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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이리시 맥도나의 연극과 영화의 상호매체성: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of Ebbing, Missouri, 2017) 마틴 맥도나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이리시 맥도나의 연극과 영화의 상호매체성: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of Ebbing, Missouri, 2017) 마틴 맥도나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3.07.1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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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겸손은 힘들다’는 아일랜드 극작가이자 영화감독 마틴 맥도나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of Ebbing, Missouri, 2017)는 2018년 여름밤 취리히 호수 야외극장에서 영화감독 마틴 맥도나와의 첫 만남이라는 멋진 사건을 경험하게 했던 영화이다. 2017년 취리히 영화제 출전작이기도 했던 이 영화는 단편영화 <육연발 권총>(2006)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맥도나의 3번째 장편영화이며, 최근 국내에서 개봉한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 2022)의 전작이다. 맥도나는 아일랜드 이주노동자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했지만, 아일랜드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대 극작을 먼저 시작한 맥도나의 영화 작업은 당연 아일랜드 극작가로서 그의 연극과 긴밀한 상호매체성을 주요 특성으로 한 작품들로 평가될 여지가 다분하다.

맥도나는 코네마라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미스 리난』(1996), 『코네마라의 해골』 (1997), 『외로운 서부』(1997)와 아란 3부작의 첫 작품 『이니쉬만의 불구자』(1997)를 동시에 런던 무대에 올리면서 극작가로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후 두 번째 작품 『이니쉬모의 소위』(2000)를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필로우맨』(2003)을 영국 국립극장에서 초연하면서, 데뷔와 더불어 단 기간에 전작을 영국 주류 무대로 진출시킨 성공적인 극작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촌스러워야할 아일랜드 극작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아르마니 양복에 남부 런던 액센트를 쓰는 맥도나는 영국 주류 비평가들 뿐 아니라 대중들로부터도 부정적인 평판과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그는 “잘 났다면 그렇지 않은 척하지 말고 알리처럼 증명하면 된다.”고 ‘겸손은 힘들다’를 공언함으로써 악동 셀럽의 부정적 이미지를 자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이주 노동자의 후손이라는 그의 출신 배경과 악동 개성은 ‘맥도나 유파’라는 그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창조하여 대표적인 아일랜드 3세대 현대 극작가로서의 국제적인 평판과 입지를 굳히는데 한몫을 했다.

극작가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맥도나는 곧 영화로 진출하여 그의 첫 단편영화 <육연발 권총>으로 2006년 아카데미 단편영화상을 수상하면서 연극 무대와 영화 스크린을 오가며 연극과 영화의 상호매체성이 부각된 작품들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시키기에 이른다. 사실 그는 자신의 극작 동기가 데이비드 매밋의 극작품을 각색한 영화 <아메리칸 버팔로>(1996)에 매료되어서 영화계로 진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의 극작에 영향을 준 작가들은 극작가들이 아니라 <펄프 픽션>(1994)을 만든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영화감독으로 그 근원을 명시했다. 따라서 그의 극작은 시작부터 영화의 영향력이 지대했고, 영화 작업 또한 그의 극작품들과의 상호텍스트성과 상호매체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니셰린의 밴시>는 맥도나가 2000년대 초 썼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후일 다시 쓰겠다며 출판을 하지 않았던 아란 3부작의 세 번째 극작품 『이니시어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er)를 각색한 영화이다. 따라서 이 최근 영화는 그의 영화가 극작품들과의 상호텍스트성과 그의 연극성과의 밀접한 상호매체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입증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극작품과 영화 사이의 밀접한 상호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이니셰린의 밴시> 이전 영화들은 아일랜드 서부 골웨이 지역과 아란을 배경으로 한 초기작품들을 비롯한 그의 극작품들과의 상호텍스트성을 직접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아일랜드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192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언급한 이 영화의 아란 3부작의 3번째 극작품과의 연관성은 기존 영화들에 대해서도 다시 보기를 권유한다. 이에 수년전 어둠 속 취리히 호숫가에 세워진 대형 스크린 빌보드에서 보았던 <쓰리 빌보드>로 후진하여 돌아가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2. 아일랜드 작가의 미국 범죄 영화

 

