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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국민을 학살하다
국가가 국민을 학살하다
  • 노수빈, 안치용
  • 승인 2020.11.17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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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④ 국민보도연맹사건 ... 한국전쟁 중 발생한 국가의 '빨갱이' 죽이기

 

그들이 죽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몇 달이 지나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 수십만 명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했다.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한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였다.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영화 '레드 툼' 캡쳐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영화 '레드 툼' 캡쳐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에서 류종철이 죽었다. 그는 20대 중반이었다. 좌익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주고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원이 되었다. 학교를 나오지 않고 농사를 짓던 평범한 청년은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어느 날 저녁 끌려가 죽었다. “빨갱이와 관련이 있다”며 잡혀간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에서 김재현과 이일용이 죽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죄를 면하게 해준다고 가입하라고 해서 보도연맹원이 되었던 당시 31세의 고종술은 각북지서에 연행되어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농업창고에 구금되었다. 밤이 되자 경찰이 차례로 이름을 불렀고 불려 나간 이들은 하나같이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고종술은 다음 날 아침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덮개를 씌운 트럭이 산동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 트럭에는 자신과 함께 창고에 잡혀있던 같은 마을의 김재현과 이일용이 타고 있었다. 트럭은 산동 가는 길목에 있는 곰티재 고개에서 멈췄고 트럭에 실린 이들은 모두 그곳에서 죽었다. 살아남은 고종술은 곰티재 고개에 시신이 가득했으며 부패상태가 심해 옷을 보고 신원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이천재의 부친은 경기도 이천에서 죽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단번에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목격한 학살 현장엔 시체가 무덤처럼 쌓여있었다. 검붉은 피가 흥건하여 발목이 빠질 정도였다. 송판때기에 쓰인 이름을 보고 겨우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경찰은 유치장 3개에 꽉 채웠다. 근처 농협 창고에서는 70여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이천과 안성 등지에서 150여 명이 무더기로 죽었다.

송철순의 부친은 경상남도 부산시 구평동에서 죽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포함하여 끌려온 이들을 4명씩 세웠다. 그렇게 줄 세운 이들 뒤에서 일제히 총을 쐈다. 산발적인 총성 끝에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자리를 제대로 정리하지도 않고 떠났다. 총을 든 자가 죽음을 앞둔 한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청년이 답했다. “내 손가락이 원수다. 도장 하나 잘 못 찍어서 이런 변을 당하고…”

노치수의 부친은 경상남도 창원에서 죽었다. 아버지는 당시 39세였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독립을 위한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해방이 되어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이승만 단독정부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을 때 강제로 보도연맹원이 되었다. 전쟁이 났고 보도연맹원은 부역하러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쌀 소쿠리와 삽을 들고 나간 후 영원히 아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보도연맹 학살 당시 부친이 사망한 노진곤 씨의 증언 /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9회 ‘보도연맹1-잊혀진 대학살’, 2001.4.27. 방영
보도연맹 학살 당시 부친이 사망한 노진곤 씨의 증언 /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9회 ‘보도연맹1-잊혀진 대학살’, 2001.4.27. 방영
보도연맹 학살 당시 부친이 사망한 정종수 씨의 증언 /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9회 ‘보도연맹1-잊혀진 대학살’ , 2001.4.27. 방영
보도연맹 학살 당시 부친이 사망한 정종수 씨의 증언 /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9회 ‘보도연맹1-잊혀진 대학살’ , 2001.4.27. 방영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군 북이면에서 청년들이 죽었다. 해방 후 좌익 활동가들이 “비료를 준다. 이걸 하지 않으면 친일파로 몰린다”라며 뭔가에 가입하라고 강권할 때 북이면에 살던 모영전은 도장을 찍었다. 이후 북이지서에 불려간 그는 “왜 좌익 단체에 가입했느냐”는 질문에 “비료 준다고 해 도장을 찍었다”라고 답했다. 그는 그곳에서 두들겨 맞고 본인도 모르게 보도연맹원이 되었다. 전쟁 직후 지서에선 보도연맹원 간부를 통해 예비검속을 했다. 지서에 모인 보도연맹원들은 북이국민학교로 이송‧구금되었다. 학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저녁이 되자 경찰들이 “밥 먹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며 일부를 내보냈다. 내보낸 일부에 속한 모영전은 학교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과 달리 되돌아간 청년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라남도 보성 참새미 고개에서 청년들이 죽었다. 보도연맹원 박태수는 22살이었다. 그는 전쟁 발발 후 율어지서 창고에 3일 동안 구금되었다. 창고엔 그를 포함하여 39명의 청년이 있었다. 1950년 7월 21일 오전 10시경 총을 멘 경찰 15명과 트럭이 왔다. 경찰은 명단을 가지고 사람을 불러내 전화선으로 한 명씩 묶고 다시 3명씩 같이 묶어서 트럭에 태웠다. 경찰은 트럭 위에 눌러앉아서 고개를 들면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트럭에서 내리게 하자 사람들이 울기 시작했다. 내려보니 참새미 고개였다. 무궁화를 단 사람이 사격개시를 외치자 경찰관들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사람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박태수는 그들의 죽음을 보았다.

