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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의 문화톡톡] 스펙터클의 사회 다시 읽기
[이 호의 문화톡톡] 스펙터클의 사회 다시 읽기
  • 이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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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스펙터클의 사회>

다소 철이 많이 지나버린 책이긴 하지만,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과학기술과 금융자본주의가 심화된 시대에 이런 고전적인 책을 꺼내드는 일은 고현학을 연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기 드보르라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학자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가끔씩 펼쳐보면서 추억의 책장을 넘기는 그런 책이다. 그러니 우리도 추억팔이하듯 잠시나마 옛 추억에 젖어보자.

 

이 책의 1장 「분리 완성 되다」에 등장하는 포이에르바하의 에피그램은 의미심장하고도 아이러니하다. 서양 기독교가 현실-실재를 대체했다고 비판하는 포이에르바하의 목소리는 오늘날 완전히 되뒤집힌 것 같다. 기독교가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기독교(종교-진실)를 상대로 사기치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기호화되는 물건보다 기호 자체가, 원본보다 복사본이, 현실보다 환상이, 본질보다 외관이 더욱 선호되는 오늘날의 시대에는……오직 환상만이 신성한 것이고 진실은 세속적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진리가 감소되고 환상이 증가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신성성은 더욱 고양된다고 여겨지고 있고, 그 결과 최고도의 환상이 최고도의 신성성이 되고 있다.” 기독교(종교)가 사기를 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기독교(진실)을 상대로 사기치고 있는 시대이니 말이다.

가짜니 진실이니 이런 이분법적 구분은 오늘날에는 개도 안 물어갈 낡은 이분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책은 가짜와 싸우려는 의지를 고양시켜 주는 마르크스적인 환약이다. 1960년대 서구 사회는 한참 지나버린 시간 구역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라는 측면에서는 아직도 같은 시간권에 아직도 머무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책은 현실 사회를 가짜가 지배하는 시대라는 것을 새삼 견결한 어조로 ‘선언’하고 ‘설명’한다. 우리의 자율적인 욕망의 운동과 성취를 가로막는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상품소비 속에서 일시적으로 자아일치의 행복감을 향유하지만 소비가 완료되면 다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진짜로(?) 자기 삶을 살기 위해 ‘삶-의-형태’를 회복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미디어의 스펙터클에 자기를 내맡기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 헐벗은 사람이 되어 소비의 스펙터클에 삶을 맡기고 허구의 행복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결코 읽어서는 안되고, 읽을 필요도 없는, 그리하여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스펙터클’이란 여러 표현으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종합해서 말해보자면 “자본주의적 존재양식”이라고 보인다. 즉, 드보르를 비롯한 상황주의자 그룹은 ‘진짜 삶을 찾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생각하는 ‘진짜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되는 삶’이다. 아감벤 식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의-형태로서의 역량이 실현되는 사회”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싫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세상과 인간과 노동과 사회를 망쳐놨다는 것이다. 1950년대 소설 비평-연구의 클리쉐처럼,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상호표절 문장들처럼 ‘황금만능주의가 인간성을 황폐화 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20절에 보면 “스펙터클은 종교적 환상의 물질적 재구성이다”라고 쓰고 있다. 물론 이 맥락은 종교 비판이 아니라 스펙터클 비판이긴 하다. 스펙터클이 종교의 환상을 이용해서 그것을 하늘로 투사하지 않고 지상의 삶으로 그리고 거기 거짓낙원을 펼친다는 얘기다. 이런 관점은 포이에르바하, 맑스-엥겔스적인 종교이해 방식이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는 성공했으나 비관적이다. 희망이 없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희망이라면 ‘유물변증법’과 투쟁을 통한 ‘민중혁명’이다. 아무튼 이들은 초월의 피안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믿는다면 유물변증법과 도래할 혁명을 통한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믿는다. 이들은 직관적 사회 이해에서는 아주 탁발하다. 좋다. 그러나 그것을 맑스를 통해 개념화 할 때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출하려는 파토스와 직관에만 동의할 수 있을 뿐 솔루션까지 패키지로 구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역사-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점이다. 마르크시즘에 있는 ‘인간-되기’만이 건강하다. 결국은 그것도 ‘메시아니즘’으로부터 삼투된 것일 뿐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전제된 인간-사회에 대한 이해의 기본적인 ‘토대’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지평이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소외’(alienation) 개념이나 루카치의 ‘물화’(reification) 개념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이것들은 헤겔의 ‘외화’(Aeusserung)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무튼 그 개념을 ‘스펙터클’이란 말로 포장해서 그 외연을 세련되게 바꾼 것이다. 과연 ‘상황주의자’들다운 “기지 환발한 스피치”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67절에서 “물화된 인간은 자신이 상품과 친밀하다는 증거를 떠벌린다”는 대목 앞 뒤로 가짜상품, 스펙터클에 의해 주입된 욕망부분에 관한 통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은 모아둘 때 힘의 증대(의 쾌감)을 가장 강력하게 제공하는 상징적 물질이다. 거기서 그 증대 자체를 향유하(려)는 자가 ‘수전노’다. 그렇지만 그것이 거침없이 소비될 때 오는 쾌락이 더 일반적이다. 탕진과 낭비의 쾌락은 꽤 중독성 강한 쾌감이다. 생물학적으로도 아마 다량의 세레토닌이 뇌 속에 분비될 것이다. 드보르는 우리의 생필품 욕망 자체가 조작되고, 끝없는 생필품 디맨드를 스펙터클이 제조해 낸다고 말한다. 지금은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지만 말이다. 이렇게 현 시대 비판적인 사고방식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과학-기술적 발전과 경제 발전에 저해되는 구태의연한 반동적 사고일 뿐이다.

