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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파이크 리, <25시>로 한계를 벗어나다.
[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파이크 리, <25시>로 한계를 벗어나다.
  • 김채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3.04.10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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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 웰즈(Orson Wells)            스파이크 리(Spike Lee)
오손 웰즈(Orson Wells)(왼)
스파이크 리(Spike Lee)(오)

 

1. 스파이크 리, 오손 웰즈와 비견되다.

《ThePlaylist》와 《Mediaversity》 등 주로 온라인 영상 콘텐츠 잡지 등에 기고하며 이름을 알린 로버트 다니엘스(Robert Daniels)는 스파이크 리(Spike Lee)를 오손 웰즈(Orson Welles)에 비견한다. 다니엘스는 자신의 ‘엄청난 발언’이 불러올 파장을 대비라도 하듯 조목조목 근거를 든다. 그가 웰즈와 리를 유비관계에 놓는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 모두 메이저 제작 시스템에 대해 매우 독립적이란 사실에 기인한다. 웰즈는 리와 달리 처음부터 독립 노선을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화 인생을 반추해보면 이 발언은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에 대해 독립적인 감독이 이 두 사람뿐이겠는가? 뉴욕파(New York School)에 속한 대부분의 감독들은 독립적이며 선댄스(Sundance Film Festival) 출신들 역시 독립적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스는 이것 말고 또 다른 이유를 말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독자들의 추궁을 예상하듯 그는 둘 다 할리우드 작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고전적 3막 구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과 독특한 몽타주 방식 그리고 자신만의 영화적 트레이드 마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연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웰즈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그가 <시민 케인 Citizen Kane>(1941)에서 선보인 공간 몽타주(spacial montage)와 딥포커스(deep focus)일 것이다. 내러티브의 부드러운 연결을 목적으로 하든 아니면 상이한 두 쇼트의 충돌로 파토스 생산을 목적으로 하든, 웰즈 이전의 몽타주는 모두 시간에 근간을 둔(time-based), 이른바 시간의 몽타주였다. 하지만 전경, 중경, 후경의 동시적 배치를 통해 쇼트 내 미장아빔 효과를 창출하고 시간의 동시적 공존을 견인한 웰즈의 획기적인 미학적 장치는 지금까지도 영화 미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의 첫 번째 연구 대상 목록을 차지할 정도로 드높은 위상을 지닌다.

 

스파이크 리의 ‘이중 달리 쇼트’- 허공위에 인물이 떠 있는 듯하다
허공 위에 인물이 떠 있는 듯한, 스파이크 리의 이중 달리 쇼트

스파이크 리 역시 분산적 에피소드와 이중 달리(double dolly)라는 테크닉을 구사하면서 스스로를 다른 감독들과 차별화한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분산적 에피소드는 단일 사건보다는 게토(Getto)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풍경들을 화면 안에 포섭하기 위한 장치이며, 이중 달리는 인물과 카메라를 모두 달리 위에 올려놓으면서 트래킹 아웃(tracking out)을 실행하는 기법이다. 이때 운동성 안에 인물이 고립되면서 기묘한 파편화 효과가 발생하는데, 이러한 전략을 통해 리는 ‘흑인들의 소외와 고립’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리의 영화는 미학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보다 두 사람을 가장 강력하게 이어주는 끈은 자신들의 예술적 신념을 위해 주변과의 불화마저도 개의치 않는 ‘투사’의 심장을 가졌다는 점이다.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배우와 감독을 갖가지 이유로 비난하던 웰즈처럼 리 역시 자신과 노선을 달리하는 여타 감독들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결정에도 심심찮게 독설을 퍼붓는다.

웰즈와 리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를 논하는 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다니엘스의 주장을 인용한 이유는 스파이크 리가 가진 미국 영화계의 위상 때문이다. 특히 ‘블랙 시네마’에서 리의 영향력은 오히려 다니엘스의 유비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높다. 온갖 B급 영화에 출연하면서 힘들게 제작비를 모아 영화를 만들었던 웰즈와 달리 스파이크 리는 꽤 안정적인 영화적 행보를 이어왔다. 재즈 뮤지션이던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리, 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외할머니, 지미 셀턴(Zimmie Shelton)이었다.

