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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트리 오브 라이프>, 당신은 이 작품에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트리 오브 라이프>, 당신은 이 작품에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 김채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1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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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 영화제 사상 가장 논쟁적인 작품

멜랑콜리아, 트리 오브 라이프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인간 본성에 관한 토론회를 가정해보자. 어떤 사람이 너무나도 유창하게 인간의 근원적인 ‘악’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당연하게도 인간이 야생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누군가가 등장해 인간이 본질적으로 타고난 ‘선’에 대해 말한다. 그는 이른바, 사단(四端), 그중에서도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을 통해 인의(仁義)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선의지를 주장한다. 두 웅변가의 목소리가 광장에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도자기 조각(陶片)을 누군가에겐 던져야 한다. 당신은 어디에 표를 줄 것인가?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2011년 제64회 칸 영화제에서…

  2010년 칸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에게 황금종려상을 배려한 것은 신선한 파격이었지만, 이듬해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의 수상은 지금까지도 해묵은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2011년 칸의 주인공은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였다. 트리에가 히틀러를 두고 “어떤 면에서는 이해한다”라고 말했던 것이 화근으로 되어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가 영광을 대신했다. 물론 트리에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실제 그가 했던 발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자회견 전문이 필요하고, 그의 가정사에 읽힌 놀라운 비밀 그리고 트리에가 ‘멜랑콜리아’, 즉 우울증을 앓고 있단 사실까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 지면은 그를 옹호하거나 발언의 진의를 밝히는 자리가 아니기에 트리에의 발언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출까 한다.

  서두를 인간 본성에 관한 상반된 논쟁으로 시작한 이유는 <멜랑콜리아>와 <트리 오브 라이프>가 너무나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관점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편 모두 가족-드라마라는 틀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제와 결론은 완전히 달랐다. <멜랑콜리아>의 주인공 저스틴(커스틴 던스트 扮)은 언니 클레어(샤를로트 갱스부르 扮)와의 대화 도중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지구는 사악해.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어. 아무도 지구를 그리워하지 않을 거야(The earth is evil, We don't need to grieve for it. No one will miss it)”

 

  ‘우울증(멜랑콜리아)’이란 이름의 소행성이 지구로 시시각각 접근하는 와중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저스틴이 내뱉는 이 말은 지구의 멸망을 암시한다. 저스틴이 “아무도 지구를 그리워하지 않을 거야”라고 했던 것과 달리, 영화의 엔딩은 지구를 그리워할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지독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그에 반해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제시카 차스테인 扮)는 끊임없이 망자를 애도하면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은총의 길(way of grace)로 귀의한다. 흑과 백,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이 두 작품은 비슷한 드라마투르기로 무장한 채 영화적 스펙터클을 이용해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듣기만 해도 전율에 빠트릴 수 있는 전가의 보도와도 같은 클래식 음악을 영화 곳곳에 등장시켜 관객의 상상력이 디제시스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소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로 접근하면서 파멸이 임박하지만, 저스틴은 야밤에 나체로 소행성 멜랑콜리아가 내뿜는 죽음의 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과연 어느 영화가 라깡의 주이상스(Jouissance)를 이처럼 단 한 장면에 담을 수 있을까? 트리에는 도처에 악을 깔아두고 이것들을 결속해 <멜랑콜리아>를 만들었다. 이에 반해 맬릭은 50년 이상 하나님을 외면한 탕자마저 선의지로 교화시키는 <트리 오브 라이프>를 통해 전 인류 앞에 자신의 종교 철학을 간증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수많은 설화, 민담, 동화 그리고 소설과 연극 이제는 영화에 이르기까지 통용되는 단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일 것이다. 예술의 윤리적·사회적 기능을 옹호하는 이 시적 정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메타적으로 증명한 사건이 바로 2011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에 얽힌 논쟁이다. 어쨌거나 안타고니스트 역할을 했던 ‘악인’ 트리에는 패배했고, “우리에게도 타르코프스키가 있다”라고 유럽을 향해 부르짖는, 미국 영화계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브래드 피트의 전폭적인 후원을 등에 업고 멜릭은 의심의 눈초리가 가시지 않는 영화로 승리를 거두었다.

