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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영화를 보며 여자를 생각하다 V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미망인>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영화를 보며 여자를 생각하다 V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미망인>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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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영화 일을 한다는 것

한국 최초 여성 영화 감독 박남옥은 1923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서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나 어려서부터 영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1936년 경북여학교에 입학해서는 체육 방면에도 소질을 보여 전조선종합경기대회(현재의 전국체전)에서 투포환 종목에 출전해 3회 연속 한국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운동으로 바쁜 일상 속에서도 영화 포스터와 배우들의 브로마이드, 영화의 신문광고 사진을 꾸준히 수집하는데 정신을 쏟았다. 시간이 많은 날은 본정 안 골목의 헌책방인 ‘태양당 서점’에 가서 시나리오, 영화잡지, 미술책을 샀다. 그중에서 중요한 사진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간직해 몇 박스의 유품으로 남게 된다. 그녀가 남긴 사진들은 그녀가 일찍부터 얼마나 영화와 이미지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비록 정규 교육으로 영화를 배우진 않았지만 좋은 그림과 영화 관련 잡지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지식과 예술적 견해를 쌓으며 훗날 영화감독이 될 자양분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두 언니와 동생들, 가운데가 박남옥(1923.2.24~2017.4.8.)

영화도 좋아했지만 어릴 때부터 미술 공부를 하고 싶었던 박남옥은 일본의 우에노미술학교(지금의 도쿄미술대학)를 가기 위해 서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경북여학교는 졸업 후 여교사가 되는 내량여고사(현재의 나라여자대학) 외에는 일본의 어떤 대학의 입학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남옥이 우에노미술학교로 몰래 보낸 입학 관련 서류가 학교로 날아와, 입학시험 한 번 못 보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1943년 이화여전(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 가정과에 입학하게 된다.

 

편견에 맞서 도전하는 인간, 박남옥

처음 서울에 올라와 한동안은 이화여전이 있는 신촌에서 염천교 헌책방으로 영화 책도 사러 다니고, 기숙사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2학기 어느 날 사감보가 기숙사 방으로 조사를 나왔다. 침대 위에 붙여둔 사진을 보며 “저 사진 뭐야! 기껏 존경한다는 사람이 영화배우야! 당장 떼!”라는 말을 들은 후 그녀는 영화배우를 존경할 수 없는 학교와 가사 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조용히 가방을 들고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미술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동양화가 현초 이유태 선생의 집으로 1년간 매일 출근한다. 그러다 선생이 징용을 피해 화실 문을 닫으며 그림 공부는 일단락된다.

 

현초 이유태 개인전 기념사진 (오른쪽 박남옥)

본격적인 영화계 입문은 1943년 친구 남편인 윤용규 감독의 소개로 조선영화건설본부 산하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면서다. 그러나 대구에 계신 부모의 성화로 고향에 내려와 ‘대구일일신문’(1) 문화부에 들어가 영화평을 쓴다. 사실 박남옥에게 신문사 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그녀가 일제 치하에서 받은 학교 교육으로는 우리나라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철자법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영화 일이 하고 싶었던 박남옥은 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광희동 촬영소로 들어가 <자유만세>(최인규, 1946)의 후반 작업, 영화 촬영이 없을 때는 뉴스도 찍고,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1947)의 스크립터로 현장에서 영화 일을 배워나갔다. 그런데 <새로운 맹서>의 제작진이 포항으로 로케이션 촬영을 가면서 스크립터인 박남옥을 데려가지 않았다. 당시 영화 현장에 여자라고는 여배우밖에 없던 시절, 여자와 함께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곤란한 일로 여겨졌다. 그 일로 그녀는 내심 몹시 섭섭했고 여성 영화인이라는 낯선 위치가 매우 불안하게 느껴졌다.

