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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의 문화톡톡] 지금-여기, ‘세기말’과 ‘Y2K’가 다시 유행하는 이유: <뉴진스>의 ‘디토(Ditto)’에 열광하는 허무주의(자)들
[이지혜의 문화톡톡] 지금-여기, ‘세기말’과 ‘Y2K’가 다시 유행하는 이유: <뉴진스>의 ‘디토(Ditto)’에 열광하는 허무주의(자)들
  • 이지혜(문화평론가)
  • 승인 2023.01.02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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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동안 ‘최대한 혼자일 것’으로 귀결되는 방역 지침이 적용되었다. 따라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유지되었던 사회와 개인의 삶 전체가 정지되었다. ‘학교는 방학 때만 가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던 아이들은 개학하고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노동’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빠르게 구축되었다.

그중 현장 프리랜서 고용 비중이 높은 문화예술계의 피해가 특히 심각했다. 관객이 모여야 일이 진행되는 공연과 축제가 위축되며 수많은 사람이 생계를 잃었다. 한 산업이 무너지면 다른 산업도 도미노처럼 붕괴하였다. 반면 게임산업이 반짝 활기를 띠었다. ‘메타버스’와 ‘VR’을 활용한 가상 공간이 현실의 공허와 공동체를 꾸려갈 대안으로 등장했지만 여의찮았다. 사이, 수많은 기술이 부유하고 침잠하기를 반복했다.

그로부터 2년 1개월이 지난 2022년 4월 18일, 정부의 발표로 약 2년 동안의 ‘거리두기’가 해제되었다.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코로나 이후’가 도래한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코로나의 극복’을 뜻했지만, 국민들은 암암리에 ‘위드 코로나’를 인지했다. 대부분 사람은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했고, 스스로 백신을 맞았다. 이대로 코로나가 종료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불안했다. 아주 많이.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출처: TVN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사진 출처: TVN)

 

기억 속의 불안: 1990년대, 세기말, Y2K

팬데믹만큼은 아니어도 과거 전 세계적으로 ‘불안’이 하나의 기조였던 시기가 있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일성의 죽음, 삼풍백화점의 붕괴, IMF, 아날로그였던 세계가 디지털로 변화했던 90년대, 그리고 이어진 세기말이 그때다. 세기말은 보통 넓은 의미에서 한 세기의 끝을 말한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여기’에서 바라보는 세기말이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를 통칭한다. 또한 좁은 의미로는 1999년을 의미한다.

컴퓨터의 보급과 일상에서의 사용을 장려했던 90년대 후반부터 ‘밀레니엄버그’로 인한 종말론인 ‘Y2K(Year, 2, Kilo)’ 문제가 대두되었다. 컴퓨터가 연도 표시의 마지막 2자리만을 인식해 1900년 1월 1일과 2000년 1월 1일을 같은 날로 인지하며 발생하는 오류로 인한 대혼란을 종말론과 연결한 사건이었다. 컴퓨터로 운용되며 연도를 참조하는 금융, 교통, 의료, 국방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마비될 것이며, 그 틈을 타 전 세계의 급진 우파들이 핵전쟁이 일으킬 것이라는 논지가 주였다.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신흥 종교를 만들었다 잡혀갔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보도되었다. 마트의 라면과 쌀, 밀가루가 동났다는 기사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필자의 부모님도 라면과 쌀, 생수 등을 조금 구매했다. 또한 1999년의 마지막 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이 집에 다 같이 모여 있어야 한다고 필자와 동생에게 신신당부하셨던 기억이 있다. 사실 순전히 필자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Y2K’와 ‘종말’보다 이 흉흉한 분위기를 틈타 당장 학기 말 성적표를 들키지 않는 게 급한, 그보다 <골든디스크 시상식>과 <가요대상>이 제때 잘 ‘올바른 사람’에게 시상되는지가 더욱 중요한 질풍노도의 중학생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컴퓨터 오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하는 것보다, 인터넷 연결이 안 되어서 팬 페이지에 접속을 못 하는 게 더 불안한 이 시대의 ‘빠순이’였던 것이다. 가족을 뿌리치고 공개방송이 있는 여의도에 달려가고 싶었다. 거기 가면 우연이라도 ‘오빠들’과 ‘언니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친구가 나 뿐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필자는 성적표를 들켰으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얌전히 집에 있어야만 했다. 45자 제한이 있던 문자메시지로 친구들과 상황을 공유하며, [Y2K 잘 버티고, 내년에 살아서 여의도에서 만나]라는 인사를 새해 안부 대신 농담처럼 전했다. 그러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새해가 되자마자 종합 학원에 감금되었기 때문이다.

