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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그녀, 자본주의의 안티고네
김진숙 그녀, 자본주의의 안티고네
  • 이택광
  • 승인 2011.09.06 2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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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는 ‘희망’인가? 이 시점에서 희망버스에 대한 이런 질문은 정당한 문제의식을 내포한다. 이 버스가 그 무엇도 아닌 ‘희망’을 이마에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처럼 희망버스에 대해 솔직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문이 “희망버스가 말하는 희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희망버스 안에 ‘희망’은 있는가”라는 근본적 회의로 나아간다면, 문제가 좀 달라진다.

김대호는 희망버스를 “진보의 재앙”이라고 불렀다. 보수신문들은 이런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진보 내에서 들리는 자성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김기원의 논조도 비슷했다. 군부독재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자본의 범세계화가 가속화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리해고는 피할 수 없는 노동자의 운명’이라는 말이다. 이 필연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협상’의 여지를 열어둬야지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전거로 마르크스를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를 통해 ‘자본의 운동’이라는 필연성에 종속된 노동자의 처지를 강조하고 있다. 결국 차 떼고 포 떼고 보면 노동유연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고, 이를 수용한 자세에서 노동자가 고용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모범답안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보에 대한 이들의 충고가 사회주의의 종언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완전고용은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사회주의는 이제 더 이상 실효성 있는 사회 기획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파악하면, 희망버스가 왜 진보의 재앙인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회주의라는 실패한 기획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희망버스는 오히려 합리적 해결책을 도모해야 할 노동운동을 잘못된 방향으로 부추기는 훼방꾼에 가깝다. 당연히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농성도 전체적인 진보의 관점에서 본다면 과잉이라고 할 수 있다. 협상 테이블에서 머리를 맞대고 합의점을 찾아야 할 마당에 해고 철회라는 판을 깨는 불가능한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중도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주장은 나름대로 ‘객관적 관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녀의 집>, 2011-정기훈

마르크스 매명해 신자유주의 설파?

비단 이들만 이런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를 인용해서 비정규직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몇 년 전 청년실업 문제를 다룬 한 토론회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일가견이 있다는 이진경도 비슷한 논조의 주장을 펼쳤다. 비정규직은 고용형태의 대세이기 때문에 이 자체를 거부하는 투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 기술’ 자체가 오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도 자본 축적과 실업이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그 발전의 주역인 노동자는 일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아무도 발설하지 않는 공공연한 자본주의의 비밀이다.

따라서 빼앗긴 일자리를 돌려달라는 복직투쟁은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실업을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저항 또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 법칙을 강조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오류는 선명하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식의 총체화는 종종 실천의 자리를 사라지게 한다. 사물을 이해하기 위한 총체적 분석이 실천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들의 주장에서 비슷한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본주의 법칙을 너무나 잘 인식함으로써 오히려 실천은 차단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들이 마르크스를 원용해서 말하는 것은 케인스나 슘페터에 가까운 것이지 마르크스 본연의 문제제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복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기껏 나아가봐야 장하준이나 장뤼크 그로처럼 금융자본에 맞서 국가와 기업을 합리화하는 방향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중도적 입장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사안은 분명 유효하다. 물론 신자유주의라는 질병에 걸린 자본주의를 국가나 기업의 합리화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과연 ‘대안’일 수 있는지 그 또한 검증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김대호나 김기원의 주장이 최근 관심을 끄는 이런 논의조차 포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자본주의 아는 것과 실천의 차이

희망버스에 대한 비판은 ‘세상 물정 모르는 진보’의 투정에 대한 훈계처럼 들린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그 세상 물정이라는 것이 톡 까놓고 말해서 신자유주의 논리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계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노동자들이 파업이나 한다며 호통치는 우파의 논리를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작 그토록 소중한 세계경제를 망치는 주범들이 호통을 쳐대는 당사자들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최소한 장하준이나 그로처럼 중도적 입장을 취하더라도, 비판받아야 할 당사자는 희망버스를 타고 간 시민들이라기보다, 한진중공업 경영자다.