 

박남옥의 첫사랑 여배우 ‘김신재’의 남편인 최인규 감독 집에서 크리스마스이브 파티 기념사진(가운데 박남옥과 '자유만세'의 배우 황려희)
박남옥의 첫사랑 여배우 ‘김신재’의 남편인 최인규 감독 집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기념사진(가운데 박남옥과 '자유만세'의 배우 황려희)

그 초조함과 불안한 열정을 못다 이룬 공부로 메우기 위해서였을까 박남옥은 도쿄로 유학 가려고 밀항선을 탔다가 배가 좌초되어 일본의 수용소에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녀가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좀처럼 굽히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강단 있는 성격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무용담에 가까운 그녀의 일본 밀항 모험담은 거의 코미디 에피소드처럼 웃기다가 그 시대와 함께 읽어내면 여성에게 가로막힌 억압을 뛰어넘고자 했던 한 여성의 처절했던 수고로움이 엿보인다.  

1950년 6·25전쟁이 나고 대구 도청에 ‘국방부 촬영대’가 조직되자, 박남옥은 합류해 전쟁 뉴스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9·28 서울수복으로 육군본부 소속의 트럭 100여 대가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 촬영대도 함께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트럭에 ‘여자는 동승시키지 않는다’는 규정으로 그녀를 떼놓고 가려 하자 그녀는 촬영대 대장에게 매달려 가까스로 승낙을 얻어 군복을 입고 서울로 올라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부산으로 피난 내려오면서 모진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박남옥은 영화한답시고 부모에게 심려만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효도하는 심정으로" 부산에서 만난 극작가 이보라와 1953년 5월에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1954년 만삭의 몸으로 서울로 올라가 그해 6월, 딸 이경주를 낳았다. 이후 이 갓난아이는 항상 박남옥의 등에 업혀있었다. 도와줄 부모 형제가 모두 대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맡길 곳도, 함께 양육해 줄 가족도 없는 상황에서 아기를 업고 현장에 가야 하는 진짜 고생이 시작된다.

 

‘여자는 자고로...’
밥하는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데뷔

박남옥은 서울에 올라와 200평 공지에 세트 겸해서 살집으로 판잣집을 지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제작은 생각도 못 할 때, 남편 이보라가 쓴 전쟁 과부에 대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둘째 언니가 영화 만들어보라고 준 380만 원으로 영화 제작을 시작한다.

그런데 영화 제작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15명이 넘는 촬영팀의 점심이었다. 매일 외식은 언감생심. 결국 박남옥 감독은 이른 아침 아이를 등에 업고 낙원시장에서 장을 봐 배우와 스태프의 점심을 준비해놓고 영화를 찍었다.

남자 감독이었다면 과연 이런 결정을 했을까? ‘밥하는 여자’라는 관습적 사고의 뿌리가 참 깊고도 질기다. 박남옥 감독은 밥하는 일에 기운을 너무 많이 빼앗겨 3일에 한 번꼴로 중국 음식을 시켜 점심을 해결하며 겨우 숨을 돌렸다.

 

‘애 엄마가 어디!’ - 박남옥은 6·25 전쟁 이후 등장한 주체적인 여성을 일컫는 ‘아프레 걸’이긴 한데, 백일 된 딸을 업고 현장에서 “레디 고”를 불러야 했다.
‘애 엄마가 어디!’ 박남옥은 6·25 전쟁 이후 등장한 주체적인 여성을 일컫는 ‘아프레 걸’이긴 한데, 백일 된 딸을 업고 현장에서 “레디 고”를 불러야 했다.

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진주로 빌려준 촬영기를 받으러 갔다가 오는 기차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예닐곱 시간 동안 갓난쟁이 아이를 포대기에 들쳐 업고, 한 손에는 촬영기를, 한 손에는 아이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던 기억은 뼈에 사무쳤다. 그 공기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아이가 울자, 승객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창밖으로 던지고 싶었다. 영화가 뭐길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진이 다 빠진 박남옥은 서둘러 여관으로 들어가 아이와 촬영기를 꼭 안고 낯선 방에서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어디 재수 없게, 연초부터 여자가”

