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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문화톡톡]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신드롬에 대한 열네 가지 단상
[안숭범의 문화톡톡]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신드롬에 대한 열네 가지 단상
  • 안숭범(문화평론가)
  • 승인 2022.09.1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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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NA 공식 인스타그램
출처: ENA 공식 인스타그램

 

한국 사회에서 <우영우>를 둘러싼 담론장은 매우 입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착한 드라마’라는 세간의 평가가 일면 타당하지만, 동화적 판타지처럼 보이는 스토리 안에 날카로운 사회적 쟁점이 다채롭게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은 <우영우> 스토리텔링의 인상적인 순간들, 질문을 남긴 쟁점을 짧은 호흡으로 정리해본 것이다. 아직 시청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지금 시청 중이거나 이미 시청한 사람들에게 생각을 정돈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첫째, <우영우>는 대중적인 드라마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차용되는 사건해결형 서사, 갈등봉합형 서사를 일정한 호흡으로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문제적 사건’에만 주목하지 않고 인물 간의 관계와 감정의 맥락을 다루는 데 충분한 시간을 쓴다. 그 때문에 회당 분량이 동일 장르 ‘미드’보다 다소 길고 서사 정보도 많다. 단 신파적 요소를 활용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고, 쇼트 진행도 상대적으로 빠른 편이다.

둘째,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주동인물군을 창조한 후, 그들 사이의 안정적인 관계망을 최대한 활용해 시리즈물의 단속적 연장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로펌 한바다의 정명석 변호사팀 내 구성원은 영우를 중심으로 일정한 대타적 역할을 갖는다. 안정적 구도로 고정된 이 관계망은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 갈등이 봉합되는 과정에 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한편 매 회차 새로운 에피소드, 결정적 사건, 흥미로운 의제를 동반하는 인물과 사건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시청자는 낯선 경로로 긴장성을 얻는 데에도 성공한다.

셋째, 영우의 시그니처로 통하는 동그라미와의 인사법, 자신을 소개할 때 반복하는 멘트 등은 광범위한 온라인 관계망 안에서 ‘밈’으로 확산될 수 있는 방향으로 기획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영우의 표정, 동작, 행동을 포함한 캐릭터라이징 방식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이에 대한 시청자의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혹자가 말한대로 장애인의 특징을 ‘모에화’한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그 자체로 차별화된 캐릭터 IP 구축에 기여한다. 그 외에도 영우의 김초밥에 대한 취향, 고래에 대한 상상력 등도 캐릭터 '에지(edge)'가 될 수 있으며 시리즈물을 안정적으로 연장하는 데 사소하지만 효과적인 설정이 된다.

넷째,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똑같다고 반복되는 단어들이 다른 함의로 읽히는 순간이 있다. 그 멘트는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동화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우영우>는 그런 식의 언어유희를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드라마다. 방구뽕, 동동일, 동동이, 동동삼, 동그라미 같은 이름은 등장부터 코믹한 판타지를 자극한다. 그런데 그러한 언어유희에 가까운 네이밍이나 대사들이 인상적인 아이러니로 나아가곤 한다. 예컨대 우영우가 자신을 지칭할 때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을 반복적으로 읊는 와중에 때론 다른 뉘앙스가 전해지기도 한다. 자폐인을 비정상성의 범주로 놓고, 대상화하여 판단하려는 편견에 대한 큐트한 일갈이 거기 있다. 가령 ‘자폐인이니까...’, ‘자폐인이라면...’이라는 전제를 앞에 놓고, 어떤 한계를 상정하거나 비장애인과 다른 잣대를 갖다 붙이는 관습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 있다. 영우는 자신을 향한 시선의 왜곡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장에 서 있다. 그런데 영우는 이리저리 뜯어볼 필요없이 그저 우리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그저 우영우일 뿐이다. 그녀는 ‘이상하고 별나지만’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20대 청년 중 하나다.

 

출처: ENA 공식 인스타그램
출처: ENA 공식 인스타그램

다섯째, <우영우>는 매 회차 갈등의 상승과 하강이 뚜렷한 아크 플롯을 모범적으로 활용한다. 물론 문제 해결을 위해 충분한 상황적 맥락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갈등이 해소될 수 있는 반전이 주어지기도 한다. <우영우>는 주인공이 자폐인이라는 조건만큼, 천재라는 설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우영우>에는 고래가 뛰어오르고, 각별한 기억과 상상, 기대가 흥미롭게 조우하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다소 비약적이지만, 시청자가 허용할 만한 수준에서의 ‘봉합’이다.