 

2. 신대륙 버전, 에덴동산 이야기

 

‘자연의 길’의 아버지                       ‘은총의 길’의 어머니
‘자연의 길’의 아버지                                    ‘은총의 길’의 어머니

무대는 1950년대 텍사스, 한 집안의 가장인 오브라이언에게는 착하고 순종적인 부인 그리고 세 아들이 있다. 오브라이언은 과거 해군 장교였지만 지금은 항공산업 관련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여인과 결혼한 그는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라고 생각한다. 음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중간에 한눈을 판 결과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자, 아이들에게 한 우물을 파라고 집요하게 요구한다. 좀 더 순종적인 둘째와 달리 첫째 아들 잭은 사사건건 아버지와 부딪힌다. 강압적인 아버지 곁에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잭은 틈만 나면 그 나이 때 소년들이 할만한 비행을 저지른다. 어느 날 아버지가 긴 출장을 떠나자, 삼 형제는 그야말로 자유를 만끽한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시종일관 ‘은총의 길’의 대변자 노릇을 한다. 그녀는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자연의 길(세속의 길), 은총의 길, 어떤 삶을 살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자비와 은총의 삶은 미움을 묵묵히 견디며, 모욕과 육신의 고통을 참아내는 길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자연의 길은 아버지 오브라이언이 선택한 길이다. 그는 세상이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강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잡아 먹힌다고 여긴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변되는 양 갈래 길에서 머뭇거린다. “저는 언제나 두 분과 마음속에서 싸워요. 어른이 되도 그럴 거예요.”라는 잭의 내레이션은 <플래툰>에서 주인공 크리스가 했던 “나는 일라이어스와 반즈라는 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느낌이 든다.”라는 대사와 공명한다.

  명시적이진 않지만 첫째는 아버지의 길을 택하고 둘째는 어머니의 길을 택한다. 하지만 자비와 은총의 길을 택한 둘째는 19살 꽃다운 나이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아버지 오브라이언과 잭의 격심한 갈등은 어쩌면 자연의 길을 택한 두 존재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온다. 잭은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버지 집이니까 내쫓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고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자신의 왕국에 반기를 든 잭, 비록 자식이지만 오브라이언은 이를 용납할 수 없다. 욕망을 통제당한 잭은 점점 더 비뚤어진다. “하고 싶은 것은 모두 금지된 것뿐”, “아버지는 거짓말쟁이, 좋은 사람인척하는 위선자”라는 잭의 내레이션은 아버지의 법에 대항하는 새끼 사자를 연상시킨다. 아버지 사자가 이룩한 왕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떠돌이 사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매일 밤 기원한다. 하지만 차마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아들은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부모 곁을 떠난다. 그는 아버지보다 더욱 철저하게 자연의 길을 따르면서 아버지가 다다르지 못했던 사회적인 성공과 부를 이룩했다.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현재, 과거의 일들이 끊임없이 잭의 현재 속에 틈입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그가 선악과(善惡果)라고 불리는 금기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은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주객이 분리되지 않은 이전의 상태에서 벗어나 타자를 객체로 의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유를 토대로 벤야민은 선악과를 ‘인식과(認識果)’로 여겼다. 아담이 하나님이 축성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똑같은 이유로 잭 역시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선악과를 취하지 않고도 사춘기라는 비밀스러운 통과의례를 치르면서 인식의 세계로 접어든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율법으로 제시한 금기를 죄다 어긴다. 특히 잭은 아버지가 설정한 최고의 금기인 ‘어머니’를 시나브로 욕망하면서 결코 한 공간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3. 하나님, 욥 대신 오브라이언 부부를 시험에 들게 하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날 새벽에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고, 천사들은 모두 기쁨으로 소리하였느니라. - 욥기(Book of Job) 38장 4~7절

