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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평화를 지켜나가는 생활의 무늬들은 서서히 낡아만 가고
[이혜진의 문화톡톡] 평화를 지켜나가는 생활의 무늬들은 서서히 낡아만 가고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0.05.06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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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다 와타루(高田渡)의 포크
일본 개헌 저지운동(출처-참세상)
일본 개헌 저지운동(출처-참세상)

평화헌법을 지키는 일본 국민’, 노벨평화상의 후보가 되다

2014년 느닷없이 평화헌법을 지키는 일본 국민이 노벨평화상의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노벨평화상 수상 예측 결과를 발표하는 연구기관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PRIO)’ 웹사이트에 여성과 아동 인권 운동가들의 이름과 함께 일본 국민이 수상 후보로 지목된 것이다. 결과는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이문화권 안에서 아동인권과 여성 교육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17세의 파키스탄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1997- )와 인도의 시민인권운동가 카일라쉬 사티아르티((Kailash Satyarthi:1954- )의 공동수상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일본 국민이 노벨평화상의 수상 대상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찬반양론이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한국으로서는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일본 국민의 성격을 새삼 환기해볼 만한 계기를 갖추게 된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들로서는 아베(阿部)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추진에만 초점을 두고 줄곧 이 사태를 주시해왔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경험했던 한국으로서는 현 시점에서 아베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추진을 좌시할 수만은 없으며, 그것은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또다시 우리의 삶으로 끌고 들어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헌법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직후인 194611월 연합국이 일본을 점령했을 당시 미군 주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초안을 작성하고 일본 국회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475월에 시행되었다. ‘일본헌법9는 일본의 전쟁 포기, 전력보유 금지, 교전권 불인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이른바 평화헌법으로 불리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개정한 적이 없었다. 그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국권 발동에 따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2. 전항(前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기타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개헌을 반대하는 일본 국민 집회(출처-연합뉴스)
개헌을 반대하는 일본 국민 집회(출처-연합뉴스)

평화헌법을 지킨다는 것

그런데 201471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일본 헌법 제9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결의안 집단적 자위권을 채택했다. 타국에 의한 불법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상 허용되는 무력행사를 자위권이라고 하는데, 일본 자위대는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정당방위 성격의 개별적 자위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평화헌법상 자위대는 선제공격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타국으로 파견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우경화 바람과 함께 20163월 아베 정권은 일본에 대한 무력 공격뿐만 아니라 일본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공격에도 자위대의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집단적 자위권법안을 발효했다. 이전에도 일본은 헌법 제9조를 개정하거나 해석을 달리하려는 시도를 반복해 왔다. 가령 1972년에는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을 보유하고 있으나 헌법의 제약에 따라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공식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일본이 아베 총리에 와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일본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면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헌법 해석의 변경을 각의 결정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발발 당시까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승전국의 강요에 의해 군사력 전체를 포기해야만 했던 저간의 사정을 추측해본다면 당시 일본 국민이 가졌던 상실감의 정도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에도 약 7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자국의 방위만을 인정하는 개별적 자위권을 보유하고 있고, 또 그것을 국제 평화 수호라는 명분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국민의 평화헌법 수호는 그만큼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베 정부가 평화헌법을 포기하고 보통국가론을 내세우며 헌법 개정을 완수하려는 것은 일본의 위기가 대내외적으로 극한에 치닫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임을 추측할 수 있다. 국내적 위기 극복을 위해 대외적 영향력을 강화해가려는 방식은 그동안 흔히 목도해왔던 낯익은 사태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환영하는 미국의 태도를 볼 때 이제 동북아시아의 평화 수호는 비단 일본 국민에게만 한정된 사안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일본 국민이 국제 평화를 지지하면서 일본의 전쟁 개입에 반대했던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60년대 후반 안보투쟁의 열기와 함께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 일본의 포크음악 역시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자위대모집포스터 (출처-hotdog)
자위대모집포스터 (출처-hotdog)

자위대에 들어가자? 도쿄전력에 들어가자?

도모카와 가즈키(友川かずき), 나기라 겐이치(なぎら健壱)와 함께 일본 가요사의 3대 주당중 단연 1위에 자리하는 다카다 와타루(高田渡:1949-2005)의 곡 <자위대에 들어가자(自衛隊に入ろう)>(1969)1960년대 일본 반체제 포크의 최대 성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일본 포크계의 신으로 불렸던 오카바야시 노부야스(岡林信康)에 감화되어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서 교토에서 활동했던 다카다 와타루는 소박한 우리 삶의 일상을 그린 가사나 유머러스한 풍자와 해학이 담긴 정치 포크송을 부른 가수로 유명하다.

정면을 항해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는 것도 하나의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일상생활 그대로를 노래하는 것이 최고의 프로테스트(protest) 싱어가 아닐까 한다라는 그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카다 와타루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친숙한 대상과 소재를 있는 그대로 노래하면서 조용히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 탓에 그의 노래는 과격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실실 웃어가면서 발화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령 다카다는 노숙자의 모습이나 아이스크림, 커피, 심지어 스킨십이나 물가인상에 대한 섭섭함에 대해서도 노래를 통해 그 감정을 조용히 읊조렸다. 그중에서도 다카다 와타루를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곡이 바로 <자위대에 들어가자>이다.

