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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극적인 노래와 지루한 몸짓 <애프터썬>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극적인 노래와 지루한 몸짓 <애프터썬>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4.10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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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영화

<애프터썬>이 지닌 영화적 전략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은 오프닝에서 캠코더 화면을 통해 보여주었던 상황을 다시 보여주는 중반부의 씬이다. 영화가 시작하며 보여주었던 캠코더의 열화 된 화면이 브라운관 TV의 굴곡진 모니터에 나타나고, 모니터 유리에는 캠코더가 촬영하고 있는 캘럼(폴 메스칼)의 모습이 반사되며, TV 뒤편에 놓인 거울에는 캠코더를 들고 있는 어린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손이 비추어 나타난다.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을 의도적으로 우회하고 나누어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묘사하려는 딸과 아버지의 관계를 은유하는 영화적 장치로 읽히기보다 영화가 관객에게 감각하게 하려는 형식적 효과로 더욱 크게 다가온다. 특히 이 쇼트에서 캘럼이 말하기 싫어하던 11살의 기억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말할 때도, 그것을 캠코더로 기록하지 않는다는 조건만이 바뀌었을 뿐, 선명하게 캘럼의 얼굴을 반사하던 거울을 아웃 포커스 시키고 꺼진 브라운관에 비친 흐릿한 이미지 속 그의 모습을 통해 발화한다.

이는 언급하고 싶지 않은 캘럼의 기억 혹은 어린 시절의 파편으로만 남은 소피의 기억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한 선택이지만 이 또한 인물의 감정과 인물간의 관계가 중심이 아니라 회상, 기억, 불분명한 이미지라는 형식과 구조의 감각이 앞서 있다. 다시 말해 <애프터썬>은 성인이 된 소피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의 영화이지만, 그 구조의 효과와 정서 외에 인물들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이상하게 회피하는 영화이다. 예컨대 관객은, 이 영화의 전제조건인, 소피가 아버지에 관해 회상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행위의 이유뿐 아니라 감정적 동기 또한 알 수 없다. 그저 이유 없이 주어진 회상이라는 장치가 던지는 향수 어린 정서와 아버지인 캘럼이 죽었는지, 이별하여 만날 수 없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럴 것이라고 짐작할 뿐인 부녀관계의 애틋한 감정만을 영화의 뼈대로 삼고 있다.

 

출처-네이버영화

영화의 이러한 앙상한 구조는 당연히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앙상하다는 것은 반대로 단순하지만 일관된 형식미를 통해 명확한 콘셉트와 의도를 전달하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피가 경험했지만 잊었거나 봤더라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회상으로 더듬어가며 떠올리거나 추측하고 기억을 재구성하는 콘셉트를 의미 있게 형식화한 장면은 앞서 언급했던 캘럼이 11살의 기억을 떠올리는 씬을 제외하면 전무하다. 대신 영화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모호한 것이 아니라 그저 텅 비어있는 이미지들의 시청각적 감각뿐이다. 휴양지의 나른한 풍경들, 여행지의 아늑한 정서, 그것을 독특하고 예쁘게 촬영한 일상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아무것도 아닌 지루한 이미지다.

물론 아무것도 아니라는 단언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밝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 건강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아이들, 청소년의 모습과 난간에 불안하게 올라가 있거나 어두운 공간에서 고개 숙인 캘럼의 모습을 대비시키거나, 어린 소피가 화장실에서 듣게 되는 여자 관광객들의 성적인 대화나, 남녀 청소년들의 연애를 바라보는 것, 게이 커플의 키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아이와 나누는 키스를 통해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버지와의 연결점을 거울처럼 마주하게 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캘럼과 소피가 Queen과 David Bowie의 'Under Pressure'를 배경음으로 춤을 추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비현실적 공간의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빛의 숨 막히는 점멸 안에서 망설이던 어린 소피가 춤을 추는 캘럼에게 다가가면 일종의 클럽과 같던 공간은 완전히 소피와 캘럼만이 존재하는 그녀의 기억 혹은 환상 속 공간으로 변화한다.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Under Pressure'의 가사 대로 아이면서 어른이기도 한 소피에게 비현실적인 기억의 공간이 주는 것은 “세상의 실체를 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이고, 캘럼에게는 “내일은 상황이 나아지길 기도하고, 사랑을 원하지만, 소용이 없다”라는 결말이며, 그런 캘럼을 바라보는 소피에게 이 기억이 “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게 하며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을 바꾸게 하지만, 결국 이 점멸하는 기억의 빛은 소피와 캘럼의 “마지막 춤”이 된다.