경상남도 울산에서 청년들이 죽었다. 보도연맹원 박재갑은 22살이었다. 1950년 7월 15일 아침 그는 소집통보를 받고 농소국민학교 교정으로 갔다. 그곳에 모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다른 데 일하러 가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트럭 2대를 나눠 타고 울산경찰서 운동장에 내려 상무관 강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곳에 구금되었다. 때는 장마철이었고 박재갑은 너무 배가 고파 뛰어 들어오는 개구리를 손으로 잡아서 씹지도 않고 넘겼다. 구금 기간에 그는 울산경찰서 1층에 있는 수사과 취조실에서 한차례 과거에 ‘빨갱이’ 활동으로 무엇을 했는지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구타가 있었다. 구금 상태로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나자 경찰은 밤에 20~30명을 호명했다. 이름이 불린 이들은 트럭에 실려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간 살아남은 박재갑은 트럭에 실려 나간 사람들이 자신과 달리 살아남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보도연맹 학살 당시 사진 자료 /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30회 ‘보도연맹2-산 자와 죽은 자’ , 2001.5.5. 방영
보도연맹 학살 당시 사진 자료 /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30회 ‘보도연맹2-산 자와 죽은 자’ , 2001.5.5. 방영

 

이렇게 국가의 폭력에 의해 허망하게 죽어간 이들은 보도연맹원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 특무대(CIC), 경찰, 헌병,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와 우익청년단은 과거 공산주의 활동과 연계된 것으로 간주된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을 소집‧연행‧구금 후 집단학살하였다. 피해자의 수는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공권력에 의한 학살에는, 희생자가 빨갱이라 하여도 당연히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공산주의 활동과 무관한 많은 국민이 무차별적으로 포함되어 희생되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전쟁 직후에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었다. 

 

‘빨갱이’와 국민보도연맹

 

1949년 4월 20일 서울시경찰국 회의실에서 소규모의 국민보도연맹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한 달 보름이 지난 6월 5일 서울시공관에서 개최된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 선포대회’는 국민보도연맹의 창립을 대외적으로 공식화했다. 

정부수립 직후 발생한 군인반란사건(여순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내부에 존재하는 좌익세력을 대대적으로 색출하고자 했다. ‘공산주의자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의 핵심 기조가 되었다. 정부는 좌익 관련자들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그들을 통제‧처벌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창설된 것이 국민보도연맹이었다.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을 통해 좌익 관련자를 적극적으로 전향시킬 것을 모색하는 한편, 전향자를 관리‧통제하고자 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들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길을 열어줄 ‘포섭기관’이었다.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영화 '레드 툼' 캡쳐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영화 '레드 툼' 캡쳐

 

그러나 국민보도연맹의 ‘저작권’이 좌익세력을 절멸하려는 남한 정부의 강력한 열망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비록 보도연맹이 남한 정부수립 이후 창설되었지만, 조직의 성격과 명칭, 운영방침 등은 일제강점기 조선통치를 위해 일제가 운영‧관리하였던 사상전향자 단체인 사상보국연맹, 대화숙, 교외교호보도연맹의 조직 성격과 명칭, 운영방침 등을 따랐다. 보도연맹 창설을 주도한 검찰과 경찰 간부들이 모방하여 창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친일 경력자가 많은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공권력이 일제의 방식을 원용하여 자국 국민을 학살한 장면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자 해결되지 않은 숙제이다.

전향자를 교육하여 갱생할 기회를 준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이 집단학살의 표적이 된 것은 애초부터 ‘갱생’을 목적으로 한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민보도연맹은 전향자단체를 표방했으나 조직의 핵심 간부는 모두 정부 관리였고 실제 관리와 운영을 전담한 이들은 사상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소속이었다. 조직의 구조 자체가 검찰과 경찰이 끊임없이 연맹원들을 감시하는 통제적 형태였다. 즉 국민보도연맹은 ‘위험한’ 공산주의자를 찾아내어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관변단체였다.