여러분 중 자위대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 없나요 / 깃발 하나 들고 나서고 싶은 사람 없나요 / 자위대가 인재를 찾고 있어요 / 자위대에 들어가자, 들어가자, 들어가자 / 자위대에 들어가면 이 세상은 천국 / 남자 중의 남자는 모두 자위대에 들어가 산화하자 / 스포츠를 해보고 싶은 사람 없나요 / 언제든 자위대로 오세요 / 창이든 소총이든 죄다 있어요 / 어찌됐든 몸이 자본입니다 / (중략) / 소총이나 탱크나 비행기에 관심 있는 분은 / 언제든 자위대로 오세요 / 하나하나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 일본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 소총과 로켓이 합니다 / 미국인들에게도 도움을 받고요 / 나쁜 소련과 중국을 물리칩시다 / 자위대가 인재를 찾고 있어요 / 나이도 학력도 묻지 않습니다 / 조국을 위해서라면 어디까지나 / 솔직한 사람을 구합니다

 

언뜻 보면 자위대 간부조차 탄복할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곡은 사실 미국을 등에 업은 자위대가 일본의 평화를 지킨다는 것의 모순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곡이 발표되었던 1969년 당시 자위대 측으로부터 자위대의 홍보 곡으로 사용하자는 제안을 받아서 매우 난처했다는 다카다 와타루의 유명한 에피소드도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곡은 현재 일본에서 방송금지곡이다.

원래 이 곡은 말비나 레이놀즈(Malvina Reynolds)<Andorra>(1962)를 원곡으로 한 번안곡인데, 피트 시거(Pete Seeger)가 이 곡을 불러서 처음 세간에 알려졌고 이후 다카다 와타루가 가사를 바꿔서 URC(Underground Record Club) 레이블에서 발매한 것이다. 당시 이 곡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시민집회에서 수도 없이 불렸던 레퍼토리 중의 하나로서, 반어적인 가사를 통해 1960년대 일본의 전체주의를 비판한 대표적인 노래로 꼽혔다.

한편 2011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이 곡은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를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아 <도쿄전력에 들어가자(東電に入ろう)>라는 신랄한 비판조의 노래로 모습을 바꾸어 일본 사회에서 다시 회자되었다.

여러분 중 도쿄전력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 없나요 / 깃발 하나 들고 싶은 사람 없나요 / 도쿄전력에서 인재를 찾고 있어요 / 도쿄전력에 들어가자, 들어가자, 들어가자 / 도쿄전력에 들어가면 이 세상은 천국 / 남자 중의 남자는 모두 도쿄전력에 들어가서 산화하자 / 스릴을 맛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도쿄전력으로 오세요 / 우라늄이든 플라토늄이든 죄다 있어요 / 하청을 주어도 좋아요 / 핵발전소 추진파 여러분은 원자로 바로 아래로 모이세요 / 지금 당장에야 몸에 나쁠 리가 있겠습니까 / 샤워만 해주면 돼요 / 핵발전소는 클린 에너지입니다 / 플라토늄은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니에요 / 방사능은 나오지만 반감기(半減期)는 겨우 24천 년이에요 / 일본에서 에너지를 유지하려면 핵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 약간의 피폭은 어쩔 수 없어요 / 이조진(가글제)을 마시면 돼요 / 사용하고 난 핵연료는 모두 추려서 드럼통에 쑤셔 넣으면 돼요 / 로카쇼무라 저장수조에서 식히고 있어요 / 겨우 3백 년만 참으면 돼요 / 물이 샌다고 소란피우지 마세요 / 연기가 나온다고 당황하지 마세요 / 지붕이 날아가 버려도 전혀 괜찮아요 / 그래도 바닷물로 식히고 있거든요 / 지금 당장 위험하지는 않지만 / 우유도 채소도 버립시다 / 정부의 높으신 양반들이 말하고 있네요 / 보상은 세금으로 치룹시다 / 방사능 계측기는 품절 되었어요 / 당신들은 그런 것을 갖고 있으면 안 돼요 / 방사능 수치는 여기서 발표합니다 / 믿는 자는 구원 받을지어다! / 도쿄전력에 들어가자, 들어가자, 들어가자 / 도쿄전력에 들어가면 이 세상은 천국 / 남자 중의 남자는 모두 도쿄전력에 들어가서 산화하자

 

다카다와타루-출처-다음
다카다 와타루(출처-다음)

 