 

유지태-김하늘 주연, 김정권 감독 영화 '동감'(2000) (출처: 네이버 영화)
유지태-김하늘 주연, 김정권 감독 영화 '동감'(2000)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반복되는 불안: 실패하지 않겠다는 의지

다시 2022년 하반기, 코로나 이전의 삶과 애매하게 비슷한 일상이 찾아왔다. 서울시 홍보대사인 ‘BTS’가 해외 팬의 입국을 견인했다. ‘SM엔터테인먼트’는 에버랜드와 함께 소속 아티스트 IP를 활용한 프라이빗 공간 콘텐츠인 ‘광야@에버랜드’를 추진했다. 수많은 해외 팬이 서울과 광야를 경험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다. 수도권에 몇 년 만에 사람이 넘쳐났다. ‘코로나 그 후’만 기다리던 영화들이 앞다투어 개봉했으며, 기획사 하이브의 르세라핌과 ADOR 소속의 뉴진스 등 대형 신인이 데뷔했다. 촬영 제한이 자유로워진 까닭에 퀄리티 높은 드라마들 또한 속속들이 공개되었다.

그러므로 감염병이라는 터널을 빠져나온 후 가장 활기찼던 산업 분야는 단언컨대 K-컬처로 견인된 문화예술계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히도 2022년도 K-문화예술계를 견인한 가장 뜨거운 트렌드는 ‘세기말’이었다. 세기말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향유한 주체였던 필자 또한 2022년은 K-컬처 덕분에 즐거웠음을 인정한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김태리·남주혁 주연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며 웃었다. 세기말 학창 시절을 컨셉으로 한 ‘뉴진스’의 신곡 ‘Ditto’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극장에 갔다. 뉴진스의 유튜브 채널 댓글 창에 달린 ‘학창 시절의 추억을 보정 당했’다라는 리플과 ‘기억 조작’이라는 단어를 보며 공감했다.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 순끼 작가가 연재 중인 90년대 배경 웹툰 <세기말 풋사과 보습학원>을 보았다. 여진구·조이현 주연의 리메이크 영화 <동감>(2022)의 개봉을 지나치는 대신, 극장에 걸리는 수많은 ‘재개봉 영화’를 다시 보았다. 영화 티켓을 예매하며 김하늘·유지태의 <동감>(2000)이었다면 주저 없이 예매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전한 재미를 주었던 영화를 두고, 새로운 영화를 골라서 굳이 실패할 필요가 없었다. ‘재개봉 영화’라면 실패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세기말’의 유행이 과연 우연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로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일에 ‘안전’을 따지는 스스로 이질감을 느꼈다. 코로나 이전 나의 문화예술 선택 기준은 ‘안전’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쇼펜하우어의 ‘욕망’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욕망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고, 욕망은 절대 만족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인간은 욕망에 대한 결핍과 불만을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는 예술을 향유함으로 인간이 욕망에서 기인한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예술은 ‘진정제’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뉴진스 '디토(Ditto)' 컨셉포토, (사진 출처: 뉴진스 공식 홈페이지)
뉴진스 '디토(Ditto)' 컨셉포토 (사진 출처: ADOR)

