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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일본 포크음악과 그 적들
[이혜진의 문화톡톡] 일본 포크음악과 그 적들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0.08.03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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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와 미카미 칸

 

CSNY-Fillmore Double Night 앨범(출처:Thecdvault)
CSNY-Fillmore Double Night 앨범(출처:Thecdvault)

밴드나 노래 제목을 잘 모르더라도 드라마나 영화 혹은 광고를 통해 CSN&Y(Crosby, Stills, Nash And Young)의 곡을 한 번 쯤은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웨스트코스트 컨트리 록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는 CSN&Y는 사막의 단비와도 같이 시원하고 청량한 감성으로 남성 중창도 천상의 보컬 하모니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탓에 한때 라디오 방송의 단골 레퍼토리로 통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록 사운드에 정통해 있는 이 네 명의 멤버들이 그 반대편에 있는 어쿠스틱 사운드로 1960년대 록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당대의 시대정신과 대중성을 한꺼번에 실현해내면서 포크 록 슈퍼 그룹으로 등극했던 저간의 사정은 그들의 명성을 되돌아보는 데 충분한 가치를 제공한다.

CSN&Y의 첫 출발은 1968년 서로 각자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David Crosby(기타, 보컬), Stephen Stills(기타, 키보드, 베이스), Graham Nash(기타, 보컬)가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3인조 포크록 밴드 CS&N을 결성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다 1970년 탁월한 감수성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 Neil Young이 밴드에 가세하게 되면서 4인조 CSN&Y로 재편했다. 이 네 명의 멤버들은 미국 포크에 뿌리를 둔 싱어송라이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데, 뛰어난 보컬 하모니에 1960년대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반영한 제1집 앨범 <Deja vu>(1970)를 출시하자마자 무려 97주간이나 미국 음악 차트의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명실상부한 밀리언셀러 슈퍼밴드로 등극했다. CSN&Y의 포크록이 라디오 전파를 따라 전 세계로 흘러가는 동안 당시 일본 포크씬에서도 이들의 영향력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어쿠스틱 기타 실력과 편안한 보컬 코러스를 특징으로 한 일본의 포크록 그룹 가로(ガロ)’CSN&Y에 대한 영감을 잘 살릴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대학가를 근거지로 하여 형성된 일본의 포크운동 속에서 가로CSN&Y1집 앨범 <Deja vu>가 발간된 1970 11월에 결성하여 19763월에 해체한 남성 3인조 그룹으로서, 호리우치 마모루(堀内護, 1949-2014), 히다카 도미아키(日高富明, 1950-1986), 오노 마스미(大野真澄, 1949- )가 여기에 멤버로 참여했다. 이들은 결성하자마자 당시 일본 최고의 록 레이블이었던 일본 콜롬비아 산하의 머쉬룸 레코드와 계약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는데, 첫 시작부터 CSN&Y 스타일의 음악을 표방하면서 싱글 앨범 민들레(たんぽぽ)(1971)를 통해 데뷔했다. 같은 해 11월 첫 정규 앨범 GARO가 발매되자 듣기 편안한 포크록 사운드로 대중에 각광 받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일본의 CSN&Y(和製 CSN&Y)’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안정된 보컬 하모니와 어쿠스틱 기타 선율의 조화, 그리고 시대에 육박해 있는 가사를 표방하면서 가로1960대를 마감해가고 있던 포크 정신과 대중성을 한 번에 거머쥘 수 있었다.

특히 1972년 두 번째 앨범 GARO 2에 수록된 <학생거리의 찻집(学生街の喫茶店)>1973년 봄 7주간 연속 1위를 차지하고, 1973년 연간 히트 차트 3위에 기록되는 등 뜻밖의 대히트를 치자 가로TV 방송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크 가수는 TV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일본의 대표적인 송년 예능 프로그램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NHK)을 비롯하여 각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연이어 출연하게 되면서 가로의 대중적 인지도 역시 함께 높아만 갔다. 이후 일본유선대상(日本有線大賞)’ 신인상까지 수상하면서 가로는 포크 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포크계의 아이돌로 급부상했다.