일본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종언과 포크가요 시대의 도래

다카다 와타루가 처음 음악에 눈 뜬 것은 그가 아주 가난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온 라디오에서 브라더스 포(Brothers four)’의 음악을 듣고 나서였다. 1957년에 결성된 미국의 포크송 그룹 브라더스 포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와 조화로운 남성 화음에 소박한 노랫말로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쉽게 빠져들 만한 곡들을 불렀다. 여기에 1960년대 미국 사회의 혼란상을 반영하면서 인종차별 철폐와 고용 평등 등 민중 생활을 둘러싼 문제적 메시지를 담아 뉴 포크의 세계를 개척한 싱어송라이터들의 음악이 더해지면서 다카다 와타루 역시 동시대의 문제의식에 공명하는 곡들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대개의 포크가수들이 그랬듯이 1960년대 후반 다카다 역시 아고라라는 포크집단에서 활동하다가 <자위대에 들어가자>를 필두로 하여 19688월 제3간사이(關西) 포크 잼보리에 등장한 것을 계기로 URC 레이블에서 앨범 다카다 와타루/다섯 개의 빨간풍선(高田渡/五つの赤い風船)(1969.8)을 발매하면서 정식 데뷔했다. ‘포크 크루세더스의 앨범 파렴치가 발매 금지 처분을 받은 것을 계기로 하여 예술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자작곡의 음악을 자주 제작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회원제로 운영하고 있었던 URC 레이블은 당시 간사이 포크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앨범 기차가 시골을 지나가던 그때(汽車が田舎を通るその時)의 발매를 끝으로 다카다는 URC 레이블과 결별하고 교토로 건너가 거기서 평생의 동지가 될 나카가와 고로(中川五郞), 나카가와 이사토(中川イサト), 가가와 료(加川良), 시바(シバ) 등을 만났다.

그 이후 다카다는 1971킹 레코드로 이적하여 앨범 인사(ごあいさつ)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인사(ごあいさつ)>, <생활의 무늬(生活の柄)> 등 정통 포크 곡에 시를 가사로 입힌 곡들과 함께 <커피 블루스(コーヒーブルース)><돈이 없어서(銭がなけりゃ)>와 같은 정통 포크 자작곡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현재 이 앨범은 일본 최고의 포크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명반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무렵 다카다는 일본 전설의 저그 밴드(jug band) ‘무사시노 단포포단(武蔵野タンポポ団)’을 새롭게 결성하면서 미국 컨트리풍의 심플한 사운드를 지향했는데, 계도(系圖)(1971)와 돌()(1973) 등의 앨범은 이 시기 다카다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처음에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정통 포크로 입문했던 다카다 와타루가 메이저 음반회사인 킹 레코드로 이적하면서 컨트리풍의 곡들로 분위기를 전환한 것은 당시 일본 포크 씬에 불었던 상업적 변화의 바람에 따른 것이었다. 1968년 제3간사이 포크 잼보리가 배출한 스타들은 거의 모두가 URC 레이블 소속의 가수들이었는데, 1971년에서 1973년까지 다카다가 속한 무사시노 단포포단을 비롯하여 엔도 겐지(遠藤賢司), 니시오카 교조(西岡恭蔵), 해피앤드,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가가와 료, 도모베 마사토(友部正人) 등 많은 포크 가수들이 메이저 레코드 회사로 옮겨갔다. 이것은 1970년대 일본 포크 씬의 변화를 의미하는 현상이었다. 이들이 URC를 떠나 메이저 레코드 회사로 대거 이적한 1971년 이후 정치 풍자적 임팩트가 점차 사라지면서 일본 언더그라운드 포크가 종언을 맞이하고 포크가요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까지 일본 포크 씬을 이끌어왔던 다카다는 공연 도중에도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들어버리는 등 오랫동안 관객들과 함께 해온 몇 안 되는 포크가수 중의 한 사람이다. 다카다의 단골술집인 도쿄 기치조지(吉祥寺)의 허름한 꼬치집 이세야(いせや)’에 가면 대낮에도 술을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지금도 무대 공연 중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하다 무대 위에서 잠에 빠져버린 다카다를 보고 키득키득 거리는 관객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그렇게 마셔댔던 술이 원인이었을까. 1949년생인 다카다는 그의 나이 56세가 되던 2005년 백발노인의 모습으로 공연 도중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 여기서는 다카다 포크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위트와 풍자가 돋보이는 <물가인상(値上げ)>을 소개한다.

물가인상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 / 올해 안에 물가가 인상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어 / 당분간 물가인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있는 힘을 다해 물가인상을 보류하고 싶어 / 지금 당장 물가인상을 인정할 수는 없어 / 물가가 인상된다네 /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은 안 돼 / 물가인상은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 물가인상은 지금 검토 중이라네 / 물가인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 아직은 시기상조야 / 물가인상 시기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 물가인상을 인정할 리가 없잖아 / 지금 당장 물가인상을 하고 싶지 않아 / 물가인상에는 소극적이지만 / 올해 안에 물가인상은 피할 수 없다네 / 가까운 시일 내에 물가인상을 피할 수 없을 거야 / 물가인상은 어쩔 수 없다네 / 물가인상을 단행하자

 

 

 

* 이 글은 <문화웹진 다>(20151130)에 게재했던 글을 수정한 것이다.

 

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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