이 영화 스토리의 영감은 1998년 미국 텍사스주 어느 소도시를 지나다 우연히 보게 된 빌보드에서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 메시지는 한 여자가 남편에게 살해되었는데도 경찰이 무능하여 제대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발하며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아마도 탄원자는 “분노하고, 괴롭고, 비통한” 피해자의 어머니일꺼라는 추측과 그 빌보드의 이미지가 그를 계속 괴롭혔다고 한다. 그러나 10년도 더 지나서야 그 어머니를 결코 물러설 줄 모르는 강한 여성으로 창조하여 이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강한 여자는 대본을 쓸 때부터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염두에 두었고, 냉혹한 무표정에 엄숙함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명연기를 펼친 밀드레드 역할로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밀드레드의 딸 19살 안젤라(캐쓰린 뉴톤)의 강간과 살해 사건이 이 영화의 주요 플롯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 소녀가 살해되기 전 성폭행을 당했을 뿐 아니라 산채로 불에 타죽은 끔찍한 치정범죄 사건은 스크린 상에 표출되지 않고 비가시적으로 이야기로만 전달되고 있다. 범죄 영화로서 이 영화는 희생자인 안젤라의 이미지를 전경화하여 강간 살해 사건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이 그 사건이 초래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를 주목한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대처 방식들이 촉발시킨 일련의 폭력들로 그 사회 이면에 내재된 도착적이고 잔인한 충동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 주력한다는 점에서 사건 해결 과정을 전개하는 범죄 영화와는 차별성이 분명하다.

 

이 영화는 2018년 주요 영화제 상들을 휩쓸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수상을 하는 등, 맥도나를 유명 감독의 반열에 올리는데 큰 공헌을 한 영화이다. 이러한 주목을 받게 된 많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의 주된 이유로 내러티브가 갖는 그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미투 운동과의 관련성, 또한 사회적 논란과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미국경찰의 야만적인 과잉진압과 인종차별의 이슈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영화제에서의 일관된 호평과는 달리, 개봉 즉시 시의성을 띈 논쟁적 사안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과 비평가들의 열띤 논란과 더불어 비판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가장 비판적인 지적은 아일랜드 작가로서 뉴스나 방문객으로 접했을 뿐인 미국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도 이해도 못한 맥도나가 그러한 이슈들을 다루기엔 역부족이라는 주장이다.

아이리쉬 맥도나의 미국 치정범죄 영화가 묘사한 에빙이 미국 소도시의 사실주의적인 재현은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극작품이 묘사한 아일랜드의 소도시 역시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제1, 2 세대 아일랜드 극작가들, 특히 싱(John Millington Synge)의 드라마에서 따온 것을 포스트모던적으로 재구성한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극의 진수가 “지방색과 포스트모더니티를 결합”시켜 창조한 상상의 아일랜드이다. 그의 아일랜드는 싱의 아일랜드의 특정 단면들과 미국의 타란티노 영화에서 차용한 폭력과 유머, 그리고 영화 기법을 결합한 상호텍스트적 또는 혼종적 산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의 미국 또한 그가 방문해서 본 미국 소도시의 단편들과 자신이 알고 있는 작품들에서 따온 것들을 결합하여 생성한 인위적인 혼종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의 아일랜드나 미국이 만들어낸 사실성이 결여된 이 혼종 공간은 현실적 공간으로서 아일랜드와 미국의 지역사회에서 억압되고 비가시화된 것들을 오히려 등장시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

 

3. 미주리주 에빙과 골웨이주 리난

비록 사실성이 결여되었다고 해도 가상의 도시 미주리주 에빙은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공권력과 폭력이 난무하는 스크린 밖 미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참혹한 치정살인사건을 블랙코미디로 다루는 영화의 무대 에빙과 그곳 사람들은 미국의 소도시와 주민들보다 맥도나의 극작품, 특히 코네마라 3부작의 무대인 아일랜드 골웨이의 작은 마을 리난과 등장인물들과 더 닮았다. 즉 에빙의 사람들은 아일랜드 서부의 고립된 마을의 폐쇄적 공간 속에서 무기력해진 싸이코패스 같은 등장인물들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연상 때문에 이 영화가 맥도나의 작품들 속에 등장한 노동자 계층 아일랜드인들의 문제 행동들을 흑백 갈등과 긴장의 미국 역사로 번역하려는 잘못된 것을 넘어서 불쾌감을 주는 시도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맥도나의 시도에 대한 오해를 전제로 한 것이다. 맥도나가 다루고자 한 것은 아일랜드의 문제는 물론 아니고 미국사회의 이슈 자체도 아니다. 그의 아일랜드가 상상의 아일랜드이듯이, 그의 미국 또한 상상의 미국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안젤라의 강간살인 사건과 경찰관 딕슨(샘 록웰)의 폭력과 인종차별과 같은 미국사회의 이슈 자체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맥도나가 시의성을 띈 이슈를 다룬 것은 그것을 공권력의 폭력, 성폭력, 가정폭력이 난무하고 자살, 살인, 구타, 방화가 발생하는 에빙의 상황을 극단까지 몰고 가 그 이면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미국사회의 현실적인 도덕적 딜레마를 보여주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에빙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가해하며 극단적 상황을 대처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엔트로피를 향해 질주하는 인물들이 끔찍한 행동을 하면서도 구사하는 거칠고 거북한 대사의 블랙 유머로 관객을 웃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그가 의도한 바이다.

