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현대인의 자기 구원: <파리, 텍사스 Paris, Texas>(1984)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현대인의 자기 구원: <파리, 텍사스 Paris, Texas>(1984)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1 09: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구인의 여행 문화전통

서구인들은 광장을 통한 공동체 문화라기보다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에서처럼 길을 따라가는 여행을 통한 개인적 인격형성의 문화라 볼 수 있다. 그런 서구인들의 문화를 반영하는 영화양식인 ‘로드 무비(Road Movie)'는 특히 영적인 각성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서사(敍事)속에서 인간의 길을 암시하거나 한 개인의 성장을 상징하는 통과제의(通過祭儀)적 의미의 서사를 나타내기도 한다.

독일 빔 벤더스 (Wim Wenders)감독의 여러 로드 무비들은 영화사상 가장 대표적으로 그러한 성격의 일관성을 잘 나타내 보여준 예에 속한다. <파리, 텍사스> 역시 그러한 통과제의서사 혹은 구도서사(求道敍事)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 <파리, 텍사스>란 제목은 무슨 말인가. 미국의 텍사스에 존재하는 파리라는 장소? 영화속에서 그곳은 주인공 트래비스의 부모가 처음 사랑을 나눴던 곳, 즉 트래비스가 태어난 장소 혹은 수태가 결정된 장소, 그의 존재의 시원(始原)이다. 결국 그의 욕망이 귀소(歸巢)되어질 곳, 등등의 의미로 차용되어지는 아이러니한 가상적 장소다. 제목에서처럼 이 영화는 트래비스가 처한 불모지대의 현대상황- 핵가족 질서의 붕괴-을 보여주면서 결국 인간이 추구해야할 궁극적 인간의 길을 마치 모범답안처럼 제시한다.

현대의 황량한 풍경은 영화속의 공간묘사에서 상세히 전달된다. 첫째,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미국의 사막지대를 통해 문명속에 폐기된 황량한 미국의 원시를 드러낸다. 둘째, 트래비스가 걸어가는 도심의 길거리에서 빈 공간을 채우며 들려오는 광인의 주문같은 예언은 마치 세례자 요한의 광야의 외침과도 같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비록 광인의 소리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감독의 공간구성은 관객에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일부러 지워 혼동스럽게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 영화속에서 신의 존재를 감지하기란 쉽지가 않다.

오히려 신의 부재하에 퇴폐와 멸망의 심연속에서 허덕이며 생존의 고통과 절망, 책무에만 시달리는 인간의 절규가 가득차 있다. 라이 쿠더(Rye Cooder)의 두 가지 메인 테마음악 가운데 한 가지는 그러한 버려진 인간 실존의 황폐함을 잘 설명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니체(Nietzsche)의 신의 죽음과 영겁회귀, 그리고 초인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광인-밝은 대낮. 등불을 켜들고 광장에 나와 ‘나는 신을 찿고 있노라!’고 계속 고함쳤다는 저 광인의 이야기를 그대들은 들은 적이 없는가 - 마침 광장에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어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 광인은 그들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신이 어디로 가셨느냐고.’ 그는 소리쳤다.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말해주마! 우리가 신을 죽였다. -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즐거운 지식]) 니체의 이러한 아포리즘은 영화속의 광인의 외침과 그 소리의 공허한 경고(警告)가 그대로 신 부재의 황량함을 암시한다고 봐야한다. 니체의 신의 죽음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세상풍조에 대한 경고이며, 인간의 의지에 대한 긍정과 희망에 대한 암시이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퇴폐와 몰락의 대안으로서 인간 의지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여준다.

 

현대인의 소외와 소통의 단절

셋째, 트래비스와 아내 제인과의 만남이 이뤄지는 전화방공간은 두 남녀 의사소통의 현대적 한 단면을 읽게 한다. 여기서 두 남녀는 육체/정신의 현전(現前)과 의사소통의 부재라는 고통을 실감케하는 영상을 보여준다. 두 남녀는 만나지만 육체적으로 접촉하지 못하고 오랜 정신의 벽은 둘 사이 실존의 괴리를 만들어낸다. 결국 그들은 과거 의사소통의 실패를 인정하며 현재 그들의 우연적 대화는 화해와 이해의 융합의 장으로 기능한다.