 

'국가의 탄생'                    '대답'
'국가의 탄생'(왼)
'대답'(오)

그녀의 권유로 리는 흑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학풍으로 유명한 모어 하우스(More House) 대학에 입학한다. 리는 이곳을 졸업한 후에 뉴욕대학원 영화과에 입학했고 몇몇 단편 영화, 특히 재학시절 제작한 <대답 The Answer>(1980)을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분짜리 흑백영화, <대답>은 그리피스(D. W. Griffith)의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1915)이 흑인 작가에게 의뢰해서 만든 작품이라는 매우 파격적인 주장을 담았고, 이 때문에 리는 퇴학 일보직전까지 몰렸으나 다른 학생들의 탄원서로 가까스로 구제된다. 리는 셀턴의 보조로 졸업 작품, <조의 베드-스터이가(街)의 이발소: 우리는 머리를 자른다 Joe's Bed-Stuy Barbershop: We Cut Heads>(1983)를 내놓으면서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원을 졸업한 리가 장편 데뷔작, <그녀는 그것을 가져야 해 She's Gotta Have It>(1986)의 펀딩 문제로 고민할 때 도와준 사람도 역시 셀턴이었다. 그녀의 격려와 지지로 영화적 입지를 다진 리는 17만 불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데뷔작으로 700만 불의 수익을 올리면서 단번에 뉴욕파의 떠오르는 기대주로 부각된다. 그는 그 여세를 몰아 1989년 지금까지도 자신의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똑바로 살아라 Do The Right Thing>를 선보이며,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이후 침잠했던 블랙 시네마의 부활을 전 세계에 알렸다.

 

'똑바로 살아라' 중에서
영화 <똑바로 살아라> 중에서

2주 만에 완성된 대본으로 만들어진 <똑바로 살아라>는 당시까지 제작된 리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청년기 이후, 삶의 모태가 되었던 브루클린의 흑인 게토, 베드-스터이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된 작품이다. 인종간의 화해를 암시하는 유연한 엔딩을 원했던 유니버설의 권유를 물리치고 리는 두 주인공(흑인 무키와 이태리 피자가게 주인 살)이 서로 주고받는 욕설과 더불어 사뮤엘 잭슨(Samuel L. Jackson)의 내레이션(DJ의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맨션)으로 본편을 끝맺음 한다. 이후 크레딧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폭력은 절대 안 된다.”는 어록과 말콤 엑스(Malcolm X)의 “폭력이 정당방위일 때 우리는 이를 지성이라 부른다.”는 어록을 차례로 보여준 다음, 두 사람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을 배치하며 마무리한다. 리는 이 자극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영화의 개봉을 미루고 칸 영화제에 출품하는 승부수를 띄운다.

주지하다시피 그해에는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Sex, Lies, and Videotape>(1989)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이에 격분한 리는 당시 영화제 심사위원장이었던 벤더스(Wim Wenders)를 향해 “그는 엉덩이를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 옷장 안에는 빔 벤더스 이름이 적힌 야구 방망이가 있다.”라고 일갈하면서 영화제를 초토화시켰다.

 

'정글 피버' 포스터                        '모 베터 블루스' 포스터
<정글 피버> 포스터(왼)
<모 베터 블루스> 포스터(오)

<똑바로 살아라>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포부를 알린 리는 <모 베터 블루스 Mo’ Better Blues>(1990)와 <정글 피버 Jungle Fever>(1991) 그리고 몇 편의 뮤직비디오 제작을 통해 숨을 가다듬은 후 1992년 <말콤 엑스 Malcolm X>를 통해 날선 블랙 시네마의 정신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뒤 10년 동안 스파이크 리는 갈지자 횡보를 보이면서 시네필들의 관심 밖으로 점점 사라져 갔다. 이 시기에 리는 <그녀는 그것을 가져야 해>의 주제와 공명하는 <걸 식스 Girl 6>(1996)로 코미디 장르에서의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 별다른 성과 없이 주로 TV 시리즈와 뮤직 비디오를 오가면서 세월을 소비했다. 오랜 기간 웅크리고 있던 그에게 9·11 테러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극의 현장 ‘그라운드 제로’를 피처 필름 사상 처음으로 화면에 배치하면서 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영화 세계로 눈을 돌린다.

