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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의 문화톡톡] 낭만적 사랑과 여성의 욕망을 결합한 로맨스
[이정옥의 문화톡톡] 낭만적 사랑과 여성의 욕망을 결합한 로맨스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2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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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왜 할리퀸로맨스를 즐기는가?

로맨스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짐작하는 대로 이는 1960~70년대에 부상한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캐나다의 로맨스 전문 출판사 할리퀸 앤터프라이지스가 1979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적으로 약 17천만 권을 판매했다는 역대급 발표에서 비롯됐다. 이를 기점으로 할리퀸로맨스라는 하위 장르가 구축됐다.

할리퀸로맨스가 전 세계 독서시장을 석권하자 세간의 관심은 온통 할리퀸로맨스를 읽는 독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집중됐다. 신문사와 출판사를 비롯한 각종 관련 기관들이 속속 자료 조사에 착수하여 다양한 통계자료를 발표했지만,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 로맨스 구독자의 90% 이상이 20~40대 여성이라는 점, 또 그 절반 이상이 기혼녀나 고정 파트너와 함께 사는 동거녀라는 점, 그 중 30% 정도는 로맨스를 습관적으로 탐독한다는 점 등이다.

미국 중서부 캔사스주의 소도시에 거주하는 로맨스공동체를 심층 취재한 사회학자 재니스 A. 래드웨이의 연구서는 이런 주장에 학술적 신뢰를 부여했다. 또한 1949년에 창립한 이래 2010년까지 약 60년 동안 할리퀸 로맨스가 60억 권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는 기록 역시 할리퀸로맨스의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로써 로맨스는 여성의 장르로 확고하게 굳어지게 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들은 이토록 할리퀸류 로맨스를 탐닉하는 것인가? 로맨스 연구자들은 그 이유를 보상심리와 저항심리, 자기계발로 정리했다. 첫째, 여성들에게 로맨스는 가부장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정서적 구원을 제공하는 교환적 보상의 유토피아적 판타지로, 몸과 마음이 지칠 때 일탈과 휴식을 보상해준다는 것이다. 둘째, 로맨스는 가부장적 현실에서 여성들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강한 항의와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보복을 품은 사랑의 판타지라는 것이다. 셋째, 로맨스는 연애에 서툰 여성들에게 낭만적 사랑에 빠진 주인공처럼 멋지게 연애하는 법, 완벽하지만 거친 남자를 순정남으로 길들이는 법 등을 익히기 위한 자기계발서로 읽혀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문학적 상상력과 자기계발이라는 문학의 일반적인 속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할리퀸로맨스의 무엇이, 어떻게 여성 독자들을 매료시켰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할리퀸로맨스는 낭만적 사랑과 여성의 성적 욕망을 결합한 로맨스의 하위 장르이다. 빅토리아로맨스가 가부장적 결혼에 대응하기 위해 낭만적 유토피아를 발명했다면, 할리퀸로맨스는 성적 욕망에 눈을 뜬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사랑을 찾아나서는 낭만적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때문에 할리퀸로맨스에 대한 접근은 여성의 성적 욕망과 낭만적 사랑의 함수관계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성적 욕망은 어떻게 발견됐나?

여성의 성적 욕망은 오랫동안 남성의 지배 아래 봉인돼왔다. 근대과학의 발명으로 성에 관련된 과학적 해명이 이뤄졌음에도 여성의 성욕에 대한 터부와 오해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여성의 몸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물질에 불과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대폭 수정됐지만, 남성과 여성의 성욕을 정자와 난자의 로맨스에 비유하는 용감한 정자에 대한 속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사회의 출현과 핵가족제도의 도입으로 여성의 성과 욕망은 번식과 출산이란 범주와 남편의 성적 쾌락을 위한 봉사에 한정됐다. 근대 핵가족제도는 낮에는 정숙한 아내와 자상한 엄마로, 밤에는 요부의 역할을 규범화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빅토리아로맨스의 여주인공들은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영혼의 순결성을 중시했고, 그 순결성은 낭만적 사랑을 완성하는 단 한 명의 남자에게 바쳐졌다.

