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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내 방 여행하는 법
[장윤미의 문화톡톡] 내 방 여행하는 법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0.12.07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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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밀레니얼 시대의 방구석 여행러, 방탄소년단

코로나바이러스 19로 외출은 금지되었고, 광장은 폐쇄됐다. 타인과의 접촉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고, 모임을 꾸리거나 참석했다간 그 목적을 불문하고 반사회적 행위로 간주하여 공공의 적으로 지목되기 충분했다. 코로나바이러스 19가 일상에 침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집단, 공동체, 소속, 유대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 추구했던 궁극적 목적이자 목표였지만 이제는 차단, 분리, 격리가 생존의 목표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 19로 강제 소환된 뉴노멀 시대는 우리에게 전한다. 생존하고 싶다면 집단과 타인으로부터 분리되라고, 멀어지라고, 철저히 혼자가 되라고. 그렇게 반은 자의적으로, 반은 타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은 격리된 일상을 선택했다. 학교, 회사, 시설 대신 집으로, 방으로, 1인실로 흩어졌다. 덕분에 신체의 안전과 건강은 확보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새로운 증상이 생겼는데 이른바 코로나 블루다. 이름은 낯설지 몰라도 그 증상은 전혀 낯설지 않다. 우울함은 외로움, 고독,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개인이라면 한번쯤 앓았을 법한 익숙한 증상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지탱했던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 소속된 집단이나 공동체로부터 격리된다는 것은 내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파편화되고 조각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장 어렵고도 근본적인 질문에 하는 우리에게 온전함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 깨진 것은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담은 노래가 등장했다. 바로 ‘방탄소년단’의 <내 방을 여행하는 법>.

개인적으로 ‘아미’(방탄소년단의 팬을 부르는 용어)는 아니지만, 방탄소년단 노래를 듣고 있으면 공통으로 담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쪼개고, 자르고, 나누어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이른바 ‘낯설게 하기’다. 이 낯선 시각과 태도를 통해 얻게 되는 대상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샘솟는 애정은 선물이자 보상이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를 꼽으라면 <DNA>(2017)가 그렇고, <작은 것들을 위한 시>(2019)가 그렇고, <내 방을 여행하는 법>(2020)이 그렇다. 이번에 발매된 <내 방을 여행하는 법>의 경우 코로나 바이러스19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위로 곡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긴 했지만 가사를 보면 역시나 ‘방탄소년단’다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로 “broken is beautiful.” 깨진 것, 부서진 것이 아름답다는 것.

코로나바이러스가 19가 일상을 파괴한 이후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쪼개져야 했고 분리되어야만 했다. 외로움과 고독은 왕따의 전유물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태도가 된 것이다. 자발적 격리를 선택한 나는 소외된 공간, 집, 방, 격리 시설에서 혼자서 놀아야 한다. 그런데 한 번도 파편화된 개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 난감하고 난처하다. 주변을 둘러보며 놀 거리를 찾아보지만 네모난 작은 공간이 전부다. 놀 방법은 하나다. 이 작은 공간을 쪼개고, 나누고, 깨뜨리기. 그리고 이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내 방을 을 날아오르는 순간 모든 것들이 낯설고 새롭게 보인다.

“여기가 이랬나 싶어/갑자기 낯선 이 풍경/괜히 추억에 잠겨/오래된 책상도/달라진 햇빛도/특별해 보이네”. -방탄소년단, <내 방을 여행하는 법> 가사-

깨진 것은 아름답다. 그 날카로움이 빛을 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빛이 나의 무뎌진 감각을 일시 정지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홀로 떨어지는 별똥별, 유리창에 홀로 붙은 눈꽃, 찰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익숙해져 왔던 나의 감각을 일시 정지 시키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듯이 말이다.

방탄소년단은 나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다시 보라고, 작은 것들을 더 크게 보라고. 이들의 작은 넛지(nudge) 덕분에 나의 감각은 일시정지 되고 눈앞의 대상에 집중하게 된다. 옆구리를 찌르는 힘은 기껏해야 고개를 돌리는 정도지만 느끼는 감동은 굉장하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방탄소년단에 열광하는 전 세계 ‘아미’들이 아닐까.

 

2. 18세기의 방구석 여행러, 그자비에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정확히 1794년 프랑스 샹베리에 방탄과 같은 생각을 한 소설가 있었다. 이름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그는 <내방 여행하는 법>(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유유출판사, 장석훈 옮김)을 통해 기발하고도 낯선 방식의 여행을 보여준다. 밀레니얼 시대의 방구석 여행러가 ‘방탄’이라면 18세기의 방구석 여행러는 그자비에가 아닐까 싶다.