 

'학생거리의찻집' 앨범(출처:Smule)
'학생거리의찻집' 앨범(출처:Smule)

당시 <학생거리의 찻집>에 쏠린 대중적 인기는 노랫말에 등장하는 장소가 도쿄 오차노미즈(御茶ノ水)의 메이지대학 근처에 있는 찻집 언덕()’이라는 등 다양한 설들이 난무하기도 했지만, 작사가인 야마가미 미치오(山上路夫)는 찻집의 실제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고 한다. 이 곡의 가사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잔잔하게 흐르는 남성 중창의 나지막한 보컬 케미가 주는 감성이 1970년대 일본 대학가의 스산한 풍경을 눈앞에 그려주며, 또 사랑에 서툰 청년들의 좌절과 상실감을 애잔한 분위기로 표현해낸 탓에 현재까지도 가로의 팬들에게 야릇한 추억을 소환해주면서 쇼와시대 정서를 간직한 대표곡으로 자리 매김 되어있다. 그만큼 가로는 포크의 형식을 빌어 20대 청년시절의 추억을 가감 없이 단백하게 묘사해내면서 동 세대의 공감을 획득하고 대중적인 명성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이전의 포크 세대와는 살짝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1972년 앨범 <GARO 3> 발간 이후 1974년에 <GARO LIVE>와 <GARO 4>가 발매되었고, 이 가운데 <너의 생일(君の誕生日)><로망스(ロマンス)>가 연이어 히트하면서 이른바 어쿠스틱화한 GS 가요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별칭은 포크 가수로서 다소 불명예스러운 평가이기도 했지만, 1973년 제15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대중상을 수상하는 등 그들의 명성은 지속되는 보였다. 그러나 1974년 <서커스(サーカス)>1975년 <음유시인(吟遊詩人)>을 연이어 발표했지만 이전에 비해 앨범 판매 실적이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부진한 앨범 판매 실적 속에서 멤버들의 음악적 지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가로19763월 그룹 해체를 결정했다.

현재 가로는 포크와 록의 경계를 횡단하면서 뉴뮤직 시대로 진입해가고 있었던 일본 대중음악의 역사를 상징하는 포크그룹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0년대 초까지 격렬했던 학생운동이 급격히 시들어가자 더 이상 청춘과 열정을 내세우며 낭만을 노래할 수 없게 된 시기가 도래하면서 정치운동을 기반으로 한 포크의 생명력도 점차 그 불씨를 꺼뜨리고 있었던 시대를 가로의 음악이 아슬아슬하게 버텨주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며 일본의 사회 개혁에 깊숙이 관여했던 일본 포크운동의 역사도 그렇게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여기서는 1970년대 일본 포크 씬에서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사로잡았던 가로의 대표곡인 <학생거리의 찻집><로망스>를 소개한다.

 

학생거리의 찻집(学生街の喫茶店)

너와 함께 자주 이 가게에 오곤 했었지 / 별 이유도 없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었지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던 이 가게의 / 한쪽 구석에서 들었던 밥 딜런 / 그때의 노래는 이제 들리지 않고 / 사람들의 모습도 변했지 / 세월이 흘러가버렸네 / 그때는 그게 사랑이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네 / 너와 / 너와 함께 자주 이 가게에 오곤 했었지 / 별 이유도 없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었지 / 창밖의 가로수들은 아름다웠고 / 문을 열고 네가 들어올 것만 같았어 / 그때 거리의 낙엽이 / 소리 없이 춤을 추고 있었지 / 세월이 흘러가버렸네 / 그때는 그게 사랑이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네 / 너와

 