 

2. 불가피했던 <25시>의 변화

스파이크 리가 밀레니엄 들어서 선보인, 실화 기반의 <뱀부즐드 Bamboozled>(2000)는 제목의 뜻 그대로 ‘매우 당혹스러운’ 작품이다. 남북전쟁 전후에 유행했던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에서 착안한 이 작품은 리의 ‘바닥’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얼굴을 검게 칠한 백인이 스테레오 타입의 흑인 역할로 등장하는 철지난 버라이어티 쇼는 인종 차별을 조장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1910년대에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사라졌고 아마추어들이 간간히 올리던 무대마저 1950년이 되면 완전히 자취를 감춘, 시대착오적인 장르였다. <뱀부즐드>의 주인공 피에르(Damon Wayans)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코스비 쇼>와 같은 작품을 준비하다가 이 기획이 거절당하자, 외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진짜 흑인이 등장하는 퇴행적인 민스트럴 쇼를 기획한다. ‘흑인 작가의 고뇌’라는 아이디어는 학창시절 제작했던 <대답>에서 이미 선보인 것이다. 영화 주제인, 자기 상처를 팔아서 성공을 꿈꾸는 흑인, 그리고 신산한 꿈의 뒤편을 장식하는 씁쓸한 결말은 주목받을 만 했지만 리의 ‘풍자’는 관객들에게 소구되지 못했다. 그의 예술적 의도는 사라지고 대신 DV 15대로 찍은 역동적이지만 성긴 화면과 흑인 동료 아티스들(프린스, 스티비 원더, 앤지 스톤 등)의 사운드 트랙만 관객의 뇌리에 남았다.

 

'뱀브즐드' 포스터                          '25시' 포스터
<뱀부즐드> 포스터(왼)
<25시> 포스터(오)

이 영화 이후 리는 몇 편의 뮤직비디오와 TV 영화 그리고 기획 옴니버스 시리즈 <텐 미니츠 Ten Minutes Older: The Trumpet>의 세그먼트 하나를 맡았다. 그 사이에 9·11이 있었고 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변화를 선택해야만 했다. 절치부심 끝에 내놓은 <25시 25th hour>(2002)는 스파이크 리가 초기에 선보였던 분산형 드라마투르기의 정점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여전히 3막 구조 대신 에피소드를 나열했지만 이 작품에서 선보인 분산 전략은 파편들이 하나의 주제로 응축되기보다는 각기 상이한 주장을 펼치는데 이용된다. 즉 전작(前作)들에서는 에피소드들이 처음부터 하나의 주제로 흘러들어가는 형태였다면 여기에서는 에피소드들이 각각 특정한 역할을 하면서 분기하다가 대단원에 이르면 그것이 다시 하나로 결속되는 좀 더 교묘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본격적으로 드라마 구조를 살펴보자.

 

'25시'의 세 친구, 프랭크, 몬티, 제이콥
<25시>의 세 친구, 프랭크, 몬티, 제이콥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총 3명, 주인공인 마약상 몬티(에드워드 노턴), 증권가에서 성공한 프랭크(베리 페퍼) 그리고 고등학교 선생인 제이콥(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은 유년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다. 이 영화의 외견상 큰 특징은 두드러진 ‘사건’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몬티는 이미 영화의 디제시스가 펼쳐지기 이전에 마약 거래 혐의로 실형이 언도되어, 며칠 후면 그는 교도소에 수감될 처지에 놓여있다. 영화는 사건의 공백을 며칠의 자유 시간이 주어진 몬티의 행방을 기록하는 것으로 채우며 분기된 에피소드들을 수렴시킨다.

 

* 몬티 – 세상 모든 것에 분노를 품은 자

 

