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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대립국면과 일본, 그리고 한반도 상황
미·중 대립국면과 일본, 그리고 한반도 상황
  • 남기정 |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 승인 2023.10.3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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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정전-냉전의 한반도 국제체제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한반도의 ‘전쟁-정전-냉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중국의 GDP가 일본을 능가해 미중 경쟁이 개시되고, 중일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후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하면서 전쟁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실천적 과제로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정밀한 해명이 필요해졌다.

판문점 선언이 발표된 2018년 4월 27일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가 정전체제 해체에 가장 근접한 날이며,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평화에 대한 희망을 품은 날이다. 판문점 선언 발표 직후 실시된 여러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 평가는 70%를 넘어섰고, 특히 판문점 선언에 대해서는 보수층을 포함해 80% 이상의 국민들이 지지했다. 주변국들도 기본적으로 판문점 선언을 환영했다. 전년도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면서 국민들의 위기감과 피로도가 극에 달했던 점, 그리고 전쟁 재발이 한반도 주변 어느 나라에도 남의 일이 아닌 구조가 그 배경이었다. 전쟁 위기 당시 동북아 지도자들은 ‘어떻게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그러나, 사실 모두 같은 입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생각이 가장 희박했던 것은 일본의 아베 총리였다. 아베 총리는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발적 충돌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2017년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2018년 시작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아베 총리의 태도는 냉담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심지어 부정적이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전후 일본의 현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이 임시로 중단된 휴전상태에서 ‘동북아 휴전체제’가 성립됐다. 일본은 이 체제에서 '기지국가'로 편입돼 있다. 휴전체제가 해체되면 기지국가로서의 일본의 존재도 의미가 없어지고 그 역할도 종식된다. 예를들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속에서 논란이 됐던 조선 유엔군 후방사령부 문제가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일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는 ‘탈기지국가’의 모습을 상상하고 전환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은 동북아 휴전체제 유지에 기지국가로서의 생존을 걸고 있었다.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PL Z페스티벌에 참여한 연주자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경위

한반도에서 평화 구축의 시도가 시작된 것은 1988년이었다. 이 해는 서울올림픽-패럴림픽이 열리는 해였는데, 가을 대회 개최를 앞둔 7월 7일 노태우 정부가 내놓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은 한반도의 휴전과 냉전의 동시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발표된 날의 이름을 따서 7.7 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총 6개 항목으로 구성됐다. 그중 전반부 3개 항목은 한반도 평화 공존과 관계 발전을, 후반부 3개 항목은 남북한과 주변국과의 상호인정을 시도하는 것을 내세웠다. 전반부는 휴전 해체를, 후반부는 냉전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여기서 탄생한 한반도 정전체제-동북아 냉전체제의 동시 해체 움직임을 1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1988년 시작된 1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1992년 까지 이어졌고, 1992년 2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발표되면서 남북관계가 진전됐다. 그리고 1990년에는 한국과 소련이, 1992년에는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었다. 1990년 말에는 북일 간에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이 시작됐으나,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제기된 핵문제를 의제로 삼고 납치 일본인 문제의 해명을 요구하면서 1992년 11월에 협상은 결렬됐다. 북미 간에는 협상을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북한은 일본과 미국 모두와도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했고, 이후 관계는 더욱 악화돼 적대적 관계가 구조화됐다. 이는 중국과 소련이라는 후방을 잃고 고립된 북한으로서는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마침 사회주의 진영의 물물교환이 무너지면서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기 시작한 북한으로서는 핵과 미사일이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1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북·일 협상의 결렬로 막을 내렸다. 거기서부터 북한 핵 문제가 발생했다.

1988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은 전년도인 1987년 한국 민주화 혁명으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한국 외교가 처음으로 평화 구축을 본격적인 과제로 다루게 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1987년 민주화 혁명이 한반도 휴전체제를 확정하고 그 유지를 위해 권위주의 체제를 용인한 한일 ‘1965년 체제’에 대한 이의제기였기 때문이다.