넷째, 어머니 제인을 만나게 하기 위해 헌터를 묵게 했던 호텔공간의 구도에서 읽을 수 있는 현대의 황량한 풍경이다. 도시의 빌딩숲이 드러나보이는 넓은 유리창가에 헌터가 앉아있고 그 옆으로 텔레비가 놓여져 있다, 그는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만을 녹음기를 통해 듣는다. 광막한 사막에 버려진 고아처럼 현대 도시문명의 한 복판에 덜렁 놓여진 고아 헌터의 모습을 한 눈에 읽게 만드는 장면이다. 헌터의 고독은 이미 그 앞에서 트래비스가 제인을 만나러 전화방 건물로 혼자 들어갔을 때, 혼자 무료하게 놀고 있는 헌터의 모습을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건물의 외관과 왜소한 헌터를 대비시켜 묘사한 장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의 소외감은 여러 장면을 통해 강조되고 있는데 그러한 도시속의 미아(迷兒)이미지는 벤더스 감독 특유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한다. <도시의 알리스 Alice in den Stadten>(1974)에서 보여준 주제가 다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벤더스에 의하면 현대인의 소외는 도시 물질문명의 공간을 채우는 의사소통의 여러 도구들, 전화기, 팩스, 텔레비 등이 인간을 에워싼 채 의사소통을 불능케하는 텅빈 공간에서 기능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설득시킨다.

로드 무비는 길을 따라 공간을 이동하면서 인간이 점점 문명과 자신을 자각해나가는 서사적 구조를 갖고 있다. 트래비스는 황야를 거쳐 도시공간을 관통하다가 마침내 그곳을 벗어나 다른 공간을 향해 어디론가 달아나버린다. 이 영화는 철저히 길을 찿아 들어서는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또 다른 길을 찿아 떠나는 이미지로 끝을 맺는다. 트래비스의 각성은 동생이 꺼내 틀어준 과거 홈무비를 관람하는 시간속에서 맨 처음 발생한다. 그 안에서 투사된 영화이미지는 집 떠나 살아온 그의 4년간의 시간의 간격을 압축시키고 다시 현재 기억의 현전으로 실존의 위치를 끌어당긴다.

 

억압된 기억의 소환

인간의 각성은 곧 어두운 우물속 의식의 기억을 다시 빛의 공간으로 들어 올려내는 작업, 즉 억압된 기억의 소환(recall)이다. 처음 나타난 그의 기억의 소환은 고통으로 표현되고 그의 각성은 자식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만든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잘못의 대가를 자식의 부채로 남게 해선 안 된다는 제법 ‘어른스런’ 자각이다. 그의 두 번째 기억의 소환은 제인과의 전화방에서 일어난다. 이때 그의 심적상태는 더 이상 고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각성은 오히려 환희의 순간으로 나아가는데 그가 자신의 내부에 꼭꼭 숨겨져 있던 영성(靈性)에 개안(開眼)하는 장면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 잘못을 통회하고 상대방의 허물조차 덮어주는 미덕을 갖게 된다. 그는 참된 양심의 살이 돋아나와 자신의 깊이 베인 마음의 상처를 서서히 덮으며 자라온 흔적을 관객에게 자랑스레 보여준다. 그는 힘있고 자신감에 차서 과거 기억속의 새로 태어난 주인공이 된다.

벤더스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남자와 여자, 젊음과 늙음,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해묵은 갈등을 청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건 황량한 현대인의 가슴속에 어쩌면 유일하게 살아있는 한 점 양심의 불꽃이 아닌가,라는 희망적 기대를 내비친다. 감독은 인간의 악행뒤에는 이처럼 슬픈 자기 연민과 기본적으로 성선설(性善說)에 기반한, 착한 본성의 인간론에 기대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성서적 인간관에 의하면 역시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 존재이며 선악과를 먹은 이후 악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영화를 서구영화라 하여 선악 이분법적으로만 인간해석을 하는 것은 옳지않은 견해다. 인간은 오히려 음양양성적(陰陽兩性的) 존재로서의 동양철학적 세계관에 의해 잘못과 용서의 이분법을 지혜롭게 극복해나가는 존재처럼 보이며, 훨씬 인간의 미덕을 유연하게 설명해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글·정재형

영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