'25시'의 주인공 몬티
<25시>의 주인공 몬티

스크린이 열리면 구타 소리와 신음 소리가 오프 사운드로 들린다. 운전하던 몬티는 길에서 누군가가 버린 죽어가는 개를 발견한다. 친구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왠지 마음이 동한 몬티는 개를 치료해준다. 이 간단한 오프닝이 끝나면 멀쩡한 개와 함께 맨해튼 바닷가의 벤치에 앉아 있는 몬티가 본편의 첫 쇼트를 장식한다. 잠시 후에 마약 중독자가 와서 그에게 거래를 청하지만 몬티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이윽고 그는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로 들어간다. 학교의 기념관에 걸린 농구부 사진에서 자신을 찾아보는 몬티, 그는 며칠 남지 않은 자유 시간을 마치 시한부 환자처럼 인생을 돌아보는데 쓴다. 학교에는 친구 제이콥이 모교의 문학 선생으로 근무하고 있다. 문밖에서 진행되는 수업을 듣다가 몬티는 이내 교실로 들어가 제이콥과 담소를 나눈다. 몬티를 통해 관객에게 제이콥을 소개한 리는 이제 동거중인 애인 내츄렐(로사리오 도슨)을 화면에 담는다.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떠올리며 불안해하는 몬티를 그녀는 포근히 감싸준다. 그러나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길 틈도 없이 마약 단속반 경찰이 수색영장을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모종의 투서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손쉽게 몬티가 숨겨놓았던 다량의 마약과 거래 대금을 찾아낸다. 이로써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그는 형기가 늘어날 처지에 놓인다. 아버지와 마지막 저녁 식사를 위해 그가 일하는 가게로 찾아간 몬티, 아버지는 식사를 하면서 자신 때문에 아들이 잘못되었다고 자책한다. 아버지의 넋두리에 눈물을 참을 수 없던 몬티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화장실로 간다. 이 화장실 벽에는 거울이 붙어 있고 그 위에는 ‘fuck you’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이곳은 스파이크 리가 벼르고 벼른 회심의 장소이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유명한 그림 <금지된 복제 La réproduction interdite>를 오마주한 듯한 포즈로 몬티를 배치한 스파이크 리는 데뷔 초부터 자신의 캐릭터들에게 갈고 닦도록 요구했던 그 비기(祕技)를 백인인, 몬티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낸다. “이 도시 전체 다 엿 먹어라.”로 시작된 몬티의 분노는 시크교도와 파키스탄인부터 시작해서, 러시아인, 이탈리아인, 한국인, 유태인, 남아공인, 도미니카인, 푸에르토리코인, 빈 라덴, 알카에다, 엔론(Enron) 사태의 책임자들, 게이, 성직자 심지어 사랑하는 아버지와 여자 친구를 향하여 가리지 않고 폭발한다.

 

'25시' 중 한 장면                       마그리트 '금지된 복제'
<25시> 중 한 장면(왼)
마그리트 '금지된 복제'(오)

“값을 부풀린 과일을 피마리드처럼 쌓아놓고 파는 한국 놈들, 십년씩이나 이 나라에 살아도 영어 하나 제대로 못하는 놈들. 카페에 앉아서 홍차나 마시면서 음모나 꾸미는 러시아 놈들, 당장 네 놈들 나라로 돌아가라. 검은 모자 쓰고 47번가를 어슬렁거리면서 남아공에서 온 다이아몬드를 파는 유태인 놈들 엿 먹어라. 빈민가 흑인들아, 엿이나 먹어라. 공은 절대 패스 안하고 수비도 하기 싫어하지. 노예제도는 137년 전에 폐지됐어, 발전이라곤 모르는 거냐? 썩은 경찰들아, 엿 먹어라. 그 잘난 공이쇠가 달린 41구경 권총을 차고 제복 뒤에 숨어서 침묵하는 놈들. 내츄렐도 엿 먹어, 철썩 같이 믿었더니 뒤에서 뒤통수치는 년. 매일같이 죽어라 슬퍼하고, 바 뒤에 서서 소다수나 홀짝거리며 소방관들한테 술이나 파는 아버지도 재수 없어, 양키즈를 응원하는 인간들, 이곳에 사는 모든 개자식들도 마찬가지야.”

 

몬티가 경멸하는 이민자들
몬티가 경멸하는 이민자들

몬티는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큰 탈 없이 자랐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 농구팀에 선발되어 장학금까지 받고 다니던 인재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약 거래에 손을 대면서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곧 있으면 영어의 몸이 될 참담한 처지에 놓여 있다. 하릴없는 분노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몬티는 주변을 이처럼 모조리 타자화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렇지만 그가 행한 주변인들의 타자화는 자신이 당해온 방식을 그대로 외부로 투사한 것이다. 가톨릭 행사 중 하나인 성 패트릭 데이(St Patrick's day/성촉절)를 마치 국경일처럼 생각하는 아이리시 출신들은 개신교를 믿는 대다수의 유럽계 이민자들과는 처음부터 차별화 된 민족이었다. 유럽에서 그들은 영국에 의해 그리고 희망을 찾아 도착한 미국에서는 일찍 건너온 다른 유럽인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내재화된 푸대접에 이골이 난 몬티, 자신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분노는 참으로 신랄하다.