또한 이들은 헤겔을 비판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비판점이다.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변증법적 관념론)은 거절하고 맑스의 유물변증법은 수용한다. “헤겔은 세계를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변혁을 해석해야만 했다. 그러나 헤겔은 그 변혁을 단지 해석하기만 함으로써 철학을 철학적으로 완성했을 뿐이다…… 그것은 오로지 사유 속에서만 분리를 초월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미 “세계를 해석하기만 하는 철학은 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독일이데올로기 10번 테제)라는 유명한 말을 한 적이 있다. 76절의 이야기는 그와 똑같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시각이자 방법론이다. 현실적 해법을 매개하고 아우르는 구심점이다. 그것은 유물변증법, 역사유물론적 변증법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마르크스 박사의 마냥 똘마니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판적 대결을 통한 진화’라는 사고패턴 자체야말로 진정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사유다. 무엇보다 이들이 믿는 것은 ‘유물변증법’이다.(75절 참조). 이들이 말하는 ‘역사’는 변증법적 역사, 투쟁을 통한 발전이다. 하지만 그 역시 ‘발전주의’다. 이런 비판은 오래전에 이미 마르크스주의에 가해진 것들이다.

 

이들이 변질된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수행하려는 움직임은 아름답고 눈부시다. 이와 관련하여 소비에트 공산당에게 죽음을 선언하고, 트로츠키를 폐제하고, 스탈린을 저주하고, 루카치를 씹을 때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전적으로 외적인 권력의 이름으로 말하는 한 명의 이데올로그였다”고 평가한다.

어쨌든 드보르의 통찰력은 뛰어났다. 아감벤이 극찬하듯 그 예언의 현실성은 정말 경이롭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로서는 이들, 상황주의자 그룹을 포함한 드보르의 시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어 안타깝다. 현상에는 동의하지만, 원인분석을 하게 만드는 현실분석의 도구적 사고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이 상정하는 이상적 대안에도 동의할 수가 없다.

이들은 죽은 시체(마르크시즘)을 애무해서 그것을 살려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진지하지만 애처로운 사람들, 덧없는 프로그래머들이다. 이들은 심지어 마르크스까지 비판하면서 마르크시즘을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그렇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과학적 사유를 넘어서 있으며, 또한 그것을 폐지시킴으로써만 과학적 사유를 보전한다.”(81절) 심지어 마르크스 자신조차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섰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스스로 자본론을 비판한 논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과학의 한계점들을 명백히 밝혔다.”(89절) 백번 양보해서 말하자.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적이다.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라는 복음을 부활시키려는 마르크스교의 CS 루이스다. 그렇다면 기 드보르를 다시 살려낸 아감벤은 키프로스의 피그말리온이다. 간절히 소원하여 만질 때마다 그 부위만 다시 사람처럼 살아난다. 그리고 그 살려내진 부분은 매우 촉감이 좋고 ‘섹시’하다. 이들을 통해 감마파를 동반하는 멀티 오르가슴이 예상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환상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자기 의식의 투여물, 환상의 소여물을 붙잡고 싶어 하고 숭배하고 싶어 한다. 단지 자기 마음 속 공허의 현현물에 불과한 대상을 삶의 동력을 제공하는 대상으로 삼아 사회를 유지하는 것, 자기 존재와 삶의 이유에 원인을 제공하는 가시화된 대상으로 착각하는 메커니즘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상품이란 단지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화폐이며, 삶의 동력이며, 욕망이다. 우리가 만들고 살아내고 발버둥 치는 게임의 장은 바로 이런 곳이다.

 

 

 

글 · 이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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