이런 일이 왜 발생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먼저, 과도한 경제주의 관점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경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회 기획의 실패는 근본적으로 경제문제와 관련 있다. 이념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가 북한일 것이다. 경제정책 실패가 어떻게 이념을 왜곡하는지 과거의 역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학습효과로 인해 경제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경향이 정치의 관점을 압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의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자체와 혼동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나타난다. 대의민주주의를 정치의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귀결점으로 생각할 때, 모든 정치의 결과물은 대의민주주의로 수렴돼야 한다는 입장을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선거 때만 되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야권통합 후보’에 대한 강박은 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겠다. 기존 정당정치에 기반을 둔 정치공학이 정치 자체를 대체하는 상황이 대의민주주의의 범주를 벗어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초래한다. 이것이 만성화됐을 때 기존 정당정치를 벗어난 정치를 과잉으로 치부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권을 곧 사회 기획의 실현으로 착각하는 것이 정치의 가능성을 하나의 결과로 수렴하는 문제를 초래한다. 정치가 하나일 수 없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논리 구조가 여기에서 만들어진다. 이유 없는 정치, 하나로 재현되지 않는 정치, 설명할 수 없는 정치 따위를 정당한 절차를 위반하는 ‘떼쓰기’로 규정하는 경향이 이를 통해 생겨난다. 따라서 모든 정치는 집권이라는 단일한 궤도로 들어와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말만 많은 ‘평론가’나 ‘입진보’로 싸잡아 비난받는다.

이처럼 김대호나 김기원의 주장은 얼핏 기존의 진보와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을 논리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희망버스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특정 개인의 ‘오판’이라고 보기 어렵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칭 타칭 ‘진보 진영’이라고 분류되는 집단 일반에서 이런 경향성을 찾아내기란 힘든 일이 아니다. 싸우는 적을 닮는 것은 정치의 본질이다. 정치 자체가 일시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 정치의 흔적을 담고 있는 사건에 대한 기억이 남을 뿐이다. 이 기억이 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변증법의 회로를 따라가는 것은 개인에게 벅찬 일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가 만들어낸 사건의 진리다. 그 진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서사의 과정이 개인을 개인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진보란 이렇게 역사의 변화를 믿고,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집단의 역량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버스라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진보주의자라면 당연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희망버스는 비로소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우파 논리로 호통치는 어떤 진보

사건은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사건의 주역은 알지 못한다. 그는 사건 자체이기 때문에 사건과 소멸할 수 있다. 사건이 개인의 문제일 수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과거 촛불과 마찬가지로, 희망버스에 참여한 시민들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모를 수 있다. 아니 스스로 의미를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희망버스는 각자의 마음에 깃든 의미화의 체계를 벗어난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 이것이 희망버스의 본질이다.

희망버스는 ‘김진숙’이라는 안티고네에 공감하는 주체들의 출현이다. 안티고네가 누구인가? 두 오빠 중에서 에테오클레스만을 장례 치르도록 허락한 왕 크레온의 명령을 어긴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들에 버려진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거둬 장례를 치른 그의 행위는 실정법을 어긴 자연법의 상징으로, 양심과 법의 명령 사이에서 전자의 편을 든 까닭에 처형당한 존재다. 우리 시대의 안티고네로서 김진숙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그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주목해서 본다면, 그가 보여준 것은 김대호나 김기원이 강변하는 그 문제의 자본주의라는 실정법에 대한 항의다.

이런 행위는 확실히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비현실성으로 인해 안티고네라는 존재는 정치성을 획득한다. 양심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만들어내는 내면의 목소리다. 이 내면으로 인해 인간은 현실에 대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이성의 오용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이를 통해 가능하다. 권력을 쥔 당사자들은 종종 사익과 공익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다. 박정희나 카다피 같은 독재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양상이다. 이럴 경우 권력의 자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실정법과 다른 법의 명령을 따르는 것, 바로 안티고네의 삶이다.

한국 사회는 민주화 과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독재권력을 퇴진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종교화하는 경제주의를 상징적 아버지로 받아들였다. 이른바 ‘먹고사니즘’이 실정법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사안의 핵심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서 먹고산다는 것은 ‘경제’라는 일반 개념을 한국적 맥락에서 재정의한 것이다. 이 개념은 지금 서구에서 통용되는 것과 달리 그리스에서 태동한 최초의 의미, ‘개인의 살림살이’라는 뜻에 더 가까워 보인다.

비현실성이 정치적인 것이다

먹고사니즘은 보수의 전매특허가 아니라는 것이 특기할 사항이다. 한국 사회에서 먹고사니즘은 보수와 진보의 진영 구도를 넘어선 차원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데올로기다. 국가에 세금을 더 내는 것보다, 내 재산을 더 축적하는 것이 먹고사는 일에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으로 놓는 경향은 정치를 쓸모없는 행위로 치부하는 입장을 낳는 배경이기도 하다. 정치는 먹고사는 문제와 관계없는 이념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이념을 형이상학으로 바라보고 배척하는 것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먹고사니즘이라는 강력한 유물론의 위력이다.