 

  하나님과 사탄이 욥을 두고 했던 ‘내기’의 과정을 대부분 알고 있기에 굳이 길게 늘어놓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 내기에서 승리를 거둔 하나님은 끝까지 자신을 저버리지 않은 욥에게 이전 그가 가진 재물의 두 배를 보상해주셨고 거둬간 자식들 대신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게 하셨으며, 그중 딸들은 근방의 제일 미인이 되게 하셨다.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도 하나님은 은총의 길을 걷던 어머니와 자연의 길을 걷던 아버지에게 자식을 거두어가는 시련을 주셨다. 아버지는 크게 낙담했지만, 묵묵히 버텼다. 하지만 어머니의 슬픔은 남달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 아들을 거두신 이유를 끊임없이 묻는다. 하지만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어머니의 간구에 답하지 않았다. 맬릭이 오프닝 시퀀스에 욥기를 자막으로 배치한 이유는 그러므로 너무도 명백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혹은 어떻게 임재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감히 아들을 데려간 이유를 짐작하지 말아야 한다. 맬릭은 오브라이언 부인과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욥기를 통해 이 사실을 주지시킨다. 인용된 욥기의 진의를 헤아리는 것은 불경스럽지만, 감히 용기를 내, 이 텍스트를 부연해보자면, “너희들은 내가 천지를 창조할 때 존재하지도 않았느니라. 오직 천사들만이 그날 함께하여 내가 이 세상을 세운 뜻과 원리를 알고 있다. 그러니 인간인 너희는 나의 뜻과 권능을 알 길이 없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자연의 길’을 따르는 잭                   ‘은총의 길’을 따르는 동생
‘자연의 길’을 따르는 잭                                 ‘은총의 길’을 따르는 동생

자식을 잃은 고통은 주로 어머니의 내레이션과 기도를 통해 재현되고 아버지에겐 인생의 실패 그리고 실직과 그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가족의 이사로 그려진다. 그들은 소, 양, 낙타, 나귀 대신 일자리와 소중한 텃밭을 잃었다. 그리고 자식 모두를 잃은 대신 가장 순종적이며 착한 아들을 하나님의 곁으로 보내야 했다. 욥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교인으로서 도리에 한 치 어긋남 없이 살았다. 오브라이언 부부도 그렇게 살아왔다. 잭은 동생의 죽음이 집안을 어떻게 쑥대밭으로 만들었는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아마도 맬릭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고심한 부분이 욥과 오브라이언 부부의 상동성이었을 것이다. 만약 욥의 고난을 현대화하는 것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췄다면 영화의 주인공을 부부 혹은 어머니로 설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맬릭은 단순히 욥 이야기의 각색만으로 <트리 오브 라이프>를 채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들 잭에게 그들 부부의 시련을 관찰하게 함으로써 관객이 욥의 에피소드 이외에 다른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게 만들었다. ‘Jack O’Brien=JOB=욥’ 도식을 설계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욥이 온갖 시련을 감내하면서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듯이 어머니 역시 극단적인 슬픔 속에서도 결코 은총의 길을 멀리하지 않는다. 욥은 충직함의 대가로 큰 복을 얻었지만, 어머니는 어떠한가? 아마도 잭이 하나님을 멀리한 채, 근 50년을 에덴동산 바깥에서 떠돈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된 잭은 영화에서 딱 한 번 아버지와 통화한다. 하지만 훨씬 친밀한 관계였던 어머니와는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머니는 동생이 죽고 난 다음, 마음에 병이 생겨 일찍 하나님 곁으로 갔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잭이 하나님을 멀리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된다. 

 

4. 이 영화의 장르는 무엇인가?