성욕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세기 초반에 시작됐다. 그 이전까지 성과학은 생물학과 담합하여 인구정책이나 산아제한, 위생정책이란 명분으로 성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활용됐다. 때문에 여성의 금욕과 남성의 욕구라는 공식이 공고화됐다.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여성의 욕망은 모두 자궁에서 비롯된 질병인 히스테리(hysteria)’로 분류됐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힘입어 정설로 굳어졌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나리오에서 남근이 없는 여성들은 잃어버린 남근을 찾기 위해 아버지와 동일시하지만,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무기력해져 결국 정신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채털리부인의 연인>의 영화 포스터

영국의 작가 D. H.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연인>(1928)정직하고 건강한 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작가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출판되자마자 금서로 지정됐다. 채털리 남작의 부인 코니는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6개월 만에 하반신 불구가 된 남편을 사랑하지만 시름시름 이름 모를 병에 시달린다. 치료를 위해 시골 저택으로 내려간 이후 산지기 멜로즈와의 만남을 통해 육체적 욕망과 참된 사랑의 의미를 깨달은 코니는 진정한 삶을 찾기 위해 집을 나간다. 당대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음란과 방탕의 화신으로 몰아갔으나, 출판금지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영국의 신사사회를 능욕한 히스테리, 즉 미친 여자의 표본이라는 명분이었다.

이처럼 본격적인 성의 해방은 세계대전 전후기에 시작됐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전쟁에 참여하자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대거 투입되어 여성의 노동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오랜 전쟁으로 부부 중심의 정상가족 모델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더 이상 외도하는 남편이나 바람난 부인이 낯설지 않게 되고 기존의 성도덕이나 순결관념도 급속하게 와해됐다.

1948년의 킨제이보고서는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곤충학자 킨제이는 18천명에게 개인의 은밀한 성생활과 관련된 설문지를 돌려 동성애, 혼전성교, 혼외정사, 자위 등과 관련된 충격적인 통계자료를 발표했다. 무엇보다 여성의 성욕이 남성 못지않다는 사실을 입증했는데, 196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페미니즘의 여파로 여성에게 금욕을 요구할 명분마저 사라졌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의 영화 포스터

이런 사회 분위기를 타고 틴에이저라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경제적인 풍요와 대중문화가 발달한 1950년대에 틴에이저들은 연애와 성적 욕망을 결합한 20세기식 사랑담론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10대 여성 중 95%18세 이전에 남자와 애무경험이 있다는 보도에 놀란 기성세대들은 사춘기의 사랑을 결혼 이전에 경험하는 성의 과정으로 배치하기 위한 방안을 서둘렀다.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펼치는 성교육은 피임과 생식에 중점을 두어 틴에이저들의 방탕한 성생활로 발생하는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계몽운동이었다. 반면, 관능적인 성의 기술에 초점 맞춘 영화와 잡지 등 대중문화 중심의 문화교육은 사춘기의 성애를 결혼성립에 필요한 젊은 시절의 낭만으로 선도했다. 틴에이저세대와 부모세대 사이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첨예한 갈등을 다룬 <피서지에서 생긴 일>(1959)이 당대 최고의 영화로 손꼽혔던 이유이다.

할리퀸로맨스는 이런 시대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여 빅토리아로맨스의 전통에 20세기식 사랑법을 결합한 새로운 로맨스이다. 초창기에는 주로 하이틴세대를 대상으로 관능적인 성의 기술을 아름다운 결혼으로 유인하는 사랑의 교과서를 표방했다. 그러나 1960~70년대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여성들이 순결한 연애와 의무적인 결혼을 거부하고 성적 욕망에 충실한 신연애관을 추구함에 따라 자유분방한 여성들의 사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성의 성적 욕망의 발견과 낭만적 사랑의 유토피아

여성의 성적 욕망과 낭만적 사랑을 결합한 할리퀸로맨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또 다른 이유는 여주인공의 성향과 연애 경험을 세분화하여 여러 라인을 동시에 출시하는 판매전략과 홍보전략에 있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하이틴들은 사랑에 서툰 유형이다. 이들은 낭만적 사랑을 꿈꾸지만 아직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자신이 사랑받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순진한 여성들이다.