 

“에르메스 스카프를 걸치고 발두치 고급 식료품점에서 50달러짜리 엉겅퀴를 사는 년들,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온갖 성형수술을 해대면서 팽팽하고 번지르르한 꼴이라니 그런다고 누가 넘어갈 줄 알아?”
 

몬티와 같은 아이리시를 경멸했던 부유층
몬티와 같은 아이리시를 경멸했던 부유층

론 하워드(Ron Howard)의 <분노의 역류 Backdraft)>(1991)에서 메카프리 형제도 그랬지만 <25시>에서도 몬티의 아버지는 아이리시라는 혈통 때문에 가장 위험한 직업 중에 하나인 소방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직업은 아버지의 자긍심이지만 동시에 열패감의 상징이기도 하다. 멸시와 자긍심의 양 극단을 오가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또 다른 상위 백인 계층들로부터의 받은 차별을 하나로 뭉쳐, 몬티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되돌려주는 핏빛 백일몽을 꾼다. <똑바로 살아라> 이후, 리의 영화 속 인물들은 흑인으로서 당한 차별과 소외를 폭력과 선동적인 언어로 되받아치는 캐릭터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건국 이래 최초의 미국 본토 공격이라 할 수 있는 9·11로 인해 이 분노가 ‘모든 사람들에 의해’, ‘모든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스파이크 리는 몬티를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바야흐로 진정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다다른 미국. 그렇다면 몬티는 이 지옥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타인을 향한 저주의 끄트머리에는 일말의 자각이 들어있다.

 

“아니지 엿 같은 놈은 바로 너야, 몽고메리! 일은 혼자 저질러 놓고, 전부 남 탓만 하고 있잖아. 이 개자식아!”

 

친구 프랭크가 말한 대로 그는 도망치거나 자살하거나 아니면 교도소에서 이대로 썩든지 해야 한다. 이 세 가지 방법 모두 친구 프랭크의 표현대로라면 ‘엿 같다!’ 하지만 관객들은 스파이크 리가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딜레마에 빠진 몬티를 구원하리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무슨 수로? 영화는 이 불가능할 것 같은 미션을 엔진 삼아 벼랑 끝으로 내달린다.

 

* 프랭크 – 미국을 움직이는 힘에 대한 자기반영 1

 

신자유주의의 상징, 프랭크
신자유주의의 상징, 프랭크

등장인물 중 가장 시니컬한 캐릭터인 프랭크는 스스로 상위 99퍼센트에 해당하는 인간이라고 떠벌린다. 그는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다. 위기일수록 더욱 더 대담한 베팅을 하는 그에게 남의 불행은 반대로 행복이 된다. 그는 미국의 금융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월 스트리트가 키워낸 괴물이다. 프랭크는 냉철한 판단력과 이성으로 사태의 핵심을 꿰뚫는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돈의 흐름을 알게 되었고 사람들이 처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하지만 그뿐. 그는 친구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수 없는 신자유주의적 기계 인간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을 수치로 판단하는 그에게 ‘입 냄새 나는 뚱보’ 제이콥은 상위 62퍼센트 인간이며 곧 수감될 몬티는 0퍼센트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친구와 만났던 30년 가까운 세월의 무게 때문에 몬티의 마지막 밤을 즐거운 파티로 만들어주려 한다. 그의 행동은 우정에서 샘솟은 것이 아닌 정치적인 행동처럼 보인다. 자신의 지위와 돈을 이용해 친구들을 클럽에 특별 손님으로 들여보내고 그 동안 번 돈으로 맨해튼의 가장 비싼 고층 아파트에 입주했지만 그에게 인간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프랭크를 몬티는 에미넴(Eminem)에 빙의한 듯 다음의 일갈로 한방 먹인다.