정부는 보도연맹을 조직하여 전향자를 확보하고 그들의 사상을 심사하여 그중 ‘진정한’ 전향자를 포섭하고자 하였다. 포섭된 전향자들에게 사상전향교육을 실시하고 ‘탈맹’대상자를 뽑아내어 최종적으로 탈맹시킨다는 계획이었다. 1950년 6월 5일 서울특별시연맹 탈맹식이 열린 자리에서 6000여 명이 탈맹했다. 그러나 20일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탈맹은 중단된다.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일단 최대한 많이 가입시켜 놓고 사상전향교육을 거쳐 심사를 통해 탈맹시켜 점차 보도연맹의 규모를 축소해나가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 탈맹은 서울특별시연맹 탈맹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즈음까지도 보도연맹 지방조직은 시‧군지부 결성에 이어 시‧군마다 읍‧면지부를 계속해서 결성하던 중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질 때까지 1년여에 걸쳐 보도연맹 조직은 확대 일로를 걸었다.

국민보도연맹은 연맹원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했다. 연맹원은 가입 이후에도 여전히 확실한 전향여부가 의심되는 ‘좌익혐의자’ 또는 ‘요시찰인’으로 취급되었다. ‘요시찰 대상자’는 경찰이 정기적으로 동태를 감시했다. 연맹원에겐 ‘보도연맹원 맹원증’이 발급되었다. 1949년 10월부터 ‘도민증’과 ‘국민증’이라는 이름의 일종의 신분증을 발급한 가운데 보도연맹원에게는 일반 주민과 구분하기 위해 보도연맹원증을 따로 발급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공산주의자를 국민의 지위에서 법적으로 제외한 것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은 거주를 옮기거나 거주지를 떠날 때 반드시 관할 경찰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거주‧이전의 권리를 제한받았다.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영화 '레드 툼' 캡쳐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영화 '레드 툼' 캡쳐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고 폭력을 행사한 국가의 조치는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국민보도연맹에서 감시‧통제한 ‘빨갱이’가 정부의 주장처럼 색출된 사람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진 이들이 다수였다는 사실이었다. 창립 초기 가입대상은 ‘좌익전향자’였고 따라서 일차적 대상자는 남로당원이었다. 그러나 지방지부가 결성되고 지방의 가입자 수가 많이 늘어나면서 가입자의 성분이 변하게 된다. 경찰은 가입인원이 할당됨에 따라 좌익과 관련 없는 사람을 무리하게 가입시켰으며, 개인의 좌익활동 여부와 상관없이 특정 단체의 구성원 전원을 자동으로 가입시키기도 했다. 또한 실제 좌익활동 여부와 상관없이 경찰 등 공권력에 조사하는 이들의 사적 감정에 의해 강제로 가입시킨 사례가 부지기수였고 그 과정에서 구타‧협박‧고문 등 가혹행위가 다반사로 행사되었다. 

따지고 들면 보도연맹에 가입한 남로당원조차 완전한 좌익분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당세 확장을 위해 남로당은 1947년에 당원배가운동 차원에서 당원들에게 당원획득 책임제를 실시했다. 당원획득 책임제는 사실상 할당제로, 후보당원 과정이나 심사절차 없이 가입원서에 도장을 찍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원배가운동 당시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 중에는 남로당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변의 선동과 권유 그리고 분위기에 이끌려 가입원서에 도장을 찍은 이가 많았다. 

해방국면의 경북 경산군을 예로 들면, 실제로 좌익사상을 가지고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보다 마을 내 남로당 지방세포들이 조직 확대를 위해 주민들에게 남로당 가입서에 도장을 찍게 하여 남로당원이 된 사람이 많았다. 또한 많은 이들이 “농민들에게 논을 무상으로 나눠 준다”는 좌익 인사들의 연설만을 듣고 남로당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남로당 가입원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보도연맹이 창설되자 일괄적으로 보도연맹원이 되었다. 앞서 살펴본 부산시 구평동 학살에서 “내 손가락이 원수다”며 죽어간 어느 청년의 이야기는 역설적 진실인 셈이다. 

남한 정부가 규정한 ‘반국가사상’은 어떠한 객관적 기준이 있었다기보다는 사실상 정부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정부의 판단은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의 판단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반공 성향은 친일·친미와 대체로 일치했다. 애초에 그들이 ‘빨간 안경’을 쓰고 ‘빨갱이’를 찾아다녔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빨간 안경을 쓴 자들에게 색출된, 그리고 학살된 ‘빨갱이’가 수십만 명이었다. 