 

‘Opus 161’ - 움직이는 빛1                 ‘Opus 161’ - 움직이는 빛2
‘Opus 161’ - 움직이는 빛1                         ‘Opus 161’ - 움직이는 빛2

영화를 관람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는 첫 번째 주범은 바로 클래비룩스(Clavilux)라는 기계 장치가 만든 ‘움직이는 빛’이다. ‘색채 오르간(colour organs)이라고도 불리는 클래비룩스는 건반 음의 높낮이와 길이에 따라 방출된 다양한 음파를 광원과 색유리를 이용하여 신비로운 이미지를 생성한다. 애초에 류트 연주자를 꿈꾸던 토마스 윌프레드(Thomas Wilfred)가 만든 이 혁신적인 기계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윌프레드는 자신의 예술품에 ‘루미아(lumia)’라는 고전적인 명칭을 부여했고 영화에 이어 제8 예술로 명명했다. 맬릭은 1950년대 이후 거의 연주된 적이 없는 루미아를 <트리 오브 라이프>를 위해 다시 재현했다. 영화 속에 삽입된 작품은 ‘Opus 161’로서 ‘성령’을 의미하거나 우주의 기원과 비밀을 형상화하는 데 활용된다. 

 

나사의 우주 다큐멘터리?                     BBC의 지구의 역사? 1
나사의 우주 다큐멘터리?                                  BBC의 지구의 역사? 1

하지만 이보다 더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오브라이언 가족의 서사 위에 군림하는 우주, 해양, 원시 지구에 관한 이미지이다.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만든 해양 다큐멘터리, 나사에서 제작한 우주 다큐멘터리 그리고 BBC에서 출시한 지구의 역사에 관한 교양 프로그램을 한데 뭉친 것 같은 기묘한 영상이다. 이에 관객은 압도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내용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찾을 수 없기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로저 에버트와 같은 다소 보수적인 평론가는 <트리 오브 라이프>를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서두에 인용된 텍스트에서 욥이 하나님의 뜻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맬릭이 영화의 기초를 놓을 때, 거기에 없었기에” 영화에 임재한 맬릭의 뜻을 짐작할 수조차 없다. 

 

BBC 지구의 역사? 2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해양 다큐멘터리?
             BBC 지구의 역사? 2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해양 다큐멘터리?

맬릭은 하버드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로즈 장학금으로 옥스퍼드에 유학해 대륙 철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는 지도교수와의 관계때문에 박사학위를 포기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맬릭은 젊은 시절 쌓았던 빛나는 공적 덕택에 학위도 없는 상태에서 MIT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뉴스위크, 뉴요커, 라이프와 같은 유수의 잡지에 기사를 송고하며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그는 공사다망한 와중에도 1969년에는 AFI에서 실기 석사(MFA)를 취득하면서 영화로 관심사를 확대했다. 이후 1973년 독립 영화로 제작한 <황무지 Badlands>가 뉴욕 영화제에서 극찬 세례를 받아, 제작비의 3배가 넘는 금액으로 워너에 배급권을 팔기도 했다. 드라마틱한 데뷔작 이후 지난 50년간 10 작품을 선보인 그는 브래드 피트의 바람대로 미국의 ‘타르코프스키’로 불릴만한 예술적 행보를 보여주었다.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그의 영화관(映畵觀)으로 인해 할리우드와는 다른 색채의 작품을 선보였지만, 대다수 관객은 종교와 철학이 뒤섞인 그의 영화에 거리를 둔다.

  맬릭의 화려한 이력, 독특한 영화적 행보와 더불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맬릭’이라는 성(性)에 있다. 맬릭은 레바논어로 ‘왕’을 의미하며 동시에 종교적으로 유력한 집안을 상징한다. 19세기 후반, 레바논 내전기에 미국으로 이주한 맬릭가는 집안 전체가 가톨릭의 지파인 마론파(Maronite)를 믿었다. 마론파 신도들은 레반트 지역에 뿌리내렸지만, 이곳이 이슬람화되면서 오랜 기간 로마 교황청과 관계가 끊겨 ‘섬’처럼 고립되어 지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다시 교황청과 관계가 복원되면서 마론파는 정통 가톨릭의 일원으로 추인되었지만, 금욕적이며 영적인 교리는 고립된 기간에 더욱 강화되었다. 집안의 전통에 따라 마론파의 교리를 신봉했던 맬릭은 랄프 에머슨에 의해 봉기된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까지 받아들이면서 독특한 ‘종교 철학관’을 갖추게 된다. 그가 신봉했던 초월주의는 우주를 신으로 여기는 범신론과 겉으로는 유사하지만, 우주를 신의 의지의 결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차이를 가진다. 마론파의 교리와 초월주의라는 끈으로 묶인 맬릭은 욥의 고행을 금욕주의로 받아들였고 원시 지구와 우주의 이미지로 덧칠된 영상을 통해 초월주의 사상을 표현했다.