여섯째, <우영우>의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극적인 파토스는 영우 주변인이 겪는 ‘외로움’의 숙명에서 주어진다. 영우는 평범한 톤으로 “내 안은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가까이 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듭니다”라고 말한다. <우영우>는 영우가 그것을 자각함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에 값하는 태도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사실도 밝힌다. 그래서 영우 아빠 우광호도 긴 외로움을 견뎌왔고, 그 ‘견딤’의 시간만큼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고 공유된다. 준호가 영우와의 관계에서 고민했던 궁극적인 부분도 그 ‘외로움’과 ‘견딤’의 지속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진지해질 무렵, 영우의 사랑스러운 매력들이 그것을 덮는 것도 사실이다. 다소 아쉽지만, 흠이라기보다는 대중적인 드라마가 취할 수밖에 없는 서사적 타협이라고 생각된다.

일곱째, <우영우>는 한국사회에 잔존하는 사회적 의제들을 성장과 모험의 플롯으로 무겁지 않게 소재화한다. 기실 우영우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기본 정보는 그리 친근하거나 평범하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변호사, 특히 대형 로펌 변호사는 특별한 선망을 받는 자리이다.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라는 설정은 영웅서사 속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비범성’마저 상기시킨다. 그런데 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가시적 차이를 갖는다. 슬프지만, 한국사회에서 이 차이는 ‘차별’로 이어지기 쉬운 조건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그 때문에 영우는 성공서사의 꼭대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성장서사의 밑바닥에서 출발하게 된다. 매 회차는 성장의 계기를 만나는 모험의 장이다. <우영우>는 성장서사와 모험서사가 자연스럽게 착종되는 가장 검증된 대중 서사의 결을 따르는 것이다.

여덟째, <우영우>가 품고 있는 사회적 의제들이 진지하고 본격적이냐고 묻는다면,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풍산 류’씨 등을 따지는 판사는 한국의 혈연문화를 상기시킨다. 서울대학교, 하나대학교 출신들의 학연문화도 한국 사회의 병폐를 터치하고 있다. 9화 ‘피리부는 사나이’의 방구뽕은 사상범, 과대형 망상장애 환자로 몰리는 중 과중한 학력 중심 사회의 거스를 수 없는 관성을 고발한다. 그러한 현실적 문제들이 다양한 인물을 통해 제기되는 까닭에, 영우가 고래를 상상하는 장면은 동화적 ‘초월’이라기보다는 현실을 끌어안은 ‘포월(包越)’의 순간을 상상하게 한다.

아홉째, <우영우>는 영우가 자신의 거울상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사회적으로 소외되었거나, 소외될 가능성이 농후한 이들이 더 이상 밀려나면 안 되는 상황에서 찾게 된 곳이 법정이다. <우영우>의 각 회차에 극심한 갈등에 연루되는 레즈비언이나 탈북자, 중증 자폐인, 지적 장애인, 해고 노동자는 각기 다른 기준에서 차별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이다. 흥미로운 건, 영우가 그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편에만 서는 게 아니라, 직업적 책임을 지기 위해 그 반대편에 서기도 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 때문에 영우는 세상을 이해하는 순간을 더 자주 만나게 되고, 성장의 폭이 넓어진다. 12화 ‘양쯔강 돌고래’에서 상대편 변호사로 만난 류재숙은 이겨야 할 상대라기보다는, 닮거나 보완해야 할 여지를 가르치는 존재다. 결국 <우영우>에서 법정은 영우의 성장을 위한 모험이 매듭지어지는 장소다. 소외된 이들이 그들 각자의 ‘소외의 이유’를 안고 한국 사회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가 환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홉째, 주동인물 내부에서 종종 반동인물처럼 기능하는 권민우는 흥미로운 캐릭터다. 때때로 그는 ‘피로사회’의 극단을 보여주는 한국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과잉 경쟁’ 문화의 부작용을 전시한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실 천재성을 가진 영우가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의 윤리성을 간과해도 좋다고 말하는 한국사회의 그림자다. 이는 사회 구조에 감춰진 근원적 적이지만, 그가 주목하는 상대는 아빠 ‘빽’을 가진 (것으로 짐작되는) 영우다. 그의 눈에 영우는 자폐인이라는 점에서 주변의 연민을 받고, 천재라는 이유로 과잉 평가를 받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느 평론가는 민우를 2030 주류 남성의 정서를 대표하는 캐릭터, 소위 ‘이대남’의 전형이라고도 말한다.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평가다. 그러나 그를 특정 성별, 일부 세대를 대표하는 빌런으로 보기보다는 구조적 ‘피로 사회’가 양산하고 있는 비사회회적·비윤리적(‘반사회적·반윤리적’은 아니다) 실리주의자의 전형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 같다.