 

딕슨은 누가 봐도 인종차별주의자이면서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관이다. 딕슨 뿐 아니라 에빙의 사람들은 맥도나가 그린 리난의 사람들처럼 캐리커쳐에 가까울 정도로 그로테스크하게 과장된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사 또한 유머와 더불어 충동과 원시적 폭력성을 담고 있는 블랙코미디의 인물들이다. 밀드레드가 빌보드 렌트를 위해 방문했을 때 렌트업자 게이 웰비(칼랩 존스)가 읽고 있는 오코너(Flannery O’Connor)의 소설 제목 착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A Good Man Is Hard to Find)이 시사하듯이, 에빙엔 본래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밀드레드처럼 정의에, 윌로비 경찰서장(우디 해럴슨)처럼 가족 사랑에 집착을 하거나, 또는 밀드레드의 이혼한 전남편이자 전직 경찰관 찰리(존 호키스)처럼 가정 폭력을 휘둘러 가정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경찰관 딕슨처럼 인종주의적, 성차별주의적 만행을 저지르거나, 그의 어머니(샌디 마틴)처럼 인종주의적 편견과 편협한 고정관념에 진부하고도 무료한 삶을 그냥 살고 있든 지간에, 모두가 다 결함이 있는 망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어느 순간 어딘가 틈을 통해 슬그머니 새어나오는 약간의 호의를 발견할 수도 있다. 딕슨이 바로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4. 맥도나의 연극성: 인위적 스펙터클로서의 에빙

에빙을 비롯하여 맥도나의 모든 영화의 배경은 연극 무대처럼 단일한 장소를 벗어나지 않는다. 장소뿐 아니라 시간과 행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정의된 3일치의 법칙, 시간, 장소, 행동이 한 편의 연극 안에서 일치해야 한다는 규칙을 느슨하게 따르고 있다. 아일랜드 극작가 싱과 미국 영화감독 타란티노의 상호텍스트성과 상호매체성의 합작으로 맥도나의 극작품은 들뢰즈가 주목한 영화가 연극에 줄 수 있는 “영화적 연극성”을 추구한다. 연극성을 추구하는 그의 영화는 들뢰즈의 영화적 연극성과는 달리 단순히 영화의 연극에 대한 일방적인 작용이 아니라 연극과 영화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호매체성을 실천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나아가 그의 연극과 영화는 상호매체성으로 스펙터클 속에 갇힌 연극 뿐 아니라 영화도 해방시킬 수 있는 전복성을 발휘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미국 미주리주 허구적 도시 에빙은 맥도나의 연극성에 기반을 둔 인위적인 스펙터클이다. 따라서 그의 연극성은 이 영화가 미국 사회의 실제적 상황과 문제를 다루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맥도나의 의도는 당대 미국사회의 이슈를 다루기보다는 그 이슈와 그 사회 심연에 작동하고 있는 폭력성과 야만성 이슈의 상호연결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연극성이 구추한 이 영화의 인위적인 스펙터클은 그러한 선택과 배치를 가능하게 한 그리고 동시에 그 이면에서 그것을 해체시키고 있는 폭력과 충동의 힘을 내포한 공간이다. 다시 말해, 그 스펙터클은 그 자체에 닫힌 세계의 열림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전복성이 내재되어 있는 공간이 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빌보드와 경찰서를 태운 두 번의 방화가 보여주듯이, 이 영화는 강간 살해 사건이 촉발시킨 일련의 폭력 행위들이 생성한 파괴적 벡터로 스펙터클의 파사드를 태워 소진시켜 그 심연에 작동하고 있는 적나라한 충동과 야만의 세계를 드러내 보인다. 강한 여성 밀드레드가 에빙에서 추동시킨 일련의 폭력은 그 공간의 엔트로피를 향한 질주를 가속화 시키는 동인이다. 극단까지 몰고 가는 그녀의 행동은 그 공간을 단순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려는 강한 의지와 욕망에 의한 파괴적 선택을 실천하는 것이다. 즉 그녀가 당면한 상황에 대한 “정치적 선택”으로 “폭력의 정치성”을 구현하는 시도인 것이다.