이런 까닭에 먹고사니즘의 당사자이자, 먹고사는 것을 위한 물적 토대를 형성하는 노동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말 그대로 경이로운 일이다. 최근 개봉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시저의 존재감을 부각시킨 것은 “아니야”라는 ‘주장’이다. 원숭이라는 존재 규정을 벗어나는 계기는 이처럼 평등·자유에 대한 주장을 통해 주어진다. 이 주장이 곧 주체화 과정이고, 이를 통해 사물은 인격을 부여받는다. 이렇게 사물은 항상 인격화해서 인식 영역으로 들어온다. 최근 한진중공업과 희망버스의 현장을 담아서 출간한 화보집의 제목이 <사람을 보라>인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노동자가 자신을 사물과 동일시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최초로 지적한 이론가는 루카치였다. 이런 현상을 루카치는 ‘물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는 ‘소외’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을 향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노동자는 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와 자신을 무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목격하는 자유주의자의 상상과 달리, 그렇게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노동자는 이 물화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 루카치의 견해다.

<무제>, 2011-노순택

‘먹고사니즘’을 넘어서는 혹성 탈출

이 객관적 인식이 그냥 인식 차원에 머물러 있을 때 상황은 복잡해진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먹고사니즘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인식 차원에 머문 물화의 존재감은 냉소주의나 허무주의로 흘러서 결국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를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탈정치성은 이런 문제와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 객관적 인식과 조우하는 주체의 차원이 이 지점에서 절실한 것이다.

희망버스는 객관적 인식으로 본다면, 아무런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없는 과잉의 정치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국가’에 대한 대책 없는 자기주장이라는 측면에서 ‘순수 정치’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국면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한국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정당정치는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학을 유지할 뿐이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질서를 해체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는 이 상황을 언제나 정치공학이라는 위계질서에 묶어두려고 한다.

희망버스, 도시 중간계급의 반전

정치공학의 위계질서에서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다. 과거에 권력이 노동자를 ‘근로자’라는 개념으로 전유하면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존재’와 노동자를 동일시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했다면, 지금은 노동자 스스로 ‘노는 존재’를 나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위계화는 거기에 적합한 삶의 양식을 강요한다. 한국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에서 노동자는 시민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허락받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자는 존재하지만 나타날 수 없다. 쌍용자동차 해고 사태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쌍용자동차는 협상으로써 노동자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줬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민’ 자리였다. 그러나 평등한 권리는 애초부터 허락되지 않았다. 비단 이런 현실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자가 아닌 시민의 권리는 낯선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의 노동자는 자신의 자식을 노동자로 키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일부에서 대기업 노조의 연봉을 거론하면서 ‘귀족노조’ 운운한 것은 노동자의 처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아무리 연봉이 높아도 보이지 않는 존재인 노동자의 삶이 사회에서 의미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노동자가 파업할 때, 이에 반감을 드러내는 이른바 ‘도시 중간계급’의 태도는 사물의 질서를 위반하는 소란에 대한 경계를 내포한다. 노동자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을 때,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공감을 보내기보다 공격성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버스 출현은 놀라운 반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 구축은 공감 확산을 빠르게 했고, 그동안 정치 지점을 찾아내지 못한 삶의 영역이 이를 기반으로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다. 과거 서구사회에서 커피숍이나 독서클럽이 했던 역할을 한국의 소셜네트워크가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희망버스는 단순하지 않다. 노동운동 의제가 공감을 획득했다기보다, 김진숙이라는 개인이 의미화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진숙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지와 연대가 희망버스를 만들어낸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과거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없던 일이다. 쌍용자동차 파업이나 서울 용산 참사에서 ‘시민 연대’가 참으로 미미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갑자기 시민들이 달라진 것일까? 일부는 그렇게 추측한다. 이런 추측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일부는 좀더 나아가서, 우연이긴 하지만, 노동운동의 의제 설정이 김진숙이라는 계기를 통해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노동운동의 의제 설정이었다기보다, 김진숙이라는 독특한 개인의 존재다. 공감의 대상이 김진숙이 아니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노동자도 사람, 아니 시민이다

희망버스의 성공을 계기로 비슷한 일들을 기획하고 추진할 수 있겠지만, 모두 성공적일 것이라고 장담하긴 어렵다. 김진숙이 공감을 이끌어낸 원인 중 하나로 ‘소셜테이너’(Socialtainer·사회참여 연예인) 김여진의 공헌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소셜테이너가 개입한다고 모든 의제가 지원과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하다. 소셜테이너가 보여준 것은 대의민주주의로 환원할 수 없는 정치적인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기존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라고 명명할 수 없는 주장이 분출해 나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희망버스는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희망버스는 정치적 상황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상황을 열어낸 계기는 김진숙과 김여진, 그리고 송경동 같은 특이한 주체들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상황을 열어내는 주체화이지, 이 상황의 결과가 아니다. 해결책은 기성 정치인이나 노조 집행부, 그리고 기업인이 이 정치를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치와 그에 대한 해결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정치가 밀고 간 자리만큼 합리성의 경계가 확장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기존의 합리성에 파열을 내는 정치의 출현이다.