  신의 의지로 창조된 우주, 이 우주에 속한 작은 지구,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현상에는 신의 뜻이 임재한다. 그 안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장 마지막에 창조한 후, 보기 좋았다고 했던 인간은 지구의 생명 발생기부터 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운명지어진 존재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에는 인물들의 직접적인 발화는 축소되고 대신 신에게 직접 호소하는 목소리가 영화 전편에 흐른다. 내적 독백의 형태로 진행되는 내레이션은 직설적인 대화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영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위적인 도시의 소음과 기계음을 차단하고 새와 갈매기 소리로 화면에 채우고 풀, 나무, 동물, 구름, 하늘, 물, 흙, 바람과 같은 자연 이미지로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신의 오랜 역사(役事)를 증명하듯 <트리 오브 라이프>에는 공룡을 비롯한 원시 생명체와 끊임없이 활동하는 화산, 흘러내리는 용암과 같은 자연 현상이 차고 넘친다. 심지어 대다수 생명체의 절멸을 불러왔다는 유카탄 반도의 소행성 충돌까지 그린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대립적인 관점의 합일로 인해 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이나 종교를 믿는 이들 모두 영화를 보면서 어색했지만, 마론파의 교리와 초월주의로 무장한 맬릭은 자신의 철학 안에서 무한대의 자유를 누린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관객은 하나님 앞에서 욥이 취했던 태도를 맬릭의 영화 앞에서 가질 수밖에 없다. 맬릭은 우리에게 그저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욥이 아니며 맬릭도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맬릭의 영화 세계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려는 부정하는 시선은 두 세계관을 하나로 합일시키려는 그의 태도에 기인한다.

 

5. 이 블록버스터 간증록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소서

 

‘생명수(tree of life)’                   저기가 하나님이 사는 곳이란다.
          ‘생명수(tree of life)’                                                                             

생명수(tree of life), 선악과 옆에서 자라던 신화적인 나무다. 영원한 삶을 보장한다는 이 나무의 열매를 우리는, 우리의 선조 아담과 하와의 실수로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맬릭은 무려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이 나무를 자신의 영화 제목으로 설정했다. 누군가 맬릭의 영화를 ‘허세’로 여긴다면 그는 ‘제목’이 갖는 위압감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았을 것이다. 이 비난에 대해 맬릭이 생명수는 메타포였다고 항변한다면 어쩔 것인가?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도 그쯤은 안다. 맬릭의 ‘생명수’에는 어떤 메타포도 부재한다는 사실을. 이것은 말 그대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생명수이다. 만일 생명수를 메타포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우리의 의심은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어느 누가 이렇게 엄청난 자본과 최첨단의 기술을 동원해서 메타포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브래드 피트라는 후원자와 엠마뉴엘 루베츠키라는 최고의 촬영감독의 눈물겨운 노력이 없었다면 이 메타포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스메타나, 쿠프랭과 같은 클래식 작곡가는 저작권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영화음악으로 일가를 이룬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그리고 존 테이브너, 헨릭 고레츠키, 기야 칸첼리라는 기라성 같은 현대 음악가들을 어느 누가, 무슨 수로 한번에 동원해 이 영화만을 위한 오리지널 스코어를 만들게 할 수 있게 한단 말인가?