로망스(ロマンス)
그대, 잊지 않았겠지? 우리 젊은 날의 사랑을 / 오늘은 우리에게 다시 오지 않을 날이야 이 강을 따라 이어진 길을 비켜가는 / 그런 것들도 기억해 두자 / 우리는 지금 하나의 사랑으로 묶여있지 / 변함없는 낭만의 꽃을 피우게 하자 /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거리가 항상 우리를 부르네 / 멀리서 들려오는 밝고 시끌벅적한 소리 / 지금 그대와 함께 바라보는 강에 떠있는 배 / 그런 것들도 기억해 두자 / 우리는 지금 하나의 사랑으로 묶여있지 / 변함없는 낭만의 꽃을 피우게 하자 / 변함없는 이 사랑을 둘이서 맹세하자 / 변함없는 낭만의 꽃을 피우게 하자 / 변함없는 이 사랑을 둘이서 맹세하자 / 변함없는 낭만의 꽃을 피우게 하자

 

미카미 칸(출처:iFLYER)
미카미 칸(출처:iFLYER)

여기 또 한 사람, 일본 포크계에서 가장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로 주목받는 이단아가 있다. 미카미 칸(三上寛, 1950.3.20.- )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미카미 칸은 추남에 가까운 생김새에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 절규에 가까운 교성과 황량한 불모지를 연상시키는 거친 기타 연주 등으로 인해 지금껏 경험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일본 포크계의 상식을 완전히 무너뜨린 인물로 통한다. 상냥함과 친절함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거칠고 파격적인 개성을 주 무기로 하여 70세의 나이에도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미카미 칸은 온 몸을 사용하면서 날짐승과 같은 샤우트 보컬과 정석을 무시한 대담한 연주, 그리고 아주 쉬운 일상적인 일본어 가사를 활용하여 매우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킨 탓에 원조 펑크 싱어라는 타이틀을 얻어낸 매력의 소유자다.

1950320일 아오모리현 기타쓰가루군(北津軽郡) 고도마리마을(小泊村)에서 나고 자란 미카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아오모리경찰학교에 입학했지만 3개월 만에 퇴학당한 후 도쿄로 이주하여 신주쿠 골덴가이의 스넥 바에서 요리사를 전전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해갔다. 그러던 중 1960-70년대 일본 불세출의 작가이자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아마추어 권투선수 등 전방위 예술가로 활약하고 있었던 데라야마 슈지(寺山修司: 1935-1983)에게 감화되면서부터 시 창작을 시작하여, 1967년 독설과 냉소, 역설과 위트가 묘하게 사람의 정곡을 찌르는 데라야마 슈지의 어법을 차용한 처녀시집 하얀 조각(白い彫刻)을 출판했다.

 

데라야마 슈지(출처:아마존재팬)
데라야마 슈지(출처:아마존재팬)

일본의 학생운동이 한창이었던 1960년대에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라는 문구 하나로 상아탑에 웅크리고 있던 학생들을 일제히 거리로 이끈 데라야마 슈지는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표방한 일본 사회의 기묘한 무사안일주의로 대변되는 기성 질서를 파괴하라고 선동했던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인물이었다. 독설과 위트로 전후 일본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면서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했던 그의 거룩한 외침은 기성 질서에 저항하여 꿈과 자유를 좇는 청년의 이상을 대변하면서 시대적 공감을 얻어내고 있었다.

청년시절의 미카미가 도쿄로 건너온 이후 싱어송라이터를 비롯하여 영화배우와 작가 등 이른바 전위예술가로 행세하게 된 것은 당시 온갖 기이하기 짝이 없는 연극과 초현실주의·부조리극을 위시한 실험영화들을 창작하면서 시대의 기린아로 불리고 있었던 데라야마 슈지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 미카미 칸이 대중을 상대로 무대에 올라 라이브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69년부터였다. 이후 그는 시부야의 스테이션 70’ 공연을 통해 저널리스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레코드 데뷔를 성사시켰는데, 19714월 일본 콜롬비아에서 발매된 <미카미 칸의 세계(三上寛の世界)>가 그의 첫 앨범이다. 그러나 1968-1969년 미군 숙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거리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한 연쇄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永山則夫)를 소재로 한 수록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이 앨범은 자체 회수되었다.

