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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의 문화톡톡] 튤립에서 암호화폐까지
[이 호의 문화톡톡] 튤립에서 암호화폐까지
  • 이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1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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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화화폐 열풍 현상에 관하여

인류 문명사에서 투기와 폭락(이른바 버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은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지만, 비교적 근대적 형태의 상업주의와 맞물려 출현한 것은 아마도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1637)이 최초의 버블 현상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옛날 얘기이긴 하지만 네덜란드가 해상 무역을 통해 경제 패권을 잡던 시기가 있었다. 그들은 바닷길을 이용해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를 누비며 무역이라는 이름의 착취(동인도회사)를 통해 상당한 이익금을 벌어들였다. 상선을 지키는 해군력도 상당해서 영국에 버금갈 정도였다고 한다. 세계 곳곳을 오가며 각 지역의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와 유럽에 팔아(수요를 생산하여) 이득을 취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튤립을 발견하였다.

튤립은 원래 남유럽과 중동 지역이 원산지였지만 네덜란드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그것을 발견하여 가져다가 유럽 왕실과 귀족들에게 납품을 한다. 뿐만 아니라 수입품인 튤립의 품종을 개량하여 2000 종류 이상의 튤립을 생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발견하고 연구-개발하여 돈이 되는 상품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 것이다. 갑자기 그리 된 것은 아니고 자연학자 콘래드 게스너가 튤립을 비엔나로 들여온 이후 30년간 서서히 사람들에게 알려지다가 영국과 그리고 얼마 뒤 프랑스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렇게 인기가 급상승하게 되자 튤립의 가격이 오르게 된다. 튤립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재배가 더 늘어났고 아예 하나의 산업 분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더구나 변종 튤립(이를테면 빨간 튤립에 얼룩점이 있다든지, 잎이 단색이 아니라 2가지 이상의 색을 갖게 된다든지)은 굉장히 비싼 값에 팔리게 된다. 튤립이 내재가치가 있는지를 묻는 이성적인 질문은 그것이 다만 팔린다는 사실(즉 돈이 된다는 현실성) 앞에서는 무용한 것이었으며, 심지어 이런 거품 현상은 튤립 재배와 품종 개량으로 큰 돈을 번 사람들을 주변에서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 별 쓸모가 없게 된다. 그렇게 네덜란드에서는(네덜란드의 토양과 기후가 다른 유럽지역보다 튤립 재배에 유리했다) 튤립은 큰 돈을 벌 수 있는 투기와 탐욕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되고, 이후의 결과는 뻔하므로 구구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튤립을 재배하기도 전에 미리 투자하는 주식 시장의 ‘선물’과 ‘옵션’이 여기서 등장했고, 투자한 튤립이 잘못될까 두려워 보험 상품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기록해 두자.

이런 역사적인 이야기를 펼치는 이유가 있다. 요즘 가상자산 시장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주변에 가상자산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하기야 모를 일이다. 지금 비트코인과 웹 3.0, 메타버스를 화두로 하는 가상자산들이 곧 도래할 근미래의 산업이 될지도 모를 일이며, 앞으로는 암호화폐를 실생활에서 사용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가깝게는 2000년 즈음의 닷컴버블이 자꾸 오버랩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는 주장, 이더리움이 암호화폐의 구글이라는 등의 비유에 그것이 대량적 수용(Mass Adoption)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어차피 화폐는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여 통용되기만 한다면 되는 것이고(상징망에서 그것이 인정되고) 그것을 보증하는 기관(국가)이 단단하다고 믿어지기만 하면 큰 문제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희망으로 혹은 욕심으로 투기speculating(혹은 투자investing)를 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경고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실제적 사용처가 불분명하고 미래의 메타버스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다가올지 매우 불투명한 상황에서 투자(혹은 투기)부터 벌어져 있는 상황임에는 분명하다. 작금의 가상화폐계는 유저보다 투자자가 훨씬 많고, 실제로 사용되는 사례보다는 시장에서 시세차익을 노린 거래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가상화폐에 몰리는 이런 현상에는 음미해 볼수록 뼈아픈 우리의 현실과 자화상이 도사리고 있다. 즉 우리 시대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이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필자는 지금 ‘너의 풍요를 알고 감사하라’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