아이를 등에 업고 “레디고”를 외치며 죽을 고생을 다 해 마지막 장면까지 촬영을 마친 후 아기를 옆에 눕혀놓고 일주일 만에 편집을 완성하고, 녹음 작업만 남겨두었다. 그런데 일이 밀려 있어 녹음 날짜를 잡아줄 수 없다는 것이다. 박남옥은 12월 중순부터 매일 공보처 녹음실로 출근해서 사정했다. 1955년 1월 6일 녹음실을 찾아갔더니 연초부터 16mm에다 여자 작품은 녹음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16mm로 촬영되던 시절이니 필름 크기를 트집 잡는 것은 핑계고, 결국 연초부터 여자 작품이라 재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후반 작업까지 마친 그녀는 최종 영화를 보던 날이 돼서야 자신의 한복 치마 끝이 갈래갈래 찢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예술이란 개념은 그날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반년 넘도록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촬영 기재 마련, 돈 마련, 스태프 식사 마련으로 정신이 빠져 있었다.

 

“<미망인> 제작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을 논했었다.
그러나 그날, 완성된 <미망인>을 다 같이 보던 그날,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속으로 울고 있었다.”

 

<미망인>의 원제목은 ‘과부의 눈물’이었다.

<미망인>은 이민자, 이택균, 나애심, 최남현 등이 출연한 16㎜ 흑백 장편 영화로 제작됐다. 원제는 ‘과부의 눈물’이었다. 한국전쟁 중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살아가는 주인공이 젊은 청년과 사랑에 빠지면서 겪는 갈등을 그린 영화로, 당시 전쟁미망인 문제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루었다. 전쟁으로 아내, 어머니라는 위치가 흔들리게 된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느냐는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당시의 유교적인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성적 욕망까지 다루며, 여성이 처한 곤궁한 현실 속에서 남자에게 상처받기보다는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사색할 줄 아는 여성을 그렸다.

영화는 제작이 끝이 아니다. 영화 흥행 즉 배급과 상영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러나 영화 만드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쓴 감독은 흥행에 신경을 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녹음까지 버텨왔던 그녀의 몸과 마음 모두 피로와 건강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1954년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미망인>은 흥행 실패로 4일 만에 스크린에서 내려왔다. 전국 몇몇 지역에 배급권을 팔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사기를 당했다. 영화 만든다고 고생하고, 지방 판매를 하기 위해 아이를 들쳐 업고 전국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그녀의 건강은 너무 나빠져 있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함께 일했던 스태프에게 생활에 보태 쓰라고 필름 한 벌을 주고 그녀는 흥행에 손을 뗀다.

 

흥행에 실패하고 이혼을 한 여성 감독에게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957년 2월에 부모님이 대구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오자, 부모님 집으로 들어간 박남옥 감독은 결국 드러눕고 만다. 영화에 미쳐 돌아다닌 처녀 시절, 결혼, 출산, 영화감독으로의 첫 출발, 흥행 실패, 이혼, 이 모든 일들을 숨 쉴 틈 없이 거치고 난 뒤의 탈진 상태였다. 계속 누워있는데 아버지가 일어나자고 하는 말에 힘을 얻어, 그길로 영화 흥행 실패로 빚진 둘째 언니네가 하던 ‘동아출판사’에 출근하게 된다.

 

동경 아시아영화제에서 만난 미후네 도로시와 김진규

한 2년 직장 잘 다니다 또 발동이 걸려 1959년 《시네마팬》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1960년 4월 동경 아시아영화제 참석도 했다. 하지만 박남옥은 아이를 키우며 먹고사는 일과 영화 일, 두 가지를 양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낀 뒤 결국 <미망인>이라는 영화 한 편만을 남긴 채 영화 일을 접는다. 이후 영화를 한다고 서울, 대구, 부산 등지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던 생활을 기억의 한 창고에다 꼭꼭 묻어둔 채, 23년간 출판사의 관리과장으로 재직하며 생활을 위해 그리고 딸을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쓰며 살았다.

