않다.

 

<로얄 커플>, 2001 - 빅토르 스티벨베르크

 

사랑이 뭘까. 대부분의 유행가 주제이자, 매일 밤 적잖은 사람들을 술병 앞에서 무너져 내리게 만드는 주류회사의 수호천사, ‘사랑’을 정의하기는 쉽고도 어렵다. 특히 에로스의 범주에 속하는 사랑은, 사랑의 대표선수인 만큼 정의하기가 훨씬 더 어렵고 동시에 어쩌면 더 쉽다. 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그게 그것 같은데, 그 둘은 우주에서 유일한 관계를 꿈꾼다.

이 글의 주제가 사랑이 아닌 만큼 (또는 사랑의 일부만을 다루는 만큼) 간단히, 성애에 기반한 배타적 유대와 초월적 공감의 욕구, 혹은 그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사랑을 정의하고 시작하자. 그렇다면 불륜은 사랑일까. 대체로 사랑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사랑의 정의가 고무줄 같은 만큼 가타부타를 양단간에 고르기는 어렵다. 반면 불륜을 정의하기는 어렵지 않다.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사실 중심으로 말하면 불륜은 ‘혼외정사’다. 혼외정사가 윤리적인 문제가 돼야 하는 이유는, 윤리가 인간의 인식체계에 작용하는 사회 안정의 모르타르라고 할 때 결혼과 결혼제도의 안정성은 사회 안정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10계명에 불륜(간음)이 포함된 배경이다.

불륜은 혼외정사이므로 옛날 고리짝 고대사회를 기준으로 하면 (모두는 아니지만) 결혼제도를 통하지 않은 모든 성행위는 간음이 된다. 다음 단계(혹은 다른 양상)로는 결혼 전과 후를 구분해 결혼한 사람이 법적(동시에 사회적) 배우자 외의 사람과 성관계를 맺으면 간음이다. 현대에도 전자의 기준이 적용되는 문화권이 있으나, 대체로 불륜이라고 하면 후자의 기준에 의거한다.

현재 우리 사회 불륜(간음)의 판정 기준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외의 사람과 성관계를 맺었느냐다. 2015년 폐지된 간통죄에서는 “배우자 있는 사람이라 함은 법률상의 혼인이 성립돼 현재 남편 또는 처가 생존하고 있는 경우”를 말하고, “간통죄의 기수시기(旣遂時期)는 남녀의 생식기가 결합한 때”로 본다. 이때의 ‘기수’는 다른 종류의 만남의 ‘기수’에 비해 절실함의 양상이 다를 것으로 추정되며 때로는 절실함에 상응하는 회피행태가 나타나는데, 가련한 어떤 미국인들이 혼외관계를 맺으면서도(일부일처제의 강박에 사로잡혀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애인과 사랑을 나누고도 삽입행위만 피해서 언제라도 자기 자신과 배우자에게 “섹스는 하지 않았다”고 말할 태세를 갖춘다(1)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생식기의 결합’은 불륜의 글로벌 스탠더드인 듯하다.

 

남자의 불륜과 여자의 불륜

배우자가 없는 사람이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성관계를 맺으면 불륜인가, 아닌가. 폐지된 법률에서는 “배우자가 없는 사람이라도 상대방이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간통하면 처벌된다”고 했다. 이때는 ‘생식기의 결합’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생식기를 결합하려는 상대의 결혼 여부를 파악했는지, 즉 ‘인지’가 기준이 된다.

간통죄는 없어졌지만 간통, 즉 불륜에 대한 사회 전반의 기본적인 규정은 과거의 법 조항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다 보니 행위와 인지 사이의 불균형과 같은 문제, 또 ‘남녀의 생식기의 결합’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상투성과 진부함, 나아가 다양한 성적 취향의 문제는 개개 삶의 현장에서 혼선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불륜은 사회적 규정과 제재에 관한 문제지만, 개인들의 인간사에서는 개별적 인격과 가치의 문제다. 간통죄라는 법률이 획일적으로 인간사를 지배했을 때의 혼선은 간통죄 폐지를 통해 사적 사건이 온당하게도 개인에게 맡겨짐에 따라 사적 해법을 통해, 사회적으론 해소됐다고 할 수 있다. 깊숙하게 논의를 진행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사적(私的)’이란 표현은 사회적으로 사적 영역으로 규정됐다는 의미다. 부언하면 사회적인 사적 해법이다.