 

“월 스트리트 브로커들아, 엿 먹어라.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놈들. 마이클 더글라스가 연기한 고든 개코가 되고 싶어 하면서 성실한 사람들 등쳐먹을 궁리만 하는 놈들. 엔론사 같은 쓰레기들은 평생 교도소에 보내야 돼. 부시와 체니가 정말로 그런 엿 같은 분식회계를 몰랐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영화 <월 스트리트 Wall Street>(1987)의 히어로 고든 개코, 그의 도플갱어인 프랭크, 그런 그가 월 스트리트의 상징이었던 그라운드 제로를 바라본다.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커튼만 열면 비극의 현장이 곧바로 내다보인다. 아직까지 그라운드 제로는 폭발과 붕괴의 잔해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노동자들은 이 잔해를 부지런히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난다. 숫자 놀음으로 번 돈, 각국의 투기 자본을 끌어들여 이룩한 부, 자신의 객관적 상관물이자 금융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영도(zero degree)가 되어버린 폐허를 보면서 그는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까? 리가 창조한 이 의미심장한 캐릭터의 진짜 주인들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맞이하는 이 ‘숭고’의 사태 앞에서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것은 더욱 드세진 머니 게임일까? 아니면 철저한 회개일까?

 

* 제이콥 – 미국을 움직이는 힘에 대한 자기반영2
 

타락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상징, 제이콥
타락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상징, 제이콥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내린 최초의 북아메리카 이민자들 중 서른다섯 명이 청교도였다. ‘Puritan’, 단어 뜻 그대로 청빈한 생활과 더불어 금욕주의를 실천하던 그들이 일군 국가가 바로 오늘날 미국이다. <25시>의 세 번째 등장인물, 제이콥은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이며 일견, 이 퓨리턴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한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제이콥은 그것을 수치스러워한다. 그의 수치심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지점이다. 그는 왜 수치스러워하는가? 제이콥이 자신이 일군 것이 아닌 부모의 재산으로 인해 안락한 생활을 유지한다는 사실 때문에 수치스러워한다면 그는 미국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어쩌면 퓨리턴의 임무대로 이 세상을 정화(purify)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물론 이런 가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사방에 분노를 흩뿌려놓고 정화수 같은 한 명의 캐릭터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의도가 그렇다고 할지라도 리가 만든 제이콥이란 인물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는 선생의 사도(師道)에 매진하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돌한 여학생에게 끌린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른다. 사람 좋은 양, 몬티의 개를 입양하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웃자란 메리를 차단하지만 그는 매일 자신의 욕망과 악전고투하고 있다. 그러므로 프랭크가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주의를 상징한다면, 제이콥은 무너져 내린 미국의 건국 윤리, 이제는 타락해버린 프로테스탄티즘을 상징한다. 맨다리를 보기 않기 위해 피아노에 양말을 신겼던 오래된 퓨리턴의 신화가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지자, 수치심에 풀죽었던 제이콥은 자기 무릎에 앉은 제자를 방관한다. 이 제자는 학점을 올려 받기 위해 제이콥을 유혹하는 중이다. 퓨리턴의 동의어인 ‘선생’ 제이콥의 수치심은 지금 당장 발동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수치심은 남들이 볼지 모른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발동한다. 그래서 그는 메리를 따라 화장실로 간다. 그리고 남들이 보지 않는 그곳에서 제이콥은 어린 제자에게 키스를 하고 만다. 이 장면 바로 직전에 제이콥은 재수 없는 친구 프랭크와 하찮은 대사를 주고받는다.

 

프랭크 :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에서 남자가 절대 물어보면 안 되는 게 뭔지 알아, 제이콥?

제이콥 : 뭐?

프랭크 : “이거, 아동용 사이즈로 나오나요?”

 

제자, 메리의 도발에 당황하는 제이콥
제자, 메리의 도발에 당황하는 제이콥

물론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프랭크는 오랜 친구답게 제이콥의 심리를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고 있다. 나이 어린 여자들에게 끌려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제이콥이 진정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것은 부모 재산으로 영위하는 안락한 삶이 아니라 바로 타락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여야 했다. “예전에는 이 정신이 미국을 지탱했지만 지금은 허울만 남은 ‘윤리’ 대신 무엇이 미국을 존재하게 하는가?”라고 스파이크 리는 제이콥을 옹립해서 관객에게 묻는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제이콥이 부모덕에 유지한 안락한 삶, 그로 인해 발생한 수치심은 더 큰 수치심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던 셈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사실은, 만인에게 촉발되어 만인으로 향하는 전 방위적 분노와 혐오를 가리기 위한 위장막이었다는 사실을 스파이크 리는 자신이 만든 역설적인 인물을 통해 관객과 더불어 깨닫는 중이지 않을까.

 

3. 그런 플래시 포워드 또 없습니다.