 

군인이었던 그는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42일 동안 가택 연금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그는 감금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는다. 그리고 사십일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자기 방 여행을 알차게 즐긴다. 물론 현실을 외면하다가도 문득문득 올라오는 우울함에 ‘애쓴 보람도 없고, 좋든 싫든 이렇게 지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하지만 내 방 여행을 멈추지는 않는다. 초상화의 주인공이 된 옛사람에게 말을 걸고, 책을 통해 과거의 현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모든 행위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의자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하인 조아네티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사실 신체와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외로운 삶, 변화 없는 삶이 무기한 반복되는 것일 테다. 소통, 발견과 변화, 거기서 얻는 즐거움은 곧 삶의 목적이자 보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아는 그자비에는 공간을 바꿀 수 없다면 ‘생각을 바꾸면 되지 뭐,’ 라는 방탄의 가사를 미리 알기라고 하듯이 감금을 여행이라고 읽고 내 방 여행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 여행의 백미는 그자비에의 영혼과 동물성이 등장하여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를 위로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자비에는 영혼과 동물성(육체를 의미한다)을 구분하고 이 둘을 자신의 방구석 여행 파트너로 삼는다. 그런데 이 영혼과 동물성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싸우고 화해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영혼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즉 잠든 사이)에 향락에 빠진 동물성을 비난하고, 반대로 동물성은 영혼이 몽상과 망상에 빠지는 바람에 상처를 입은 것은 물론 42일간 감금이 된 것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다. 그런데 이 격렬한 싸움은 커피 한잔의 여유로 싱겁게 끝이 난다.

영혼과 동물성의 싸움은 마치 여행 중에 길을 잃거나 위기에 봉착했을 때 흔히 벌어지는 파트너와의 싸움을 연상시킨다. 이쯤 되면 그자비에는 방구석에서 혼자 여행하는 게 아니라 셋이 여행하는 것 같다. 영혼과 동물성, 그리고 이 둘을 지켜보는 그자비에. 심심할 틈이 없는 여행이다. 이 여행에서 그자비에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아마도 영혼과 육체의 새로운 발견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생각은 하지 못 했을 텐데 그자비에는 자신에서 이 둘을 떼 내고 분리하고 들여다본다. 분열된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보는 또 다른 나야말로 낯설게 하기의 백미다. 그자비에는 이 둘을 소유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이들을 관찰하는 3인칭 관찰자로서 둘의 치열한 싸움을 관전하며 마치 남의 뒷담화를 엿듣는 사람처럼 서술한다. 하지만 둘의 대화는 그자비에 스스로 던지는 메시지이자 반성이라는 점에서 결코 우습거나 가볍지 않다.

42일의 짧지 않은 여행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그자비에는 이렇게 말하며 여행을 마무리 짓는다.

이제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장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 이제 나는 격식과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중략-이제 나는 내 자신을 이중적 존재로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나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오, 나의 동물성이여, 몸조심하기를!

오히려 자유가 있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만 같다. 육체의 자유는 얻었지만 그 자유는 온전한 자유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와 규칙을 따른다는 조건으로 얻어지는 제한적 자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방을 여행할 때만큼은 오로지 내가 기준이고, 중심이고, 우주였는데 이제는 집단으로 돌아가 그 안으로 수렴되고 환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고 또 두렵다. 자유로운 영혼과 안전한 육체 중에서 무엇이 더 먼저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건 그만큼 나를 단속하고 규제하고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자비에가 부디 동물성에게 몸조심하기를 당부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러한 두려움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깨달음은 만약 그가 온전한 자신을 지키려고 쓰며 영혼과 동물성을 분리하지 못했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영감과 반성이다.

 

3.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자

팬더믹, 뉴노멀, 언택트, 코호트 격리…말 자체도 어렵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사용하는 전문 용어인 줄 알았지만 2020년 한 해 동안 자주 들어 이제는 익숙한 일상어가 된 지 오래다. 2020년 한해를 오롯이 방구석에 앉아 마무리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토론할 수 있는 광장은 사라졌고, 타인과의 접촉은 금기시되었다. 언택트는 일상이 되었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철저한 외로운 개인이 되어 비일상 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들 하지만 갑자기, 그리고 자의적/타의적로 격리(당)하는 세상에서 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취미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만나 집단을 만들고, 취미와 취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놀이를 통해 창조 활동을 하는 호모루덴스의 시대는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가는 것만 같다. 광장과 타인과의 접촉이 일절 금지된 이상 타인과 만나 감정을 공유하고 함께 행동하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공동체를 꾸리고 그 영향력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욕망은 당분간 또는 기약 없이 접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개인의 삶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공동체 이전에 나라는 개인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다시 나, 개인으로 돌아가 보자. 최대한 나를 잘게 쪼개고, 자르고, 들여다보자. 그자비에처럼 육체와 동물성으로 나누어도 좋고 방탄소년단처럼 시선을 낮추어 방을 날아다녀도 좋다. ‘나’라는 우주는 수많은 별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그 별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때이다.

 

 

글·장윤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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