한일 ‘1965년 체제’는 역사청산과 안보의 교환관계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요한 저음’으로 작용하는 한일관계의 기본 구조다. 그 배후에는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치르는 한국과 후방기지인 일본을 결합시키려는 미국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그래 
서 ‘1965년 체제’ 하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확정된 동아시아 냉전에 한반도의 휴전체제가 연동되게 됐다. 한반도의 분단과 대립은 상시화돼 주기적으로 전쟁직전의 위기가 조성됐고, 이에 대응해 권위주의 체제가 경직됐다. 광주의 시민항쟁은 이 체제에 대한 이의제기였다. 국가 폭력 앞에 한동안 잠잠해졌지만, 1980년대를 통해 저항은 계속됐고 마침내 1987년 민주화 혁명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한일관계

2018년 평창에서의 해빙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을 수락하면서 탄력을 받았고, 판문점 선언을 거쳐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문제였다. 한국에서 진보정권이 탄생한 반면, 아베 정부의 역사 인식이 후퇴하면서 한일 역사 화해 프로세스가 정체된 것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뒤늦게 뛰어든 일본 정부는 그해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에 ‘국제법 위반’ 카드를 꺼내들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나아가는 문재인 정부를 견제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둘러싼 한일의 상호 불신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고, 이미 양국 정부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어 놓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창올림픽 개막식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이때도 아베 총리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는 2월 9일 개막식을 이틀 앞둔 7일, 도쿄에서 펜스 미 부통령과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미소 외교’에 빼앗기면 안된다”고 말했다. 또한 북한에 ‘최대의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판문점 회담이 실현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본격화되는 가운데,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조언을 통해 북미 관계 진전의 페이스메이커가 되려고 했다. 한편, 그해 10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이를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한국 정부에 시정을 요구하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향하는 문재인 정부의 행보를 견제했다.

신(新)판문점 체제 구축의 주역은 기본적으로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중 양국이었다. 한국전쟁을 치른 주요 국가들이다. 그러나 역사의 과정을 보면 여기에 러시아와 일본이 가세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은 김일성의 한국 전쟁을 승인하고 지도한 국가이며, 이를 계승한 러시아 
는 한국전쟁을 종식시킬 책임이 있다. 푸틴 대통령은 북미 간 전쟁이 임박한 분위기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는 2018년 봄에 한반도를 방문한 숨은 주역이었다.

 

모기장 밖에서 본 아베 외교

그러나 일본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2018년 3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말한 것은 아베 총리에게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평창에서의 남북 화해 무드를 관망하던 아베 총리는 드디어 이에 대항하려 했다. 종전선언을 목표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의 '평화외교'에 대해 한반도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일본 정부의 전방위적인 ‘대결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아베 총리는 그해 3월 9일 오전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통해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를 향한 ‘최대한의 압박’을 지속할 것을 강조하고 납치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이때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일본의 대(對)백악관 외교에서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일본의 대미 외교는 일본 정부와 호흡을 맞춘 볼턴의 회고록에 잘 묘사돼 있다.

볼턴에 따르면 일본은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분주했다고 한다. 일본은 한국과 180도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볼턴의 입장과 “거의 같았다”고 평가했다. 야누치는 납치 일본인 문제도 언급했다. 이후 납북 일본인 문제는 미북 정상회담의 또 다른 의제가 됐고, 4월 12일 볼턴과 야나이의 회담은 “모든 것이 뒤집어지길 바랐던” 볼턴과 일본이 마음을 합친 순간이었다.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과 북미 공동성명 발표로 아베 총리의 ‘대결 외교’는 궁지에 몰렸다. 북미정상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아베 총리는 납치 문제의 조기 해결을 위해 아베 총리가 직접 북한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밝혔다.