마지막 파티가 끝난 아침, 프랭크와 제이콥 그리고 강아지 도일과 함께 맨해튼의 바닷가에 도착한 몬티 일행, 제이콥에게 개를 인계한 몬티는 갑자기 프랭크에게 반쯤 죽을 정도로 때려달라고 부탁한다. 흉한 얼굴로 교도소에 들어가야 죄수들이 겁먹는다면서 구타를 애원하는 몬티, 프랭크는 처음에 이를 거절한다. 하지만 자신이 사라지면 내츄렐을 차지할 속셈이지 않았느냐고 도발하는 몬티의 억지에 자제력을 잃은 그는 울부짖으면서 친구를 때린다. 한바탕 드잡이가 끝나고 쓰러져 있는 몬티를 제이콥이 부축해서 기둥에 앉힌다. 카메라는 널찍이 떨어져 세 친구를 한 쇼트에 담는다. 오고가는 대화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그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넝마가 된 옷을 추슬러 입고 터덜터덜 공원을 빠져나오는 몬티, 여자 친구 내츄렐은 집근처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엉망이 된 몬티를 보자마자 걱정되어 달려온다. 간단한 치료가 끝나고 내츄렐은 상처를 달랠 얼음주머니를 몬티에게 건네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버리고 아버지 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몬티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단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응시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 자신이 그렇게도 경멸했던, 이태리인, 유태인, 한국인, 흑인들이 미소 지으며 그를 배웅한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차는 뉴욕 외곽으로 빠져나온다.

 

아버지의 은밀한 제안
아버지의 은밀한 제안

두 사람이 탄, 차 안에 아버지의 내레이션이 조용히 깔린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은밀한 제안을 한다. 지금부터 다시는 연락을 해서도, 편지를 써서도 안 된다고 경고하고 엄마를 포함한 우리 세 사람은 천국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가명으로 직업을 가질 것을 당부하고 나서 아버지는 몬티를 서부의 어느 마을에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다시 차를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간다. 화면 속에서는 아버지의 당부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내츄렐에게는 2~3년이 지난 후에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하고 화면은 몇 번의 점프 컷을 반복한 끝에 내츄렐과 몬티가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몬티는 내츄렐과 새해를 기념하고 임신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진다. 아버지의 눈물어린 충고가 계속될 즈음, 관객은 점점 당혹스러워진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장면은 몬티의 상상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말이 그대로 현실화된 플래시 포워드인가? 우리가 당혹해하든 말든 계속되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정은 이 플래시 포워드를 더 미궁 속으로 밀어 넣는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기묘한 플레시 포워드
꿈과 현실 사이에서, 기묘한 플래시 포워드

“아이의 이름은 제임스라고 짓고 세월이 지나 너희 엄마에게 갈 때쯤이면 아이에게 너의 인생에 대해서 말해주렴. 네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를 말해주렴. 그리고 새 인생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도 말해주렴. 모든 게 꿈일 수 있었다고 일어나지 않은 일일수도 있었다고 너희 자녀들에게 말해주렴.”

 

이 내레이션이 끝나면 아버지와 몬티를 실은 차는 다시 어디론가 달려가는 중이다. 그리고 영화는 몬티의 으깨진 얼굴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도대체 이 플래시 포워드의 정체는 무엇인가? 혹시 아버지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다시 일어설 미국을 상상한 것이 아닐까? 아버지는 자본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수치심의 윤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지금 여기를 벗어나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속에서 자손을 낳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상상의 공동체를 염원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파이크 리는 그다지 낙관주의자가 아닌 것 같다. 안소니 퀸(Anthony Quinn)의 명연기로 영화사에 기록된 앙리 베르누이(Henri Verneuil)의 또 다른 <25시 The 25th Hour>(1967)가 아무도 구원해줄 수 없는 최후의 시간, 곧 폐허가 된 유럽의 당대 시간을 의미한다면, 스파이크 리의 <25시>는 그 반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 시간은 아버지의 플래시 포워드 속에서만 작동하는 상상 속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크 리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역설적인 의미 부여를 잊지 않는다. 왜냐하면 플래시 포워드가 현재화되는 기적의 조건이 어쩌면 이미 마련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운 것은 영도(零度), 즉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 시작되기에...
 

프랭크의 고급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그라운드 제로
프랭크의 고급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그라운드 제로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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