  아버지 오브라이언의 동산에서 쫓겨난 ‘탕자’ 잭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회적 성취를 얻었지만, 그의 영혼은 언제나 긍휼한다. ‘외면이 화려한 자=마음이 궁핍한 자’라는 철 지난 이분법은 마론파의 금욕주의적 세계관을 그대로 적용한 결과로써 이 도식 역시 맬릭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이들을 더욱 뒤틀리도록 만든다. 자연의 길에서 아등바등 살아온 잭은 이제 어머니가 따르던 은총의 길로 눈길을 돌린다. 그곳에서 여전히 젊은 부모와 죽은 동생은 돌아온 탕자를 반긴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뜻이라는 듯, 맬릭은 클래비룩스로 재현한 빛무리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저열한 자본주의, 가벼운 팝 음악으로 대변되는 세계 최고의 강대국 미국이 영혼이 부재한 국가라는 세간의 인식에 맞서기 위해 맬릭을 내세워 만든 블록버스터 간증록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트리 오브 라이프>처럼 치열하게 인간의 감정을 파고들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던 로저 에버트의 평가를 다시 상기해보자. 타르코프스키는 차치학고 베르히만, 안토니오니, 오즈, 앙겔로폴로스의 세계를 에버트가 경험하지 못했다면 여긴다면 우리는 에버트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미국으로 시선을 옮겨도 인간의 감정을 ‘파고든’ 감독은 차고 넘친다. 에버트가 역대 최고의 영화 10편에 <트리 오브 라이프>를 선정한 진짜 이유는 영화에 대한 그의 견문이 얕아서가 아니다. 1970년대부터 활약한 노문객이 어찌 영화에 과문하겠는가? 단지 에버트는 영혼이 부재하다는 조롱을 들었던 미국 영화에 ‘생명수’를 심고 싶었던 게 아닐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이 영화를 대면할 때 나는 화려한 ‘우주쇼’에 압도당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이 최첨단의 간증 영화가 미국의 콤플렉스가 빚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뭔가 미진했다. 나 역시 '저열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고 팝 음악으로 영혼의 살을 찌운 자로써 자기부정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장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6. 놓칠뻔한 단 하나의 미학

 

잭이 아버지의 왕국에서 멀어진 이유는 굳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잭은 멀고 긴 우회로를 돌아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귀환했다.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게 된 아주 사소한 이유이다. 잭은 어머니를 욕망했다. 맬릭은 이 엄청난 금기를 위반하려는 잭을 너무나 사소한 것들, 일명 ‘죽은 시간’으로 오해할 수 있는 몇 개의 쇼트로 표현한다. 어머니는 잔디에 물을 주기 위해 설치된 스프링클러에 발을 갖다 대면서 휴식을 취한다. 이 장면은 딱 두 번 반복된다. 그리고 금기 위반의 결정적 장면은 모두 잭의 시점 쇼트로 에두른다. 맬릭은 이 사소한 장면들로 엄청난 일을 해낸다. 텅 빈 이웃집에 들어가 여자 속옷을 훔치는 것은 둔감한 이들을 위한 반복일 뿐이다. 

  맬릭은 잭의 금기에 대한 욕망을 어머니의 발과 스프링클러에서 흘러나온 물로만 표현했다. 나는 어떤 영화에서도 이처럼 미묘한 쇼트 사용법을 본 적이 없다. 그가 만약 메타포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생명수’가 아닌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그런데 그는 이 고도로 정제된 ‘시’를 포기하고 왜 ‘우주쇼’에 집착했을까? 자신의 이름처럼 ‘왕’이 되려 했다면, 브래드 피트의 바람대로 ‘미국의 타르코프스키’가 되려 했다면, 그는 ‘시’에 더 집중했어야 했다. 나는 잭과 어머니가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하염없이 읊조리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내레이션을 떠올린다. 

“당신께 인도하소서”

그리고 목적어가 생략된 이 문장에 ‘시’를 끼워 넣는 상상을 해본다. 

 

'다시 만난 세계'
'다시 만난 세계'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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