불륜의 사사화(私事化)를 통해 남은 중요한 문제로는 남자의 불륜과 여자의 불륜이 성립하는 구조가 여전히 (전적이지는 않지만)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불륜을 포함해 전반적 성(性)인식·담론·관행에서, 여성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차별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은 적시돼야 한다. 불륜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의 혼외정사는 남성에 비해 덜 공리적이며 더 제재를 받는다.

신약성서에는 간음한 여인이 예수 앞으로 끌려 나오는 장면이 있다. 간음한 그 여인은 당시 율법에 따라 공중(公衆)에 의해 돌로 찍혀 죽어야 하는, 즉 투석형을 앞둔 처지였다. 이런 야만적 폭력은 현대사회에서도 일부 문화권에서 존속한다. 성서의 이 장면을 두고 교회 등에서는 예수의 현명하고 나아가 신성한 답변을 주로 운위한다. 어려서부터 이 장면을 보며 드는 궁금증은 ‘도대체 저 여인과 간음한 남자는 어디 있는가?’였다. 자위를 ‘간음’이라 하지는 않을진대, 처벌의 순간에 간음한 여인만 남고 간음의 상대인 남자는 어디 갔는가. 이것을 ‘죄와 벌’이라고 한다면, 남자의 죄와 벌과 여자의 죄와 벌은 이 장면에서 다르다. 그러나 알다시피 성서에서는 남과 여의 죄와 벌이 완전히 다르고, 나아가 남과 여의 근본적 존재설정마저 차별된다. 이런 차별은 기독교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불륜, 즉 협소하게 혼외정사를 잘못됐다고 규정하는 사회적 인식과, 행위로 빠져들거나 상상과 탐색에만 머물거나 어떤 형태로든 그것에 매혹되는 개인적 태도 사이의 상충을 목격하고 경험한다. 상충의 정도는 개인마다 문화권마다 다르다.

이런 ‘다름Ⅰ’은 ‘다름Ⅱ’와 중첩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혼외정사에 대한 태도와 행위가 남성과 여성 간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남성과 여성 간의 상충, 즉 ‘다름Ⅱ’는 혼외정사를 성(性)권력과 가족제도의 차원에서 살펴봐야 함을 의미한다. ‘다름Ⅱ’를 요약하면, 많은 페미니즘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역사를 통틀어 남성은 일상적 혼외정사에 노출됐지만, 여성은 그것으로부터 일상적으로 배제됐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틀어서 고찰할 때 혼외정사가 남성의 영역이었다면, 불륜은 오직 여성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오쟁이 진 아담과 최초의 자유부인 하와?

에덴동산 설화는 비기독교인에게는 재미있는 내러티브지만 기독교에는 수천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빌미였다. 에덴동산에서의 쫓겨남(혹은 관점에 따라 벗어남)은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에덴동산을 나올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이는 하와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남편에게도 권유한 이가 하와임이 성서에 명시된다.

이 내러티브를 약간 불경스럽게 해석하면, 에덴동산을 나온 사건은 일종의 치정극으로 볼 수 있다. 주지하듯 아담 몰래 하와를 꼬드겨서 하와로 하여금 금단의 열매를 먹게 한 존재는 뱀이다. 뱀이 무엇을 상징하느냐에 관해선 2,000년이 넘는 토론이 있었다. 나중에 신약성서에 출현할 예수와 호응하는 존재로서 뱀이 사실상 예수를 상징한다는 다소 과격한 견해까지는 아니어도, 뱀이 사탄이나 악마를 상징한다는 과거 오래 통용된 순진한 견해는 근대 이후에는 지각 있는 기독교인들에겐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다.

성서라는 관점을 떠나 하나의 내러티브로 보면, 뱀을 남근의 상징으로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은 하와의 불륜으로 정리된다. 아마도 에덴동산은 가부장제의 체계를 의미할 것이고 참다운 성애에 눈뜨지 못한 하와는 뱀과의 불륜을 통해 관능을 배우며 어리숙한 남편에게도 전한다고 통속적인 이야기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에덴동산의 주인인 여호와는 가부장이다. 뱀을 처단함으로써 아담과 하와 부부를 지켜내는 등 가문의 존속을 위한 조치를 취한다. 하와에게 주어진 형벌이 자녀를 낳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성애에 관한 본질적 통찰이다.
물론 에덴동산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정통적’ 해석방법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에덴동산을 아침드라마의 세트장으로 만든 나의 견해는 해석이랄 것도 없고, 에덴동산 내러티브 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성(性)코드를 상상해 본 것에 불과하다.