 

그날의 학살은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른 야만적 범죄였다

 

군‧경은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을 1950년 6월 전쟁 발발 직후부터 9월 중순까지 전국에 걸쳐 검속하고 살해했다. 이러한 집단학살은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 편에 설 것이라는 예상과 불안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 발발 당일인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 각 경찰서에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서 구금할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 비상통첩을 보냈다. 이후 6월 28일부터 7월 중순까지 지속적으로 ‘불순분자 구속’ 명령, 계엄령 선포 등 일련의 조치가 있었고 이를 근거로 요시찰인 예비검속과 구금, 살해가 무차별적으로 일어났다. 전쟁 이전부터 보도연맹원에 대한 정기적인 교육 소집이 있었기에 이들은 군‧경의 소집요구에 대부분 순순히 응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이 학살당하는 장면 / 출처 : 미국국립문서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이 학살당하는 장면 / 출처 : 미국국립문서관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곧바로 남하하여 전황이 급속이 악화한 지역에서 군‧경은 보도연맹원 등을 즉시 연행하였다가 곧바로 후퇴 직전에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이와 달리 인민군이 남하하는 데 시간적 여유가 있던 후방지역에서는 주요 좌익 활동가들이 먼저 소집되어 사살되거나 형무소로 연행되었다. 나머지 대다수 요시찰인들은 전선의 이동에 맞추어 재차, 삼차에 걸쳐 연행되었고, 군‧경은 이들을 며칠 구금하였다가 형식적인 분류 심사를 거친 이후 집단살해하고 후퇴했다. 군‧경의 분류는 매우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분류를 위한 심사는 일관된 원칙 없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폭력과 고문이 수반하였다. 이러한 학살 자체가 전쟁범죄일뿐더러 이미 살펴보았듯이 무고한 민간인이 대거 희생되었는가 하면 더러 연고와 금전제공에 따라 석방되기도 하였다. 

학살의 피해는 희생자 당사자에게만 국한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를 비롯하여 198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까지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하여 감시했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하여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하였다.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일부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처벌을 받았으며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았다.

무차별적 학살을 명령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모든 폭력을 ‘빨갱이’ 진압이라며 합리화한 배경을 ‘타자화’로 설명하는 시각이 있다. 절대 타자화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타자는 ‘빨갱이’였다. 공산주의자는 ‘비국민’이자 절멸되어야 할 존재였다.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타자를 폭력적으로 배제하면서 유지될 수 있었다. 

타자화로 설명하든 권력투쟁으로 설명하든, 혹은 내전 광기 그 무엇으로 설명하듯, 이 사건은 국가에 의한 국민 학살이란 야만적 범죄이고 전쟁범죄이다.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정체성이 아닌 이승만과 친일 군‧경의 정체성이었고, 남한의 공권력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극우 친일 세력에 장악되면서 공권력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복무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생존에 골몰하며 이러한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상상하여 통일정부가 수립되었거나, 혹은 남한 단독정부가 출범하였다고 하여도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이 공권력을 통제하는 정부가 구성되었다면 이러한 집단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은 대한민국에 강제된 배타적 타자화와 극우 친일세력이 장악한 공권력의 생존 광기가 낳은 참극이다. 1950년 여름 전쟁의 와중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지만, 남한 곳곳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수십만 명의 민간인 비전투원이 조직적으로 학살된 사건은 전장과 무관한 국가의 범죄였다. 통일된 독립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남북한에 각자 별개 국가를 수립한 분단의 비용이자 남한에서 친일청산에 실패한 비용이었다. 학살이 끝난 후 남은 것은 ‘대한민국을 위협할 공산주의자’의 시체가 아닌, 발목이 빠질 정도로 흥건한 대한민국 국민의 피뿐이었다. 대한민국은 그 피를 마시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노수빈ㆍ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안치용ㆍ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ㆍ문학ㆍ신학 공부에 힘쓴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년의죽음역사의눈물'을 함께 진행한다.

 

 

참고자료

 

 

1. 영상자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9회 ‘보도연맹1-잊혀진 대학살’ , 김환균 연출, MBC, 2001.4.27. 방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30회 ‘보도연맹2-산 자와 죽은 자’ , 김환균 연출, MBC, 2001.4.27. 방영

 

2. 논문

김태우, 「제노사이드의 단계적 메커니즘과 국민보도연맹사건: 대한민국 공산주의자들의 절멸 과정에 관한 일고찰」, 『동북아연구』 제30권 1호, 조선대학교 동북아연구소, 2015.

이윤갑, 「해방 후 경상도 성주지역의 건국운동과 국민보도연맹」, 『한국학논집』,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1.

백윤철, 「보도연맹사건에 관한 연구」, 『세계헌법연구』 제15권 2호, 세계헌법학회 한국학회, 2009.

 

3. 보고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

 

4. 기사

이윤상,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묻자 어머니는 눈물만…"」, 2020.02.04. 노컷뉴스, 2020.11.13. 조회. https://www.nocutnews.co.kr/news/5283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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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빈, 안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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