2018년 10월과 11월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되는 가운데 한국의 외교력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 집중돼 있었다. 그 이면에는 일본 외교도 하노이로 향하고 있었는데, 2019년 2월 27일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 아베 총리는 2월 20일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미북 외교 일정이 하노이로 향하는 도중에도 아베 총리는 볼턴 등 강경파를 지원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이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동력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미일동맹의 벽에 가로막혔다. 볼턴은 2019년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의 장광설'을 중간에 잘라낸 것을 좋게 평가했다. 이때 이미 미국에 중요한 문제는 한반도 정세가 아니라 한일 관계였다. 북한 문제를 언급한 후 트럼프는 한일관계로 화제를 돌렸다. 

이를 회고하는 볼턴의 서술에서 미국 정책결정자의 한일관계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볼턴은 문재인 대통령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뒤집으려 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일본의 관점에서 이 조약의 목적을 설명하며,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된 적대감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평화외교’는 일본이 워싱턴을 무대로 추진하는 ‘대결외교’에 밀렸다. 윤석열 정권이 등장해 한일관계 회복과 한미일 안보협력을 추진하는 것은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한국의 정권교체와 휴전체제 강화

제3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하노이 노딜(no deal) 이후 흐름을 되돌리지 못하고 중단됐다. 문재인 정부를 지탱했던 더불어민주당이 발목을 잡히고,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후보가 박빙의 승리를 거두며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윤 후보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문 정권의 남북화해정책과 대일외교를 철저하게 추궁했고, 취임 후에는 문 정권이 추진한 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애니싱 벗 문(Anything but Moon)’ 노선을 채택했다. 북한과의 대화와 관여를 중시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종전선언’에 ‘거짓 평화’를 요구한 것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통한 압박만이 '진정한 평화'를 보장한다는 압박 정책을 취하게 됐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 전환은 먼저 국방안보 분야에서 시작됐다. 2022년 7월 한국 국방부는 문재인 정부에서 축소 조정 및 폐지된 연합훈련의 부활 방침을 보고하고 한미연합훈련의 ‘정상화’에 돌입했다. 2022년 9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실시된 대규모 한미연합전술훈련은 4년 10개월 만에 재개됐다. 같은 달 30일에는 한미일이 동해 공해상에서 연합 대잠수함 훈련을 실시했는데, 2017년 4월 제주 남방 해역에서 한미일 대잠수함전 훈련을 실시한 이후 5년 만의 일이다. 민감한 시기에 북한은 연이은 미사일 시험발사로 응수했다. 이는 과거에 없던 일이다. 

한미연합훈련에 미사일 시험발사로 응수하는 것은 우발적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북한이라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북한이 2022년 10월 4일 드디어 일본 상공에 화성-12형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것도 2017년 9월 이후 정확히 5년 만의 일이다. 미국과 일본, 필리핀이 10월 3일부터 실시하고 있는 해상훈련에 한국 해병대가 사상 처음으로 참가하는 것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 복원되고 강화되는 한미일 안보협력에 북한도 이례적인 무력시위로 대응했다. 윤석열 정권들어 한미, 한미일 연합훈련이 과거보다 대규모로 부활하는 가운데, 북한이 연일 발사하는 각종 탄도미사일이 지역의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부정하며 시작된 국방부문의 ‘정상화’에 이어 한일관계의 ‘정상화’가 시도됐다. 국방의 ‘정상화’로 ‘위기가 일상화’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역사문제에서의 양보로 한일관계는 급격하게 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2023년 3월 6일, 한일관계의 걸림돌이었던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제3자 배상’이라는 방침으로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겠다고 발표했고, 3월 16일에는 이를 평가한 일본 정부와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대법원 판결의 대전제인 ‘불법적 식민지 지배’ 문제는 모호한 상태로 남았고, 2023년 3월 한일관계에서 일어난 것은 ‘1965년 체제’로의 회귀였다.