희망버스에서 정치가 발생하는 지점은 바로 노동자가 시민으로 자기주장을 한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도 사람이다’는 주장에서 한층 더 발전한 것이 바로 ‘노동자도 시민이다’일 것이다.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는 쌍용자동차 투쟁 이후 낯선 것이 아니다. 생산에 종속된 노동력이라는 사물의 자리에서 시민이라는 주권의 자리로 이동하는 과정이 ‘노동자도 시민이다’는 주장에 담겨 있다. 김진숙과 희망버스는 이 주장을 인준받기 위한 투쟁이다. 희망버스가 객관적 조건의 구속을 넘어가는 것은 이 지점이다. 여기에서 희망버스는 기존 정치를 넘어서 새로운 정치의 ‘희망’을 드러내고 있다.

글•이택광
문화평론가. 저서로 <이현세론: 영웅 신화와 소외성의 조우>(1997),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2002),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2007),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2010) 등이 있다.


 이 책을 보라, 사람이 보일 것이다

<사람을 보라> 아카이브 펴냄
<사람을 보라>(아카이브 펴냄)는 사진집이다. 책 제목은 문자언어이지만, 문자의 물성을 유지한 최후의 지점에서 건져올린 다섯 개의 글자 같아 보인다. 이 글자들은 차라리 사진의 물성에 가깝다. 언어가 건너가 닿지 못하는 지점에서 사진은 언어 대신 말을 한다. 그 말은 시간을 따라 흐르지 않고, 시간의 단면을 잘라 2차원의 ‘절대 공간’으로 재현한다. 물리학을 거스르며 2차원을 공간화하는 그 재현은 이것저것 토를 다는 대신 직관을 집중해 시간과 공간을 순간으로 포착한다. 특히 그 안에 사람이 있을 때, 사진은 배후에 역사를 거느린다. 책 제목은 그 원리의 방정식이자, 원리 자체의 자기 구현 같다. 그리고, 책의 출입문 같기도 하다.그 문을 열면 정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을 보라>에 수록된 수많은 사진들에는 두어 컷 말고 모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의 얼굴이나 몸의 일부만 클로즈업된 컷도 있고, 사람이 소실점처럼 아득히 어른거리는 컷도 있다. 한 사람의 실루엣도 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군집도 있다. 심지어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컷조차 프레임 바로 너머에 사람이 있거나 프레임 안에서 방금 전 사람이 떠난 흔들림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표지 사진에 사람이 없는데, 여기서는 제목 활자의 기의가 곧 사람 구실을 한다. 표지 사진은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의 불 꺼진 85호 크레인 기둥이다. 물론, 프레임 밖의 그 구조물에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아주 절박하게 사람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의 사진들은 죄다 인물 사진이다.

히로인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다. 그러나 이 책이 바비 인형 같은 여성 모델의 여느 패션 화보집과 다른 건 모델이 김진숙이어서가 아니라, 히로인이 이 책과 맺는 관계 방식, 나아가 다른 모델들과 맺는 관계 방식이다. 그녀는 책의 중심이되 부분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 모두의 운명과 관계된 이야기다.” 첫 장을 열자마자 마주치는 글귀는 이 히로인이 ‘우리 시대’의 ‘모두’와 관계맺고 있음을 내비친다. 책 속에서, 차가운 쇳덩이 구조물 저 높은 곳에 버티고 선 그녀는 우리 시대 지배 체제와 정면으로 대적한다. 그녀는 혼자 대적하고 있지만, 하나하나 호명할 수 없는, 희망버스에 올랐던 사진 속 수많은 얼굴들에게 희망의 영감을 사출하고, 다시 그들의 희망을 벼리처럼 엮어 등에 짊어진 채 집단적 투쟁을 수행하고 있다.

한 장의 사진은 다른 사진들과 엮여 내러티브가 되고, 책의 전개는 그 사태의 기승전결을 따른다. 그렇다고 한 사람의 모티브와 한 사람의 치밀한 기획, 작업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작가 23명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앵글과 각자의 포커스로 포착한 순간들이 모여 내러티브가 되고, 책이 되었다. 책을 제작하는 데 든 시간은 불과 열흘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 시대의 탁월한 역사적 기록이 될 수 있는 것은 주어를 은폐한 채 특정한 관점(심지어 의도)으로 쓴 여느 기록과 다르게, 개별자들의 관점이 모여 만화경의 풍경이 저절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책을 닫는 순간 우리 시대 사람의 모습이 가슴속에 구체적인 상으로 맺힌다. 희망버스에 탑승하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다르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진이라는 전달 수단의 힘이다.

*이 책의 인세는 모두 희망버스 쪽에 기부된다. 1만원.

글•안영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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