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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Numbers (5) - 이황이 왕십리에 난을 들고 가 통곡한 이유
안치용의 Numbers (5) - 이황이 왕십리에 난을 들고 가 통곡한 이유
  • 안치용 l ESG 연구소장
  • 승인 2023.04.2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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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읽는 인문학]

두어 명에게 “5 하면 뭐가 떠오르냐”고 물었다. 또래라서 그랬는지 그들은 내 머리에 떠오른 목록의 상단에 있는 것을 말했다. 가장 먼저 말한 것은 독수리오형제. 1979년 국내에 첫 방영된 이래 여러 차례 전파를 타고 극장판까지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요즘 대학생에게 물으면 생소한 작품이지 싶다.

원래 1970년대 일본 후지TV에서 인기리에 방송된 프로그램이었다. 주인공이 5명이라 국내에 들여올 때 독수리오형제로 프로그램 이름을 바꿨는데, 원제는 <과학닌자대 갓챠맨(科学忍者隊ガッチャマン)>이다. ‘시노비(忍び)’라고도 하는 ‘닌자(忍者)’를 어린이물 제목에 반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심 끝에 ‘닌자’가 독수리로 변모한다. 

‘닌자’보다 독수리가 더 높이 날아오르기는 한다만 새 중에서 최상위 포식자인 독수리가 숨는 데도 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문구는, 중학교에 갓 입학한 사춘기 소년에게 감동을 줬다. 그 새는 독수리가 아니라 갈매기였다. 멀리 본다고 멍 때리다가 독수리 먹잇감이 된 것은 아닌지. 아무튼 독수리오형제가 지구를 지킨다.

 

<독수리오형제>

 

왕십리

‘5’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왕십리’였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알게 될 무렵 접한 김소월의 시. 꽤 오랫동안 암송했으나 지금은 몇 구절만 입안을 맴돈다.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라떼’의 유행가에 등장하듯 ‘커피’ 맛을 알기 전에 사춘기 소년은 비를 사랑했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커다란 창과 향 좋은 커피가 있는, 그런 아늑한 비가 아니라 퍼붓는 비를 그때는 좋아했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몇 시간이고 맹목으로 돌아다닌 그때의 그 비가 그립지 않다. 집 안의 사람에게 창밖에서 내리는 비는 내리지 않는 비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往十里) 건너가서 울어나 다오,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山)마루에 걸려서 운다.

 

그때 그 비를 철철 맞고 싸돌아다니지 않았다면 지금 머리숱이 더 많았을까. 아니면 그때 물을 많이 줘서 그나마 대머리 신세를 면했을까. 아 혹시 지금 부적절한 혐오 표현을 한 것은 아닌가. 벌새는 지구를 구하지는 못한다. 다행히 그래서 우는 건 아닐 테다. 저 새가 독수리라면 김소월은 시인이 아니다. 

‘왕십리’를 애송하던 무렵 함께 외운 시는 최치원의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몇 글자 안 되는 오언절구여서 아직 암송할 수 있다.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고국을 떠나 당나라에 머물던 최치원이 18~23세에 쓴 시라고 한다. 여기서 ‘삼경’은 자정 무렵을 뜻한다. 교과서에 수록된 시라 삼경이 언제인지를 묻는 시험문제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대충 다음과 같은 뜻이다.

 

가을바람에 오직 힘들여 읊고 있건만

세상에 알아주는 이 적네

창밖에 삼경의 비가 오는데

등불 앞에 만 리의 마음이여

 

꽤 좋은 평가를 받은 한시지만 현대인의 감각으론 평범한 내용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난 최치원이 지금 대학생 나이에 쓴 ‘만 리의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지기는 한다. 가을비는 흠뻑 맞으면 앓아눕는다. 작정하고 맞을 수 있는 비는 몰디브 같은 열대의 스콜이나 우리나라라면 여름비 정도다. 봄 햇볕과 가을 햇볕에 내보내는 사람이 다르다고 하는데, 봄비든 가을비든 그 속으로는 누구든 내보내면 곤란하다. 더구나 삼경의 비는 등불 앞에서 듣는 게 최선이다. 

교과서에 수록된 한시 중엔 정지상의 송인(送人)이 절창이다. 그래서 교과서에 실렸겠다. 같은 제목의 두 편 시 가운데 내가 아직 암송하고 있는 칠언절구가 아마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일 것이고, 나머지는 오언율시다. 율시는 8줄로 작성된 한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즉 “비 갠 긴 강둑에 풀빛 더욱 푸르다”는 ‘송인’의 첫 구절은 늘 이수복 시인의 ‘봄비’를 상기했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정지상의 ‘송인’과 이수복의 ‘봄비’를 비교하며 퇴고의 유래가 된 고사를 떠올리게 된다.

