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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문화톡톡]김소월의 왕십리에 찬 저녁이 오면
[안치용의 문화톡톡]김소월의 왕십리에 찬 저녁이 오면
  • 안치용(문화평론가)
  • 승인 2021.10.30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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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往十里) 건너가서 울어나 다오,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찬 저녁

 

퍼르스렷한 달은, 성황당의

데군데군 헐어진 담 모도리에

우둑히 걸리웠고, 바위 위의

까마귀 한 쌍, 바람에 나래를 펴라.

 

엉긔한 무덤들은 들먹거리며,

눈 녹아 황토(黃土) 드러난 멧기슭의,

여기라, 거리 불빛도 떨어져 나와,

집 짓고 들었노라, 오오 가슴이여

 

세상은 무덤보다도 다시 멀고

눈물은 물보다 더 더움이 없어라.

오오 가슴이여, 모닥불 피어 오르는

내 한세상, 마당가의 가을도 갔어라.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나는

소리를 들어라, 눈석이물이 씨거리는,

땅 위에 누워서, 밤마다 누워,

담 모도리에 걸린 달을 내가 또 봄으로.

 

비에 대해서 말하자면, 시작이야 무어라 단정하기 힘들어도 끝은 대체로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결말은 하강이기에 어떻게 올라갔든 무조건 내려와야 한다. 흠뻑 적시든, 젖는 듯 마는 듯 삐들삐들 내리든, 원래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는 비의 여정은 한 닷새 굶은 암사자처럼 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이다.

출발한 곳을 기억한다기보다 돌아간 곳을 출발점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돌아간 모든 연어가 태어난 곳을 반드시 찾아내는 건 아니겠지만, 연어는 귀향한다. 가끔은 귀향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연어. 귀향하지 않아도 연어는 연어다. 귀향에 실패할 수는 있어도 귀향을 거절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연어는 귀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연어가 귀향을 거절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에서 내리지 않는 비는 비가 아니다. 귀소본능이란 신성불가침한 명령이 결과만을 정당화하는 현실. 젖이 마른 젖꼭지일망정, 나오든 말든 무심히 새끼에게 젖꼭지를 내어놓는 암컷의 초현실주의적 방심. 비는 시금 털털 내리다가, 그렇게 말라간다. 얼마를 버티든 결국 말라버릴 게다. 처음부터 마를 작정으로 내리는 비가 있겠냐만, 비의 하강은 의도와 목적을 사상(捨象)한 순수 행위이다. 행위 그 자체가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알 때가 되면 알게 된다. 영국의 법률가 윌리엄 존스가 말은 땅의 아들이고 행동은 하늘의 아들이다.”고 했을 때의 행동은 윤리적 관점에서 실천의 의미를 강조하였지, 삶의 관점에서(혹은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순수 행위를 겨냥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럼에도 땅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은 단지 대기의 무게일 뿐 아니라 땅을 딛고 선 이유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땅의 아들로 태어나지만 종국에는 하늘의 아들로 돌아간다. 연어의 귀향이나 비의 하강은, 정말로 눈 감은 맹목적 회귀이며 우리는 그러한 맹목성(盲目性)을 통해서만 연어나 비로 존재할 따름이다. 만일 진정한 의미란 게 존재한다면 진정한 의미는 의미의 상실이란 순수 행위에서 드러난다. 발화하지 않은 말의 감화력이 혈관투여제처럼 때로 더 직접적이듯, 무의미의 의미를 꿋꿋하게 주장하는 삶의 지루한 순수 행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혹은 (연어에게 어떤 깨달음도 필요 없기에, 깨달아서 무엇에 쓸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깨달음을 기대한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그랬구나, 시인은 오는 비는 올지라도 그렇게 감당하기 힘들었구나.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그렇게 비가 오네. 오는 비는 올지라도 오다가다 벌새가 되어 울지라도 산마루에 구름으로 걸려 웃다 울다 메말라갈지라도, 한 닷새 내리면 젖을 대로 젖어서 나른하게 젖어서 필사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닷새 울면 작은 소금기둥이나마 쌓아올려 언젠가 바삭하게 말라갈 수 있을까. 벌새는 죽을 만큼 빠르게 심장을 펌프질하지만 그 날개는 심상하게 퍼덕거리다 한 방울 한 방울의 하강을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서먹하게 접힌다.

비는 의도 없는 행위이다. “오든”, “울든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다. 꼭 새가 아니어도 울지 말아야 할 까닭은 널려 있다. 이미 비가 오는데, 울지 마라. 다 씻겨 갔는데 이 나이에 흥건한 설움이 어디 남았겠냐. “세상은 무덤보다도 다시 멀고/눈물은 물보다 더 더움이 없어라고 한 김정식(金廷湜)이 아닌데, 고향 땅으로 돌아가 아편 먹고 32살 짧은 인생을 마감한 시인이 아닌데, 벌새가 아니고 암사자가 아닌데, 시작과 끝을 아는데, 여기가 왕십리가 아닌데, (설령 이곳이 왕십리라 한들) 꾸역꾸역 울지 마라. 그저 무심히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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