 

극동 1905년 체제, 한일 1965년 체제, 한반도 휴전 체제

그 결과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한일 1965년 체제’에 탑재돼 작동해 온 ‘역사와 안보의 교환 구조’가 부활했다. 즉, 역사를 봉인하고, 경제협력을 매개로 한일관계를 안정화시키고, 한미일 안보협력체제를 구축, 가동하는 구조가 복원된 것이다. 이후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가 부활 강화되고 있으며, 그 대가로 북-중-러의 진영화가 이뤄지고 있다. 그것은 신냉전 돌입이라기보다는 한반도 휴전체제의 전면적 부활이며, 이에 호응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제 및 한일 1965년 체제의 부활 또는 강화다. 한반도 탈냉전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맞이하고 있는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대립, 갈등, 분단의 현실은 신냉전이 아니라 냉전의 지속이며, 그 동북아적 변형인 휴전체제의 전면화에 불과하다.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의 두 동맹이 실체적으로 하나이며, 그 기원이 1905년에 있었다는 이 해석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즉 한반도 휴전체제가 ‘극동 1905년 체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휴전체제를 고집한 아베 총리와 ‘극동 1905년 체제’를 만든 메 
이지 원로들이 연결되는 것이다.

2022년 9월 2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국장의 사상은 이 극동 1905년 체제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아베 국장에 참석한 한덕수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제법적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라고 일본 측의 인식을 받아들였다. 이날 국장에서 스가 전 총리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야마현 유토의 심정을 빗대어 조문을 낭독했다. 야마현은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으로 구성된 일본의 지정학을 창안한 사람이고,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할 때까지 이를 실행한 당사자다. 국제법은 그들이 한국을 길들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국제법으로 그들의 침략적 행동을 포장했다.

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아베 내각 시절부터 이미 부활의 조짐을 보였던 지정학적 구상이 있다.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호소야 유이치(細谷雄一) 등의 '신지정학' 그룹이 대표적이다. 그들의 새로운 지정학에서 한국은 배제 대상이다. 한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징용공’ 문제로 ‘자기주장’을 펼치며 국제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기타오카는 일본 주도의 ‘서태평양 연합’ 구상을 제기한 적도 있다. 한국은 조약, 선언, 합의를 지키지 않는 나라로 ‘법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다.

이후 한국에서 정권이 교체되면서 앞서 언급한 ‘극동 1905년 체제’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한편, 2022년 6월 샹그릴라 다이얼로그 기조연설에서 기시다 총리는 일본이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 속에서 평화와 번영의 발걸음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변경이 당당하게 통용되는 (중략) 그런 약육강식의 세계로 되돌아갈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인식과 주장은 일본에서 2022년 12월에 채택된 ‘국가안보전략’ 문서에 반영돼 있다. 지난해 말 발표된 한국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여기에 한국의 국익을 동기화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강제동원’ 문제는 대일외교의 과제 목록에서 사라졌다.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의 사상, 결과, 전망

이를 문서화한 것이 캠프 데이비드 3문서다. 2023년 8월 18일 윤 대통령, 바이든 대통령, 기시다 총리 등 한미일 3국 정상이 워싱턴 근교의 미국 대통령 휴양지 캠프 데이비드에 모여 첫 단독 3국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세 정상은 회담 결과 3개의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발표했다.

정상회의 정례화 등 3국 간 포괄적인 협력 방안을 담은 한미일 공동성명 ‘캠프 데이비드 정신’, 한미일 협력 추진 과정의 원칙을 문서화한 ‘캠프 데이비드 원칙’, 역내 도전과 도발 및 위협에 대한 정보교환, 메시지 조정, 대응 조치를 신속히 협의한다는 내용을 담은 ‘3자 협의에 대한 공약(Commitment to Consult)’ 등이다. 이로써 사실상 동맹에 준하는 안보협력의 틀이 만들어지게 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과 일본 간에 서로 한 나라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나 위기가 발생하면 서로 협의하기로 약속했다는 점이다. 한일 간 안보위기에 대한 협의 약속을 통해 한일 안보협력은 '새로운 역사의 장'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한미일 안보협력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실선으로, 한일 간 안보협력을 점선으로 표시하는 구도로 전개돼왔다. 그 기원은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북한의 선제공격에 대응해 미국이 유엔의 깃발을 내걸고 유엔 협력을 표방한 일본의 기지를 이용해 전쟁을 수행한 데서 비롯됐다. 이후 일본은 한국전쟁의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고, 휴전으로 전투가 종결된 후에도 그 기능을 유지한 채 ‘기지국가’로서 한반도의 휴전체제에 편입됐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번 회담의 목표가 대 중국 포위망 완성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 목표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한일관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그동안 미국을 매개로 유사 동맹 관계에 머물렀던 한일관계가 실질적 군사동맹으로 격상됐기 때문이다. 한-미-일로 구성된 삼각형에서 점선으로 그려졌던 한일관계는 이제 실선이 됐다.