당나라 중기에 ‘가도’라는 시인이 어느 날 생각에 집중하며 길을 걷느라 어느 관리의 행차를 막아버렸다. 그 관리는 글을 좋아하는 ‘한유’라는 사람이었다. 가도가 생각에 빠져 한유와 부딪힌 이유는 시작(詩作) 때문이었다. 다음과 같은 오언절구 마지막 줄의 한 글자를 두고 이 글자를 쓸까, 저 글자를 쓸까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길복순>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누나”의 ‘두드릴 고(敲)’를 그대로 둘지 ‘밀 퇴(推)’로 바꿔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의 도입부에서 길복순 역의 전도연이 오다 신이치로 역의 황정민과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같이 피우면서 대화하는 장면처럼 한유와 가도는 ‘고(敲)’와 ‘퇴(推)’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한유의 제안은 무엇이었을까.

‘고(敲)’였다. 내 생각도 그러했다. 나에게 직관적으로 떠오른 건 소리였다. 스님이 달 아래서 문을 두드릴 때와 문을 밀 때의 소리가 판이하게 다가왔다. 그 문이 비밀번호를 눌러 전자음을 튕기며 들어가는, 지금 우리가 쓰는 흔한 형태의 철제문이 아닐 테고 그렇다면 그 문을 두드릴 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시의 정취를 훨씬 더 우려낸다는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두 사람처럼 깊이 고민할 마음이 없으니 그 밖의 추가적인 상상은 그들에게 맡긴다. 

재미 삼아 정지상의 ‘송인’과 이수복의 ‘봄비’ 중 어느 것이 ‘고(敲)’이고 어느 것이 ‘퇴(推)’인지를 생각한다.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에 쉽게 판단이 내려지지 않으나, ‘송인’을 퇴고하면 혹은 영감을 받아 활용하면 그 결과물이 ‘봄비’이지 싶다. 온몸으로 맞는 비와 창밖으로 바라보는 비 가운데 어느 것이 ‘고(敲)’이고 어느 것이 ‘퇴(推)’인지는, 일도양단할 수 없되 어림짐작할 수는 있다. 어쨌거나 문을 여는 격이니 ‘퇴(推)’가 온몸으로 맞는 비이고, 기다리는 격이니 ‘고(敲)’가 창밖으로 바라보는 비다. 현실과 비교해 시에서는 공간이 뒤바뀌긴 한다. 시에서 흔히 일어나는 치환이라고 우겨보자.

 

지천명

독수리오형제를 아는 나이면 나이를 ‘몇 학년 몇 반’으로 표현하기도 한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다). 독수리오형제를 모르는 사람에게 “몇 학년 몇 반이냐”고 물으면 대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을 것이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는 팔자소관이거나 하늘에 매인 바이겠지만 돌아보니 지금 내 나이를 기준으로 삶의 가장 큰 분절은 50세였다. 22년을 다닌 회사를 49살에 느닷없이 그만둔 까닭이 50세에도 회사 생활을 하는 게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100세를 넘긴 김형석 교수라면 다른 숫자를 말하려나.

공자는 인생의 특정한 나이에 이정표 격으로 의미를 부여해 단어로 제시한다. <논어> 위정편에 공자의 ‘나이’학(學)이 나온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뒀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알게 됐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고(六十而耳順), 

일흔이 돼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개인적으로 공자를 선호하지 않는 까닭에 공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만일 공자가 자신이 말한 그대로의 인물이었다면 그를 성인(聖人)이라 부르는 데 이견이 없다.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등 공자의 자기평가와 우리의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 내 또래 대학교수가 최근 사석에서 “요즘 책 읽는 재미를 붙였다”고 말했다. 무려 대학교수가! “공부하는 재미가 무엇인지 알겠다”라면서 “그동안 알지 못하고 가르친 것 같아 학생에게 미안하다”라고 했다. 나 또한 그에게 격하게 동의했다. 헛되이 보낸 시간을 공부하고 책 읽는 데 썼으면 더 나은 사람이 돼 있지 않았을까. 온몸으로 비 맞는 생활을 더 빨리 청산하고, 창밖으로 가끔 비를 바라보며 실내에서 하는 더 바람직한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모색했으면 더 나은 삶이 되지 않았을까.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에 도달한 걸 조금 민망해하면서 그와 나는 전적인 동감에 이르렀다. 