 

“투포환 선수였던 엄마는 「미망인」이라는 포환을 던진 후 그걸 주우러 가지 않았다.
그게 어디쯤 가 떨어져 있는지 몰랐다.
좌절과 상처를 안겨준 그 포환을 던진 후,
새 포환을 던지지 못하고 엄마는 투포환 장을 영영 떠났다.”
- 딸 이경주(2)

 

다시, 박남옥을 부르다

단 한 편의 영화만을 남기고 영화계에서 잊혔던 그녀를 다시 불러낸 건 1997년 제1회 여성영화제였다. 한국 최초 여성 영화 감독의 작품인 <미망인>이 한국영상자료원에 네거티브 필름으로 보관되어 있던 걸 복원해 개막 초청작으로 상영하면서 재조명되었다. 보관되어 있던 필름은 결론 부분의 필름 롤이 빠져있고, 남아있는 필름 중에도 후반 10분의 사운드가 없는 불완전한 상태였지만 1950년대 전쟁미망인의 사회적 위치와 주변 관계도를 통해 당시 여성이 처한 곤궁한 현실을 리얼리즘에 따라 조망한 여성영화였다.

“여성 감독이 아니면 착안하기 어려운 ‘앵글’과 사건의 ‘템포’, ‘리듬’의 명쾌, 화면과 동작(연기) 등에 생활감정을 예리하게 융화”(3)했다는 개봉 직전 영화평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영화는 평단의 인정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전후 여성들의 욕망을 과감하게 묘사한 그녀의 영화가 너무 앞서갔던 탓이었을까. <미망인>은 단지 최초의 여성 감독의 영화로 수식되기보다 여성영화로서의 의미도 큰 작품이다.

 

자서전 원고를 집필하는 박남옥 감독 생전의 모습

한국 최초 여성 감독이자 의미 있는 여성영화를 만든 박남옥 감독은  2001년 임순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와 김재의 감독의 박남옥을 기리는 다큐멘터리영화 <꿈>을 통해 자신의 생애와 열정을 영상으로 남긴다. 그리고 2008년 후배 임순례 감독을 격려하기 위해 박남옥이 사비를 기부해 진취적인 활동을 하는 한국 여성 감독에게 서울여성영화제는 ‘박남옥 영화상’을 제정해 수여했다. 그 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감독한 임순례 감독이 수상했다. 그러나 재정 문제 등으로 이후에는 수상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 최초 여성 감독 박남옥은 2017년 4월 8일 미국에서,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한시도 떼어놓지 못하고 등에 업고 다니던 딸 이경주 가까이서 생을 마감한다.

 

“나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
우리나라 여성 영화인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세계로 진출하는 것도 보고 싶다.”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국에서 여성이 영화 일을 한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편견을 딛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나아가 아이가 있는 여성이라면, 애를 두고 불규칙한 일정에 고정적인 수입도 없이 미래도 불확실한 영화 일을 한다는 자기 승낙과 사회적 인정(4)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다.

박남옥은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까지 격동의 시절을 살아오며, 전통적 여성상에 도전하고 봉건적 사회 구조와 관습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며 사회 안에서 주체적 역할을 찾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온 인물이다. 살아생전 박남옥의 소원은 두 번째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비록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감히 박남옥 감독의 삶을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으로 예단할 수 없다. 도전하는 한 인간의 삶의 태도가 조금씩이나마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1) "그 당시 일본 사람에 의해서 경영되는 큰 3대 신문사로는 <평양일보> <경성일보> 그리고 <대구일일신문>이 있었다." 박남옥,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마음산책, 2017, 70쪽.
(2) 위의 책, 274쪽.
(3) <未亡人(미망인) 女監督(여감독)·朴南玉作(박남옥작)>, 《동아일보》, 1955-02-27, 4면.
(4) 영화 일이 노동이라는 사회적 인정이 있어야 사회적· 제도적으로 육아 돌봄 혜택을 받을 수 있다.
* 그 외 참고자료
『전후의 풍경』, <미망인>, <꿈>이 담긴 DVD세트, 한국영상자료원, 2011.
주진숙, 변재란 외, 『여성영화인 사전』, 소도, 2001.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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