이에 따라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관여가 보다 직접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일본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전후 처리 문제에서도 일본의 발언권이 인정될 것이다. 결국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개입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한국전쟁 말기 휴전회담의 이면에서 외교력을 총동원해 실현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한 꿈이다.

1990년대 이후 군사적 ‘보통국가’화의 오랜 꿈을 담아 지난해 말 일본이 채택한 3개 안보문서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3자 협의에 대한 공약과 겹쳐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지난해 말 개정된 ‘국가안전보장전략’과 ‘국가방위전략’에는 동지국(like-minded countries)으로 분류된 협력대상국과 다양한 방위협력을 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는데, 이는 상호군사지원협정(ACSA)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한국과의 상호군사지원협정은 그 점에서 이번 캠프 데이비드 회담 이후 논의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 목표점은 MD(Missile Defense)의 완성일 것이다.

 

한미일 동맹, 대만, 원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는 동아시아 정전체제의 산물이다. 전후 일본은 동아시아 정전체제 속에서 ‘기지국가’이자 ‘원전국가’로 존재해 왔다. ‘원전국가’라는 개념은 일본의 ‘전후국가’의 역사적, 공간적 특징을 담고 있다. 후쿠시마의 사고 또한 동아시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동아시아 문제로서의 원자력이 오염수 문제의 기원이다. 일본의 원자력 문제가 동아시아의 지역적 문제임을 확인하는 것은 일본의 완성된 ‘원전국가’는 사실상 ‘기지국가’임을 인식하면 가능하다. ‘기지국가’가 전후국가 일본이 동아시아 정전체제 속의 군사적 지위를 표현하는 말이라면 ‘원전국가’는 그 사회경제적 표현이다. 여기서 ‘원전국가’란 ‘원전이 국민의 삶과 기업의 생산성에 양적, 질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융크의 ‘원자력국가(Der Atomstaat)’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융크는  “원자력 산업의 발전에 따라 통치를 합리화할 기술주의자들에게 독재적으로 권력이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해 이런 체제와 문화를 가진 국가를 ‘원자력국가’라 불렀다.(Robert Yungk, 1989)