열째, 최수연 캐릭터는 영우와의 대타적 관계에서 민우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개성적 인물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그러면서도 평면적인 인물에 해당한다. 만약 영우가 비장애인 변호사였다면, 수연은 더욱 평범한 주변인물이었을 것이다. 수연을 특별하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이유는, 영우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수연은 비장애인 친구와 평범하게 우정을 쌓듯, 장애인인 영우와도 그저 무탈하게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왔을 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그런 그녀의 평범성이 영우에게서 ‘봄날의 햇살’이라는 시적 수사로 미화된다는 것이다. ‘봄날의 햇살’은 슬픔을 내재한 언어적 아이러니다.

 

출처: ENA 공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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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째, 드넓은 ‘자폐 스펙트럼’을 고려할 때, 여러 자폐인이 우영우와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은 틀림없이 걱정되는 부분이다. “우리 애 장애가 당신 장애랑 같아요?”라고 질문하던 혜영의 어머니(10화 ‘손잡기는 다음에’)가 던진 질문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는 <우영우> 신드롬의 언저리에서 계속 제기된 우려 중 하나다. 자폐인 중 특정 분야에 매우 뛰어난 능력과 감각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서 우영우가 가진 천재적 능력, 곧 논리적 사고력과 결부된 기억력은 사회적 효용이 매우 높다. 자폐인 중 일부가 예외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영우처럼 사회적 효용이 높은 경우는 아닐 수 있다. 과거 <말아톤>이 흥행할 때, 골방에 갇힌 수많은 초원(자폐인)을 향해 ‘노력하면 너도 성공할 수 있어!’라는 말이 너무 쉽게 뱉어지는 풍경을 본 적 있다. 우리는 <우영우> 속 영우가 매우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극화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곱씹어야 한다.

열두째, <우영우>가 의도한 사회적 ‘올바름’에 대한 상상 안에 간과된 반대면도 없지 않다. 자폐 때문에 서울대 로스쿨 수석이 어느 로펌에도 들어갔지 못했다는 불평은 타당해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나 변호사 시험을 합격한 후 적을 두지 못하고 보낸 6개월이란 시간이 한국의 평범한 취준생 사이에서 큰 시련이라고만 해석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열셋째, 10화 ‘손잡기는 다음에’에 등장하는 지적 장애인 혜영을 통해 장애인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낸 점은 훌륭하다. 혜영과 정일 사이의 사랑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해와 오해를 보면서, 영우도 준호와의 사랑을 객관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등장한 공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혜영은 자기 감정을 좀처럼 표현하지 못한다. 연애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내세우지 못하는 것처럼 무력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한 캐릭터 설정 덕분에 극적인 긴장성이 높아진 부분도 있지만, 이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보다 오해를 조장할 수도 있다.

열네째, 그럼에도 <우영우>는 여러 장점을 가진 드라마인데, 그중 눈여겨볼 대목 중 하나는 ‘막장 드라마’로 나아갈 수 있는 서사적 길목에서 담백한 ‘힐링 드라마’로 영리하게 선회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한국 드라마의 흥행 공식을 잘 알고 있는 작가라면, 태산의 태수미와 한바다의 한선영, 그리고 영우 아빠 사이의 ‘과거’에 더 힘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감정을 폭발시킬 수 있는 비밀스러운 사연을 더 복잡하게 묻어 놓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질긴 인연을 다채롭게 드러냈을 것이다. 그런데 <우영우>는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을 자극적 매듭으로 반복 활용하지 않는다. 특별한 날에 먹는 30만원짜리 코스요리를 자주 등장시키지 않고, 매일 먹는 김초밥을 정갈하게 보여주는 드라마다.

<우영우>에 대한 글을 닫기 전에 콘텐츠 외적인 면에 주목해 한 가지 희망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영우>의 IP를 제작사(에이스토리)가 오롯이 소유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방송사의 권한이 막강한 제작·유통 환경에서 외주로 드라마를 만들어온 제작사는 대개 IP를 가질 수 없었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 플랫폼에서 개봉하는 오리지널 시리즈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영우>가 특정 장르 팬덤에 매니악한 소구력을 갖는 드라마는 아니다. 그럼에도 부가 사업을 확장시켜 갈 수 있는 매력 포인트가 상당하고, 제작사는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을 쥐었다. <우영우> 시즌 2를 말하기 전에 나는 그 권한이 영우의 상상력만큼 펼쳐지는지 지켜보고 싶다.

* 이 글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행하는 국가 홍보 영문 매거진 <KOREA>에 수정을 거쳐 영문으로도 게재되고 있다.

 

출처: ENA 공식 인스타그램
출처: ENA 공식 인스타그램

 

 

글·안숭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시인.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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