 

5. 강한 여성 밀드레드의 분노

사건이 발생한지 6개월이 넘었는데 범인을 잡지 못하는 윌로비에게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항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밀드레드가 빌보드를 렌트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빌보드 사건으로 강간살인사건은 주민들뿐 아니라 언론의 관심까지 끌게 되지만, 강간살인 사건의 해결보다는 빌보드의 존재가 더 주목을 받는다. 이에 밀드레드는 흉물 취급을 당하는 빌보드의 철거를 종용하는 회유와 협박을 받지만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그녀의 강인함과 용기는 그녀를 공공의 적으로 몰고 간다. 특히 빌보드의 메시지의 당사자인 윌로비의 자살은 밀드레드를 딸을 잃은 피해자에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로 취급된다. 그러나 윌로비가 보낸 편지에는 안젤라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책임과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말기암 환자로 아내와 딸들에게 고통스러운 마지막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자살을 선택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남긴 빌보드는 재미있는 발상이고 신의 한수라는 칭찬과 함께 한달치 빌보드 렌트비는 밀드레드의 잔혹한 진실 찾기 미션 추진에 필요한 실질적인 경비를 제공한 셈이다.

이 영화가 드러낸 그러나 동시에 암시에 머문 직면하기 힘든 적나라한 진실은 안젤라를 죽인 범인으로 분노조절장애에 변태 성애자인 그녀의 아버지 찰리가 의심이 되는 비속살인의 잔혹성이다. 맥도나의 아일랜드 연극은 『미스 리난』에서 딸 모린의 아버지 맥 살해와 같은 존속살인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딸을 죽인 비속살인으로 대체된다. 경찰서 방화 현장에서 밀드레드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해준 난장이 제임스에게 보답으로 저녁을 사주고 있는 밀드레드를 발견한 찰리가 그녀를 비꼬며 자시가 술을 먹고 화풀이로 빌보드에 불을 질렀다고 당당하게 떠벌리는 순간 밀드레드는 안젤라를 죽인 범인이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끔찍한 일을 저지른 찰리가 아무런 생각도 없는 페넬로페가 북마크에 적힌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야기할 뿐”이라는 말을 그냥 한 것을 대단한 지혜인양 자랑하는 희극과 잔혹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거북한 대사에는 유머가 있다. 이러한 블랙 유머가 숨어 있는 분노와 충동의 폭력이 터지기만을 기다리던 관객을 웃고 생각하게 만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 애인 페넬로페와 함께 앉아 있는 찰리를 향하여 그녀가 다가갈 때 와인병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은 그녀의 내면에 내재한 폭력, 그녀 자신뿐 아니라 관객까지도 전율하게 만드는 그러나 정적인 폭력을 방사하고 있다. 클리템네스트라의 분노에 비견되는 불같은 분노를 밀드레드가 그녀의 전남편과 어린 애인에게 분출할 것이라는 관객의 예견과는 달리 페넬로페에게 잘해주라는 협박 같은 명령으로 그녀의 내적 폭력을 방사하는 대신 담아두는 모습은 오히려 강한 여자 밀드레드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녀의 담담하고도 단호한 어투에 움찔하는 찰리의 표정은 그 말이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는 경고임을 암시한다. 찰리 앞에 서 있는 당당한 밀드레드의 존재 자체가 그를 무력하게 만든다.

 

6. 밀드레드와 딕슨의 분노의 고요한 질주

 

이 영화는 복선과 혼선의 미끼를 던져 주고는 있지만, 안젤라를 죽인 범인을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낯선 남자가 밀드레드를 협박하고, 술집에서 딕슨이 그 남자가 친구에게 어린 여자를 강간하고 불에 태워 살해한 무용담을 자랑하는 것을 엿듣는 에피소드로 그를 범인으로 의심하게 만들지만, 수사 결과 그는 범인이 아님이 밝혀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밀드레드가 찾고 있는 범인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는 찰리일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유력한 용의자일 뿐 사건은 미결인 채로 남는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 밀드레드와 딕슨이 함께 에빙을 떠나 아이다호로 강간살인을 했다고 허풍을 떨었던 그 낯선 남자를 죽이러 차를 몰고 떠난다. 그들은 여전히 그 남자가 안젤라를 죽인 범인이라고 의심을 해서가 아니라 에빙에서는 이룰 수 없었던 일종의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길을 떠난 것이다. 그 남자를 죽일지 말지는 가면서 결정하기로 한 두 사람의 분노의 고요한 질주의 엔딩은 그들의 행동과 선택이 과연 우리의 인식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답에 대한 생각을 유도한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

 

·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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