네그리의 ‘원자력국가’와 ‘핵무력국가’ 개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네그리는 ‘원자력국가’ 즉 ‘Stato Nucleare(Nuclear Power State)’와 ‘핵무력국가’, 즉 Potenza Nucleare (dominance with nuclear weapons)를 구분하고, ‘원자력국가(Stato Nucleare)’로서의 일본의 특징에 주목했다. 즉 네그리의 개념에서 ‘원자력국가’는 기술, 경찰, 군사력을 갖춘 세력에 의해 주권이 실질적으로 결정되는 것을 말하는 바, 일본이 그런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오염수 방류의 결정 과정은 네그리의 통찰에서 봤을 때, 원전국가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전체제에서 일본만 원전국가일 수는 없다.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 ‘평화를 위한 원자력’ 이후, 미국은 일본에서 원자력발전 계획을 신속하게 채택했다. 이는 일본을 소련, 중국에 대한 쐐기로 사용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원전은 미군기지와 등가물로서, 미일동맹의 상징이다.(池上, 2012) 그러나 이와 거의 동시에 한국과 대만이 같은 길을 걸었다. 1955년 7월 1일, 한미 원자력 협력 협정이 처음 합의된 후 1956년 2월에 체결됐으며, 1955년 6월, 대만 행정원 산하에 원자력위원회 설립하기도 했다. 나아가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1950년대 중반, 미국은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1959년 6월 오키나와에서 핵무기를 장착한 미군의 나이키 미사일이 오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과 대만에 원전을 도입한 것은 미국이 핵무기 확산을 막고 두 국가에서 핵무기 포기로 인한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공식적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한 대만과 한국에 핵발전소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잠재적 핵 억지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본은, 한국 대만과 함께 ‘대표적인 잠재적 핵보유국’으로 분류된다. 일본에서 도카이무라(東海村)가 미일 원자력동맹의 상징이라면, 롯카쇼무라(六ヶ所村)는 잠재적 핵보유국 일본의 상징이었다. 그런 배경을 고려하면, 원전오염수 문제는 미일동맹의 문제이면서,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과 한국, 대만이 참여한 동아시아 원전 질서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원전오염수 문제는 대만을 둘러싼 미중 대립을 배경으로 추진되는 한미일 동맹화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2023년 4월, 가데나기지에 핵 공격 능력을 가진 F15E 스트라이크 이글 전투기 배치됐는데,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 후 핵탑재-공격 무기가 오키나와에 배치된 것은 처음이었다. 나아가 아마미오시마의 군사화도 현저하다. 러우전쟁에서 게임체인저라고 불린 하이마스가 배치됐다.

문제는 후쿠시마 이후 일본의 탈핵 움직임과 이에 이은 대만과 한국의 탈핵 움직임이 있었고, 이는 원전 거버넌스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지위를 흔들 가능성이 있었다. 이후 이들 국가에서 원전 재가동 및 원전산업 확대로 선회하는 배경에는 미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오염수 문제는 특히 이에 제동을 거는 악재가 될 수 있다.

한편 ‘원전국가’에 오염수의 해양 투기는 사활적 문제다. 원전의 사용 후 핵연료를 롯카쇼무라 재처리공장에서 재처리 후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나머지를 핵폐기물로 처리하는 것이 일본의 원자력 정책의 근간인데, 삼중수소는 제거가 되지 않기 때문에 바다에 방출한다는 것이다. 롯카쇼무라 재처리공장에서는 매년 800톤의 핵연료를 처리하고 삼중수소가 포함된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한다는 계획이다. 후쿠시마 오염수의 해양 투기에 제동이 걸릴 경우, 롯카쇼무라에서의 재처리공장을 가동시키기 어려워지면서, 일본의 원자력 정책이 근간에서 붕괴 할 수 있다.(2)

원전국가의 붕괴는 기지국가의 종언으로, 그리고 나아가 동아시아 정전체제의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오염수 문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체제전환이자, 동아시아 질서변환의 문제다.

 

 

글·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일본 도호쿠대학 법학부 조교수 및 교수,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부 교수를 거쳤다. 국제관계론을 전공했고, 관심 주제는 미일동맹의 전개와 이에 대한 일본 평화운동 진영의 대응이다. 저서와 편저서로 『일본 정치의 구조 변동과 보수화』, 『기지국가의 탄생』, 『전후 일본의 생활평화주의』(편저) 등이 있고, 『난감한 이웃 일본을 이해 하는 여섯 가지 시선』 등 다수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다.
이 글은 올해 10월 1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된 시민사회 긴급세미나 ‘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의 발제문을 요약한 것으로 필자의 동의를 받아 본지에 게재 한다.
 


(1) Nam, Kijeong “Is the postwar state melting down?: an East Asian perspective of post-Fukushima Japan”, Inter Asia Cultural Studies, Vol.20 Issue 1, 2019.
(2)「日本のメディアは腐っている!」海洋放出の“真の理由”, 小出裕章さんが熱弁, 202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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