 

하이틴로맨스 <석류관 가는 길>

하이틴로맨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바이올렛 윈스피어의 <석류관 가는 길>은 영국 출신의 20대 초반 여성이 미지의 남자와 이국 여행에 동행하는 모험적인 여정과 사랑의 모험서사를 중첩시킨 작품이다. 어딘가에 존재할 낭만적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북극성처럼 빛나는 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지만 번번이 길을 잃고 마는 초보 여행자처럼, 처음 만난 남자를 따라 낯선 모로코 사막으로 향하는 긴 여정은 사랑의 감정과 파트너십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모험의 연속이다.

고아원에서 자라 따뜻한 보살핌이나 애정을 받은 적이 없는 흙수저 출신 제너에게,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모로코 사막의 왕자 라울은 자신의 약혼 파기를 도와주는 대가로 런던에 레스토랑을 차려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한다. 흥미롭게도 제너가 이 제안을 수용한 이유는 평생 만져보지 못할 큰돈이 아니라 라울을 향한 감정적인 신뢰이다. 여행 기간 내내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가벼운 키스나 포옹 수준에 머물지만, 두근거리는 첫사랑의 감정은 디테일하게 묘사된다.

사랑을 꿈꾸는 틴에이저부터 첫사랑을 경험하는 모든 여성의 심경을 사로잡을 매혹적인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에 걸맞게 착하고 아름답지만 성에 대해서는 순진무구한 제너와 모로코 사막의 왕자 라울의 모험여행은 진실한 사랑의 확인과 운명적인 결혼으로 끝난다. 제너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덕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 라울에게 사랑의 기술을 학습함으로써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견인하고 마침내 사막의 왕자와 행복한 결혼에 이르게 하는 촉매제이다.

한편, 하이틴로맨스보다 성숙한 20대 후반의 여성들은 육체적 욕망과 사랑의 감정 사이에 조화를 추구한다. “사랑을 체험하기 시작할 때, 뜨겁고 슬픈 사랑이 아름다울 때, 실루엣로맨스가 당신 곁에 있다는 광고 문구는 낭만적 사랑에서 신체적 접촉과 성적 욕망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신체를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신체적 지식은 성적 접촉을 넘어 서로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인지행위이다. 때문에 열정적 감정과 냉철한 이성 사이의 균형감을 유지하여 자신의 이상형을 찾아내는 일에 몰두하도록 유도한다. 이상적인 상대를 찾는 것이야말로 낭만적 사랑을 기획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수잔 브럭맨의 <위험한 사랑>은 하이틴로맨스와 실루엣로맨스의 혼합형에 해당한다.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 자경대원으로 활동했던 에밀리는 캠퍼스 폴리스인 제임스를 만나 육체적 사랑에 눈을 뜨고 결혼을 결심했으나, 이유도 모른 채 이별통고를 받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7년 후 교사가 된 에밀리는 사업가 알렉스와 사귀고 있지만, 그가 마약밀매자임이 밝혀지고 마약사범 소탕작전에 투입된 경찰 제임스와 재회하게 된다. 에밀리의 아파트에서 1주일간 잠복근무하며 오누이 행세를 하며 기묘한 동거생활을 시작한 두 사람은 강렬한 욕정과 진실한 사랑을 통해 이별의 고통을 치유하고 완전한 합일체를 이룬다. 몸과 마음으로 인지하는 신체적 지식은 눈앞에 현존하는 대상이 자신에 가장 적합한 이상형임을 감지하고 마침내 결혼으로 인도하는 나침반 기능을 한다.

