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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플랑 세캉스, 그 의심과 확신 사이-<거미집>
[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플랑 세캉스, 그 의심과 확신 사이-<거미집>
  • 김희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3.12.26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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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에서 특정 영화 용어가 반복해서 언급되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2023)에선 플랑 세캉스(plan-sequence)’라는 용어가 수차례 언급된다. 플랑 세캉스는 중간에 끊지 않고 단 한번의 카메라 워크로 시퀀스를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객들에겐 물론 영화 속 인물들에게조차 생소한 용어이다 보니, 영화 속엔 플랑 세캉스가 뭔데?”라는 대사들이 여러 번 나온다. 이 용어는 영화에서 하나의 맥거핀(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줄거리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플랑 세캉스를 구현하기 위한 처절한 몸짓 속엔 자신에 대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한 창작자의 처절한 고뇌가 깃들어 있다.

 

상상과 현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다

 

<거미집>은 영화에 대한 영화, 메타영화에 해당한다. 영화 제작 과정, 그에 따른 고뇌 등을 다루는 만큼 메타영화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담기게 된다. <거미집>의 주인공인 김열(송강호) 감독의 내적 고민과 갈등 역시 김지운 감독을 포함한 영화인, 창작자들의 자전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김열의 고뇌는 재촬영, 그리고 플랑 세캉스를 향한 집념으로 표출된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김열의 꿈으로 시작된다. 꿈에서도 자신이 이미 다 찍은 영화를 생각할 정도로 절박한 김열은 재촬영을 하면 새로운 명작이 탄생할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 확신에 따라 배우, 스텝들이 다시 한데 모이고 재촬영이 시작된다. 이때 재촬영되는 영화 속 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 등을 연상케 하는 설정으로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거미집>은 감독의 상상과 현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김열은 이미 세상을 떠난 스승 신승호 감독을 만나게 된다. 이 장면은 김열이 자주 복용하는 약으로 인한 환각 증상인지, 현실인지 모호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그 만남 이후 김열은 다시 의지를 갖고 좌초될 위기에 처한 재촬영을 이어간다. 그 힘은 신 감독의 말에서 나온다. 신 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김열에게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라고 말하고, 이 말은 김열에게 큰 힘이 된다.

김열은 남들 앞에선 확신을 외치면서도 내면엔 자신에 대한 의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에게 절대적 존재였으며 남들도 인정하는 권위자인 신 감독에게 확신의 말을 듣고서야 의심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그 확신이란 것은 결국 환각을 통해 스스로 부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을 떠난 신 감독을 만난다는 것은 지극히 허구이자 환각 증상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으니까.

영화의 꿈은 곧 현실이라는 점을 반영한 듯, 영화와 현실의 경계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허물어진다. 영화에서 형사 역을 맡은 인물은 현실에서도 형사처럼 배우와 스텝들의 뒤를 캐며 수첩에 메모를 한다. 강호세(오정세)와 한유림(정수정)의 영화 속 불륜 관계는 현실로 확장되어 이어진다.

 

의심과 확신을 오가는 숙명, 그리고 즐거운 비명

 

이같은 상상과 현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는 종국에 플랑 세캉스를 향한 집념과 실현으로 귀결된다. 플랑 세캉스는 배우들의 연기, 카메라 움직임, 조명 등의 완벽한 배치와 같은 다양한 요소가 합을 이뤄야만 가능하다. 이는 김열의 상상 속, 영화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이상적 영화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자신을 태워서까지 플랑 세캉스를 구현했던 신 감독을 통해 이상이 현실로 되는 과정을 지켜봤던 김열은 자신 역시 플랑 세캉스를 통해 그 이상을 이루려 한다.

 

그렇게 완성된 김열의 영화는 마침내 상영된다. 하지만 카메라는 기립 박수 속에서도 막상 자신은 일어나지 못하고 앉은 채, 멍하니 생각에 잠긴 김열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다. 김열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재촬영을 하고 플랑 세캉스를 성공시켰다. 하지만 이를 보며 다시 자신에 대한 의심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렇게 수없이 의심과 확신 사이를 오가며, 만들고 좌절하고 또 만드는 것이 영화인을 포함한 창작자들의 숙명이 아닐까. <거미집>은 그 숙명에 갇혀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창작자들을 위한 헌사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김희경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한국영화학회 이사, 은평문화재단 이사, 만화평론가로 활동.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예술경영학 석사, 영상학 박사.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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