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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어디선가 고군분투하는 모든 '듣보인간들'에게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어디선가 고군분투하는 모든 '듣보인간들'에게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 이하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04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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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포스터./사진제공=㈜시네마 달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포스터./사진제공=㈜시네마 달

인생의 좌표는 정해진 대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온 어떤 존재로 인해 경로를 이탈해서 재검색되기도 한다. 안내된 새로운 경로는 미처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을 보여주기도 하고 나 자신을 탐구하는 과정을 마련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감독 권하정, 김아현)은 불쑥 튀어나온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청춘들의 도전기가 담겨있다. 맨땅에 헤딩하듯 0에서 시작해 그대로 돌진하는 이들의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응원을 하게 된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듣보인간 3명이 만나 가수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간단하지만 사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험난한 상황의 연속이다.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스틸컷./사진제공=㈜시네마 달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스틸컷./사진제공=㈜시네마 달

"우리는 이 가수를 불쑥 찾아갔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라는 내레이션처럼 당돌하고 패기 어린 듣보인간들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 영화과를 재학하던 권하정, 김아현, 구은하는 졸업 이후,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던 과정에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시도를 하게 된다. 2020년,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 가수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로 한 것. 마음이 끌리는 대로 무작정 '무명성 지구인'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고 USB를 이승윤에게 전달하기에 나선다. "나 이 가수랑 작업해 보고 싶어"라는 대책 없는 말이 불씨가 되어 시작된 프로젝트. 아티스트를 향한 존경과 순수한 애정으로 제작한 '무명성 지구인' 뮤직비디오는 가수 이승윤의 마음에 닿아 응답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안녕 난 무의미한 발자취야. 반가워 내 이름은 아무개"라는 '무명성 지구인'의 가사처럼 이들은 서로 마음을 나누게 된 것이다.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스틸컷./사진제공=㈜시네마 달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스틸컷./사진제공=㈜시네마 달

영화 '성덕'(감독 오세연)이 그동안 대가 없이 사랑했던 아티스트를 보내주는 애도 서사에 가깝다면,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차곡차곡 쌓은 마음을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시키는 성장 서사에 가깝다. 물론 '성덕'과 같은 선상에서 나란히 비교하기엔 애정의 방향성이 정반대이지만, 한 번쯤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성덕'에서 그리는 삶에 가장 가까운 한 겹으로 사랑했던 아티스트를 떠나보내는 것은 나의 삶을 구성하던 일부를 떼어내는 고통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성덕'의 개봉 당시, '그 시절' 순수했던 우리들을 추억하면서 공감하는 '우리들'이 많았다. 어른이 된 지금, 과연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그 시절처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성덕'이 던진 질문은 스크린 위를 한없이 유영한다. "어느 날, 오빠가 범죄자가 되었다. 나는 실패한 덕후가 되었다"는 오세연 감독의 내레이션과 제목인 '성덕' 사이의 괴리감은 꽤나 크다. 그간의 발자취를 차분하게 쫓아오면서 동시에 빛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접어두는 마음은 새로운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금 전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할 수 없을지라도 망가진 것들을 봉합해서 마음의 공간을 비워두는 일. '성덕'은 더하기보다는 빼내는 이야기에 가깝다.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스틸컷./사진제공=㈜시네마 달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스틸컷./사진제공=㈜시네마 달

하지만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무언가를 완결시키는 마음에 더 초점을 맞춘다. 뮤직비디오 세트를 제작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마음 한켠의 공간에 다짐을 꾹꾹 눌러 담는다. 이는 가수 이승윤의 삶과도 맞닿아있는데, 무명가수로 시작해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무명가수전'에 30호 가수로 출연해 최종 우승을 하기까지. 처음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무명가수와 처음으로 뮤직비디오를 출연하는 이승윤의 모습은 다른 듯 닮아있다. 물론 중간중간 드러나는 대사처럼 가수 이승윤에게 빠져든 이유나 순간은 명확하지 않지만, 이들의 행보는 거침없다. Chapter 1 무작정 만들기, Chapter 2 무작정 전달하기, Chapter 3 무작정 기다리기로 구분된 구성처럼 일단 달려들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 다큐멘터리 역시 처음부터 찍을 생각보다는 '기록'을 위해 시작했다는 이들은 자신들의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발자취들을 찬찬히 새겨둔다. 거칠고 뿌연 화면, 흔들리는 앵글과 왕왕 울리는 소리까지. 분명 정돈되지 않은 화면임에도 어딘가 마음이 쓰인다. 화면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간절함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반복된 회의와 고난 끝에서 희열이 느껴지는 순간은 쉬이 허락되지 않던 좌충우돌 촬영기가 "네. 컷이요"라고 외치는 순간이다. '듣보인간의 생존기'는 스펙터클한 드라마보다는 기나긴 코스를 완주하는 마라톤의 꾸준함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듣보인간들의 계속된 회의는 관객들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지 다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프로젝트와 거절되는 상황의 반복에서 어떻게든 이뤄낸 성과는 압축할 수 없는 이들만의 서사다. 특히 제목인 '생존신고'는 권하정 감독의 말을 빌리면 "영화를 쉰다고 하고 사람들도 '쟤는 영화를 안 하는 애'로 기정사실이 됐더라. 어떤 선배가 나를 보더니 '영화를 안 한다더니 살아있었네'라고 말하더라. 속으로 '나 영화 안 하면 죽어있는 거야'라고 생각이 들더라. 그런 의미에서 생존신고라는 제목을 붙였다"라는 의미가 숨겨져있다.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스틸컷./사진제공=㈜시네마 달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2023) 스틸컷./사진제공=㈜시네마 달

척박하고 모난 길의 모퉁이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던 무모함은 이들에게 삶의 재시동하는 생존신고가 되어줬다. '영웅 수집가' 뮤직비디오가 완성된 뒤에 이승윤이 이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장은 이를 대변한다. "이승윤은 안중에도 없고 본인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한다는 그 말이 참 좋았습니다" 가수 이승윤을 애정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마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2021년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그래서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뮤직비디오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생존신고를 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결과를 알 수 없을지라도 무모하게 달려드는 모습. 거창한 이유는 아니지만 경로를 새롭게 설정하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무엇보다 짜릿하고 감동적이다. 79분가량의 러닝타임에서 가수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본격적인 장면은 사실 아주 짧다. 결과보다는 목적지로 달려가기까지 상처받았지만 채워 넣은 마음들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는 말을 전하는 듯하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를 보고 어딘가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듣보인간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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