 

출처-네이버영화

이 클라이맥스 장면은 <애프터썬>이 모호하게 회피하고자 하는 태도와 달리 매우 극적이며 직접적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소피와 캘럼의 관계를 의미화하는 극적 동선 변화가, 매우 단순하고 식상하더라도, 존재한다. 덕분에 전에 없던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유일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이고 고전적인 방식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의 모호한 태도로 인해, 이 장면에서 거울처럼 마주하는 소피와 캘럼의 관계의 연결점인 ‘세상의 실체’나 나아질 길이 없는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증폭되어야 할 감정적 동요를 불가해한 죽음으로 결별하게 되는 아버지에 대한 보편적 향수로 불투명하게 축소하고 있다.

즉 <애프터썬>은 영화 속에서 어린 소피가 'Losing My Religion'을 부르며 “그건 그냥 꿈일 뿐”이라고 읊조리듯, 기억과 기록된 DV 이미지의 환영적 감각을 어느 정도는 구조적으로 구현하면서, 동시에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고전적인 이야기의 결말처럼 “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캘럼)을 보살피게 하며 스스로(소피)를 돌아보게 되는” 은유로 서로를 비추는 두 인물 관계의 극적 연결점으로 이끌려 한다. 그렇다면 회상이라는 콘셉트 안에서 사건과 기억의 실체를 회피하고 우회하면서도 극적인 감정과 공감을 이루려는 감독의 의도는 성공하였는가?

어느 쪽으로도 과장하지 않고 정확하게 답하면 실패하지는 않았지만 성공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버린(아마 자살했거나 최소한 현실에 없는) 아버지를 회상하며 그와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보는 작업에서 오는 향수와 슬픔은 충분히 느껴지지만, 밤의 끝자락에 있던 캘럼을 통해 어른 소피를 돌아보게 하는 구성은 성공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것과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스타이프의 노래를 사용한 것, 그리고 영화 속에 묘사한 캘럼의 모습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지만 확신할 수 없는 성 정체성의 모티브나, 캘럼의 경제적 어려움, 우울감,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는 그의 11살의 기억 같은 것들은 소피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로서 작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서 글에서 영화가 회상을 형식화하면서 기억을 불투명하게 묘사한다고 했던 것처럼 인물들의 관계 설정과 전사(前史) 역시 영화를 설계하는 지점에서 분명히 설정해놓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출처-네이버영화

<애프터썬>은 회상이라는 이야기의 구조와 시각적 형식을 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묘사하면서 결론에서는 극적인 결과를 얻으려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어느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극적이지 않은 것에서 극적인 결과를 만드는 것이 인물들 간의 관계와 감정의 축적과 긴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지도 대담하지도 않은 회상의 앙상한 구조와 클라이맥스 장면 연출만으로 얻으려 했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에서 계속 회피하며 애매하게 묘사되는 캘럼의 11살 시절 기억에 관한 것이나, 경제적 어려움, 소피의 성적 호기심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다 제거한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여행의 나른함 속 아이의 밝은 모습과 우울한 캘럼의 대비만으로도 회상의 구조를 경유해 클라이맥스의 감흥에 이르는데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전반부의 예쁘게 촬영된 여행지의 일상들이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아무것도 아닌 지루한 이미지라 말한 것이다.

결국 <애프터 썬>은 회상을 활용하는 태도와 단순한 콘셉트가 장점이자 단점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영화이다. 나에게는 단점이 더 크게 다가왔고 영화에서 그나마 흥미로웠거나 감정적 동요를 일으킨 순간은 중반부에 캘럼이 11살 시절 기억을 고백하는 장면과 클라이맥스의 ‘Under Pressure’ 씬 뿐일 정도로 나머지 부분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만장일치의 찬사를 받은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형식이나 내용 모두 더 과감하지 못했기에 아쉬운 영화라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더 과감하지 않았기에 만장일치를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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