 

실루엣로맨스 <너무나도 아름다운 고백>

실루엣로맨스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딕시 브라우닝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고백>은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을 추구하는 커리어 우먼과 여러 여자들과 연애를 즐기는 바람둥이 사업가의 쿨한 연애와 계약결혼을 다룬다. 보수적인 농촌 출신의 프랜시스는 대학 졸업 후 독립적인 직장생활을 즐기지만 옆집 사는 케이벨의 건장한 육체와 남성성에 번번이 유혹당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어릴 적 자신과 아버지를 버리고 두 번이나 재혼한 어머니로 인해 여자를 신뢰하지 않는 플레이보이 케이벨 역시 순진하면서도 아름다운 프랜시스에 매료된다. 각자의 취향을 인정하며 쿨하게 연애를 즐기던 두 사람은 결혼여성을 모집하는 직장에 재취직하는 상황과 사업상 부인이 필요하다는 이해관계를 충족하기 위해 계약결혼을 한다. 평소에는 애인처럼 지내다 필요할 때만 부부행세를 한다는 계약은 애초부터 지키기 어려운 과제지만, 화재사건을 계기로 서로 이상형임을 확신하고 평생 자유와 사랑을 구가하는 계약결혼을 유지하자는 합의에 도달한다. 일생동안 동반자이자 협력자로, 애인이자 부부로 계약결혼을 유지하며 완벽한 사랑을 실험했던 사르트르와 보바리가 연상되는 커플이다.

 

스칼렛로맨스 <욕망을 넘어선 사랑>

한편, 영국의 로빈슨출판사가 출시한 스칼렛로맨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직장 여성으로서 직업적 성취와 관능적 사랑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당찬 여성들이다. “대담하고 건방지며 도발적이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자, 섹시하고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모험을 즐기는 성격으로 가슴은 늘 열정으로 꽉 채워진 여자,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자신의 가슴을 따라 살아가는 여자라는 슬로건은 자기주도적인 페미니스트를 지향한다.

제시카 마찬트의 <욕망을 넘어선 사랑>의 주인공 에이미는 결혼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연애만 즐기는 페미니스트이다. 11살 때부터 일찍 여읜 엄마 대신 아버지와 남동생 넷을 돌보며 성장한 탓에 모성이 체질화되어 있는 에이미는 연극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기간제 교사에 대한 소명의식도 강한 편이다. 그러나 에이미가 만난 남자들은 모두 그녀의 가치관을 무시하고 폭력과 강압적인 섹스로 길들이려 한다.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힌 남자들에게 신물이 난 에이미는 우연히 교양미 넘치는 폴을 만난 이후 진중하고 다정다감한 인간미에 빠져들게 된다. 철두철미 독신주의를 표방했던 에이미는 용감하면서도 침착하고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남자 폴과의 육체적 합일을 통해 성숙한 사랑에 눈을 뜨고, 흑인과 영국인의 혼혈족으로 고달프게 살아왔던 폴의 아픈 상처를 모성으로 감싸주기 위해 청혼을 결심한다.

이처럼 할리퀸류 로맨스는 순진무구한 하이틴에서부터 성적 욕망을 추구하며 독신생활을 즐기는 당찬 페미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상이 분포되어 있다. 세계대전 이후 성도덕의 급격한 변화, 여성의 공적 참여의 증가, 60년대 페미니즘의 부상 등으로 오랫동안 남성의 지배 아래 봉인됐던 여성의 성적 욕망이 풀리자, 할리퀸로맨스는 나의 몸과 마음은 나의 것이라 외치며 성의 혁명을 구가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적극 담아내어 여성 독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만남 성적 욕망과 시련 사랑의 합일 결혼이라는 이른바 로맨스의 정석과 서사문법을 고수하는 할리퀸로맨스에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먼저, 여성 주인공들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에 몰입한다. 그들은 남자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감정의 촉수를 세워 그만의 매력을 탐색한 다음 그것을 나침반 삼아 본능적으로 사랑의 완성에 도달한다. 때문에 표면상 사랑의 서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성의 적극적인 인도에 따라 결혼에 도달하는 수동적인 여성들이다.