지금-여기, ‘세기말’이 유행하는 원인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말하자면 ‘안전’에 대한 결핍이 욕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진정제’로는 진정되지 않는 ‘불안’이 ‘지금-여기’ 도처에 떠돌고 있었다. 팬데믹 기간 우리의 삶은 너무 많이 불안했다. 안전하지 못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 실패할 것이다, 모든 게 중지될 것이다. 허무로 돌아갈 것이다. 라는 요지의 불안을 적어도 나의 선택 때문에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게 고작 영화나 드라마 음악을 고르는 정도의 사소한 선택이라고 해도 그랬다. 당장의 기분을 침범당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언제 전염병에 걸려 죽음 앞에 내던져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2년 꼬박 겪어야만 했다. 인간은 언젠가 다 죽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무력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세기말’이 유행하는 원인은 ‘불안’이 아닐까. 더 나아가 ‘허무’가 아닐까. 나는 이 세기말의 유행이 우연이나 유행의 주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허무’에서 비롯되었다고, 아주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하이데거의 ‘허무’를 빌려 주장하고 싶다.

하이데거에게 기대어 말하자면 인간은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 즉 현존재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가 문제 되기 때문에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규정해야 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 방식은 실존이다. 실존이란 ‘세계 내에서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부닥쳐 있음을 현존재는 ‘기분’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낸다. 즉, 현존재는 기분을 통해 자신이 세계 내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현재 문화를 가장 열심히 생산하고 향유하는 세대는 밀레니얼 세대다. 이들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 출생했다. 어쩌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잘 배운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였던 부모의 사랑과 관심 아래에서 지식과 문화를 매개하고 취향과 개성의 다양성을 존중받으며 성장했다. 반면 이들은 금융 위기 이후와 팬데믹 시기 사회에 진출해 유례없는 고용 감소와 일자리 질 저하 등을 폐부로 느끼는 세대이기도 하다. 예고된 적 없었던 좌절과 실패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세대이다. 따라서 이들을 장악하고 있는 ‘기분’이 ‘불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불안이라고 말했다. 불안은 공포와 다르다. 공포는 위협하는 것이 대상으로서 존재하지만, 불안은 어떤 것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불안은 현재를 초월해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방식인 ‘기투’로만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밀레니얼 세대의 ‘불안’은 하이데거식의 기투가 불가능하다. 일단 스스로 존재를 ‘이해’할 틈이 없었으며, 그러므로 타인의 존재조차 ‘이해’하려 하지 않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자가 매몰되고 고여있는 세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존은 완성될 수 없다. 말 그대로 불안한 세대이다.

 

뉴진스 '디토(Ditto)' 컨셉포토 (사진 출처: ADOR)
뉴진스 '디토(Ditto)' 컨셉포토 (사진 출처: ADOR)

불안을 잠재우는 문화콘텐츠

‘밀레니얼’을 넘어 ‘MZ’(라는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기회가 있다면 지면 관계상 추후의 글에서 밝히도록 하겠다)로 한 곳에 묶여 설명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문화콘텐츠에 열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콘텐츠는 항상 트랜드에 민감하다. 그러므로 대중의 요구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문화콘텐츠는 자기 존재와 자기의 ‘말’을 상실한 불안한 세대의 유일한 이해이자 소통의 보루이다. 그러므로 ‘지금-여기’ 불어닥치는 재개봉의 열풍과 K-POP에 번지는 세기말 리메이크의 현상은 우리가 모두 거쳐왔던 시기이자 겪어봤던 ‘익숙한 불안’에 대한 간절함이 빚어낸 퇴락의 현전화일지도 모르겠다.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지만,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세대, 이 ‘존재’들이 허무주의에 빠져 이미 겪은 불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허무, 즉 니힐리즘은 이미 전 세계에 걸쳐 만연되어 있으므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더 무르익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의 허무는 개개인의 허무다. 그러나 니체의 니힐리즘은 결이 다르다. 니체의 허무는 세대가 향유하는 허무다. 니체는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기준에서 그저 일상적 욕구를 충족하며 기계처럼 사는 현대인은 그 자체로 기력을 탈진해 무력감에 지배당한 허무주의자이다. 또한 그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며, 그러나 인간이 나약하므로 그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숭배할 우상을 찾는다고 주장했다.

