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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 시대 영화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바빌론>
[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 시대 영화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바빌론>
  • 윤필립(영화편론가)
  • 승인 2023.10.30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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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빌론 국내 포스터(네이버 영화)
영화 바빌론 국내 포스터(네이버 영화)

오티티(OTT)의 보편화 덕분에 관객들이 영화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갑작스럽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구태의연한 질문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최근 들어 이러한 사유를 담은 작품들이 많아지는 이유이기도 한데, 일본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우에다 신이치로, 2018), <거미집>(김지운, 2023)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그 가운데 할리우드 영화 <바빌론>(데이미언 셔젤, 2023)은 ‘과연 영화의 영화로운 시대는 끝난 것일까?’라는, 영화의 존재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한 물음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 눈에 띈다. 물론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즉, 그 개념과 의미가 변모할 뿐 각 시대가 요구하는 ‘영화’는 늘 그 요구대로 ‘영화롭게’ 존재할 것이란 사실이다.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우에다 신이치로, 2018)의 한 장면(네이버 영화)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우에다 신이치로, 2018)의 한 장면(네이버 영화)

바로 이 극명한 사실을 셔젤은 <바빌론>을 통해 자신만의 사유를 영화의 역사와 함께 쏟아 놓는다. 실제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예를 들면, 조명 기술이 열악한 시대에 자연광에 좌지우지되는 영화 촬영 현장, 유성영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시작되는 무성영화 배우들의 몰락, 토키 영화 시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트럼펫 연주자의 얼굴이 더욱 검게 보이도록 분장할 것을 강요하는 장면)은 영화학 개론이나 그 비화를 다룬 논저들에서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바빌론>은 영화의 시작과 현재를 사적(史的)으로 훑고 있음에도 그 이야기가 지루하지만은 않은 것은, 영화사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두 남녀의 연애사가 연대기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는 무성영화 전성기인 1920년대 할리우드의 어느 휘황찬란한 파티장에서 시작한다.

 

가장 영화 같은 시대, 화려한 파티를 즐기고 있는 넬리(네이버 영화)
가장 영화 같은 시대, 화려한 파티를 즐기고 있는 넬리(네이버 영화)

할리우드 영화 시장의 활황기, 영화를 동경하는 매니(디에고 칼바)는 매일 밤 격렬하게 치러지는 영화 관계자들의 파티장에서 책임감 있게 일한다. 그러다 마치 행운처럼 당대의 명배우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의 눈도장을 받게 되고,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처럼 넬리(마고 로비)와도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배우를 꿈꾸던 넬리는 그렇게 잭을 등에 업은 매니 덕분에 영화에 출연하게 되고, 이 셋은 영원할 것만 같은 행복을 누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기술의 발전은 밝게 빛났던 무성영화 배우들의 빛을 조금씩 앗아가고, 그러한 현실 앞에서 잭과 넬리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매니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스튜디오 촬영의 시대, 그 현장을 지켜보는 매니(네이버 영화)
스튜디오 촬영의 시대, 그 현장을 지켜보는 매니(네이버 영화)

셔젤이 이 이야기를 ‘바빌론’으로 명명한 이유는 1920년대의 할리우드가 마치 황홀하면서도 위태로운 고대도시 바빌론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멸망을 예상하지 못했던, 그러나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세계사 속의 바로 그 도시. <바빌론>에서 이 도시와 가장 닮은 인물들은 잭과 넬리이다. 극 중 무성영화 시대의 영웅들인 잭과 넬리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급격히 변모하는 영화 제작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는 지금의 영화계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각종 뉴미디어와 오티티의 범람 속에 성장 동력을 상실한 채 부유하고 있는 그 현장. 소비자로서의 ‘대중’에게 초점을 두고 변모하는 영화산업 현장에 어떻게든 적응하려 발버둥치는 그 현장. 그럼에도 영화가 지니는 ‘예술’로서의 본성과 가치는 포기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그 현장. 

 

영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와 토토(네이버 영화)
영화 시네마 천국(쥬세페 토르나토레, 1990)의 알프레도와 토토(네이버 영화)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고대 도시 바빌론은 멸망했지만 영화의 고장 할리우드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궁극적으로 감독은 <바빌론>을 통해 ‘영화’의 암울한 미래가 아닌 희망을 찾아내려 애쓴 것 같다. 감독의 이러한 면모는 영화 속 매니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진다. 극의 종반부에는 영화를 향한 꿈과 열정을 탕진한 채 평범하게 살아가던 매니가 가족과 함께 극장을 찾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이때 매니는 스크린 속 영화를 보며 <시네마 천국>(쥬세페 토르나토레, 1990)의 토토처럼 지난 삶을 회상한다. 이 장면 속의 매니처럼 누군가는 여전히 영화를 통해 과거를 느끼고 현재를 읽어 내며, 누군가는 아직도 영화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그것에 생의 모든 열정을 쏟아내고 있다.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네이버 영화)
영화 거미집(김지운, 2023)의 한 장면(네이버 영화)

글을 맺으며, <바빌론>의 잭과 넬리 그리고 매니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것은 그것의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시대의 영화가 산업적․경제적 측면에서 그것을 소구하는 대중들의 관심에만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는 사실은 다소 우려된다. 현대사회의 자본에 대한 거대한 욕망은 이러한 경향을 앞으로 더욱 가속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가 대중예술이라는 점에서 제작 집단이나 평단과 같은 영화 전문가들의 이론적, 예술적 자존심만으로 유지되고 발전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나 셔젤의 <바빌론> 속 인물들처럼 동시대의 영화계가 영화에 대한 진심만은 잃지 않았으면 한다.

 

영화 바빌론 국내 홍보물(네이버 영화)
영화 바빌론 국내 홍보물(네이버 영화)

본 기사는 영화평론국외영화 리뷰 '동시대의 영화, 그 존재의 이유, <바빌론>'을 깁고 더한 것이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대학에서 강의하며 한국 언어/문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계명대에서 국문학, 영문학을, 연세대 대학원에서 국어학-한국어교육을 전공했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영상작가전문교육원을 수료했고, 무궁화 스토리텔링 공모전 동화 부문 입선,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기독교 영화비평 대상 수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 등을 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의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다. 필리핀 관광부(마닐라) 관광 개발 기획국에서 일했으며, 에모리대(미국) 대학원 펠로우십 후 국립정치대(대만) 한국어문학과 및 난양공대(싱가포르) 인문대학 교수로 지내다 귀국 후 연세대, 세종사이버대에서 강의하며 세종사이버대 한국어교육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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