이런 성적 해석은 창세기에 관한 다양한 전승에서 이미 존재한다. 하와 이전에, 창세기에 존재한 인류 최초의 여성의 이름은 ‘릴리트’다. 창세기엔 하나님이 두 번에 걸쳐 여성의 원형을 창조한다. 그중 성서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첫 번째 여성이 릴리트다. 백합꽃은 여성의 음부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백합의 ‘Lily’와 ‘릴리트(Lilith)’가 연계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유대와 서구의 민간전승에서 릴리트는 주로 나쁜 여자, 마녀 등으로 전해진다. 지금 어법으로는 여성해방의 원조다.

전해지기로는 릴리트는 남성 상위 체위에 반대해서 아담을 떠나(에덴동산을 떠나?) 홍해 근처에서 데몬들과 자유로운 성애를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아담의 두 부인이 모두 혼외정사를 감행한 셈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 첫 번째 부인은 아예 아담을 떠나 자유분방하게 살며 불특정한 남성의 자녀들을 많이 낳았다. 반면 정실부인이 된 두 번째 부인 하와는 아담의 자식들을 낳아서 아담 가문의 대를 잇게 해줬다.

릴리트에서 남성 상위 체위 일화, 하와에서 뱀에 대한 가혹한 징벌은 여성의 혼외정사에 대한 남성의 체계적 대응으로 읽힐 수 있다. ‘다름Ⅱ’의 신화적 버전인 셈이다.

여성의 혼외정사를 공식적이고 엄격하게 금지하지 않았다면 가부장제는 존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성의) 혼외정사 금지가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근거만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다. 포유류인 인간이 생존과 번식에 관한 종의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혼외정사를 금지하는 쪽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포유류의 대표적인 번식 특징으로 암컷이 뱃속에 미성숙한 아이를 (오랫동안) 품고 있어야 하고, 낳은 후에도 암컷이 새끼들을 (주로 젖을 먹이면서) 돌본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적어도 인간 포유류에게는 여성에게 혼외정사를 규제하는 것이 번식에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지금 인간은 교접을 하지 않고 섹스를 하며 번식보다는 정사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섹스(Sex)가 모세의 10계명 중 6(Six)계명(가톨릭에서는 제6계명이 ‘간음하지 말라’다)에서 나왔다는 설도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혼외정사에 관한 ‘다름Ⅱ’는 분명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기획의 결과이지만 연원엔 생물학적인 효율성이 깔려 있다는 주장을 유전자 수준으로까지 극단적으로 밀고 가면, 리처드 도킨스 같은 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또 다른 유형의 결정론으로, 창세기를 과학교과서로 읽는 맹신자들과 동일한 부류라고 볼 수 있다. 생물학과 유전자까지 이야기하기에는 논의가 너무 산만해질 것이고, 끝이 나지도 않을 것이기에 이 논의는 여기서 그친다.

어떤 독자는 혼외정사의 실태에 더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고, 원하면 주변에서 쉽게 생생한 체험담을 들을 수 있다. 더 본질적인 이야기는 실태나 체험담 너머에서 나와야 한다. 혼외정사는 불륜이라고 규정되지만 불륜은 언제나 상대적이며, 인간은 사회적으론 윤리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윤리적이지 않다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짧은 이 글에서는 혼외정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다름Ⅰ’과 ‘다름Ⅱ’를 동시에 감안해야 한다는 정도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것도 변죽만 울리고 말았다.

혹자는 그리하여 이 글이 여성의 혼외정사를 격려한다고 오해하려나. 만일 여성의 혼외정사를 장려함으로써 가부장제를 넘어서고 여성해방이 이뤄진다면 그것도 가능한 방법론의 하나일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지평의 이야기들을 한 지평의 이야기로 묶어서 풀어낼 수는 없다.

이렇게는 이야기할 수 있겠다. 더 이상 불륜은 없다고. 만일 그런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애정의 형태가 있다면 전통적 관점에서 그것은 혼외정사인데, 혼외정사를 불륜이란 잣대로 일률적으로 재단하기는 불가능하다. 혼외정사가 있다면 어떤 혼외정사가 있는가를 따져볼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들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 결혼이든 혼외정사이든 어떤 관계를 맺든 그 관계의 가치와 품격을 결정하는 것은 관계에 개입한 개인들의 인간적 존엄과 그들이 창출할 사랑에 달려 있다.

결국 윤리가 아니라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다. 윤리적이지 않다, 즉 불륜이다는 타자성에 입각한 판정이 아니라 사랑이란 주체성의 심급에 입각해 새로 창출하는 윤리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전제는 있다. 먼저 인간답기를 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1) 『지구촌 불륜 사유서』, 파멜라 드러커멘 지음, 공효영 옮김, 담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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