사회가 아무리 풍요로워졌어도 개인은 가난하며, 가난한 사람은 점점 늘어난다. 결국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으며 그것의 제1, 궁극원인은 돈이 부족해서다. 자신, 즉 자아를 실현하는(Self-Actualization) 노동 운운하는 건 개도 안 물어갈 이야기이고, 상대적 빈곤감은 더욱 커져서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와 삶을 찾으려는 사고의 운동을 행하는 바, 그것이 가상자산 시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그것 말고는 지금 단기간에 지금보다 나은 현실을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보여서 위험한 시장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점이 매우 안타깝고 슬픈 우리의 현실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자발적으로 코인이라 불리우는 가상화폐 시장에 투자자로 걸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미래를 찾을 길이 없어서 암호화폐 시장으로 내몰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형국 앞에서 “모든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다”느니, 어리석게 일확천금을 꿈꾸다 더욱 가난해지는 미련한 놈들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은 아마 젊은 세대에 대한 공감력과 상상력, 더불어 이해력과 이해할 마음이 하나도 없이 늙어버린 틀딱일 가능성이 높거나, 꽤나 많은 돈을 모아놓은 철밥통일 공산이 아주 크다. 제발 그들의 말이 틀리기를 바라고, 미래가 불안하고 현실이 고달파서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차라리 맞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젊은이가 그릇된 길로 가면 어른들이 가르쳐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뭐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올해 5월에 ‘테라-루나’ 코인의 폭락 사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탈중앙화와 디파이, 대체불가능한 토큰 등 암호화 기술을 사용한 사례들의 이야기는 이념적으로 봤을 때 매우 매력적이며 미래 수용가능성을 타진해 봤을 때도 꽤나 그럴듯하다. 하지만 테라의 몰락은 이익을 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야말로 얼마나 허약하기 짝이 없는지 보여준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루나 코인 생태계의 가치를 담보하는 테라(UST)가 흔들리며 붕괴했을 때, 그것은 익히 보아왔던 뱅크런 사태의 재현이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그 공동체를 지지해줄 그 어떤 단체도, 믿음을 가지고 그곳에 남아줄 그 어떤 사람들도 없었다. 모두 한 푼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남보다 빨리 거기서 뛰어내릴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뱅크런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은행 문을 강제로 닫아걸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여러분이 돈을 찾아 가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말했던 일이 있었다. 그 결과 은행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얼마간의 인출 사태 이후에 은행에는 다시 예치금이 들어와 미국 은행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는 일이 중지되었던 일이 있었는데, 테라-루나에는 그런 말을 해줄 리더조차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건 미리 설계된 토크노믹스와 알고리즘으로 짜인 프로토콜이겠지만 그것이 흔들려 붕괴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잘 짜인 프로토콜이라고 해도 결국은 신뢰망이 무너지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믿어진다는 점이 핵심이었다고 봐야 하고, 코인 시장의 구성원은 이익을 탐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들의 일시적 집합체일 뿐이다. 더 냉혹하게 말하자면 남의 돈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전장터와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그것을 보증하는 주체가 없다는 점일 터이다. 그 점이 아직 우리가 처해 있는 암호화폐 생태계의 현실이다. 따라서 결론은 하나, 돈을 잃어버릴 준비가 된 사람만이 투자(혹은 투기)할 수 있다는 뻔한 결론이다.

이쯤 쓰고 나니, 이 글도 도박의 일종이 아닌가 생각된다. 먼 훗날 필자가 “이런 글을 쓸 시간에 0.001개의 비트코인이라도 더 살 껄”하고 후회하게 될는지, 아니면 “역시 가난하고 무식한 투기꾼과 도박사의 귀결은 불행이야”라고 쓸쓸하게 읊조리게 될는지 결정될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한 판의 도박 같은 것이라는 점을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으니 말이다.

 

 

글 · 이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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