<석류관 가는 길>에서 제너는 라울을 보자마자 흑표범과 같은 남성미에 사로잡힌 자신의 감정에 의지하여 멀리 모로코 사막의 석류관까지 따라나서는 순진무구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미화된다. 빅토리아로맨스의 흙수저인 제인 에어와 닮은 구석이 많지만, 제너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나 남자의 제안에 대한 진위여부와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일말의 의심과 갈등조차 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고백>의 프랜시스는 독신주의자로서 소신이 뚜렷한 여성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실상은 케이벨이 유도하는 대로 이끌려가는 수동적인 여성이다. 비록 프랜시스가 주도적으로 계약결혼을 제안했을지라도 경제적으로 지위가 월등한 남자에게 의존하기 위한 방책일 뿐이다. 따라서 평생 주체성과 자유를 추구하며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을 유지했던 페미니스트 보바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더욱이 초록빛 눈동자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사랑의 징표로 비취빛 결혼반지를 준비했다는 케이벨의 고백에 눈물을 흘리며 사랑스럽게 교태를 부리는 프랜시스에게서 독립적인 여성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할리퀸로맨스의 주인공들은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여성상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남성에 의존하거나 수동적인 여성들이다. 여성의 수동성과 의존성을 로맨스의 정석인양 강조함으로써 백마 탄 기사의 구애를 기다리는 궁정풍 사랑의 우아한 여성모티브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할리퀸로맨스의 여주인공들은 낭만적 유토피아에 사로잡혀 있다. 낭만적 사랑은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운 이상적인 대상과 순수한 쾌락의 경지에서 결합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때문에 낭만적 사랑에 사로잡힌 주인공들은 사랑 자체를 사랑하거나 연애 초기 단계에 동반되는 황홀한 감정을 사랑하는 것일 뿐, 자기 앞에 현존하는 남자는 그 사랑을 경험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할리퀸로맨스의 주인공들은 완전무결한 이상과 현실적인 경험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채, 이상적 사랑과 현실의 남자를 향한 감정과 성적 욕망을 즉자적으로 일치시켜버린다. 때문에 사랑의 감정과 성적 욕망이 혼재된 남자와의 육체적 합일을 완전한 사랑으로 환치하거나 이상화하는 모순에 빠져 현재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최상의 이상형으로 우상화한다.

<위험한 사랑>에서 에밀리가 추구하는 낭만적 사랑은 첫사랑의 황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별의 고통을 안겨준 제임스는 7년 만에 나타나 단 일주일 동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에밀리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사랑의 감정과 성적 욕망의 충족은 에밀리로 하여금 제임스를 오랫동안 꿈꾸었던 완전한 사랑의 이상과 일치하게 만드는 기제이다. 

반면, <욕망을 넘어선 사랑>에서 에이미의 낭만적 사랑은 폭력적인 남성들에 대한 환멸과 반대급부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자신이 만난 남자 중 유일하게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남자 폴의 인간미에 단번에 매료된다. 에이미는 이상적인 남자로 우상화된 폴의 아픈 상처를 모성으로 치유해주기 위해 어릴 적부터 가부장적 결혼과 모성이데올로기를 강렬하게 저항해왔던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폴에게 청혼한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확신과 주체적인 의식을 지닌 페미니스트이지만, 가부장적 결혼제도에 반성적 거리를 취했던 빅토리아로맨스의 주인공들과 달리 열정적인 사랑의 감정에 매몰되는 모순적인 여성들이다. 정숙한 아내와 요부를 요구하는 가부장적 결혼제도에 저항하여 성의 혁명을 외치는 페미니스트 주인공들은 분명 능동적인 남자와 수동적인 여자라는 고정적인 성역할의 통념을 벗어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여성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이분법을 고수함으로써 다시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여성으로 퇴행하는 식으로 이성애중심주의적인 낭만적 사랑의 유토피아에 고착되어 있다페미니즘 재부팅시대에 이성애적 유토피아를 넘어서 다각적인 사랑의 서사를 그린 최근의 로맨스와 대조를 이룬다. 

 

글: 이정옥

 

* 사진 출처: 네이버 및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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