 

뉴진스 '디토(Ditto)' 뮤직비디오 사이드A (사진 출처: ADOR, 뮤직비디오 갈무리)
뉴진스 '디토(Ditto)' 뮤직비디오 사이드A (사진 출처: ADOR, 뮤직비디오 갈무리)

뉴진스의 ‘디토(Ditto)’에서 엿본 허무

그러한 맥락에서 지난해 12월 19일 발표된 걸그룹 뉴진스의 싱글 ‘디토(ditto)’에 대한 문화계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불과 여름까지만 해도 뉴진스는 아트디렉터 민희진이 설립한 기획사에서 팬데믹 이후 시기 좋게 데뷔한 까닭에 여러 의미로 처음부터 주목받은 ‘운’ 좋은 신인이었다. 기획사 공식으로 ‘디토(ditto)’는 그룹 ‘뉴진스’가 자신들의 팬덤인 ‘바니스’에게 헌정하는 팬 송이다. 유튜브에 공개된 두 편의 뮤직비디오 또한 팬과 아이돌의 관계를 90년대의 교정과 사춘기 학창 시절에 비추어 화면으로 재현해 냈다.

사이드 에이(A)에 해당하는 뮤직비디오는 성인 여성 ‘반희수’가 먼지 쌓인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넣으면서 시작된다. 비디오테이프에선 아직 어린 ‘반희수’가 손에 깁스하고서도 캠코더로 촬영했던 뉴진스의 일상, 즉 90년대의 뉴진스가 재생된다. ‘반희수’는 자신의 내면적 불안과 외면의 상처를 뉴진스 멤버들에게 치유 받기도 하고, 뉴진스가 힘들어할 땐 함께 의지가 되어주기도 한다. 두 번째 뮤직비디오인 사이드 비(B)에서는 성인 여성 ‘반희수’가 캠코더를 파괴하는 장면이 클로즈업된다. 성인 여성 반희수는 더 이상 뉴진스를 실제로 쫓지는 않지만, 녹화된 비디오 플레이어 속에서 뉴진스는 90년대 착용했던 복장으로, 서로가 친구이자 의지였던 그 시절처럼 나타나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다. 그때의 추억이 무의미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줬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디토(ditto)’라는 단어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지만, 뉴진스가 의도한 뜻은 ‘나도 그래’, ‘여전히 나도 사랑해’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팬덤을 위한 팬 송이었지만 팬뿐만 아니라 90년대를 지나쳐 온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지금-여기, 허무주의에 빠진 밀레니얼 세대가 가장 빛났던 시절, 누구나 가지고 있던 학창 시절을 영리하게 건드렸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순식간에 다양한 성별과 세대를 톺아보며 수많은 밈 콘텐츠가 생산되었으며, 국내·외 음악 차트의 1위를 모조리 석권한 것에서 나아가, 지난 12월 31일에는 세계 최대 음악 스트리밍 업체 스포티파이가 발표한 ‘주간 톱 아티스트’ 랭킹에서 2016년 이후 데뷔한 K-POP 그룹 중 유일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허무가 만연한 지금-여기, 세기말을 껴안고 새로운 우상이 나타났다. 밀레니얼 세대는 불안에서 나아가 허무에 잠식되어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우리가 말하고 싶던 것,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던 것,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가 주장했던 ‘힘에의 의지’를 ‘디토(ditto)’가 대신 말해주고 있으므로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은 안도해도 괜찮다. 더 이상 '함께'가 아닐 때, 이유가 무엇이었건 그 시간에서 떠나왔을 때, 비로소 내가 혼자라는 것을 인지할 때, 그러므로 세계가 붕괴하고 그 순간을 이겨낼 때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성장한다는 메시지를 말이다.

과연 괜찮을까. 허무하다.

 

 

글·이지혜

문화평론가. 제16회 <쿨투라>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으로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문화현상과 NFT를 연구하고 있다. 


참고자료

박인정, 『하이데거의 불안 개념(Heidegger᾽s Concept of Anxiety)』,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9.

이은비,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 나타난 고통 개념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미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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