우리에게 이립은 “서른 살(또는 30대)이 됐는데 걸음이나 제대로 떼고 있느냐?” 혹은 “서른 살이 됐는데 홀로 서도록 노력해라”로 읽힌다. 불혹(不惑)은 영어식으로 말해 (Don’t로 시작하는) 부정 명령문으로, “마흔 살(또는 40대)이 되거든 유혹이 많으니 유혹에 흔들리지 마라”다. 요즘 ‘겨우’ 마흔 살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20대 초반 신부보다 40대 초반 신부가 더 많은 세태를 봐도 불혹이 어불성설이다. 매혹되지 않고 어떻게 결혼하나.

내가 스쳐 지나온 지천명은 솔직히 더 웃긴다. 천명을 알기는커녕 그 나이 되도록 제 삶을 제대로 꿰지 못한 채 허겁지겁 통과했다. 지천명(知天命)을 “(겨우) 쉰 살(또는 50대)에 천명(天命)을 안다고?” 혹은 “쉰 살이 됐으니 천명에도 관심을 기울여라”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플라톤이나 공자가 말한 50세와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50세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순(耳順)은 “예순 살(또는 60대)이 됐으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로 이해하는 게 더 온당하다. 60세 언저리 사람에게서 자주 본 표정은 ‘귀에 거슬리는데 참는다’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지만, 갈수록 듣기에 거슬리는 게 많은 모양이다. 입이 하나고 귀가 두 개인 이유를 뻔히 알면서 적게 듣고 많이 말한다. 더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란 말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망발이다. 

 

이황의 유언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 이황(李滉)은 1502년에 태어나 1571년에 숨졌다. 70년을 살고 간 그가 남긴 유언은 “매화에 물을 주라”다. 전후 배경을 모른 채 그의 유언을 들으면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다. 과장해 표현하면 일상과 우주를 버무린 장대한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황의 유난한 매화 사랑, 또 매화에 얽힌 관기 두향과 사랑 이야기가 양념으로 전해지면 그 큰 울림이 쪼그라든다. 특히 애틋한 사연의 주인공 두향이 유언의 관련자로 거론되는 순간 유언의 깊이는 증발하고 더없이 평범해지고 만다. 사랑이야 삶의 사건이 아닌가. 죽음의 문턱까지 지고 간 사랑이 어찌 가상치 않으랴. 하지만 삶은 삶에서 내려놓고 더 큰 깨달음을 남기고 가야 대유(大儒)가 아닐까.

이황과 두향의 사랑은 조선시대 유명한 사랑 이야기의 하나다. 두 번째 부인과 사별한 이황이 50세를 앞두고 단양군수로 부임해 만난 관기가 두향이었다. 두향은 시에 능했고 무엇보다 매화를 사랑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황이 임지를 떠나면서 1년을 채 못 채우고 끝났고 두향은 이황이 떠난 후 수절하다가 이황이 죽자 홀로 문상하고는 단양에 돌아와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략 그의 나이 40을 앞뒀을 때겠다. 두향의 정절을 두고 칭송이 자자하지만 일각에서는 조선조 가부장제 이념화의 희생양으로 보기도 한다.  

이황이 물을 주라고 유언을 남긴 매화는 두향이 준 것으로 전해진다. 나이 50에 얻은 유학자의 사랑이 연인의 부재 속에 임종까지 지속됐다. 다시 생각하니 범부와 다를 바가 없는 대유의 사랑에서 지극한 깨달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비범한 인물이 비범이 아닌 평범으로 삶을 마감하니 보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제대로 삶을 산 것이 아닌가. 끝까지 들고 있으려고 애쓰다가 떨어뜨려 깨어지는 게 삶이지 모자 벗듯 심상하게 스스로 내려놓는 게 삶은 아니지 않은가. 

끝까지 들고 있었던 게 매화이고 사랑이었으니, 삶의 마감과 유언치고는 진짜 대박이라고 해야겠다. 아마 이황은 온몸으로 맞는 비와 창밖으로 바라보는 비 가운데서 대체로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살았지만 진정으로 원한 것은 온몸으로 비를 맞는 것이 아니었을까. 비가 오면 하늘이 물을 주도록 그 난을 들고 문밖으로 걸어 나가지 않았을까. 그 걸음이 왕십리 곱창골목에 이르면 소주 한잔하고. 다음은 이황이 남긴 陶山月夜詠梅(도산월야영매)라는 한시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 불어와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뜰 안에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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