지금까지도 일본 포크계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19718월의 나카쓰 포크 잼보리는 미국의 우드스턱 페스티벌처럼 일본 포크음악을 중심으로 한 청년들의 자유분방한 집단문화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 여기서는 예의 바르기로 소문난 일본 청년들조차 지루한 무대 공연에는 나가라!(帰れ)’고 가차 없이 외치는 것을 의례처럼 취급했다. 이러한 행위를 가에레 콜(帰れコール)’이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이 공연에서 많은 가수들이 가에레 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외모에 날카롭고 거친 목소리, 그리고 분노의 기타 신공 퍼포먼스를 선보인 미카미 칸의 낯선 음악은 청년 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당시 이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일본 청년문화와 절묘하게 어울렸다. 더욱이 잔혹하고 외설적인 가사와 맹렬한 에너지를 내뿜는 그의 절규는 저항을 모토로 한 포크음악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었다. 1960년대에 시작된 일본 사회의 혁명적 분위기는 미카미 칸과 같은 청년세대의 좌절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포크가수를 배출해내는 환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요컨대 미카미 칸의 가사는 쓸쓸한 도시의 황량함이나 궁색한 변두리 마을의 쓰레기장, 낡은 가건물의 스트립 댄서나 야쿠자 등을 연상시켰고, 또 일본 포크 특유의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의 거칠고 탁한 목소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막고 싶게 할 정도의 고성과 절규를 내뿜는 과격한 것이었다. 미카미의 그런 낯선 음악은 마치 현실이란 날 것 그대로 대면하고 정면 돌파해야만 기성에 대한 정당한 각성을 촉구할 수 있다고 호소하는 것만 같다. 즉 노랫말은 매우 거칠고 외설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지만 그런 강렬한 이미지와 상상력을 압도하면서 전위의 자세를 보여준 것은 반도덕을 통해 거꾸로 도덕을 보여주려는 부정변증법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런 탓에 그의 노래는 세상을 원망하는 노래(怨歌)’로 간주되어 종종 방송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미카미 칸의 대표곡으로 간주되는 <꿈은 밤을 열고(夢は夜ひらく)>를 소개한다. 이 곡은 사르트르와 마르크스, 야쿠자 영화와 만화 내일의 죠와 같은 어휘들로 일본 학생운동 세계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신좌익 청년들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 명곡으로 꼽힌다.

 

꿈은 밤을 열고

72를 더하면 9가 되지만 / 9가 되면 더 좋은 쪽으로 / 4()4()를 더하면 괴로움이 되지 / 꿈은 밤을 열고 / 사르트르 마르크스가 줄을 서더라도 / 내일 날씨는 몰라 / 야쿠자 영화의 간판에 / 꿈은 밤을 열고 / 태어난 고향은 고도마리(小泊) / 오늘도 불경기라네 / 현금 등기 우편이 왔다고 / 달려가는 누이야 / 정말로 간다면 / 이 칼로 어머니를 찌르고 간다면 / 그런 날도 있었겠지 / 목욕탕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길 / 40엔의 영광은 / ‘내일의 죠도 되지 못하고 / 꿈은 밤을 열고 / 채소 가게 뒤에서 울고 있던 / 아이를 업은 도둑이여 / 양배추 하나 훔치는 데 / 눈물은 필요 없잖아! / 빨간 청사초롱에 인생론 / 너무도 슬픈 균형이 잡힌다만 / 컵 하나의 행복을 / 어찌 다 마셔버릴까 / 꿈은 밤을 열고 염불을 외워도 / 열린 꿈은 없다네 / 하물며 밤 같은 것은 오지 않는다네 / 꿈은 밤을 열고 / 꿈은 밤을 열고

 

*이 글은 계간 <문학과의식> 2019년 겨울호(통권117)에 수록되었던 것을 수정한 것이다.

 

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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